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훤은 오랫동안 검토해 오고 있던 승정원일기를 덮었다. 잠을 설쳐가며 애쓴 보람도 없이
짐작한 대로 주요문서는 남아있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표면적인 내용뿐이었다.
별궁에서 알 수 없는 고열과 번갈을 겪다가 때때로 숨이 막힌다는 호소를 하기도 했다는 기록만이
있었고, 죽음에 관한 것도 그저 원인 모를 병사(病死)로 기록되어 있었다. 사대부가의 여인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부친인 홍문관대제학이 조용히 일의 마무리를 원했기에 시신을 세밀히
관찰하지는 않았다는 기록도 있었다. 이렇게 마무리 된 데에는 어의의 병사라는 소견서의
뒷받침도 한몫했다. 훤은 선왕이 이리 어영부영 사건을 덮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분명 따로 조사를 했을 것이고,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승지와 내관을 거치지
않고 왕이 직접 보고를 받아 기밀로 처리되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러 문서 기록들로 인해 훤이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단 하나
있었다. 연우가 죽었을 당시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지만 가례를 치르지 않고 죽었을 경우 첩지를
내려야 하는가, 아니면 무위로 돌려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연우는
세자빈으로서가 아니라 댕기머리를 올리지 않은 처녀귀로 규정되어졌다는 기록이 남아있었다.
세자와의 아주 작은 인연의 끈마저 완전히 없애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훤은 7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이러한 논의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세자빈으로
두어 달라 졸라보았을 것이다. 비록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후회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훤은 승정원일기를 밀쳐냈다.
“다시 승정원에 가져다 두어라.”
상선내관은 참담한 표정의 훤을 보며 걱정되어 물었다.
“아무 것도 없었사옵니까?”
“그렇다.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기가 막힐 정도로 아무 것도 없다.”
“그러하면 이제 어쩌실 것이옵니까?”
훤은 서안에 머리를 받히고 엉뚱한 말을 했다.
“월은 어찌하여 와있지 아니 한 것이냐? 언제나 침전에 있어라 하지 않았느냐!”
“하오나, 상감마마······.”
“어서 데려오너라! 숨 막혀 죽을 것 같다.”
훤의 괴로워하는 모습에 상선내관은 걱정이 되었다. 그 어떤 누구도 왕의 노기를 가라앉힐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월이란 무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현재로선 그나마 고마운 일인지도
몰랐다. 성숙청에서 월을 불러오는 시간은 제법 걸렸다. 그 시간 동안 훤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 월이 절을 올릴 때도 고개를 들어 보지 않았다. 운 또한 왕의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앉아 월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왕이 있는 자리에선 특히 더 그랬다.
훤은 월이 멀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으려하자 화난 목소리로 입만 열었다.
“어디에 앉는 것이냐! 내가 너의 자리가 그곳이라 하더냐?”
월은 다소곳한 눈길로 상선내관을 보았다. 상선내관은 어서 왕의 옆으로 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월이 다가가 앉자마자 훤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이 말 같지도 않게 여기느냐? 분명 침전에 있어라 하지 않았느냐?”
“괴로운 일이 있으시옵니까?”
훤은 말없이 월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었다. 놀라서 몸이 경직된 월의 손을 잡고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내관과 궁녀는 일제히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운도 몸을 돌려 앉았다. 가까스로
슬픔을 참은 훤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살아있는 너 하나에게도 아무 것도 못해주는데, 죽은 여인에게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느냐?
이 하얀 소복도 벗어던지게 해주지 못하고, 이 어여쁜 손가락에 놋가락지일 망정 끼워주지 못하는데.”
훤은 손을 더듬어 월의 댕기를 앞으로 넘겨왔다. 붉은색 댕기가 눈에 쓰라리게 박혔다.
그 댕기에 입을 맞추며 다시 중얼거렸다.
“이 가엾은 댕기조차 풀어주지 못한다. 너도, 그리고······. 너의 머리를 올려 비녀를 꽂아주는
사내는 나이고 싶은데, 다른 사내에겐 허락하고 싶지 않은데······. 나란 놈은 아무것도 못한다.
그런데도 임금이란다.”
