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민화는 오늘도 어김없이 해가 떨어지자 향목욕을 하고 내당에 곱게 앉았다. 염이 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이 더 지났건만 아직 내당에 발걸음을 하지 않고 있었다. 원래 먼 여행을
다녀와서 한동안은 합방을 하면 안 된다는 상식쯤은 알고 있긴 했지만, 한 달이 넘기까지
내당으로 오지 않는 건 서운한 일이었다. 염이 보고 싶어서 사랑채 근처를 숨어 서성거리다
우연히 마주친 척하며 얼굴을 보긴 했다. 하지만 잠시 서서 한두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오늘 낮에 만났을 때 혹시 밤에 내당에 올수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옆에서
도끼눈을 하고 있는 민상궁 때문이 입도 벙긋 못해보고 말았다. 매일을 기대감만으로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몇 번이나 거울을 보며 외양을 단장한 민화는 수틀을 꺼내 놓고 열심히 수를
놓는 시늉을 했다. 수 자체에는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단지 염이 와서 봤을 때 얼마나 우아해
보이는가 하는 것만이 중요했다. 수 한 땀 놓고 거울 한번 들여다보기를 연거푸 하다가 한번 씩
방문 쪽을 보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오늘도 이렇게 끝나고 마는가 싶어
초조해졌다. 그래도 한편으론 아직 포기하기엔 밤이 깊어지지 않았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수가 슬슬 지겨워졌는지 하품이 자꾸만 나왔다. 그래서 수틀을 밀치고 서안에 앉아 책을
읽는 시늉을 하기로 했다. 어쩌면 수놓은 모습보다 책 읽는 모습이 염의 눈에는 더 우아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민상궁, 내 모습이 어떻느냐? 수놓는 모습이 나으냐, 아니면 이 모습이 나으냐?”
민상궁도 지겨운지 하품을 참으며 말했다.
“어느 거나 다 어여쁘시옵니다.”
“그래도 우리 서방님 눈에는 어떤 것이 더 나아 보이겠느냐?”
“그건 저도 모르지요. 의빈자가시라면 아마도 책만 눈여겨보실 것 같은데······.”
민화는 어쩐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서 깊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휴. 내 몸에 붓으로 글을 새겨 넣으면 서방님께서 날 찾아주실까? 그 글들이 보고 싶어
옷고름을 풀어주지 않으실까?”
“먹물 지우려면 고생하실 것이옵니다.”
민화는 민상궁을 쌜쭉하니 쳐다보았다. 입을 삐죽하는데 그만 눈물도 삐죽거리며 나올 것
같았다. 염이 너무도 보고 싶었다. 매일매일 아무것도 안하고 둘이만 꼭 붙어있으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을 것 같은데, 염은 책과 더불어 있는 것이 곧 무릉도원이라 여길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민화는 서안 서랍에서 붉은색의 화려한 궁낭(宮囊, 향낭, 주머니,
노리개 등의 기능을 한꺼번에 한 복주머니의 일종)을 꺼냈다. 이때까지 지겨워 하품을 참던
민상궁의 눈이 번쩍 뜨였다.
“공주자가, 뭐, 뭐하시려는?”
“서방님이 독서삼매경에 빠져 아무래도 아내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만 모양이시다.
내 지금 당장 가서.”
“아니 되옵니다!”
민상궁은 당황하여 팔을 펼치고 급히 방문을 막아섰다. 그리고 옆에서 같이 지겨워하고 있던
여종에게 말했다.
“넌 어서 저쪽 문을 막아라. 절대 비켜드리면 안 된다. 공주자가! 체통을 지키시옵소서.
이 시간에 안채 여인이 사랑채에 드는 것은 절대 아니 되.”
“그놈의 체통! 체통! 민상궁이 눈 떠서 지금까지 체통이란 말을 몇 번 했는지 아느냐? 비켜라!”
“공주자가, 제발.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오소서.”
“안 비키면 소리칠 테다! 어머님 귀에 다 들리도록 사랑채 가고 싶다고 크게크게 소리쳐 버릴 테다!”
이 막무가내의 공주에 놀라 민상궁은 옆으로 비키며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 그럼 아랫것들한테 들키지 않게 조심, 또 조심하시어······.”
“넌 여기 있거라.”
민화가 궁낭을 소중히 끌어안고 냉큼 밖으로 나가자 민상궁은 이마를 짚었다.
