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달빛이 거의 없어도 운의 눈에 보이는 월만큼은 눈부시게 빛을 내고 있었다. 한 달 간만 궐에
머문다고 했으니 이제 보름 뒤엔 이리 앉아 있어도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눈에 보여 아린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사라질 것인지, 운은 이제껏 이러한 감정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라 판단할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생각도 나지 않을 것이라 마음 속에
새겨보지만 이미 보름 뒤를 생각하면 생전 없던 심장의 통증이 생겨나왔다. 자신의 눈 바로
앞에 칼날이 지나가도 움직이지 않던 심장이었다. 그런 운이 봐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든 왕과, 달이 저물어도 변함없이 조용한 무표정의 월이었다. 달은 옆으로 돌린 얼굴로 한
하늘에 있지 못하는 해만 그리워 할뿐 옆에 있는 구름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운의 마음이
무거운 또 하나의 이유는 더 이상 해가 달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늘의 달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칭얼대며 조르던 말도 싹 지워버렸기에, 월이 왕이 잠든 옆에 있노라 먼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것을 핑계 삼고 있는지도 몰랐다. 월의 가려달란 청 때문이 아니라, 왕이 월을
찾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왕에게 충성하는 마음 때문만이 아니라, 어쩌면 이 모든 것을 핑계
삼아 그저 말하고 싶지 않은 마음일련지도 몰랐다. 또 다시 아까운 한 밤이 지났다. 한 밤이
지났다는 건 월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날 하나가 감해졌다는 뜻이었다.
새벽 4시가 되자 훤이 가뿐한 모습으로 기상했다. 내의원에서 올리는 차를 마시고 잔 이후부터
몸이 가볍고 머리가 맑아진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여전히 밤새 누군가가 자신의 옆에
있었던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떠나지 않았다. 천추전에 나가 상참의(常參儀, 매일 새벽 5시경에
6품 이상의 문무 관리가 참여하던 조회)를 하고 조계(朝啓, 상참의가 끝난 뒤 의정부와 6조등
3품 당상관 이상의 문무관리가 참여하여 국가의 주요 업무를 보고 결정하던 회의)를 했다.
어제 연우에 관한 일로 골몰하던 모습은 없었다. 상선내관은 왕이 밤사이 자고 일어나 잊어버린
건 아닌가 생각이 될 정도였다. 조계가 끝나자 훤은 대신들에게 먼저 물러나란 명을 했다.
그리고 모두가 물러가도록 기다리며 문서들을 검토했다. 모두가 물러가도 내관들과 사관 두 명
만큼은 남아있어야 했다. 훤은 그것을 기다렸던 것이다. 열심히 사초를 기록하고 있던 우사관
앞에 누군가가 다가와 쪼그리고 앉았다. 우사관이 두려워하며 눈길만 반쯤 들자 눈에 곤룡포
자락이 보였다. 그래서 재빨리 눈길을 다시 아래로 깔았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아라.”
“사, 사, 상감마마. 어찌 이러시옵니까?”
원래 왕의 얼굴을 허락 없이 보면 안 되는 것이긴 했지만, 훤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는
부담감과 어려보이는 자신의 얼굴 때문에 그러한 것을 특히 더 싫어하는 왕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우사관이었기에 왕이 고개를 들란다고 들어서 보긴 두려웠다.
“보라는데 안보는 것도 왕의 말을 거역하는 것이다!”
우사관은 두려운 눈길을 들어 왕을 보았다. 동안이긴 하지만 뚜렷한 이목구비가 여간 잘생긴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옆에 있어도 이리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경우는 얼마 없었다.
이렇게 돌발적으로 한 번씩 보게 되면 잘생긴 얼굴에 내심 놀라곤 했다. 원래 못생긴 용안(왕의
얼굴)도 잘생겼다는 의미를 붙여주지만 이번 왕은 그저 미려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곤 했다. 앳되어 보이는 모습이 잘생긴 외모와 더불어 조화를 이뤄, 그 모습에서 거역할 수
없는 고귀함으로 사람을 압도했다.
