#15
난데없는 왕의 입궐 명령에 전 상선내관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궐내로 들어왔다.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친 선전관 때문에 아래 하인에게조차 어디 간다는 말도 못하고 따라나섰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침전인 강녕전으로 끌려오자 혼이 먼저 내뺐는지 정신이 하나 없었다.
조반을 먹고 난 훤은 잔뜩 긴장하고 있는 전 상선내관을 더욱 긴장하게 만드느라 바로 그가
있는 방으로 가지 않고 기다렸다. 곧 올 것이라던 왕이 오지 않자 전 상선내관의 긴장은 더욱
심해졌다. 한참 만에 그의 앞에 운검을 대동하고 나타난 왕은 또 다시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손끝 하나로 자신의 목숨을 꺾을 수도 있는 것이 왕이라는 존재였다.
그런 왕이 바로 눈앞에서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는 것은 보통의 공포가 아니었다.
그래서 전 상선내관의 긴장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렇게 사람의 피를 말리던 침묵의 시간이
지나자 훤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그, 그, 그렇사옵니다.”
“너는 상왕의 친신이 분명하렷다!”
“네? 네. 그러하온데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사오나, 하문하시오소서.”
“내 곧 편전에 나가봐야 하기에 짧게 묻겠다. 7년 전, 세자빈 간택 때.”
훤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앞의 전 상선내관의 몸이 경기를 일으키듯 움찔했기 때문이었다.
그 찰나의 움직임을 훤은 놓치지 않았다.
“세자빈 간택이라는 말만으로도 넌 내가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알고 있군.”
“무, 무엇을 이르심인지 이 천신 도저히 헤아리지 못 하겠나이다.”
훤은 또 다시 입을 다물었다. 뒷말 없는 왕도 무섭지만,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닥만 보고
있어야 하기에, 왕의 표정을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것이 더 오금이 저리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전 상선내관의 숨이 넘어갈 때 쯤 훤의 입이 열렸다.
“그 당시 세자빈으로 간택 된 전 홍문관대제학의 여식인 허연우! 그 허씨 처녀의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가?”
“모, 모르옵니다. 이 천신이 무엇을 알겠사옵니까?”
훤의 한쪽 입고리가 비틀어졌다.
“오호, 이상한 일일세. 허씨 처녀의 사인이 병사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인데 네가 모르겠다니.
그렇다는 것은 병사가 아니라는 말이렷다?”
전 상선내관이 화들짝 놀라 더듬거리며 말했다.
“기, 기억이 나옵니다. 천신이 노쇠하여 기억을 못한 것이온데, 병사였던 것이 이제야 기억이
나옵니다.”
“탄망(誕妄, 거짓되고 망령되다)한 자로다! 누구 앞이라고 감히 그 따위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훤이 갑자기 소리를 높여 호통 치자 전 상선내관은 더욱더 어쩔 줄 모르고 당황했다.
훤은 목소리를 가라 앉혀 조용히 말했다.
“병사가 아니라면······, 타살인가?”
“아니옵니다! 그 어찌 천부당만부당한 윤언이시옵니까? 그 당시 어의까지 병을 살폈는데,
다른 것 없이 오직 알 수 없는 병이라 하였사옵니다.”
“조금 전까진 잘 모르겠다고 하여놓고 갑자기 너의 기억이 회춘을 하는 것이냐? 어의가 병을
살핀 것까지 기억을 하는 것을 보면, 세자빈 허씨가 죽은 뒤에 상왕께옵서 따로 조사시켜
보고 받은 기무장계(機務狀啓, 비밀리에 조사하여 왕에게 보고하는 중요 문서)도 기억하고 있겠군.”
세자빈 허씨! 그 말을 들은 순간 전 상선내관은 이 일이 단순한 하문이 아니라 취조임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처녀귀로 규정하고 덮어버린 것을 굳이 세자빈이라고 까지 칭하며 말을 꺼내는 것은
그 당시의 사건을 다시 뒤집을 것이라는 뜻이었고, 이미 어느 정도의 타살이란 정황을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왕의 목소리는 위엄이 있었다.