“이 일을 대비마마께옵서 아시게 되면 난 또 회초리감이야. 에구, 내 팔자야.”
민화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까치발로
뛰어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난 쪽문으로 갔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정문은 이미 잠겨 있을
것이기에 오직 뒤로 난 쪽문 길 밖에 없었는데, 쪽문은 어느 사대부 집이든 젊은 부부만이
드나들 수 있게 고안한 비밀 문으로 대체로 잠그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민화는 이 쪽문만큼
사랑스러운 것도 없었다. 이쪽 길로는 하인들도 얼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남편이
주로 사용해야 할 문이지만, 이 집 쪽문을 이용하는 사람은 주로 민화였다. 목을 쭉 빼서
사랑채를 보니 불이 켜져 있었다. 민화는 재빨리 뛰어 사랑채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방안으로 뛰어든 민화 때문에 염이 책 읽다 말고 자칫 비명을 지를 뻔했다.
“고, 공주. 무슨 일입니까?”
민화는 쭈삣거리며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염은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뒤늦게 미소를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 굽혀 정중히 인사했다. 얼떨결에 민화도 따라 인사했다. 염이 다시
자리에 앉아 미소를 보였다. 민화는 그 미소에 안심이 되자 신발을 신은 채로 방안에 들어온
것을 깨달았다. 얼른 신발을 벗어 방문 앞에 놓고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혹시 누가 볼까
걱정되어 방문 밖으로 내 놓지는 못했다. 민화는 그렇게 멀찌감치 앉아 염의 눈치만 살피며
궁낭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염이 입을 열기 전에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먼저 말했다.
“저기······, 저 때문에 놀라시었죠?”
“갑자기여서······. 무슨 용무이십니까?”
무슨 용무냐는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고개 숙인 채 애꿎은
궁낭만 열심히 매만졌다. 용기 내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 했다.
“가까이 오라 아니 하시어요?”
“아! 제가 잠시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리 오십시오.”
염은 미안해하며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조금 비켜 앉아 옆으로 오게 했다. 민화는 냉큼
다가가 염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마음이 앞서 너무 바짝 다가가 앉았기에 염이 오른쪽 팔을
움직이기가 불편해졌을 정도였다. 민화는 염에게서 나는 난향이 좋아 힘껏 숨을 들이켰다.
“서방님을 방해하러 온 것이 아니어요. 저 여기 얌전히 있을 것이니 읽던 책 마저 읽으시어요.
책 다 읽으시면 말씀드리겠사와요.”
눈을 똘망똘망 뜨고 말하면서도 부끄러워 몸을 비비 꼬는 모습에 염은 조용히 미소만 보낸 뒤
책을 들여다보았다. 책 읽으랬다고 진짜 책을 읽는 염이 원망스러웠지만, 옆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서 조용히 있었다. 염의 옆얼굴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쳐다봐도 책에
집중하고 있는 염은 의식하지 못했다. 민화 또한 염에게 정신이 집중되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책장을 넘기는 염의 하얀 손이 너무도 우아하고 아름다워 어느새 손을 뻗어 슬금슬금 만지고
있었던 것이다. 기분이 좋아 자기도 모르게 입에 헤 벌어졌다. 손으로 슬금거리는 것도 부족해
이번에는 볼을 가져다 대어보았다. 염의 따뜻한 손에 행복해져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민화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눈을 슬쩍
떠보니 물끄러미 자신을 보고 있는 염의 눈과 바로 마주쳤다. 얼굴이 붉은 꽃보다 더 붉어졌다.
민망함을 감출 수 없어 천천히 볼을 떼어내어 상체를 꼿꼿하게 했다. 그리고 또 다시 궁낭이
희생양이 되었다. 염이 빙그레 웃으며 책갈피를 끼운 뒤 책을 덮었다. 그리고 민화를 향해 앉았다.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듣겠습니다.”
“저기, 방해를 하였어요? 이제 방해 안할 터이니 계속 책 읽으시어요.”
“아닙니다. 저도 막 책을 덮으려 하였습니다.”
민화는 부끄러워 몸을 비비 꼬면서 궁낭 입구를 열었다 닫았다 한참을 망설였다. 궁낭으로 입을
가리며 염의 눈치를 보니 염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궁낭 안에
들어 있던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꺼냈다.
“이, 이거······.”
염은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펼쳤다. 민화는 여전히 염의 눈치만 보며 계속 궁낭만 만지작거렸다.