“하문하시옵소서. 천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것이옵니까?”
“상왕(죽은 전 왕)의 실록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내관들과 사관들이 모두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꺼번에 합창하듯 말했다.
“아니 되옵니다. 상감마마!”
우사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역대 상대왕의 실록을 금상(현직 왕)께오서 보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경국대전에도 법으로 명시되어 있사옵니다. 그리고 이제 겨우 초초(初草,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작성한 원고)가 완성되었다 들었사옵니다.”
“난 초초나마 보길 원한다. 아니면 그 당시 기록해둔 사초라도.”
“상감마마, 폐위 연산군의 무오사화를 유념하시오소서. 그 또한 사초의 유출로 인한 비극이었사옵니다.”
“내가 전체를 보길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극히 일부만이다.”
“그것이 글자 하나라고 하여도 아니 되옵니다.”
우사관은 왜 하필 좌사관이 아니라 자기한테 와서 이러는지 원망스러웠다. 이 와중에도
좌사관은 왕이 상왕실록이나 사초를 보여 달라고 조르는 사실을 자신의 사초에 적고 있었다.
“내가 나의 아바마마께서 처리하신 일들을 배우고자 하는 부분이 있어서 이러는 것인데,
그러하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잠자코 사초를 적고 있던 좌사관이 우사관을 돕고자 말을 꺼냈다.
“그러하오시면 승정원일기를 열람하시오소서. 승정원일기에는 실록보다 더 방대한 공문서
처리 기록이 있사옵니다. 비록 신하들은 열람할 수없는 기밀이나 상감마마께오서는 자유로이
열람하실 수 있사옵니다.”
훤도 승정원일기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훤이 알고자 하는 것은 세자빈 간택 당시, 왕이
처리한 공문서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전체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연우가 죽고 난 뒤에 왕이
어떠한 사람들을 만났는가에 대한 것도 알고 싶었다. 어차피 사관들 귀를 피해 몰래 대화를 주고
받았을 것이니 그 내용까지 알게 될 거란 기대 같은 건 없었다. 연우의 죽음을 즈음하여 왕이
어떠한 사람들과 접촉했는지 그들의 행보는 어떠했는지 이것이 궁금했다. 이런 사실은
승정원일기에는 없는 것이었다. 훤은 더 이상 사관들을 조르지 않았다. 이들은 사초를 내놓느니
차라리 자신들의 목을 내놓을 사람들이었다.
“내 너를 시험한 것이었다. 앞으로 누가 사초를 보여 달라 하거든 나에게 한 이렇게 행하라.”
훤은 조반을 들기 위해 강령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침밥을 먹고 난 뒤에 강령전에 앉아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했다. 그 당시 기억을 애써 더듬어냈지만 뾰족하게 이상한 것은 없었다.
그러던 중에 딱 하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불분명했다.
“암기반 요원(내관들 중에 특별히 뛰어난 암기력을 가진 인물 두 명을 선발하여 각종 부문을
두루 암기하게 했다가 왕이 필요할 때 마다 그때그때 대답하던 내관)을 들라 해라.”
암기반 요원 두 명이 왕 가까이로 다가와 앉았다. 훤은 심각하게 물었다.
“내 기억으로는 이전 관상감의 세 명의 교수들이 한꺼번에 사약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게 언제였느냐? 세자빈 간택이 있고 난 이후였느냐?”
“네. 삼간택이 끝나고,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죽은 허씨 처녀의 짧은 사주를 미리 알지
못했다는 죄를 물어, 허씨 처녀가 죽고 난 바로 다음날 세 교수도 사약을 청해 자결하였습니다.”
“잠깐! 사약을 청하였다고? 상왕께오서 사약을 내린 것이 아니라?”
“이 천신의 기억으로는 그리 되어 있사온데 자세한 것은 이 몸의 머릿속에 기억되지 않았사옵니다.”
