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를 품은 달-11화 (11/47)

#11

월이 발목을 한번 빼내려고 하면 발목을 쥔 훤의 손에 힘이 더 가해지고, 다시 한 번 빼내려고

움직이면 그만큼 더 손에 힘이 가해졌다. 이러고 있는 둘의 움직임은 너무나 미세해서 아직

내관들의 눈에는 띄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운의 눈에는 훤의 손이 살짝 움직여 원래 있던 손의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월의 발목을 잡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저 잠결에 손이 조금

움직였는가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운은 놀라서 훤의 머리 옆에 있는 수건을 보았다. 그리고

왕이 시의 뜻을 알아차리고 차를 뱉어 내기 위해, 일부러 기침을 하면서 수건을 달라고 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운의 심장은 영원히 월을 보지 못할 것이란 절망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절망으로 어두워졌다.

훤이 월의 발목을 사정도 없이 잡아 당겼다. 그리고 힘으로 바닥에 넘어뜨려 자신의 가슴아래에

가두었다. 이번에는 훤과 월의 움직임이 컸기에 내관과 궁녀의 눈에도 띄어버렸다. 하지만

그들이 놀라기도 전에 훤은 다른 손으로 월의 어깨를 잡아 달빛이 드는 창 아래로 끌어 올린 뒤,

다시 한 번 더 자신의 가슴아래에 깔린 월이 움직일 수 없게 단단히 했다. 월은 소리를 낼 수

없었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사, 상감마마······.”

상선내관의 떨리는 목소리는 훤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훤의 오감은 오직 눈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휘영청 밝은 달빛에 눈이 부시더니 이젠 그 달빛의 어두움에 화가 났다.

“어서 촛불을 가져오너라, 어서!”

내관과 궁녀가 촛불을 준비하기까지 기다리는 것도 조급했다. 그래서 손으로 월의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이마를 만져보고, 눈을 만져도 보고, 코도 만져보고, 입술도 만져보았다.

달처럼 차가울 것이라 여겼던 뺨도 만져보았다.

“따뜻하구나. 사라지지도 않는구나. 재가 되어 날아가지도 않는구나. 사람이었구나. 귀신이

아니었구나. 그때 꿈을 꾼 것이 아니었구나. 달빛이 흰 돌을 가져다 나를 농락하였다 여겼다.

소아(素娥, 달나라의 선녀)가 나를 희롱하였다 여겼다.”

훤은 믿기지 않는 듯 계속해서 월의 얼굴을 만졌다. 내관이 촛불 두 개를 가져와 가까이에

놓았다. 하지만 그 두 개의 불빛으로는 월이 보고파서 허기진 훤을 채울 수가 없었다.

“너무나 어두워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촛불을 더 가져오너라! 궁궐에 있는 모든 불빛을 다가져오너라!”

왕의 외침에 창고 등으로 초와 촛대를 가지러 내관들과 궁녀들이 놀란 걸음으로 뛰어다녔다.

그리고 관상감의 교수들을 찾아 뛰는 내관도 있었다. 월은 훤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고자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더 아프게 어깨를 짓누르는 훤의 보복을 받아야 했다.

훤은 월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뚫어지게 보았다.

“뇌봉전별(雷逢電別, 우뢰처럼 만났다가 번개처럼 헤어진다는 뜻으로 잠깐 만났다가 곧 이별함)한

인연으로만 여겼다. 그리 끝나는가 여겼다. 그런데 네 눈에서 나의 눈부처(눈동자에 비치어

나타난 사람의 형상)를 보게 될 줄이야.”

훤의 눈에는 어두운 불빛이 운의 눈에는 너무나 환하여, 그만 고개를 돌려 어두운 구석을

보았다. 돌려진 고개를 따라 절망을 대신해 긴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가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여기저기서 가져온 촛불들로 방안을 하나씩 채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밝힌 촛불 수십

개가 훤과 월의 주위를 에워싸고 방안을 햇빛처럼 채웠다. 월이 다시 한 번 몸을 빼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월의 등이 바닥에서 조금 떨어진 틈으로 훤의 팔이 들어와 그녀의 상체를

안아 올렸다. 동시에 한 손으로 볼을 감싸듯 쥐며 옆의 눈길을 막았다. 월이 훤의 몸을 밀치며

다리를 조금 뻗자 발끝에 촛대가 닿았다.