게다가 훤의 비상한 머리는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그 비상한 머리가 이 일을 체계적으로
파고든다면 아니, 이미 파고들었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전 상선내관의 손과 발은 더 이상
떨리지 조차 않았다. 오금도 저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기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세자빈 허씨란 말은 그만큼 무서운 말이었다.
“말하라! 기무장계를 기억하느냐?”
“천신,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진정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비록 가까이 뫼옵는
상선내관이란 자리에 천신이 있었사오나, 상왕께옵서 지시하신 기무장계를 어찌 보았겠사옵니까?
그것은 상왕께옵서만 읽으시었습니다.”
훤의 입가에 미소 한 자락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훤의 옆에 앉아 있던 운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짐작으로 시작했던 것이 기정사실로 밝혀진 것이었다. 전 상선내관은 연우의 죽음이 병사가
아니었음을 실수한 것과 동시에 기무장계가 있었다는 것도 실토한 것이었다. 훤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알겠느니. 넌 집으로 돌아가 있도록 하라. 곧 다시 부를 터이니.”
두려운 마음을 거머쥐고 강녕전을 나오던 전 상선내관은 미처 월대를 다 내려오기도 전에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자신이 한 말실수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넋이 나가
멍하니 앉아있는 그에게 지나가던 내관이 다가와 부축해서 데리고 나갔다.
전상선내관이 물러가고 나자 훤에게 운이 물었다.
“어찌하여 더 캐묻지 않으셨사옵니까?”
“넌 저자를 잘 모르겠지만, 내가 만약에 더 캐묻는다면 분명 혀를 깨물고 자결을 할지언정
선왕께서 묻어버린 일을 발설하진 않을 자다. 짐작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저자를 부른 것뿐이었다.”
이제 짐작이 맞는 것은 입증되었다. 하지만 앞으로 이 사건을 어떻게 조사해 나가야 할지 막막하여
이마를 짚었다. 공개적으로 조사할 수 없는 어려움이 더 막막했다. 그리고 연우의 억울한
사연을 이제까지 알아채지 못한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 당시 그저 슬픔이라는 자신만의
감정에 취해 주위를 돌아보지 못한 것은 순전히 훤, 자신의 죄였다. 훤은 긴 한숨과 함께
상선내관에게 물었다.
“월은 지금 어디 있느냐?”
“아마도 잠들어 있을 것 같사옵니다.”
“어디에서?”
“성숙청 근처의 행랑이 아닌가 하옵니다.”
“성숙청!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관상감의 교수가 성숙청의 도무녀가 복귀했다던가?
하여간 그 엇비슷한 말을 했던 것도 같은데.”
훤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가 상선내관에게 말했다.
“상선, 성숙청으로 가자.”
“아니 되옵니다. 그곳은 상감마마께옵서 행차하실 곳이 못 되옵니다.
원하시오면 곧 액받이무녀를 불러오겠사옵니다.”
상선내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훤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잠들어 있는 월을 왜 데려오려 하는가? 잠시 들르려 하는 것이니 나서도록 하라.”
성큼 방을 나서는 왕이 무슨 일로 성숙청으로 가려는지 미처 생각할 틈도 없었다.
급히 따라나서며 왕의 빠른 걸음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 더 바빴다.
성숙청 뜰에 홀연히 행차한 왕으로 인해 성숙청의 무녀들은 일제히 당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씨도무녀는 침착하게 홀로 뜰에 나가 큰 절 네 번을 올리고 차가운 땅바닥에 엎드렸다.
장씨를 뚫어지게 보고 있던 훤은 그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그 유명한 장씨도무녀냐?”
“도무녀 자리에 있는 장씨인 것은 맞사옵니다.”
“그동안 도무녀 자리를 비웠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디에 있었느냐?”
“쇤네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묻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지 않사옵니까?”
훤은 왔다 갔다 하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다시 묻겠다. 7년 전에 자리를 비웠다고 들었다. 왜 비웠느냐?”
“쇤네의 신기에 따라 비웠사옵니다.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불운한 일이 있을 거란
하늘의 계시였사옵니다.”
하늘을 들먹인다면 더 이상의 것은 물을 수 없는 것이었다. 차라리 관상감의 교수에게서 들은
‘유생들의 상소에 밀려서’라는 답을 들려주었다면 물을 말이 많았을 것이다. 훤은 말없이
서성이다가 이럴 때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것이 확실할 거란 판단이 섰다.
