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석수라를 끝마친 훤은 더 이상 편전에 나가지 않고 침전에서 업무를 보았다. 이전에는 석수라를
들기가 무섭게 간단한 산책을 하고 바로 편전에 나가 나머지 야간업무를 보았지만, 비밀리에
검토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져서 침전에 서안을 가져다 두고 밤늦도록 일을 했다. 침전의 수십
칸이 달하는 방들 중에 어느 곳도 가구를 두지 못했다. 화재를 대비해서 이기도 하지만 자칫
가구는 무기가 되기도 하기에 왕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훤이 침전에서
업무를 보게 되면 간이 서안을 들고 내관들이 움직여야 했기에 상당히 불편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훤은 어쩔 수 없이 이런 번잡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강녕전에 앉아서야
삼일간의 근신을 마친 상선내관과도 비로소 개인적인 인사를 나누었다.
“그래, 내 말을 거역하여 근신을 당한 기분은 어떻더냐?”
“마땅히 받아야 할 근신이었사옵니다. 하오나 앞으로도 천신은 계속 그리할 것이옵니다.
천신은 상감마마를 보필해야 하는 사명과 더불어 종묘사직 또한 보필해야 하오니.”
“됐다! 내 서글퍼지려 하느니.”
훤은 쓸쓸한 표정으로 승정원일기를 펼쳤다. 훤의 옆에는 언제나처럼 운이 앉아있었다.
“운아. 석반은 잘 먹었느냐?”
“네.”
“······건개(반찬)는 뭐로 먹었느냐?”
“무엇을 묻고자 하시옵니까?”
“하하. 네 목소리 들은 지 하도 오래된 듯 하여 듣고자 한 것뿐이다.”
훤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지만 운은 고개만 깊숙하게 한번 숙인 뒤 또 입을 다물었다. 다시 한 번
말을 붙여보려 했으나 바깥에서 관상감의 명과학교수가 왔다는 외침이 들렸다. 그래서 검토하던
승정원일기를 덮고 오늘 미처 결제를 끝내지 못한 문서들을 펼치고 들어오라고 명했다.
명과학교수가 가지고 들어온 것은 훤이 명령한 성숙청무녀의 무적(巫籍)이었다.
상선내관이 무적을 받아 훤에게 건네주었다.
“사이에 갈피를 꽂아둔 곳이옵니다.”
명과학교수 말대로 사이에 꽂아둔 곳을 펼쳤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기록이라고는
6년 전 날짜와 무명자(無名者, 이름이 없는 사람)란 글자가 전부였다. 훤은 운이 그곳을 볼 수
있게끔 틈을 내어 보여주었다. 운은 훤의 뜻을 이해하고 그곳을 유심히 보았다.
“어찌하여 이것뿐인가?”
“성숙청 무적은 도무녀가 관리 하는 것이옵니다. 하여 천신은 거기까지는 잘 모르옵니다.”
“나의 액. 내 곁을 지키는 무녀가 아니냐? 그런데 아는 것이 없다니 이 무슨 어이없는 말인가!”
훤이 차마 자신의 액받이무녀라 입에 담기도 서글퍼 곁을 지키는 무녀라고 말을 돌렸다.
그 어떻게 돌려 말해도 가슴에 촘촘히 박히는 가시들은 따돌리지 못했다.
“성숙청 무녀는 다른 관청에 소속된 무녀들과는 다르옵니다. 동서활인원과 각 고을의 관청에
무적이 올라있는 무녀들은 백성 개인의 기복(祈福)행위와 의원의 힘으로 안 되는 병을 치유하는
일을 하기에 그 해당 관청이 관리를 하지만, 성숙청은 오직 나라를 기복하는 일을 하는 곳이라
철저히 비밀리에 무적을 관리하옵니다. 천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옵니다.”
“그렇다면 내 곁을 지키는 무녀를 선발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성숙청에서 아무렇게나 뽑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성숙청의 도무녀가 추천하는 처녀 무녀 중에 관상감에서 사주를 풀어 상감마마와
합이 맞는지 본 뒤에 결정하는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그 합은 네가 보았겠구나?”