“움직이지 마라. 촛대를 넘어뜨려 이 나라의 왕을 화마의 재물로 바칠 생각이냐?”

월이 촛대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눈길을 돌리니 훤의 손바닥이 그 길을 방해하고 있었다.

어디쯤에 촛대가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기에 자칫 잘못 움직이다간 촛대를 넘어뜨려 불길에

휩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손끝하나 꼼짝 못하고 속절없이 훤의 품에 안긴 채

있어야 했다. 하얀 비단야장의가 떨고 있는 하얀 무명소복을 꽉 안아 하나의 덩어리가 되었다.

월은 햇빛국화향을 느꼈고 훤은 달빛난향을 느꼈다. 서로의 향에 코끝이 아려왔다. 훤은 월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 대었다. 귓불에 송송이 박힌 솜털이 입술에 먼저 와 닿았다. 귓불에도

난향이 베여있었다. 그 귀에 살랑이는 따뜻한 바람과 함께 속살이는 말도 불어넣었다.

“난 이 훤이다. 넌 누구냐?”

월의 눈에는 훤의 어깨 너머로 천정만이 보였다. 천정이 흐릿하게 일렁이자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입술을 조그맣게 움직여 말을 할 듯 말듯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술 한 번 꽉

깨물고는 이 사이로 겨우 말했다.

“월이옵니다. 상감마마께오서 이름하신 월이옵니다.”

월의 목소리였다. 그때 들었던, 잊어지지 않았던 월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더 이상 힘껏 껴안을

수 없을 것 같았던 팔에 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그래, 네가 맞구나. 내가 지금 다른 사람을 착각하는 것이 아니구나.”

훤은 자신의 가슴에 와 닿은 월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표정은 더 없이 평온해 보이는

월이었건만 가슴은 더할 나위 없이 바삐 뛰고 있었다.

“놀랐느냐? 내가 널 놀라게 했느냐?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자는 척하지 않았다면 또

나를 속였을 것이니, 내가 널 속여야 했다. 너도 날 속이지 않았느냐. 그곳에 정박령으로 있을

것이라 하여 놓고는 나를 따돌리지 않았느냐.”

월은 손을 움직여 훤의 어깨를 잡았다. 밀어 내기 위해 잡았는데 힘이 들어가 지지가 않았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비단의 부드러움이 마음속에선 까칠 거렸다. 훤은 월을 조금 떼어내어 눈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품속의 여인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월아. 월아.”

“······네.”

“월아, 혹여 나를 생각한 적이 있었느냐? 나를 그리워 한 적은 있었느냐?”

월의 두 눈에 슬픔이 차올랐다. 단지 두 달에 불과한 세월만을 묻는 훤에게 아무 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두 달에 불과한 세월에 대한 답조차 할 수 없는 처지에 마음으로만 답했다.

‘매일을 울었다 말하리까. 소녀의 눈물로 내를 만들고, 강을 만들고, 바다를 만들었다 말하리까.’

“산 그림자는 밀어도 나가지 않고 달빛은 쓸어도 다시 생긴다 하더니, 너도 그랬다. 네 달빛은

아무리 내 마음, 내 머리에서 쓸어내려 하여도 쓸어 지지가 않았다. 넌 아니었느냐?”

그랬다며 고개조차 끄덕일 수 없었다. 혹여 눈동자에 그렇다란 답이 담겨질까 두려워 훤의 눈에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또 다시 마음으로만 답했다.

‘세 치에 불과한 짧은 혀로 끝없이 기나긴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리까. 얼마나 긴지

재어보지 못한 황하강보다 길다 어찌 말하리까. 얼마나 깊은지 재어보지 못한 바다보다 깊다

어찌 말하리까. 소녀가 무엇을 말할 수 있으리까.’