“7년 전에 관상감 전 세 교수들이 일제히 사약을 청해 자결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 너도 있었을 터.
이유를 아느냐?”
“쇤네도 정확히는 알지 못 하옵니다. 비록 성숙청과 소격서, 관상감의 업무 중 서로 간에 유대가
필요한 부분이 있긴 하나, 상호교환 하는 부분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그 당시
기억으로는 그들의 실수에 의해 상왕께옵서 상심하시었기에 자결한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이 여자는 뭔가를 알고는 있다는 생각이 깊숙이 들었다. 하지만 훤이 현재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성급하게 세자빈 사건 자체를 캐물을 수는 없었다.
그것보다 더 이 여자에게 묻고 싶은 것은 월에 대한 것이었다. 훤은 다시 물었다.
“나의 액받이무녀의 신모가 너냐?”
불쑥 물음이 월에 대한 것으로 바뀌자 장씨는 당황했다. 곧이어 단지 화제를 돌린 것뿐임을
깨달아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어디서 어떻게 만났느냐?”
“길가다 주웠사옵니다.”
“길에서 줍기엔 너무나 어여쁜 아이가 아니냐?”
“어여뻐도 길에서 주운 것은 사실이옵니다.”
“말씨가 한양 말이던데, 한양에서 주운 것이냐?”
“한양에 살았던 아이인지는 모르겠사오나 흘러흘러 온양까지 내려간 것인지 그곳에서 신기가
있는 그 아이를 신딸로 들였사옵니다.”
“신딸로 들였으면 월의 과거도 알아보았을 것 아니냐?”
“신산스런 무녀들의 팔자이옵니다. 신기가 들기 전의 삶이란 것이 어찌 있겠사옵니까?
게다가 그 아인 액받이무녀의 팔자. 하여 이름도 주지 않았사온데, 하물며 그 아이의 과거를
어찌 알아보았겠사옵니까?”
“이해 안 되는 것이 있느니.”
장씨는 지레 놀랐지만 태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훤은 머릿속을 정리하며 생각에 잠긴 채
서성거리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성숙청의 무적은 도무녀가 관리하는 것이라 들었다. 그런데 넌 7년 전에 자리를 비우고 나갔는데,
6년 전 그 아이가 어찌 무적에 올랐느냐? 게다가 성숙청의 무녀는 다른 관청의 무녀들에 비해
누리는 혜택이 많아 그 경쟁이 치열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만큼 신력이 높은 무녀가
선출된다고 들었는데, 그다지 신력이 높아 뵈지도 않는 그 아이가 어떻게 성숙청의 무적에
오를 수 있었느냐?”
“신력이란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오이까? 그 아인 그 아이 나름대로의 신력이 있사옵고,
그 신력을 서찰로 전해 무적에 올리라 하였을 뿐이옵니다.”
“너의 일방적인 권한으로 성숙청 무적에 올렸단 것이군. 그러면 어떻게 무적에 무명자라 올리면서
그 아인 성숙청에 보내지 않았느냐?”
“그건······, 액받이무녀이기에.”
“액받이무녀로 선발된 건 4년 전. 즉, 무적에 오른 지 2년이 지난 뒤로 알고 있다.”
장씨는 말문이 막히자 속에서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대체 왕이 이런 세세한 것까지 왜 묻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월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하기엔 그 질문의 농도가 짙었고,
어찌 보면 월의 신상과는 별 상관이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왕이 무엇을 알고자 하는지
더욱더 파악하기 힘들었다. 훤이 입을 다문 장씨에게로 갑자기 소리를 쳤다.
“나에게 무엇을 감추려는 것인가! 필시 너는 월의 이전 이름도 알고 있고, 그 아이의 사연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숨기려는 것인가?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날 속이려
하기 때문에, 왜 날 속이려는지 알고 싶단 말이다! 난 월의 원래 이름보다, 월의 이름을 숨기는
이유가 더 궁금하다. 숨기는 이유를 말하라!”