“하, 하오나 합을 본 후에 그 무녀에 관한 것은 즉시 태워서 버렸기에 기억하고 있는 것이 없사옵니다.”
명과학교수는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물론 성숙청에서 건네준 무녀의 생년월일시를 즉시
태워버린 것은 맞지만 이 또한 기억해야 하는 것도 명과학교수의 일이었다. 왕의 생년월일시를
누설하면 안 되는 것처럼 액받이무녀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무리 왕이라 해도 말해줄 수 없었다.
“언제 선발하였느냐?”
“상감마마께옵서 즉위하실 때 같이······.”
“4년 전? 그렇다면 나이쯤은 기억나지 않느냐?”
훤의 질문에 명과학교수는 고민에 빠졌다. 나이쯤은 괜찮았다. 무적에 다른 무녀들은 나이가
기재되어 있는데 오히려 액받이무녀만 빠져있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었다.
“올해로 스물하나, 새해가 오면 스물둘이 되옵니다.”
‘연우낭자가 살아있다면 동갑이었겠구나. 나란 놈도 우습구나. 얼굴도 모르고 연심을 품질 않나,
아무것도 모르고 얼굴만 아는 여인에게 연심을 품질 않나. 희한한 놈일세.’
훤은 씁쓸하게 웃으며 곰곰이 계산해보았다. 무적에 올라 있은 지는 6년 전이니 적어도 그 이전
까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단 말이었다. 글도 박식하게 알고 자태도 품위 있는 것으로
보면 분명 양반가의 여식이었을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그리고 그때 처음 만났던 곳에서 여종이
‘아가씨’라고 한 것과, 거친 일 한번 해보지 않은 듯한 고운 손을 보면 더더욱 확신이 섰다.
귀하게 자라지 않았다면 결코 그런 손이 되지 못했을 것이었다. 궁궐의 많은 궁녀들도 얼굴이
아무리 고와도 손의 거침은 숨길 수가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성도 있었을 것이고,
이름도 있었을 것이었다.
“성숙청의 무녀는 어떻게 뽑는 것이냐?”
“신내림을 받은 무녀 중에 특히 신기가 높은 무녀를 데려온다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도 신내림을 받은 것인가?”
“그러할 것이옵니다.”
“그럼 신내림을 받기 전에는?”
“천신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네가 그녀의 사주를 보았다 하지 않았는가?”
“사주를 본 것이 아니라 상감마마와의 합만을 보았습니다. 신기가 내린 사주는 괘가 흩어져
있기에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하여 보지 않습니다.”
“합은 보아도 사주는 보지 않는다? 뭔 뜻인가?”
“합을 보는 방법과 사주를 보는 방법은 다르옵니다. 합을 볼 땐 상감마마와 액받이무녀의
사주를 같이 풀어 보면 괘가 보이지만, 그 여인의 괘만 따로이 보면 보이진 않았단 뜻이옵니다.”
“음······.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지만, 알았다. 이 여인의 신모는 누구인가?”
“장씨도무녀이옵니다.”“그럼 그 장씨도무녀는 이 여인의 친모는 아닐 것이나, 어디서 온
여인인지는 알 것이 아닌가?”
명과학교수는 입을 다물었다. 훤의 술수에 넘어갈 뻔 했다. 이렇게 조목조목 따지고 들어오면
어느새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마는 실수를 유도하는 것. 이것은 훤이 잘 쓰는 유도심문이었다.
명과학교수도 월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긴 했지만 훤의 유도에 넘어가면 자신도 미처 모르고 있던
답이 나올 것만 같아 더 이상 입을 열기가 무서웠다. 답이 없자 훤은 다시 질문했다.
“말하라! 장씨도무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궁궐에 없사옵니다. 더 이상은 천신도 모르옵니다.”
“도무녀도 엄연히 나라의 녹봉을 받는 자리라 알고 있다. 그런데 궐내에 없다니!”
“7년 전에 자리를 물리고 나갔사온데, 장씨도무녀의 신력을 넘어서는 도무녀가 없어 대리자만을
우선에 두었사옵니다. 지금도 불러들이려 노력하고 있사옵니다.”