“요망한 무녀 같으니. 아주 잠시 널 보았다. 그런데 어찌 눈을 뜨고, 눈을 감아도 너만이 보이게

되었느냐. 어찌 날 힘들게 하였느냐. 이는 필시 네가 주술을 걸었음이야. 왕인 이 몸에 주술을

걸었다면 넌 능지처참을 당할 것이다. 말해보아라. 주술을 건 것이냐?”

월이 놀란 눈으로 다시 훤을 돌아보았다. 훤의 눈빛이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아니면 내 마음이 왜 이런 것이냐? 설명해다오.”

훤은 또다시 월을 가슴에 꽉 품고 그녀의 귓속에 속살거렸다.

“네 향기 때문인가. 내가 예전부터 가슴 설레 하는 난향 때문인가. 아니면 네게서 받아온

저 달이 널 잊지 못하게 언제나 비추었기 때문인가.”

“달빛이 요망하여 그런 것이옵니다. 상감마마의 어환이 깊었기에 그런 것이옵니다.”

“나의 착각이라는 것인가? 그리 말하지 마라. 네가 야속타.”

갑자기 훤이 월을 품에서 놓아 일으켜 앉혔다. 눈앞에 보인 월이 반가워 생각지 못했던

의문들이 급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네가 여기 왜 있는 것이냐? 여긴 구중궁궐이다. 그런데 어떻게 온 것이냐?”

월은 대답 없이 고개만 숙였다. 이때 관상감의 세 교수가 헐레벌떡 달려와 방문이 열린 너머에

앉아 엎드렸다.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촛불들을 넘어 갈 수가 없었기에 내관들이 있는

자리에 앉아야만했다. 훤은 놀란 눈으로 월과 교수들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게 어찌 된 것인가? 설명해보아라!”

명과학교수가 엎드려 답했다.

“그 여인은 무녀이옵니다.”

“나도 알고 있다! 나는 왜 여기 있는가 하는 걸 물었다.”

“무녀이온데······, 상감마마의 액받이무녀이옵니다. 하여 한달 간 어침 곁을 지켰사옵니다.

하지만 이제 오늘밤이 마지막이니 진첩(震疊, 왕의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무슨 말이냐?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 액받이라니?”

훤은 명과학교수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차차 그 의미를 파악해 들어갔다. 그 뜻을 알면 알수록 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숨 쉬기 조차 힘들어졌다. 훤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심장을 꾹 눌렀다. 심장이 옥죄어오는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통증은 살을 받아 고통스러웠던 것보다 훨씬 더 참기 힘든 것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훤이 힘들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 여인이 나 대신, 나 대신······.”

훤은 차마 뒷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심장에서 슬픔과 분노가 끓어 넘쳐 올라왔다.

상선내관은 왕이 또 다시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가까이 가고 싶었지만, 촛불이 방패가

되어 있어 다가갈 수 없었기에 마음만 동동 굴렸다. 운은 여전히 구석에서 눈길을 거둬오지

않고 있었고, 월은 훤에게서 등을 돌려 앉아 바닥만 보고 있었다.

“관상감은 뭐하는 곳인가! 나에게 오는 살 하나 막지 못하면서 이 여인을 내 방패막이로

두었더란 말이냐! 감히 나를 속이고, 나에겐 아무 보고도 없이······. 감히! 감히!”

훤의 분노는 관상감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관상감을 핑계로 둔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던 자신과, 몸이 좋아졌다 기뻐했던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몰랐던 것 또한 자신의 탓임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교수들은 훤의 분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잠든 옆에 보고 없이 둔 것만을 질책하는 것이리라 여겼다.

“어쩔 수가 없었사옵니다. 어환의 원인을 몰랐기에 최선의 방법이었사옵니다. 날이 밝으면

궐 밖으로 내칠 것이옵니다. 하오니.”

“내치다니? 어디로!”

“풍수에 따라 휴 지역이라 하여 마마의 살과 액을 대신 받아 누르는 곳이 있사옵니다.