“숨기는 것은 없사옵니다. 그러니 이유랄 것도 없사옵니다.”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왕의 호통에 조금도 밀리지 않고 똑 같은 목소리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만으로 이 여자의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태도 때문에 마치 왕이 생떼를 부리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이상 장씨도무녀를 상대하는 것은 시간낭비란 생각이 들었다.
훤은 일단 지금은 접고 넘어가기로 했다.
“월은 어디에 있는가?”
“저 뒤의 행랑에 잠들어 있사옵니다.”
“안내하라.”
상선내관이 조용히 아뢰었다.
“상감마마, 조강에 드셔야 하옵니다. 지금쯤 대신들이 다 모여 있을 것이옵니다.”
“알고 있다. 잠깐이면 된다.”
훤은 결국 장씨도무녀의 안내를 받아 월이 잠들어 있다는 행랑 앞에 섰다. 초라하디 초라한
행랑의 섬돌 위에는 월의 초라한 짚신이 놓여있었다. 강녕전 월대 아래에 던져져 있던 짚신이
가엾어 아무 말 못하고 쳐다만 보았던 것이 생각났다. 그나마 이곳은 섬돌 위에 신이 올려져
있으니 다행이라 스스로 위안 삼았다. 왕 옆에 서 있는 운의 마음도 쓰라렸다. 도린곁이라더니
그 말 그대로 성숙청 뒤의 이리 어두운 곳에 작은 몸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 한 켠이
칼날에 베인 듯 시큰거렸다. 한참을 방문만 애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훤은 주위사람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해서 걸어라. 많은 사람들의 발소리에 깰라.”
옆에서 서두르는 사람들에 밀려 월이 잠든 방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월이 잠든 자신의 머리맡을 지키는 것처럼 자신도 월의 머리맡을 지켜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밀려있는 만기가 많았다. 훤은 만기를 외면해선 안 되는 왕이었다.
경연청에 들어간 왕을 호위한 운은 바로 물러나 나왔다. 그리고 선전관청 근처의 행랑에 몸을
잠시 누웠다가 깊게 잠들지 못하고 일어났다. 누워서나 일어나서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월이란 여인 때문에 요 근래 깊은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왕의 옆에 있으면 안 보려 해도 보이는
것이 월이었고, 애써 외면한 눈길만큼 가슴에 들어오는 것도 그녀의 존재였다. 그녀를 가슴에
담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운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왕의 무녀였고, 왕의 가슴속에 있는
여자였다. 결코 자신이 눈길을 주어선 안 되는 왕의 여자였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내는 자신의 주군이었고, 주군이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해도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사내는 자신이었다. 사내로서 월의 앞에 설 수 없기에 가슴에 담아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운은 잡념을 떨치려 이마에 홍건을 질끈 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헝클어진
마음속을 잘라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검술훈련장으로 달려가 검을 휘둘렸다. 하지만 휘두르는
별운검 아래에 잘려져 떨어지는 것은 월에 대한 마음이 아니라, 월을 외면하려는 자신의 의지였다.
검술연습이 끝나도 마음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인지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발걸음을
유혹하여 이끈 곳은 월이 잠들어 있던 행랑 앞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이곳으로 온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월의 낡은 짚신을 보아버린 뒤였다. 왕의 옆에 선 운검의 눈이 아니라 한 사내의 눈이 되어
그 짚신을 보았다. 그리고 그 짚신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손끝으로 짚신을 만져보았다.
왕의 손길은 월의 몸에 닿을 수 있지만 운의 손길이 닿을 수 있는 건 이렇게 벗어둔 차가운 짚신이
고작이었다. 월의 몸에 손끝이 스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때 등 뒤에서 검을 든 자의
기척이 느껴져 운의 본능은 순식간에 별운검을 빼들고 몸을 돌려 검 날을 상대의 목에 겨누었다.
운의 검에 목이 겨누어진 사람은 설이었다. 너무나 재빠른 운의 검에 설의 검은 칼집에서 반도 채
빼어내지 못한 상태였다. 운은 설을 발견하고도 검을 내려놓지 않았다. 오히려 손에 더욱 힘을 줘
칼날을 세웠다. 설은 당황하여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검을 내려놓으시죠? 전 아무 잘못 없으니.”
“언젠가 의빈자가의 저택 앞에서 마주친 적 있었지?”