훤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 당시의 관상감의 세 교수는 처녀단자로 올라온 모든 처녀의
사주를 보았을 것이다. 그중 좋은 사주 또한 그들만 알고 있었을 것이고, 명과학교수는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던 연우의 사주를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리 가까운 시일 내에 덧없이 가버릴
여인의 사주를 그가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걸 몰랐기에 사약을 청했다? 훤은 의문이 더 커졌다.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청해 사약을 받는다고 해도 의금부에서 심사하고 판결을 하려면 많은
시일이 걸린다. 왕이 사약을 명해도 바로 다음날 형이 집행되지는 못한다. 너무 빨리 사약이
내려졌다. 이는 빨리 그들의 입을 봉해야 할 무언가가 있었다는 뜻이 분명했다. 세자빈 간택에
참여했던 관상감의 교수 세 명은 죽고 없다. 연우의 병을 진맥했던 어의도 죽고 없다. 아마도
이 모든 일을 알고 있었을 것 같은 왕도 죽고 없다. 연우에게 약을 준 전 홍문관 대제학도 연우가
죽고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고 없다. 그렇다고 아무나 잡고 물어보아선 안 되는
것이었다. 훤은 언제나의 버릇으로 운을 찾았다. 하지만 운은 조계가 시작되기 전에 쉬러 가고
없었다. 훤은 눈썹 사이에 진한 내천 자를 그리며 말했다.
“상선!”
“네,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하교하시오소서.”
“그 당시의 승정원일기를 가져오너라. 그리고 그 이전과 이후도 아무렇게나 뽑아 오너라.
그때만 가져오면 혹여 이상히 여기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윤음(임금의 말씀)의 뜻을 헤아렸나이다. 승지(승정원 관리)에게 전할 밀지를 내려주시옵소서.”
훤이 조강과 윤대(당상관이하의 실무관리들의 보고를 받는 회의)를 마치고 주수라(점심식사)를
먹으러 다시 강녕전으로 오자 그제야 내관들이 승정원일기를 찾아서 가져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양이 엄청나게 많았다. 낮 짬짬이 그리고 밤에 짧은 시간을 투자하여 그 당시 두 달간의
문서들을 확인하려니 여간해선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훤은 다른 사람 손에 맡기지 않고
서류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확인해 들어갔다. 하루 종일의 가뿐함 때문에 훤은 밤만 되면 먼저
차를 청해서 마시고 잠에 들었다. 차 때문에 깊은 잠을 자게 되는 것인데 그 차의 효능이 건강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날은 지났다. 그리고 달은 점점 더 둥글어져 훤과 중전의
합궁일이 되고 말았다.
불완전한 보름달이 뜨자 훤은 목욕을 마치고 하얀 야장의를 입었다. 그리고 하얀 두루마기를
걸치고 강녕전 뜰에 섰다. 머리엔 아무 것도 쓰지 않고 그저 황금 상투관에 황금 첨(상투비녀)을
꽂은 것이 전부였다. 교태전으로 가는 것이 싫은 마음에 괜히 뜰을 몇 바퀴 거닐며 서성거렸다.
어젯밤 차는 마시지 말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러면 오늘 잘하면 몸이 안 좋아졌을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만약에 오늘의 합방에서 중전이 회임을 하게 된다면, 그것이
또한 왕자라면 파평부원군의 위세는 더욱 심해질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이유때문만이 아니더라도
훤은 중전과 합방하는 것이 싫었다. 평소엔 또 괜찮다가 이렇게 합궁일만 되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역한 감정이 생겨났다. 파평부원군이 싫은 것과는 뭔가가 다른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중전을 미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무작정 드는 거부감이었다.
입태시가 가까워져 가자 옆의 내관들이 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훤은 하는 수 없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교태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 걸음은 옆에서 보는 이들의 눈에도 더 없이 무거워
보였다. 훤은 오늘따라 날씨조차 좋은 하늘의 달로 원망하는 눈길을 띄워 올린 후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양의문(兩儀門)으로 긴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 들어갔다. 운은 거기 까지였다.