“7년 전이라······. 무슨 연유로 성숙청을 나갔단 말이냐?”
“잘 모르오나 성균관 유생들이 성숙청의 철폐를 강력하게 요구하여 더 이상 있기 싫다며
나간 것으로 아옵니다.”
훤은 고개를 갸웃했다. 7년 전이라면 세자빈 간택이 있었고, 성균관에서는 그 일과 관련하여
권당을 하느라 성숙청 같은 곳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오히려 성균관에서 성숙청 철폐를
요구하여 상소를 올리던 때는 그 전과 그 이후였다. 게다가 이 상소는 하루 이틀 이어져 온 것이
아니라 성숙청이 생긴 이래 시시때때로 끊임없이 불거져 나왔던 문제였다.
“장씨도무녀······. 어떤 자냐?”
“조선이 건국한 이래 최고의 큰무당이라 들었사옵니다. 하지만 천신도 훈도로 있을 때 한번
보았을 뿐인지라 자세히 알진 못하옵니다.”
훤은 생각에 빠져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 큰무당의 신딸이라······. 묶이는 인연이 무섭다하여 이름하지 않은 신모란 자가
장씨도무녀란 말이지.”
훤은 처음 만난 날 월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분명 월의 신모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의 답은
그러했다. 자신이 신딸로 삼았으면서도 인연이 묶이는 것이 무서워 신딸에게 이름을 주지
않았다는 장씨도무녀. 월의 그 전 이름을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단지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할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픈 것을 대신하여 액받이무녀가 아픈 것이 확실한가?”
“네? 그, 그러한 것이 마땅하긴 하오나······. 아뢰옵긴 송구하오나 이 액받이무녀는 상감마마와의
합이 너무도 잘 맞는 것이온지 신기하게도 무녀가 대신 아프거나 하는 것은 없사옵니다.
그러니 심려는 마시옵소서.”
훤은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인지, 아니면 월이 아파도 내색을
하지 않는 것인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훤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머리가 아프다. 무녀를 불러오라.”
상선내관은 왕이 어디가 아프다고만 하면 걱정부터 앞서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훤의 꾀병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어의를 불러오는 것이·······.”
훤은 더욱 찌푸린 표정으로 명과학교수를 보고 말했다.
“아직 인경이 되기 전이지만 데리고 오라. 내 머리는 무녀가 있어야 괜찮아지느니. 어서!”
명과학교수는 어쩔 수 없이 성숙청 무적을 들고 물러났다. 상선내관과 운만 남게 되자 훤은
조용히 운에게 물었다.
“운아, 이상한 점이 있지 않느냐? 네가 다른 관령 소속의 무적들을 보았을 것이니 이상한 점을
말해보아라.”
“다른 무적에는 각 무녀들의 신상에 대해, 심지어 생긴 특색까지 소상하게 적혀있었사옵니다.
하온데 방금의 성숙청 무적은 다르옵니다.”
“어떻게 다르단 말이냐?”
“마치 무적에 올리긴 했지만 사람 자체는 숨기려는 듯이 보이옵니다.”
“다른 무녀들은 생김새 까지는 아니지만 이름과 나이는 적혀있었다. 월은 다른 무녀들 보다
더 무언가를 감춰둔 것 같더군. 그 무적에 무명자란 글을 올린 자가 바로 장씨도무녀란 말이다!
대체 무슨 의도로······.”
훤은 턱을 괴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월과 처음 만난 날을 되풀이해서 기억해보았다. 월이 그때
거짓을 아뢰지는 않는다고 했었다. 무명자. 이름이 없는 것은 분명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월은 무녀가 되기 전을 전생이라 말했었다. 그건 그 전생을 기억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선 안 되는 것이란 뜻이었다. 전생이란 전혀 다른 신분에 전혀 다른 삶을 의미하는 것이니,
훤은 월이란 여인이 더욱 궁금해졌다.
한참 만에 월이 들어와 네 번의 큰 절을 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자태였다. 훤은 서안에
이마를 괴고 월에게 가까이 오라고 명했다. 월이 가까이 다가와 앉자 훤은 어리광 섞인
표정으로 월을 보았다.