설은 시치미를 떼고 빙그레 웃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전 의빈자가의 저택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운은 칼날을 설의 목에 더욱 바짝 붙여 넣었다. 설에겐 운의 동작에 조금의 빈틈도 없어 진짜
목을 벨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운은 같은 말을 두 번 입에 담지 않았다. 말 대신
검으로 다시 묻고 있었다. 설도 사실을 털어 놓을 수 없었기에 목에 겨누어진 칼날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돌리며 검을 뽑았다. 설의 몸동작에 운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사람 잘못 보았다 하지 않았습니까!”
설은 더 이상 핑계를 댈 수가 없었다. 갑자기 운의 검이 설의 몸 여기저기를 파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설은 자신의 검으로 운의 검을 막아내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장난으로
겨누는 검이 아니었다. 자칫 실수를 할 시엔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할 만큼 진심으로 겨누는
검이었다. 그래서 왜 운검이 자신을 이렇게 밀어붙이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정신없이
방어만 하던 설에게 공격의 틈이 보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운이 공격할 기회를 준 것이었다.
설은 자신도 모르게 그 공격의 틈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운의 몸은 그 검을 피하며
검 날을 따라 돌아 정확하게 환도를 잡은 설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또 다시 운의 검은 설의
목에 겨누어졌다. 운의 차가운 목소리가 설의 귀를 얼려버렸다.
“어디서 검술을 익혔느냐?”
“젠장! 날 시험했군. 어쩐지 철옹성 같은 틈이 쉽게도 보인다 했더니만.”
설은 왜 운이 자신에게 검을 겨누었는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돌이키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너의 검은 나의 검술 스승의 것이다. 하지만 스승의 제자 중에 여자는 없었다. 어디서 어떻게 익혔느냐?”
“홀로 익혔습니다. 그러니 운검나으리의 검술과 비슷한 것은 단순히 우연일 뿐입니다.
그보다 검 좀 치워주십시오. 이러다 제 목을 베겠습니다.”
하지만 운의 검은 조금도 거둬주지 않았다. 설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러고 있는 건 상관없지만 우리 아가씨께서 무척이나 놀란 것 같은데.”
운이 눈길을 슬쩍 돌려보니 방 앞에 월이 놀란 눈으로 서 있었다. 운은 차분히 검을 거둬 칼집에 꽂고는
월에게 몸을 돌려 섰다. 월은 신을 신으며 운에게 다가왔다.
“여긴 어인 일이시옵니까? 혹여 상감마마께 무슨 일이라도······.”
“아니오. 잠시 지나던 길에.”
“그런데 저 아이와 왜 검을 겨누고 있었사옵니까?”
“······나와 같은 검술을 쓰는 것이 이상하여 물어보았소.”
“우연이겠지요. 저 아인 혼자 장난삼아 검술을 닦은 아이입니다. 어찌 감히 운검나으리와 같은
검술을 쓴다 생각하셨사옵니까?”
옆에서 설이 퉁명스럽게 말을 끼워 넣었다.
“검술은 비슷할지 모르겠으나 실력은 천지차이입니다. 왜 검을 쥔 자들이 운검의 검술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지 비로소 알 것 같습니다. 잠시나마 검을 겨누어 볼 수 있었음이 영광입니다.”
운은 홀로 검술을 익혔다는 말을 믿진 않았지만 더 이상 추궁하지도 않았다. 밝은 햇빛 아래에서는
처음 보는 월의 모습이 다른 생각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용건도 없이
이곳에 얼쩡거린 것이 들킬 새라 얼른 인사하고 물러났다. 왕의 곁으로 돌아오고 있던 도중
운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의빈자가의 저택. 비슷한 검술. 그리고 여종!
무언가 어렴풋하게 짚이는 것이 있었다.
옛날, 어릴 때부터 염의 집은 좋은 검술 훈련장이었다. 홍문관대제학에게 글을 배운 뒤,
어김없이 염과 양명군과 더불어 서로 검술을 익혔었다. 운은 어릴 때부터 검술 스승이 따로 있었다.
그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염, 양명군과 나누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주로 검술을 가르치는 쪽은
운이었고 양명군은 곧잘 그 검술을 따라했지만, 염은 도무지 그 실력이 늘지 않았다.