펼친 종이에는 날짜들이 적혀있었다. 염은 멋쩍은 미소를 보이며 서안 위에 그 종이를 올렸다.
민화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민상궁이······. 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민상궁이 꼭 귀한 아들을 봐야 한다며 관상감에 가서
날짜를 택일 받아 온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 날짜에······. 그러니까······.”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종이에 적힌 날짜는 염과 민화의 사주로 뽑은 합방일 날짜였다. 그 날짜에 합방하면 귀한
아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민상궁이 스스로 이 날짜를 받아 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민화가 민상궁을 숨 막힐 정도로 졸라서 관상감에 날짜를 받아오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받아온
날짜가 눈물이 날 정도로 횟수가 적었다. 받아온 두 달 치에서 날짜는 고작 여섯 개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민화는 실상 귀한 아들 따위에는 그리 큰 욕심은 없었다. 그러잖아도 내당으로
걸음을 잘 하지 않는 염이었기에 아들 본다는 족쇄라도 채워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날짜 사이사이에 민화가 손수 괴발개발 날짜를 더 끼워 넣었다. 누가 봐도 민화가
써 넣은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것 같은데, 민화는 혼자만은 들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염이라고 표가 확 나는데 중간에 민화가 날짜를 더 써 넣은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 날짜들은 무엇입니까?”
민화는 염이 민화의 글자들을 가리키자 화들짝 놀랐다. 얼굴을 새빨갛게 하여 한참을 방바닥만
긁다가 모기만한 소리로 겨우 핑계를 대었다.
“귀숙일자(씨내리는 날이라 하여 여염집 부녀자들이 외우고 있던 것) 중에 빠진 것이 있어서
어쩔 수없이······. 민상궁이 꼭 넣어야 한 대서······. 춘 갑인 춘 을묘 하 병오 하 정사 추 경신
추 신유 동 임자 동 계축. 소첩도 이렇게 외우고 있사와요. 그리고 어떻게 좋은지 모르겠지만
민상궁이 좋다는 날도 넣었는데······.”
“알겠습니다.”
염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다른 종이에 옮겨 적었다. 염이 순순히 받아들이자 민화는 속으로
날짜를 몇 개 더 넣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저기, 소첩은 잘 모르지만, 진짜 잘 모르지만 <포박자>에는 20대 남자는 방중절도일이 3일에서
4일에 한 번 씩이 좋다고 하였사와요. 소첩은 오직 서방님 건강이 걱정되와······.”
부끄러워하면서도 민망한 말을 꼬박꼬박 잘도 하는 민화였다. 오히려 부끄러워 아무 말 못하는
쪽은 염이었다. 염이 붉히는 볼에 민화는 붉은 색을 더 보탰다.
“거기다가 <옥방비결>(중국의 유명한 성 의학서)에 따르면 건강한 20대 남자는 하루에 2회 하는
것이 좋다고 민상궁이······. 서방님도 건강하시니······. 매일매일······.”
“매, 매일? 허허. 공주께서 저를 놀리시려는 겁니까?”
“아니어요! 분명 그렇게 되어 있사와요. 제가 똑똑히 확인. 아, 아니 민상궁이 똑똑히 말해주었는데······.”
염은 곰곰이 계산해보았다. 염이란 인간이 따르는 예를 갖춰 한 번의 합방을 하는 순서를
따져본다면 하루에 두 번이란 횟수는 하루 종일 다른 일은 아무 것도 못한다는 뜻이었다.
실제 <옥방비결>에 그렇게 명시가 되어있다는 민화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지만, 염도 이 책의
아성은 들은 적이 있기에 믿어지지 않았다. 민화와 책이 말하는 한 번의 횟수와, 염이 생각하는
한 번의 횟수는 굉장한 괴리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민화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여겼다.
“공주, 저 이래뵈도 서당에서 <보정>(保精, 생리철학으로 일종의 성교육)을 배운 몸입니다.
그러니 농일랑 마십시오. 그리고 관례를 치르면서 <상투탈막이>도 외웠고, 혼례 전에 사랑들이
(혼례를 치르기 전 가까운 친척집-주로 삼촌-에 가서 받던 성교육)도 하였습니다. 이 모든
배움 속에 하루에 두 번이란 횟수는 없었습니다.”
“아니어요! 정말 이어요!”