이제 새 지역을 구했사오니 그곳으로 보내 더 이상 마마의 눈에 띄지 않게 할 것이오니.”

“닥쳐라!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훤은 분노로 머리까지 아파왔다. 날이 밝으면 다시 월이 사라질 것이란 말과, 자신을 대신해

액을 받는 것이란 말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어지럽혔다. 뒤돌아 앉아있는 여린 어깨가

보였다. 사라지지 않았음 하는 마음에 급히 월의 뒷모습을 안았다. 교수들은 영문도 모르고

의아해 하기만 했다. 훤이 이를 갈듯 힘겹게 말했다.

“난 아직 아프다. 조금도 건강해지지 않았다. 그러니 궐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 계속 나의 곁에

있게 하라.”

“휴 지역에 두면 곁에 있는 것보다는 덜하지만 충분히 옥체를 지킬 수 있사옵니다. 염려놓으소서.”

“곁에 두라 하였다! 내 말이 말 같잖은가!”

“네? 하, 하오나 무녀를 곁에 계속 두시면 아니 되온데······.”

“이제껏 내 옆에 있었던 것은 그럼 무엇이냐? 내가 모르게는 되고 알게는 아니 된다 하는 말이냐!”

이제껏 엎드려 가만히 있기만 하던 천문학교수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상감마마!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마마께오서 계속 두라 명하시오면 천신들은 그 어명을 받잡을

수밖에 없사옵니다. 하오나 이 말씀은 올리겠사옵니다. 그 여인은 무녀이옵니다.”

“어느 무적에 이름이 올라 있느냐? 내가 그 무적에서 이름을 빼버리겠노라!”

“상감마마께옵서 노비를 양인으로 올리시고, 양인을 중인으로 올리시는 것은 그 또한 마마의

성택일 것이옵니다. 하오나 무녀만큼은 아니 되옵니다. 무적에서 뺀다 하여 무녀가 무녀가 아닐

수 없사옵니다. 무녀는 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옵기에 어명으로 거둬질 수 없사옵니다. 그리고

그 무녀를 곁에 두시는 것도 성택일 것이니 천신들은 받잡을 수밖에 없사옵니다. 하오나

안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무녀는 절대 마마의 승은을 입어선 안 되는 것이옵니다. 신기라는

것은 아래로 되 물림되기도 하는 것이오니, 혹여 앞으로 있을 왕손께 더 없이 큰 문제가 될

것이옵니다. 안지 않으시겠다 천신들 앞에 윤언을 내려 주시오소서. 그러 하오시면 궐 밖으로

내치지는 않겠사옵니다.”

훤은 교수들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월을 안지 말라니, 그리고 무적에서 뺄 수도 없다니

이 말들이 훤의 심장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시하고 이 자리에서 월을 안아버리기로 했다.

“다들 문 닫고 물러나거라. 지금 당장!”

훤의 어명에도 어느 누구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상선내관까지도 훤의 말에 복종하지 않았다.

“물러가라 하였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명과학교수가 힘주어 말했다.

“오늘 밤은 원자를 보기 위한 밤이옵니다. 그 입태시가 아직 지나지 않았사옵니다.

절대 물러날 수 없사옵니다!”

“물러나라! 상선, 뭘 하는가! 어서 문 닫고 물러가라 하였다!”

“상감마마, 송구하옵니다. 이 천신도 물러날 수 없사옵니다.”

상선내관이 몸을 엎드려 훤에게 아뢴 뒤 주위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다들 문을 열어라!”

상선내관의 호령에 훤의 침소를 빙 둘러있던 문들이 스륵스륵 열리기 시작했다. 각 방과 복도에

삼삼오오 대기하고 있던 내관과 궁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따라 평소보다 많은 인원이었다.

수십 명의 눈들이 왕이 무녀를 안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훤의 분노가 폭발했다.

“상선, 정녕 목숨이 아깝지 아니 한 겐가! 여기 있는 너희의 목을 내가 못 밸성 싶으냐!