“윤언을 받잡기 민망하여이다.”
“그렇지. 월이 너에게도 난 그저 왕이기만 할 테지.”
홀로 읊조리는 훤의 말에 마음속에서 큰 물결이 일듯 출렁한 쪽은 월이었다. 그저 왕인 것이 아니라,
오직 왕으로만 대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어찌 할 수 없어 얼굴에 표정조차 담을 수 없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고개를 드는 연우란 전생의 기억도 월의 무표정에 무게를 실었다.
월의 허벅지에 슬픔을 비비던 훤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달빛도 좋은데 산책이나 하자!”
이제 막 그믐달을 벗어난 흐린 달빛이 좋다하는 것은 순전히 핑계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지만
우울하게 방안에 있는 것 보다는 산책을 하는 것이 더 나을 거라는 판단에 모두 일어섰다.
월도 따라 일어섰지만 훤과 같이 산책에 나갈 폼은 아니었다. 훤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월아, 너도 가야지. 산책하는 도중에 또 살을 맞으면 어쩌란 말이냐?”
상선내관은 훤이 무슨 꿍꿍인지 불안했지만 생각해볼 짬도 없이 월에게 따라 나서라는 눈짓을 했다.
대청에서 내려서는 훤의 발아래에 석(왕의 신발)이 신겨 졌다. 하지만 월은 버선발로 월대
아래까지 내려가 그곳에 던져져 있던 초라한 짚신을 신었다. 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눈썹사이에
슬픔을 담은 채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일렬로 훤의 뒤를 따라 산책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월이 궁녀들보다 뒤처져 걷는 것에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훤은 앞서서 걸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월을 자신의 바로 옆으로 불렀다. 그렇게 또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산책만
했다. 오직 소복차림만 한 월이 매서운 겨울밤의 추위에 오돌오돌 떠는 것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운은 바로 뒤를 따르며 월의 몸이 걱정되어 뒤통수만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또 다시 훤은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월의 손을 잡고
뒤돌아 말했다.
“그대들은 너무도 가까이 나를 따른다. 조금 물러나 따르도록 해라.”
다들 놀라 주춤거리며 서있기만 하고 물러나진 않았다. 훤이 소리를 높였다.
“어허! 물러나 따르라고 했다!”
상선내관은 굉장히 불안했다. 하지만 왕이 무엇을 하려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어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운을 제외한 모두가 두어 발 뒤로 물러났다. 훤은 운을 보고도 말했다.
“운아, 너도 같이 물러나거라.”
하는 수 없이 운도 조용히 두어 발 뒤로 물러났다. 훤은 손을 들어 더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계속되는 훤의 손짓에 모든 사람들이 상당히 멀리까지 물러나야만 했다. 어느 정도 만족스런
거리가 되자 훤은 월의 허리를 감아 잡아 당겨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월의 턱을 손으로 들어
얼굴을 가까이 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월이 조용히 말했다.
“지금 무엇을 하려 하시옵니까?”
“내가 무엇을 하려는 것 같으냐? 무녀라면 알아맞혀 보아라.”
월이 아무 대답도 못하자 훤은 미소로 속삭였다.
“못 알아맞추는 것을 보니 넌 아무래도 무녀는 아닌가 보다. 앞으로 나에게 무녀라 속이면
죄를 물을 것이다.”
훤은 월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려했다. 월이 얼른 입술을 피해 고개를 돌리려 하자
턱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고정시켰다. 하지만 훤은 월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지는 않고
입술이 닿을 듯 말듯 한 거리에서 멈췄다. 그리고 눈동자만 돌려 내관들이 있는 곳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왕이 여자를 가까이 했을 경우에 해야 되는 법도대로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순간 훤의 한쪽 입고리가 짓궂게 올라갔다. 그리고 월을 한쪽 어깨에 짊어지고 달리기 시작한
것은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월이 깜짝 놀라 말하려 하자 훤은 잽싸게 달리며 말했다.
“어명이다! 아무 말 마라. 내 널 보쌈 하는 중이다.”