“머리가 너무 아프구나. 그래서 널 일찍 불렀다. 내 이마를 짚어 다오.”
월이 주춤 거리며 앉아만 있는 것이 답답하여 성격 급한 훤이 먼저 손을 가져와 자기 이마에
강제로 올렸다. 월이 손을 빼내려고 해도 강한 힘으로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역시, 말끔해졌구나. 이상하지? 어째서 네가 있는 것만으로 이리 머리가 맑아지는 것인지.”
월이 다시 손을 빼내려고 하자 이번에는 허리를 안아 잡아 당겼다.
“가만히 좀 있으라.”
훤은 월의 손을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상선내관이 보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로 손을 만졌다.
한참을 정신 집중해서 만지작거리던 훤이 월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참으로 고운 손이로구나. 섬섬옥수가 그대의 손을 일컬었음이야.”
“상감마마의 어수(왕의 손) 또한 그러하옵니다.”
“당연하지. 난 태어나서부터 줄곧 손을 사용할 일은 하지 못했으니. 기껏 활시위나 당기고
말고삐 잡는다던가 책장 넘기는데 사용한 것이 전부이니. 그대의 손도 기껏 책장 넘기는 것 말고는
사용한 적이 없었단 말이렷다.”
훤은 월의 손을 놓고 두 팔로 월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무녀가 되기 전의 네가 어떤 이름의 어떤 신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귀한 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신분이었을 것이다. 네가 나에게 말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손수 알아낼 것이다.
아참! 머리 아프다는 거 꾀병이었느니라. 네가 보고파서 그랬으니 실없다 생각지 마라.”
상선내관이 둘이 너무 꼭 붙어 있는 것이 염려되어 노심초사하였다. 월의 미색이 뛰어나 왕이
잠에서 깨서 보게 되면 큰일이라 줄곧 생각했었지만, 막상 깨어나니 일은 더욱 커져있었다.
아직 상세한 것은 알지 못하지만 눈치 상으로 행궁에서 미행을 빠져나가 한 번은 만났던 사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왕이 달 타령 해대던 것도 어찌 보면 전부 저 여인을 지칭한
것이란 짐작도 되었다. 그러니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상감마마, 승정원일기는 아니 보실 것이옵니까?”
훤은 상선내관을 쳐다보며 월에게서 차츰 떨어져 서안에 바로 앉았다. 하지만 훤은 상선내관이
안심할 틈이 없이 재빨리 월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승정원일기를 펼쳤다.
“상선, 볼에 입 맞춘 것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그러니 그리 놀란 눈으로 보지 말라.”
상선내관은 월을 쳐다보았다.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월이었다. 훤도 월을 보았다.
“아, 미안하구나. 내 널 놀라게 하려던 것은 아닌데. 그럼 널 놀라게 한 죄로 나도 벌을 받지.”
말을 끝낸 훤은 또 다시 재빨리 월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얼굴에는 한가득 장난스런
미소를 담고 있었다.
“사, 상감마마······.”
월이 당황하여 말을 더듬는 모습에 훤은 더욱 기분이 좋아졌는지 큰소리로 웃으며
승정원일기를 보았다.
“하하하. 내가 판단컨대 입 맞추는 것도 괜찮느니라. 볼이 되는데 어찌 입이 안 되겠느냐?
월아, 이렇게 만났으니 내 절대 널 놓치지 않을 것이다. 분명 방법이 있을 게다. 기다려다오.
네가 날 위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을 떠나지 마라.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다.”
월이 아닌 승정원일기에 눈을 두고 말하는 훤이 운의 눈에는 더 애처롭게 보였다. 그래서
급하게 월의 입술만 훔치고 마는 모습에 질투란 것은 느낄 수도 없었다. 현재 훤이 애써 웃으며
태연한 척 버티고 있을 것이란 것은 운과 상선내관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월은 왕이 무엇을
조사하는지 까맣게 모른 채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있었다. 딱 한 달만 궐내에 머물러야 한다는
장씨의 말이 귓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훤의 미소가 이내 장씨의 말을 멀리 쫒아내
버리곤 했다. 그래서 떨리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이 함께하고 있었다.