모조리 다 벨 것이다!”

훤의 외침에도 어느 누구하나 물러나는 이 없었다. 빙 둘러 주위를 보았다. 오직 달 만이 창문을

열어 안을 보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자신의 욕심만 앞세워 월을 안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눈앞에서 월을 안는다는 것은 곧 월을 욕보이는 것이었다. 훤은 망연자실하여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월의 작은 어깨가 가엾어 차마 쓰다듬어 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못난

얼굴을 월이 돌아볼까도 겁났다.

“여봐라. 촛불을 치워라. 눈부시다.”

궁녀와 내관이 촛불을 하나씩 꺼서 가져나가기 시작했다. 다 가져가고 남은 자리엔 달빛만이

남았다. 그 어두움 속에서도 사람들은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어찌 할꼬, 내가 널 어찌 할꼬. 월아, 혹여 날 못난 사내라 여기진 않느냐? 얼마나 못났으면

가녀린 널 방파삼아야 한단 말이냐. 날 원망하느냐?”

“아니 옵니다. 소녀, 그런 마음 전혀 없사옵니다. 오직 송구하여······.”

“나 대신 아픈 것이냐?”

“아니옵니다. 소녀 건강하여 전혀 아프지 않사옵니다.”

“······고맙구나. 건강하여서 고맙구나.”

훤의 가슴엔 월과 재회하여 기쁜 것 보다는 참담한 마음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기대 듯 월의 목덜미에 이마를 기대고 있었다. 그렇지만 미안해서 안지는 못했다.

운은 어두움에 힘을 빌려 그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가슴이 아파 그저 두 사람을 안타까워 한

것이라고만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의 마음이 아픈 것은 서로를 못 보는 둘을 동정한 마음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이 달을 향해 욕심을 가진 것은 한 톨도 없었다라고 머릿속에

각인시키기로 했다. 심장까진 설득시킬 수 없어도 뇌에게만은 설득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 마음을 다지듯 무릎 위에 가로놓인 별운검을 보았다. 왕을 지키는 호위무사의 검. 검은색

칼집에 촘촘히 새겨진 구름문양을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언제나 등에 짊어진 운검의 무게가

오늘따라 무거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음을 느꼈다.

사발에 가득 술을 붓는 장씨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사발 째 입속으로

들이켰다. 좁은 대청에 앉아 술만 들이키던 장씨는 고개를 들어 환한 달빛을 보았다.

“그 혜각도사 늙은이가 기어이 내 목을 따고야 말리라 작정을 한 게군.”

갑자기 방 안에서 자지러지는 잔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장씨는 그 비명소리에도 놀라지 않고

한쪽 입술을 찌그러뜨리며 코웃음을 쳤다.

“지랄하기는. 저 년도 주제에 무녀랍시고, 쯧쯧. 몇 푼 되지도 않는 신력으로 선몽이라고 꾼 게군.”

잔실의 비명소리에 잠귀 밝은 설이 자다 말고 깨어나 목을 벅벅 긁으며 대청으로 나왔다. 술을

마시고 있는 장씨를 발견하자 상 앞에 앉았다.

“무녀님! 쪼잔하게 사발에 퍼 마십니까? 이리 줘보십시오.”

장씨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들고 흔들어보니 안엔 조금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술병을

상 위에 두고 부엌으로 가 술독 째 가져왔다. 설이 바가지로 퍼서 들이켰다.

“으, 시원하다. 안 그래도 목이 말랐는데.”

“목이 마르면 물을 찾지 왜 술을 축내고 지랄이야? 네 년도 술은 좀 작작 마셔라. 나랑 술 마시기

내기를 하면 유일하게 네년만이 이길 수 있을 것이야.”

“내겐 물이나 술이나 매한가지 아닙니까?”

장씨는 설을 보며 힘겹게 웃었다.

“왜 그렇게 웃습니까? 징그럽게.”

“아가씨 궁궐로 보냈다고 칼 들고 내 목을 벨거라 지랄하던 네년 생각하니 기가 막혀서 그런다.