운은 훤이 도망을 치는 것을 느꼈지만 일부러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내관들은 두 사람이
멀리 도망가고 나서야 낌새를 채고 고개를 들었다. 모두가 우왕좌왕하며 왕을 뒤쫓아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운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슬픈 표정으로 가만히 있다가 사람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
훌쩍 담 위로 뛰어 올라 담을 따라 홀로 쫓기 시작했다.
훤은 월을 어깨에 메고 뛰는 것이 즐거운지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이대로 궐 밖으로 도망을
치진 못하는 것은 누구보다 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도망치는 시늉이라도 내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뒤쫓아 오는 발걸음이 느껴지자 조급한 발걸음은 더욱 바빠졌다.
복잡한 건물과 건물 사이를 정신없게 뛰어 다녔지만 금세 잡힐 것처럼 뒤쫓는 무리의 발걸음이
가까이 느껴졌다. 그래서 한 건물의 대청 아래에 우선 숨어들어 월을 내려놓았다. 훤은 숨이
차올라 헉헉 거리면서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걱정마라. 어릴 때부터 숨바꼭질에선 나를 당해날 놈이 없었다.”
“어디로 가시려는 것이옵니까?”
캄캄한 대청 아래라 월의 표정이 어떤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월도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 표정은 무녀가 아닌 한 여인의 표정인 듯 하여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어둠에
파묻혀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손으로 그 얼굴을 더듬었다.
“어디로 가려는 지는 나도 모른다. 어디든 너와 나 단둘만 있을 수 있는 곳이라면······.
아주 잠깐만이라도 좋다. 너와 단둘만 있고 싶느니.”
“하오나 상감마.”
월은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훤이 입술로 말을 완전히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뛰고 난 뒤라
숨을 가삐 내쉬는 훤의 혀조차 달음박질에 길들여졌는지 조급하게 서둘렀다. 하지만 월의 입술은
놀라 붙었는지 훤에게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월의 턱을 잡아 훤 스스로 길을 내어 안으로
들어갔다. 음밀한 월의 입 안 여기저기를 혀끝으로 느꼈다. 그리고 차가운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떨고 있는 월의 혀끝을 자신의 혀로 따뜻하게 해주려 했지만 온몸이 열기로 뜨거워 진
것은 훤이 먼저였다. 월도 서서히 땅의 냉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훤의 입술이 뜨거워 입안에서부터
온몸으로 그 뜨거움이 번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훤의 숨 가쁜 호흡도 월에게 옮겨와
심장마저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둘이 서로의 입술을 나누고 있는 건물 앞으로 왕을 찾는 발걸음들이
주르르 뛰어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그 근처로 와서 이리저리 찾는지 한참을 맴돌았지만 대청
아래에 왕이 숨어들었을 거라 상상도 못했는지 들여다보진 않았다. 그 와중에도 훤은 월의
입술을 놓지 않았다. 월도 훤의 입술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훤이 입술을 떼어 낼까 겁이 났다.
앞에서 맴돌던 발걸음들이 다른 곳으로 뛰어가 다시 조용해 졌다. 훤이 멀어져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월의 입술을 놓아주고는 속삭였다.
“월아. 너 뜀박질 잘 하느냐?”
“네?”
“또 도망가자. 뛰기 힘들다면 내 이번에도 널 어깨에 메고 뛸 것이다. 보쌈이 좋으냐,
같이 손잡고 도망하는 것이 좋으냐? 어찌 해줄까?”
월은 왕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어둠에 의지해 조용히 말했다.
“같이 도망하겠나이다.”
“우리가 아무리 뛰어 봤자 대궐 안을 벗어나진 못하겠지만 이 넓디넓은 궁궐 안에 우리 단둘의
몸 숨길 곳이 없겠느냐? 그런데 음······.”
월은 고민하는 척 뜸을 들이는 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군사암호를 뭐로 정해주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정신없이
바빠 급하게 무언가를 써준 건 기억나는데 그것이 어제의 암호였는지 그제의 암호였는지
아리송한 것이······. 큰일이군. 월아, 열심히 뛰어라. 만약에 내관들이 아닌 내 얼굴을 모르는
군사들의 손에 잡힌다면 우린 그 자리에서 사살 될 것이다.”
월이 깜짝 놀라 훤의 팔을 잡았다.