민화는 책을 당장 가져다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그 책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들킬
것이기에 입을 다물었다. 염은 종이를 접어 궁낭에 다시 넣어 주었다. 민화는 합방일 날짜를
서로 약속한 종이를 나눠가진 것이 기뻐 궁낭을 꼭 감싸 쥐었다. 그리고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리고 중얼거렸다.
“진짠데······, 하루 2회······.”
“밤이 깊었습니다. 그만 내당으로 가보셔야지요.”
민화는 화들짝 놀랐다. 또 다시 부끄러워 몸을 비비꼬면서 손가락으로 아직 먹물이 덜 마른
염의 종이를 가리켰다.
“여기······.”
민화가 가리킨 곳은 오늘 밤의 날짜를 적은 곳이었다. 염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속삭였다.
“미리 기별을 주시지 않고요. 오늘이란 것을 알았더라면 몸과 마음을 미리 준비해두었을 것입니다.”
“아니 오시었잖아요. 아무리 기다려도 내당에 걸음 한번 하지 않으시었잖아요.”
민화는 목소리에 그만 원망을 가득 담아 울먹거리고 말았다. 보고 싶어 서성거리는 것도
민화였고, 밤마다 목을 빼고 기다린 것도 민화였다. 그래도 너무 사랑해서 원망하는 마음보다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 자신과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아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서,
이 남자를 탐내며 울었던 그 시간들도 있었기에 내당에 찾아주지 않는 서운함 쯤은 웃고
털어버릴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만 꼭꼭 숨겨왔던 원망스런 마음이 목소리로 흘러나오고
만 것이었다. 염은 민화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기다리시었습니까?”
“네, 언제나. 매일을 기다리어요. 서방님은 소첩을 부덕한 아내로 만들어 버렸사와요. 점잖지
못하게 사랑채나 넘나드는······.”
“가야지, 가야지 하였는데 책 읽다 정신을 차리면 너무나 밤 깊은 시간이라 감히 내당에
걸음하지 못하였습니다.”
“소첩을 점잖지 못하다, 음탕하다 꾸짖지 마시어요. 이 또한 서방님이 이리 만드신 것이어요.
서방님께서 보고 싶어 하는 책을 못 구해 속상한 것도, 제가 서방님을 못 뵈어 속상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어요.”
염은 책을 비유해서 말한 민화의 말이 어느 비유보다 가슴에 와 닿았다. 염이라고 민화의
지극한 사랑을 모를 리가 없었다. 과분하리 만큼 벅차서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7년 전, 유배를 당할 처지에 놓인 염과 홍문관대제학을 이 여인이 지켜준 거나 진배
없었다. 공주는 이 집안의 은인이었다.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비록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의빈의 처지가 되긴 했지만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아니어요. 소첩의 인내가 부족한 탓이어요. 그래도 서방님은 딴 여인에게 한눈을 파는 것이
아니잖아요. 만약에 다른 사내처럼 그러시오면 소첩, 가슴 아파 죽어버릴 지도 몰라요.”
민화의 괜한 엄포였다. 의빈은 첩을 둘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 다른 여인과 하룻밤을 보낸다면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 여인이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첩도 없이 오직 공주만을 처로
삼아야 했다. 그리고 공주가 먼저 죽어버려도 재처를 들일 수가 없었다. 들인다 해도 그 어떤
사대부가의 여인이라도 첩으로 되어버렸다. 이것이 의빈에게 법으로 가해진 또 다른 금고(禁錮)였다.
“서방님을 첨앙(瞻仰, 우러러 사모함)하는 소첩의 마음을 아시어요?”
염은 대답 없이 따뜻하게 민화의 등만 어루만져 줄뿐이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민화의
사랑고백에 대한 답은 들려주지 않았다. ‘나도 공주를 사랑한다.’라는 이 간단한 말은 절대 입에
담지 않았다. 민화는 단지 사랑표현에 인색할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건 일종의
믿음이었다. 결혼하고부터 지금까지 여자문제로 민화를 속상하게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속상하게 하는 상대는 민화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책이란 것이었다.
민화는 염을 꼭 끌어안았다.
“소첩, 서방님이 눈길 주시는 꽃들에도 시샘할 것이어요. 서방님의 얼굴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바람에도 시샘할 것이어요. 서방님이 디디어신 땅에도 시샘할 것이어요.”
“꽃은 공주가 아니십니까? 하하하.”
“금새 시드는 꽃은 싫어요. 아바마마께 제 이름의 꽃화를 불화로 바꿔 달라 청을 드린 적
있었사온데 안 된다 하시었어요. 칫! 불과 불꽃. 더 없는 궁합인데.”