교태전의 서쪽 온돌방이 왕비의 정침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이 방은 비어있었다. 중전윤씨는
왕비의 정침에 있는 있기만 하면 불안하고 짜증이 일어났다. 그래서 주로 교태전의 동 침전인
함원전(含元殿) 중에서도 작은 방 한 곳에 주로 기거했다. 궁녀들 눈치가 보여 정침에 애써 앉아
있으려 해 보아도 마치 남의 집에 손님으로 와 있는 것 같이 안정이 되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함원전의 작은방은 괜찮았다. 내전상궁이 중전윤씨에게 조용히 물었다.
“마마, 상감마마의 성후를 여쭙지 아니 하셔도 되는지요?”
중전윤씨는 불편해 하며 더듬거렸다.
“가, 강령하시다 하지 않았느냐?”
“하오나 마마께옵서 친히 가보셔야 하오는 건 아니 올련지요. 그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사온데······.”
중전윤씨의 인상이 자기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합궁일에 훤이 쓰러졌을 때 누구보다 안심이
되었던 것은 중전이었다. 이상하리만큼 왕에게 정이 가질 않았다. 그저 그 모습만을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멋있건만 합궁일만 택해지면 그날부터 중전은 무언가에 뒤쫓긴
사람마냥 불안하고 왕이 무서워졌다. 왕이 자기 옷고름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것조차 싫었다.
아무리 괜찮다며 스스로를 위로해도 쉽사리 그런 감정들이 누그러지지 않았다. 왕이 괜찮아졌다는
것도 상궁을 통해서만 들었을 뿐 직접 가서 왕을 보진 않았다. 자기 아래에 있는 상궁들조차
그런 중전을 이상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조심하려 해도 은연중에 인상으로
드러나 버리곤 했다.
“마마께옵서 공무로 많이 바쁘시온데 나까지 귀찮게 해드려서야 되겠느냐?”
“하오나, 마마······.”
“오늘은 나도 바쁘니 다음에 가서 뵐 것이다. 그렇게 있지 말고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너라.”
“알겠사옵니다. 아래 궁녀를 시켜 성후를 걱정하옵신다고 아뢰겠나이다.”
내전상궁은 심부름을 시킨 뒤 왕비가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다. 중전윤씨는 왕비의 옷인
당의차림을 불편해 하기 때문에 해가 떨어지기만 하면 바로 편한 저고리와 치마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당의를 입을 땐 꼭 안에 적삼을 두 겹이나 껴입었다. 겨울 뿐만이 아니라 여름에도
이렇게 입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당의가 불편했다. 혹시나 상궁들이 자신을 정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것도 불안해하는 것 중에 하나였다. 자신의 편 하나 없이, 마음을 털어
놓을 사람 하나 없이, 오직 눈치를 봐야할 사람들 밖에 없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성숙청 무녀들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모습이 혜각도사와 관상감의 교수들 눈에 안 들어올 리가 없었다. 혜각도사는 그 느낌을 알아차려
침묵했고, 관상감의 교수들은 대리 도무녀에게 물어보았다. 답으로 큰무녀가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큰무녀의 복귀! 그건 교수들이 두 팔을 들고 반길 일이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기이한 일들은 그녀의 신력을 빌린다면 쉽게 풀릴 수 있을 지도 모르거니와 관상감에서
다 지고 있는 짐을 성숙청과 나눠 질 수도 있었다. 대리 도무녀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신력이
미치지 못하는 일을 접할 때 마다 아무도 못 찾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꼭두각시란 자리에서 내려 올 수가 있게 되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의 기다림을 받는 장씨도무녀가 드디어 궐내 성숙청에 도착했다. 그 옆에는
잔실과 설이 같이 있었다. 모든 무녀들이 궐 밖까지 나와 장씨도무녀에게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 장씨의 뒤를 따라 성숙청 안으로 들어왔다. 장씨는 성숙청에 들어서자마자 액받이무녀를
찾았다. 하지만 월은 밤새 왕의 곁에 있다가 잠들었기에 아직 자고 있던 중이었다. 장씨가
모두의 인사를 받고 난 뒤에 다른 무녀가 월을 깨웠는지 데리고 왔다. 월은 다른 무녀들과는
달리 이제껏 장씨가 올 것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자기 눈앞에 장씨가
보이자 장씨의 경고가 생각나 고개만 숙이고 자리에 섰다. 장씨는 그런 월을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다가 주위 무녀들을 나가라고 명했다. 시끄럽던 사람들이 나가고 나자 설이 얼른 월에게
달려가 꼭 끌어안았다.