그때 어느 날 염이 했던 말이 있었다.
“난 도무지 소질이 없나보군. 우리 연우의 몸종은 지나가다 한번 보고도 곧잘 따라 하던데
난 어째 그 아이 보다 못하이.”
“여종이라 하였습니까?”
“자주 숨어서 훔쳐보았는지 내가 혼자 연습하고 있을 때 나에게 와서는, 자네는 이렇게 하는데
난 왜 팔꿈치가 아래로 쳐지느냐 가르쳐주더군.”
옆에서 양명군이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염, 자네가 소질이 없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여아보다 못한 건 또 처음 알았군.
맞아. 자네는 팔꿈치가 자꾸 아래로 쳐져 검 날이 정확하지 못하긴 하지.”
그런 대화가 오고 간 뒤에도 검술 연습을 하면 가끔 누군가가 훔쳐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정체는 몸종이란 아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훔쳐보던 아이의 느낌도 없어져
잊고 있었다.
운은 여전히 발걸음을 멈춘 상태에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 여종이 더 이상 훔쳐보지 않게 된 게
언제쯤인지 하는 것이었는데, 그건 염의 누이가 죽은 그 시점과 일치했다. 아마도 그 즈음에
다른 곳으로 팔려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검술이 비슷한 점과 왜 그녀가
의빈자가의 저택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건
의빈자가의 저택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거짓말을 한 점이었다.
생각에 잠긴 운의 주위로 급한 발걸음의 의금부 관원들이 뛰어다녔다. 그래서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하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의금부 관원들은 급하게 편전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운도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그들을 앞질러 왕에게로 달려갔다. 왕은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지방관리들의
윤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안심한 것은 아주 잠시 뿐이었다. 곧이어 조금 전의 의금부 관원이
급하게 내관을 통해 말을 전달해 왔다. 내관이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왕에게 조그맣게 말했다.
“상감마마, 의금부에서 방금······.”
“무슨 일인데 말을 못하느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 상선내관이 조금 전 사가에서 목을 매고 자결하였다 하옵니다.”
“뭣이!”
훤은 놀랍고 화가 난다기 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그에게 물어 본 것이 대체 뭐가 있기에 자결까지
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어이없던 감정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차차
더 큰 의문 덩어리가 되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훤의 머리는 그의 죽음을 기름으로 해서
급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 상선내관은 많은 것을 숨기기 위해 자결을 했지만, 자신의
자결로 인해 훤에게 드러낸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건 상왕이 세자빈의 죽음을 둘러싸고
조사했던 것이 뭐였는가는 덮었지만, 왜 그것을 덮어버렸는가 하는 것을 죽음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왕이 사실을 덮어야 하는 이유, 그것을 전 상선내관이 자결을 하면서 까지 입을
다물어야 하는 이유, 답은 단 하나 밖에 없었다. 아직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연우의 죽음에
개입한 인물들은 왕족일 가능성이 확실 했다. 세자빈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대역죄였다.
그것이 왕족이란 것은 일대풍파가 일어날 사건이었을 테고, 아무리 왕족이라고 해도 중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렇기에 상왕은 사건을 덮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왕족이 누군가 하는 것인데, 연우의 죽음으로 인해 가장 큰 혜택을 받은 쪽일 테고
이 또한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상왕의 어머니! 외척일파의 지주인 현재 왕대비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심증만 일 뿐 심증을 뒷받침 해줄 수 있는 증거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증거가 되어질 가능성이 있던 전 상선내관은 자결을 해버렸다. 게다가 왕족의 소행이라면
연우의 마지막 봉서에 적혀있던 사실, 홍문관대제학의 손으로 연우에게 약을 먹인 건 설명되지
않는 것이었다. 또 하나 알 수 없는 사실이 있다면 관상감의 전 세 교수들의 집단 자결이었다.
시기를 되짚어보면 연우가 죽은 바로 다음날 자결을 한 것이니까, 세자빈의 사인 조사가
이뤄지기도 전에 그들은 자결을 한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훤의 머릿속은 또 다시
‘왜?’라는 단어만으로 빼곡하게 들어찼다. 그리고 왜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몰아내고 들어오는
다른 단어들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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