“불꽃도 꽃입니다. 그러니 저도 공주와 같은 꽃입니다.”
민화는 웃고 있는 염의 입술에 냉큼 입을 가져가 대었다. 염이 피하지 않고 민화의 입술을
받아주는 것에 더욱 용기 내어 염의 입 안으로 겁먹은 혀를 조심스럽게 넣어보았다. 염은 깜짝
놀라 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거절당한 거라 여기고 한가득 겁먹은 민화의 큰 눈과 마주치자
이번에는 염이 먼저 합구(合口, 키스)를 해주었다. 이 또한 어찌나 조심스럽게 움직이는지
민화는 염의 혀의 움직임에 속부터 먼저 타 들어갔다. 또 갑자기 염이 민화를 떼어냈다.
아직 황홀함에 빠져있느라 민화는 눈이 떠지지가 않았다.
“아내를 대하는데 있어 이리 준비 없이는 예가 아닙니다.”
“소첩이 이리 사랑채에 달려온 것도 예는 아니어요, 뭐.”
그놈의 예의 타령에 민화는 삐친 모습을 보였다. 이런 상황이 되면 예의 따위는 벗어던지고
불꽃처럼 타올랐으면 하는데 염이란 사내는 꼭 이불 속에서도 예의란 시덥잖은 옷을 갖추는
것이 문제였다.
“제가 몸을 닦고 내당에 갈 것이니 먼저 가 계십시오.”
민화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몸을 닦고’ 이 의미는 날이 샐 때쯤에나 내당에 나타나겠다는
뜻이었다. 몸을 닦는데 어지간히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어김없이 염의
옷고름을 먼저 푼 것은 민화였다. 정숙한 척 기다리다간 염의 손길이 민화의 옷고름에 닿을
때는 내일 해가 중천에 떴을 쯤에야 가능할 것이었다. 그러면 그전에 민화의 속이 새까맣게
타서 이 세상을 하직한 뒤일 것이 분명했다. 당황하는 염의 윗옷을 벗겨 뒤로 감췄다.
“그렇게 해서 몸을 닦으러 나가보시어요.”
적삼차림으로 방문 밖을 나가는 것도 염의 상식으론 어림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벗
겨놓고 얼굴 빨개져 부끄러워하는 모습 때문에 염은 민화를 탓하지도 못했다. 민화는 나이가
스물 살, 한 달 뒤면 스물한 살이 되는데도 앳되어 보이는 얼굴 때문에 언뜻 열 예닐곱 살로 밖에
안 보였다. 그래서인지 민화가 하는 짓은 뭐든지 귀여워보였다. 이렇게 민망하게 만드는 것도
귀여웠다.
“그럼 손만이라도 씻고······.”
민화는 재빨리 자신의 치마를 들어 안에 입은 속치마로 염의 손을 쓱쓱 닦아주었다. 염은
합방에 들기 전에 손을 씻을 땐 꼭 벚꽃 말려 갈아둔 것을 비누로 사용했다. 아내의 몸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가르침 때문이었다. 더러운 손으로 여인의 소중한 곳을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가르침을 받지만 거의 지키지 않는 것이었는데, 염은 다른 사내들과는 달리 그대로
실천하는 융통성 없는 사내였다. 그렇기에 마른 속치마로 대충 닦는 것은 절대 염이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염이 옷을 빼앗아 입을 기세였다. 그래서 민화가 먼저 선수 쳤다.
“소첩이 물을 떠 오겠사와요.”
민화는 얼른 일어나 신발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급히 대야에 따뜻한 물을 떠왔다.
어찌나 조심성 없는지 민화의 옷은 물에 흠뻑 젖어있었다. 염이 물에 손을 넣고 벚꽃가루로
손을 비비니 민화도 그 손을 마주잡고 같이 비볐다. 물과 가루가 손을 간질이자 민화는 까르르
거리며 웃었다. 염의 하얀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마주 끼운 느낌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염은 깨끗한 무명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손을 씻으며 같이 물에 적셔 두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손수건에 벚꽃향이 스며들었다. 요의 가운데에도 수건을 깔았다. 요에 얼룩이
생기면 하인들이 볼 테고 사랑채 요에 생긴 얼룩은 민화의 흉일 될 것이기에 특히 조심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민화는 빨리 자기 옷고름을 풀어주지 않는다며 조급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 염이 수건을 정성스레 깔 동안에 염 몰래 자기 옷고름을 자기 손으로 잡아 당겨
느슨하게 만들었다. 이미 웃통이 벗겨져 적삼차림이 민망하긴 했지만 염은 예의를 갖춰
민화에게 합방을 하겠노라는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드디어 염의 손이 민화의 옷고름에
닿았다. 참으로 굼뜨는 손길이었다. 저고리를 벗겨내는 것도 그렇게 더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벗겨 낸 저고리를 정성껏 접어서 옆에 놔두는 것도 염이 생각하는 예의 있는 합방의 절차였다.