“괜찮으십니까? 걱정되어 부리나케 왔습니다.”
월은 대답하지 못하고 장씨만 보았다. 눈 한가득 이제 어떻게 되는지 두려움을 담아 묻고 있었다.
장씨는 힘든 미소로 말했다.
“설이 년이 어찌나 빨리 걷던지 따라 뛰느라 이 늙은이 가랑이가 찢어지는가 하였소.”
장씨도 월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여 주며 다시 말했다.
“어찌 되것지요. 이렇게 된 건 다 내 탓이요. 아가씨 탓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고. 무엇보다
이제 말조심이나 하십시다. 이 시간부터 내 아가씨한테 반말을 하겠소.”
“진즉에 그러셔야 했지 않사옵니까?”
“혼자 힘들지 않았소? 난 설이 년이 내 목 벨거라 지랄하는 바람에 많이 힘들었소.”
장씨는 웃으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긴 여행 때문에 힘들었던 탓도 있었지만 궐내에 가득한
어수선함 때문에 더 정신이 없었다. 월이 걱정되어 물었다.
“긴 길이 힘드셨습니까?”
“아니, 그보다 한적한 곳에 있다가 이렇게 북적이는 곳에 오니 적응이 안 되어 그렇소.
조금만 지나면 언제 그랬나 싶게 곧 이곳에 다시 익숙해져 살아가겠지.”
잔실은 처음 성숙청이란 곳에 왔기 때문에 낯설고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장씨는 그런 잔실이 조차 정신없게 느껴졌는지 옆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한참을 숨을 돌린 뒤 장씨는 그제야 왕에 대해 물었다.
“상감마마께옵선 괜찮으시오?”
“네, 제가 오고 나서 좋아지셨다 합니다. 관상감에선 아직까지 원인을 모른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신모님은 아시겠습니까?”
“글쎄······. 이제 도착해서 바로 알 수는 없겠지만······. 차차 알아봐야겠지.”
장씨가 골똘하게 생각에 빠져있을 때 쯤 혜각도사가 갑자기 들어왔다. 장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미리 말도 놓지 않고 불쑥 들어오는 이런 경우가 어디 있소!”
혜각도사는 장씨를 보고 있지 않았다. 오직 월을 쳐다보며 앞으로 와서 월 앞에 큰 절을 올렸다.
장씨가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보며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화를 냈다.
“이 늙은이가 실성을 했나? 어서 일어나시오!”
혜각도사는 일어나지 않고 몸을 숙인 그 상태로 조용히 말했다.
“교태전의 주인이시여. 이 몸이 죄인이라 그간 예를 갖추지도 못 하였사옵니다.”
월은 차분하게 미소로 말했다.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소녀는 비천한 무녀일 뿐이옵니다.”
“세자빈 간택 당시 소인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사옵니다. 그 죄는 죽어도 마땅하옵니다.”
월은 장씨의 눈치만 보았다. 장씨는 지쳤는지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큰일 만들 늙은이 일세. 쯧쯧. 허연우, 그 아가씨는 이미 죽고 없소. 똑똑히 보시오!
눈앞에 있는 건 무녀일 뿐이오. 액받이무녀.”
혜각도사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숙청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제야 모두가 놀라
장씨를 보았다. 설이 펄쩍 뛰며 말했다.
“저 늙은이 누굽니까? 어찌 아가씨를 알고 있는 것입니까?”
“호들갑떨지 마라. 발설할 인간은 아니다. 하지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구나.”
장씨는 놀란 눈으로 서 있는 월을 보고 물었다.
“두렵소?”
월은 쓸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한숨과 같이 말했다.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이미 소녀의 전생이 되어버린 허연우란 이름을 들었사온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