“아니 되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
“뛰어라! 돌아가진 않을 것이니 날 살리는 길은 그것뿐이다.”
훤은 월의 손을 잡아 당겨 발걸음들이 사라진 반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월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훤의 손에 이끌려가면서도 지금 가고 있는 곳이 지옥이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뛰어 도망하는 것도 오늘 이 잠시의 장난일 뿐이겠지만, 사람들의 손에 잡히면 그것으로
툭툭 털며 없었던 일이 되어 왕과 무녀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이 찰나의 도망이 행복했다.
열심히 뛰다가 담 너머에 군사가 지나가자 훤은 담장 뒤로 몸을 붙여 숨었다. 그렇게 숨다가
뛰다가 하면서 달려간 곳 멀리에 큰 연못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 위에 우아한
정자가 보였다. 하지만 그 곳으로 가기엔 왔다 갔다 하는 군사들이 많아 쉽게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았다. 훤은 숨을 고르며 군사들이 틈을 보이길 기다렸다. 그리고 아주 잠깐의 틈이 보이자
정자로 뛰었다. 연못 위에 걸쳐져 있는 취향교(연못 위로 나 있는 다리)를 건너 가까스로 정자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제야 놓지 않고 줄곧 잡고 있던 월의 손을 놓았다. 월은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이느라 바빴지만 훤은 자신의 곤룡포를 벗어 월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월은 왕의 옷을
걸쳐서는 안 되기에 놀라서 옷을 벗어내려 했다. 하지만 훤의 단단한 손이 월의 어깨를 꽉 쥐며 말했다.
“내가 너의 소복이 보기 싫어서이니 벗지 마라. 추우니 입고 있어라.”
“추우니 상감마마께옵서 입으셔야 하옵니다. 도리어 소녀의 옷이나마 벗어 덮어드려야 하온데.”
“오호! 대담한 여인일세. 감히 내 앞에서 옷을 벗겠단 말이냐?”
“그 뜻이 아니오라.”
“여긴 너와 나 단 둘 뿐이다. 내관도 없고 궁녀도 없으니 왕도 없고 무녀도 없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건 한 사내와 한 여인일 뿐이다. 그리고 네게 걸쳐준 이 옷은 곤룡포가 아니라 한 여인을
따뜻하게 해주고자 하는 사내의 마음이니라. 그 마음을 거절하겠단 것이냐?”
단 둘! 이것은 월에게로 와서 묘한 주술이 되었다. 훤은 싱긋이 웃으며 다리가 있는 쪽의 창을
조금 열어 바깥 동정을 살폈다. 그리고 가운데 있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말했다.
“이곳이 어딘지 아느냐?”
월은 여전히 문 앞에 가만히 선채로 말했다.
“모르옵니다.”
“이곳은 취로정(翠露亭, 현재는 향원정)이다. 비취이슬이라고 하지. 아바마마께옵서 살아생전
어마마마와 함께 담소를 즐기던 곳이니라. 어디든 내관과 궁녀가 따라다니니 불편하셨는지
이곳에 드실 때는 꼭 주위사람들을 취향교 저편에 세워두고 두 분만이 이곳으로 드셨는데,
나도 너와 이곳에 꼭 한번 와보고 싶었느니. 비록 밝은 날 이리 같이 하진 못하지만.
오늘은 어째 달빛마저도 어둡구나.”
취로정 안으로 들어온 달빛이 창살의 무늬를 찍어다 훤의 얼굴과 옷에 그려놓았다.
훤은 멀리 서 있는 월에게 미소로 말했다.
“이곳의 아름다움은 호랑이도 흠모한다 하였느니라. 호랑이가 널 물어 가면 어쩌려고 그리 서 있느냐?
이리 오너라.”
“호랑이라 하였사옵니까?”
“그래. 밤이 되면 이 취로정에 호랑이가 출몰한단 소문 못 들었느냐?”
월은 믿지 않는 표정으로 싱긋이 미소 지었다. 월의 미소에 훤은 더 기분이 좋아졌다.