민화는 자기 손으로 확 옷을 벗어던지고 싶었지만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었기에 숨을 들이키며
참기로 했다. 그나마 민화가 굼뜨는 염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쪽진 머리를 푸는 것 하나였다.
치마, 그리고 아래에 첩첩이 입은 속치마를 벗겨내고 적삼 아래의 속곳까지 다 벗겨내
단정하게도 접은 옷이 차곡차곡 옆에 쌓일 때쯤, 민화의 귀에는 어디선가 닭 울음이 들리는 듯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민화의 두통수를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며 눕혔다. 그런 뒤 이번에는
자신의 옷을 열심히 벗어 접기 시작했다. 민화의 조급증 같은 건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준비를 끝낸 염이 적삼차림으로 이불 속에 들어왔다. 그 어떤 경우라도 절대
급하게 서둘지 않는 염이었다. 민화의 위 적삼의 옷고름을 풀고 치마를 조금 끌어내려 젖가슴을
드러나게 했다. 비록 앳된 얼굴이지만 젖가슴만큼은 제법 풍만한 편이었다. 민화의 몸에 염의
손길이 지나다녔다. 이 순간 민화는 자신이 깨어지기 쉬운 얇은 사기도자기란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염의 손길은 조심스러웠고 격조가 있었다. 염의 손길이 지나간 자신의 몸에선 여기저기
벚꽃이 피어나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그리고 염의 손길아래에 비로소 자신은 완전한 꽃이
되어 만개하는 것 같았다. 염은 기다렸다. 민화의 몸에서 충분한 꽃즙이 흘러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사내 된 몸의 예의였다. 그리고 그 꽃즙이 흘러내리게 노력하는 것도 사내의
도리였다. 꽃즙이 덜 준비된 여인의 몸에 들어가는 것은 더불어 같이 합방하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민화는 염과는 달리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꽃즙이 흘러내리기도 전에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꽃즙으로 젖어있었다. 염의 점잖은 몸이 민화의 안으로 들어갔다.
민화는 감사한 마음으로 자신의 몸 안에 꼭 힘주어 받았다. 자신의 몸 안이 원하는 부위를
스치면 손으로 염의 어깨를 꽉 잡아 말없이 그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러면 염이 알아서 그
부위에 좀 더 신경 써서 움직여주었다. 민화는 황홀함으로 넘어가는 신음소리를 참아가며 염의
몸이 움직일 때 마다 힘을 주어가며 염에게도 황홀함을 주었다. 그렇게 은밀한 부분에 힘의
강약을 주면 남자들이 더 좋아한다는 것을 책에서 배웠었다. 아녀자라고 남편에게 받기만 해서
안 된다는 배움을 행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 다 만족한 입태를 끝내고 난 뒤 염은 미리 적셔
두었던 손수건으로 민화의 꽃즙을 닦아내주었다. 베개가 일인용이라 민화는 염의 팔을 베고
나란히 누웠다.
“혹여 소첩이 얼마나 행복한지 말씀드린 적 있었사와요?”
“네, 언제나 말씀하시니.”
“서방님이 아시는 것 보다 더 많이 행복할 것이어요.”
‘서방님은요?’라는 이 말은 묻지 못했다. 아마도 그렇다라고 답해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진심이 아님을 민화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신분 때문에 염이 학문을 떨치지 못하는
것을 민화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마도 자신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 남자를 달라고 떼를
부리지 않았다면, 이 남자는 귀양이 끝나고 현재 왕인 훤에게 등용되어 그 뜻을 펼치며 살고
있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렇게 쓸쓸한 사랑채와 동호(서재)에 학자들로
빼곡하게 모여, 서로 간에 상기된 얼굴로 학문토론 하느라 시끄러웠을 것이란 것도 민화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사내의 날개를 자르고 옆에 둔 죄책감은 민화를 언제나 따라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