옆을 비우고 떠돌다 온 주제에.”

“에이 씨! 또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군!”

설이 술독에서 한 바가지를 더 들이키고는 팔뚝으로 입술을 쓱 닦았다. 그리고 장씨를 노려보며 말했다.

“오늘밤이 마지막이죠? 분명 관상감에서 호위하여 여기까지 모시고 온다고 한 것, 거짓 아니죠?”

설의 시퍼런 눈빛을 받으며 장씨는 술을 마셨다. 잔실이 바들바들 떨며 방에서 나와 장씨 팔을

꼭 끌어안고 붙었다.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설이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

“너 왜 그러냐? 소름 돋게 비명을 지르질 않나.”

잔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넋 나간 상태였다. 대신 장씨가 말했다.

“그 술독에 있는 술 지금 다 마시자. 내일부터 이 집에 남아있는 술을 마실 사람은 없을 터이니.”

“뭔 소립니까?”

“성숙청으로 복귀한다!”

설이 무슨 영문인지 묻기도 전에 잔실이 비명을 질렀다.

“악! 안 되어유. 지는 못 가유, 검은 기운이 한가득 우릴 잡아먹으러 덤벼드는데, 전 못 가유!

너무 두려워······.”

“잔실이, 이년아. 꼴깝 떨지 마라. 네년 신력으로 날 선몽했으니 그리 검은 기운만 느낀 게다.

네년의 한 사발 신력으로 한 독이나 되는 내 신력의 선몽을 보았기에 그 선몽이 부서진 게야.

아마도 그럴 게야.”

두 사람의 알 수 없는 말에 설이 술 바가지를 집어던지며 화가 나서 소리쳤다.

“대체 알아듣게 말 좀 하세요! 도대체가 무당이란 것들은 왜 뭐든지 알쏭달쏭한 말만 주고받는

답니까? 그러면 뭣 좀 있어 뵌 답니까?”

장씨가 다 마신 사발을 들고 설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누구 때문에 일이 이 지경까지 됐는데? 네 년이 관령 근처에서 임금님이 행궁에 오신단 말을

듣고, 그 말을 아가씨께 쪼르르 일러바치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다, 이년아!”

설은 쥐어 박힌 머리를 손바닥으로 쓱쓱 문지르면서 콧등을 쨍긋했다. 분명 자기 입이 방정

맞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 결계를 부서뜨린 건 무녀님이면서 왜 그럽니까? 거기다 발길 불러들이는 주술까지 행해 놓고선!”

“네년 말 듣고 그리 구슬프게 계신데, 내 심장이 무슨 무쇠를 녹여 만들었는지 알아?

단 한번으로 끝날 거라 생각했지. 따뜻한 술 한 잔을 건네어 드리는 것으로 설움이 다 할 것이라

생각했더니, 염병할. 그 임금이 궐로 돌아가 그리 어환을 앓아댈지 몰랐지.”

“무녀님이 그걸 미리 모르면 어떻게 합니까?”

“낸들 아나. 숨어 부리는 주술은 나도 미리 가늠 못하는 것을. 재수 없게 언 놈이 부린 주술인지

모르지만, 그것과 내가 결계를 깬 시기가 우연히 맞아 떨어진 것이야.”

“책임 없는 말 하지 마십시오! 두 분이 만나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으면서 대체 무슨

심보로 그런 주술을 행했는지 내 그러잖아도 따져 물으려고 했습니다.”

장씨는 얼마 남지 않은 술병의 술을 사발에 탈탈 털어 마저 붓고 벌컥벌컥 마셨다. 다 마신

사발을 멀리 마당을 향해 털고는 한숨과 더불어 말했다.

“내가 망령이 난 게지. 그때 내 잠시 취기로 사리분별을 못했어. 그 인연이 어떤 인연인데,

그리 잠시 만나는 것조차 위험했는데······. 이제 달이 구중궁궐 속에 잠겨버렸어. 꼼짝 없이······.”