“허허. 믿지 않는단 것이냐? 그런데 어찌 하냐. 내 말은 진실인 것을. 세조대왕이 이 연못과
취로정을 만들었는데 그 이후로 이곳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자, 세조대왕께옵서 친히 많은
장수를 거느리고 인왕산과 백악산 등지로 호랑이 사냥을 다니셨다. 하지만 결국은 못 잡았다
들었다. 지금도 밤사이에 호랑이 발자국이 종종 발견되곤 하느니라. 호랑이가 유독 이곳만을
좋아하는 연유를 모르겠느니.”
“어찌 궐내에까지 호랑이가 들어올 수 있다 하옵니까? 그러니 소녀가 못 믿을 밖에요.”
“이 취로정 뒤로 산줄기가 뻗어있으니 그렇지. 네가 나에게 거짓을 아뢰진 않는다 한 것처럼
나도 네게 거짓을 말하진 않는다.”
월은 그래도 훤에게 다가가 서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로 먼저 다가가기가 힘겨웠다.
훤이 애가 타서 말했다.
“어서 이리 다가오너라. 지나가는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 조만간 우리가 있는 곳을 들킬지도
모르는데. 아니, 곧 들킬 것인데 그 사이에 네가 나를 만져볼 시간은 아주 잠깐이다.
그리 멀리 서서 바라보는 것은 내관들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가능하지 않느냐.”
월의 발걸음이 주술에 이끌린 듯 훤에게로 서서히 다가갔다. 훤 앞에 고개를 숙이지도, 눈길을
아래로 깔지도 않고 오직 훤의 눈만 보고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 선 월의 눈에 슬픔을 담은
훤의 눈동자가 보였다. 훨의 고운 손끝이 훤의 눈 위로 내려앉았다. 그 긴 세월 그리워만 했던
얼굴이 손끝에 따뜻한 형체를 띠고 더듬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월의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훤의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월은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리는지도 못 느끼고 있었다.
“월아······.”
월은 훤의 얼굴을 자신의 품에 끌어 앉았다. 훤은 월의 심장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울음소리조차
삼켜 심장 안에서만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훤은 월의 가냘픈 허리를 끌어안았다.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비록 왕이지만 월의 울음을 덜어줄 수가 없었다.
“월아, 말해보아라. 이름이 무엇이냐? 네 아비는 누구며, 네 어미는 누구냐? 오라비는 있었느냐?
너에게도 가족이 있질 않았느냐? 말해다오. 내가 널 도울 수 있게 해다오.”
“월이옵니다. 그저 무녀일 뿐이옵니다.”
아무리 단 둘이라는 주술이 있긴 했지만 허연우란 이름을 답하기엔 그 주술은 미약했다.
그래서 마음으로만 답할 수밖에 없었다.
‘허연우라 하옵니다. 혹여 잊으신 이름인지는 모르겠사오나, 허연우라 하옵니다. 오라버니가
전해주는 세자저하의 봉서에 얼굴을 붉히며 잠 못 이루던 연우이옵니다. 소녀, 연우란 이름은
잊을지언정 어찌 세자저하의 봉서에 담겨 있던 그 글들을 잊을 수 있으리까.
혹여, 혹여 잊으셨나이까. 연우를 기억하나이까.’
월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훤의 귓가에는 월의 울음소리만 생생하게 들렸다. 알 수 없는 그
사연들이 안타까워 좀 더 캐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취로정 밖의 나뭇가지
사이를 비집고 바람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너의 사연을 알고 같이 울어주는데 나만 너의 사연을 모르는구나.”
“바람의 울음도 들을 줄 아시옵니까?”
“이리 너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으니 네 신기가 나에게로 옮겨왔나 보구나.”
훤은 월을 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리고 월의 얼굴에 흘러내린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내 지금은 네 얼굴에 흘러내린 눈물만 닦아주지만 나중엔 너의 마음에 흘러내린 눈물도
닦을 수 있게 해다오.”
월은 희미한 미소만 보였다. 훤의 말에 기대감을 가지지는 않았다. 도리어 훤의 마음을 어지럽게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미안했다. 이렇게 왕의 얼굴만이라도 한번 보게 해달라는 소원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삶이었기에 이 이상의 욕심을 가지는 것은 죄였다. 훤은 조금 열린 창밖으로
군사 두 명이 이상하게 여기고 취향교를 건너오려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운이 그 다리 앞을 막아섰다. 운검의 출몰에 군사들은 취로정에 있는 사람이 왕이란
것을 눈치 채고 바로 물러나 주었다. 훤은 희미한 달빛이 만들어내는 창살무늬에 마음을 실어
시를 읊었다.
“서로 그리는 심정은 꿈 아니면 만날 수가 없건만, 꿈속에서 내가 님을 찾아 떠나니 님은 나를
찾아 왔던가. 바라거니 길고 긴 다른 날의 꿈에는, 오가는 꿈길에 우리 함께 만나지기를.”
<서로를 그리는 꿈(相思夢)> - 황진이
옛날 연우에게서 처음으로 받았던 서찰에 적혀있던 시가 불현듯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월이 놀라는 눈빛을 미처 보지 못한 훤은 서글픈 미소와 같이 말을 이었다.
“세자시절 내가 마음 설레며 읽고 또 읽었던 시다. 그때 이 시는 그저 가슴을 두근대게 하느라
바빴는데······. 오늘 이 시는 서글프구나. 내가 잠든 시간에 넌 깨어있고, 네가 잠든 시간에
난 깨어있으니 꿈에서 조차 만나 미소를 나눌 수 없을 것 아니냐. 그나마 꿈속일망정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었던 그때는 행복하였느니.”
‘연우를 기억하고 계셨사옵니까?’
월은 기쁘고도 서글픈 눈빛을 감추느라 눈을 감았다. 그리고 훤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연우의 모습은 그저 글자 몇 개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월은 기뻤다. 그토록 이나 그리워하던 이의 가슴 속에 자리하고 남아있었다는 것만으로 연우를
버리고 월로 살아도 한이 없을 것 같았다. 월이 조그만 소리로 시를 읊었다.
“바다 위에 밝은 달이 떠올라, 하늘 저 끝까지 고루 비추네. 사랑하는 연인들 서로 멀리 있는
이 밤을 원망하여, 님 그리운 생각에 잠 못 이뤄 하노라. 촛불 끄고 방안에 가득한 달빛 아끼다가,
저고리 걸치고 뜰에 내려서니 촉촉이 이슬이 젖어 오네. 손으로 가득 떠서 보내드릴 수 없는 터에,
다시 잠자리에 들어 님 만나는 꿈이나 꾸어보리라.”
<달밤에 임 그리며(望月懷古)> - 장구령(당나라 현종 때의 재상 겸 시인)
훤이 연우에게 제일 처음 보낸 서찰에 적혀있던 시였다. 순간 훤의 몸에 경직이 일어났다.
“소녀가 좋아하는 시이옵니다. 멀리 있어 만나지 못하는 것보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리 있는
것만 못한 사이도 있다는 것을 예전엔 몰랐사옵니다.”
월이 또 몰랐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훤의 눈치가 얼마나 빠른가 하는 것이었다.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훤은 월을 끌어안았다. 월의 어깨너머로 훤의 무서운 눈길이 번뜩였지만
이내 그 매서움은 사라졌다.
‘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건가. 아무리 요 며칠간 연우낭자와 월 사이에서
어지러웠기로 단지 시 하나로 둘을 동일인물로 생각하다니, 정녕 내 정신이 이상한 것이야.
어찌 죽은 연우낭자가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말이 안 되는 것이야.
그저 내 바램 일 뿐이야.’
운검을 본 군사들에게서 들었는지 내관과 궁녀가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훤은 오늘의
도망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시간이 왔음을 알았다. 월을 내려놓고 얼른 곤룡포를 갖춰 입었다.
그리고 월의 옷매무새도 정돈해 주고는 멀찌감치 떨어져 마치 이제껏 줄곧 그런 자세로
있었는 양 창밖을 향해 뒷짐 지고 섰다.
“월아, 다음에는 경회루로 도망하자꾸나. 그곳은 더 큰 연못이 있고, 그 위엔 놀잇배도 띄워져
있느니. 그리고 그 큰 연못엔 수십 마리의 용이 떼 지어 살고 있느니라.”