설이 놀란 눈으로 장씨를 보았다. 장씨 팔에는 잔실이 여전히 매달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방금 무슨 말씀입니까?”

“사발에 술이나 더 떠다오.”

설은 대답하지 않고 팔만 내밀어 건네는 장씨의 사발을 사정도 없이 내팽개쳤다. 그리고 앞에

있던 상도 마당으로 집어던졌다. 설이 난리 부리는 통에 설의 앞에 있던 술독도 섬돌 아래도

떨어져 박살이 났다. 장씨는 흘러 떨어지는 술만 덧없이 바라보았다. 그런 장씨를 설이 멱살을 잡았다.

“궁궐 속에 잠겼다니? 그게 뭔 말입니까? 우리 아가씨께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무사히 올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어이구, 그놈의 땅바닥이 넙죽넙죽 잘도 술을 빨아먹네.”

“잡소리 치우고 어서 대답하십시오!”

멱살을 잡고 흔들어도 장씨는 덧없는 미소만 띠우며 술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감마마의 옥체에 살이 날아갔다. 그것으로 인해 다시 운명이 꼬여버렸어. 아무래도

상감마마와 아가씨의 인연이 이어져버린 것 같어. 이제 아가씨가 궐 밖을 못 나올 터이니

우리가 들어가야지. 어쩌누. 그 늙은이가 살을 날렸어. 내 목을 따려고 살을 날렸어.”

설이 멱살을 놓았다. 눈이 풀려 헛소리를 하는 것 같은 장씨가 무서웠다. 그리고 잔실의 태도도

무서웠다. 왕의 옥체에 살을 날렸다고 해 놓고 또 자신의 목을 따려고 살을 날렸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언제나 장씨가 중얼거리는 말들 중, 열 마디 중 한마디만 건져도 많이

건지는 축에 들었다. 그런데 요즘 장씨의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거의 혼자 중얼중얼 거리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떨 땐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다가 유심히

들으면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귀를 기울이면 기어이 중간에 화가나

소리치게 되기 일쑤였다. 월이 있던 휴 지역에 결계를 깰 때도 장씨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평소 아가씨와 왕이 만나면 세상 뒤집힐 것처럼 부산떨던 사람이, 그날은 거의 눈이

뒤집어져 집 사방에 결계를 깨는 주문을 외우고 다녔다. 그리고 왕의 발길을 오게 만드는

주술을 했다며 술에 취해 중얼거렸다. 그래서 처음엔 농담하는 것이거나 술주정인 줄로만

여겼다. 그런데 그 주술을 행하고 난 다음날 장씨가 예언한대로 왕이 왔었다. 장씨의 말을 믿고

왕을 맞을 준비를 한 것은 월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일을 벌여놓고는 그 이후 장씨는 더욱더

이상해져갔다. 설은 그래서 장씨가 무서웠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만큼

무서운 것은 없었다. 아무튼 현재 설은 조금 안심하기로 했다. 아가씨가 무사하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슴을 쓸어내릴 일이었다. 그리고 한양으로 간다는 건 또 다른 기쁨일 수

있었다. 설의 마음을 읽었는지 장씨가 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년아. 예끼, 이년아. 주제를 알아라. 꼴같잖게 생긴 선머슴 주제에. 내 그리 의빈자가 댁에

가지 말라 일렀는데. 이번에 한양에 가거든 이젠 절대 가지마라. 금기를 어기면 꼭 그 대가가

있는 법이다.”

설은 입을 샐쭉거린 뒤 자신의 용무만 물었다.

“한양에는 언제 갈 겁니까?”

“지금 저 달이 다 지기 전에 여기서 출발하자. 설이 네년의 환도가 있는데 길 걱정은 점쳐보지

않아도 되겠지.”

장씨는 옆에서 여전히 떨고 있는 잔실의 등을 툭툭 때렸다.

“괜찮을 거다. 잔실이 너까지 이러면 어쩌누. 그래도 네년이 내 진짜 신딸인데. 내 너무 오래

성숙청을 비워두었다. 도무녀! 그 한스런 자리로 돌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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