월은 빙긋이 웃었다. 언젠가 오라비인 염에게서 들었던 말이었다. 경회루의 수많은 기둥에 용을
조각했기에, 그 용들이 일렁이는 수면에 비치면 마치 용이 물속에 잠겨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경회루의 연못엔 용이 살고 있다는 말을 했었다. 훤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선내관이 사색이 된 표정으로 취로정 안으로 들어왔다. 훤은 환하게 웃으며 상선내관을 보았다.
“상선, 잔소리는 조금만 하세. 내 오랜만에 숨바꼭질이 즐거웠으니.”
“상감마마, 어찌 이리 놀라게 하시옵니까? 옥체를 생각하셔야 하옵니다.”
“이제 돌아가자.”
훤이 앞서 취로정을 나섰다. 그리고 월도 상선내관의 차가운 눈빛을 받으며 뒤를 따라 강녕전으로
돌아왔다. 강녕전의 동쪽 온돌방은 뜨겁게 데워져 있었다. 훤은 표범 가죽을 덮어쓰고 멀리
앉은 월에게 자신의 품으로 오라며 한쪽 팔을 펼쳤다. 상선내관이 최대한 몸을 낮춰 호소했다.
“상감마마, 어찌 계속하여 무녀를 가까이 하려 하시옵니까?”
“가엾지 않느냐. 왕에게 끌려 다니느라 추위에 오돌오돌 떨었는데 뭔 잘못이 있기에 저 곳에
떨고 있어야 하느냐? 월은 왕의 어명을 따른 죄밖에 없느니.”
“그런 뜻이 아님을 아시지 않사옵니까?”
“월아, 이리 오너라. 네가 오지 아니한다면 내가 그쪽으로 갈 것이다.”
하지만 월은 멀리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곳은 이제 단둘이라는 주술이 없는 곳이었다.
훤은 답답한지 벌떡 일어나 월에게 다가가 앉았다.
“참으로 귀찮게 하는 여인일세. 넌 나의 말만 들어라.”
훤은 월을 아랫목으로 안아 데리고 왔다. 그리고 표범가죽으로 자신과 월을 같이 둘러 꼭 붙어
앉았다. 운은 고개를 돌리고 그들의 옆에 앉아 있었다. 상선내관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무녀를 꾸짖을 수도 없었다.
“마마, 밤에 취로정엔 가시지 말라 아뢰었는데 어찌 가셨사옵니까? 호랑이가 출몰한다 하지
않았사옵니까?”
상선내관의 한숨 섞인 말을 훤은 냉큼 받았다.
“월아, 거봐라. 호랑이가 나타난다 하지 않았느냐. 내 눈으로 아직 본적은 없지만.
난 너에게 거짓을 말하진 않는다.”
훤은 월에게는 의기양양하게 말해놓고는 상선내관을 향해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상선, 내 운검을 믿고 그리 있었느니라. 운이 내 뒤를 계속 따라온 것을 알기에.
그러니 걱정일랑 마라.”
상선도 운검을 믿고 그나마 안심하고 있었다. 단지 추위까지 운검이 막아주진 못하기에 화가 난
것이었다. 내의원에서 몸에서 열이 나게 하는 차를 가져와 훤에게 올렸다. 훤은 그 차를 한 모금
머금고 그대로 자신의 입에서 월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모두들 납작하게 몸을 숙였다.
운도 몸을 돌려 앉았다. 그렇게 차를 나눠 마시고 난 뒤 훤은 월을 품속에 더욱 당겨 안고는
표정은 더 없는 왕의 모습으로 말했다.
“내일 날 밝거든 이전 상선내관을 불러 오너라. 선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한 친신(임금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은 바로 그 자이다. 그리고 선왕의 두터운 신임 또한 받고 있었던
자였기에 승정원일기에 남아있지 않는 문서들 중에 기억하는 것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비밀리에 조속히 대령시키도록 하라.”
월은 훤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차마 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왕의 얼굴을 하고 있는 훤도
보고 싶었지만 우렁찬 목소리만 느껴야했다. 그리고 연우가 느꼈던 감정과는 다른 서글픈
설렘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