내관과 궁녀는 따라 들어갈 수 있어도 남자인 운검은 양의문 앞까지만 왕을 호위할 수 있었다.
운은 몸을 돌려 강녕전을 호위하기 위해 돌아왔다. 돌아와 강녕전 앞에 서니 멀리서 월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관상감에서 지정해둔 오늘의 왕의 방을 홀로 지켜 왕의 액을 누르며, 무사히
합방이 이뤄지길 기도하기 위해서였다. 남아있던 내관 한명이 월을 강녕전 안으로 안내했다.
월이 왕의 이불이 깔린 방에 자리 잡고 앉자 내관은 어디론가 가버렸다. 강녕전 일대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왠지 월과 운뿐인 것 같았다. 운은 방 밖의 창 앞에 서 있다가, 안에 앉은 월의
모습이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창을 열었다. 고요히 열리는 창에도 월의 움직임은
없었다. 언제나 옆모습만 보이던 월의 얼굴이 운 앞에 정면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번엔 운이
월을 정면으로 볼 수 없었다. 무표정한 월의 표정에 마음이 아릿해져 그만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다른 여인과 합방하러 간 왕을 위해 앉아 있는 월의 마음이 운에게 고스란히 넘어오고
있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그것에 힘을 빌어 운은 처음으로 월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괜찮소?”
“무엇이 말이옵니까?”
운의 숨이 턱하니 막혔다. 목소리를 들었다. 감정 없는 목소리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무엇이 괜찮은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하는데 차마 입에 말을 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슬쩍 말을 돌렸다.
“건강 말이오.”
“네.”
대화가 끊어졌다. 운은 그 순간도 아까워 다시 말을 이었다.
“상감마마께옵서 그대를 많이 찾으시었소.”
그리고 그 뒤의 말, 만 리 길을 찾아다닌 이가 자신이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월은 아무 말 없이 있었다. 작은 고개 짓도 없었다.
“한 달 간만 궐내에 있을 거라 들었소. 내일까지요?”
“오늘밤이 마지막이옵니다. 내일 새벽에 길을 떠날 것이옵니다.”
별운검을 잡은 운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눈길을 다시 월에게로 돌렸다. 오늘밤만
지나면 못 볼 얼굴이라 생각하니 안 볼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가오? 그때 만났던 곳?”
“아니옵니다. 그곳은 그때 결계가 깨어져 상감마마와 나으리가 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그곳을 비운 것입니다. 이제 나가면 다시 결계를 묶어 어느 누구의 발길도 들 수 없는 곳으로
갈 것이옵니다. 그곳이 어디인지 소녀도 모르옵니다.”
“괜찮소?”
“또 무엇이 말이옵니까?”
운은 고개를 들어 완전히 둥글게 차오르지 못한 달을 보았다. 내일 밤이면 완전히 둥근 달이
이곳을 비출 것이다. 그리고 그 달빛 아래에는 더 이상 월의 모습은 없을 것이었다.
“무엇이든.”
“네. 그 무엇이든 소녀는 괜찮사옵니다.”
운은 달에서 눈길을 가져와 자신의 발아래만 보았다. 옆의 달도 또 옆의 월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우두커니 서 달이 월에게 보내는 달빛을 막고, 월이 달로 보내는 설움을 막았다.
운의 그림자가 월의 손등을 어루만지고, 가슴을 쓸고 올라가 입술에 내려앉았다가, 양쪽 볼을
감싸 쥐었다가, 차마 흘러나오지 못하는 눈물을 닦아주다가, 월의 가녀린 몸 전체를 감싸
안았다. 오직 키 큰 운의 긴 그림자만이······.
교태전에 든 훤은 여전히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앞에 다소곳하게 고개 숙이고 앉은 중전의
옷고름에 손이 가지지가 않았다. 힘껏 손을 뻗었지만 중전이 움찔하는 바람에 옷고름에 손이
다다르기도 전에 다시 얼른 거둬와 버렸다. 그렇게 앉아만 있는 훤의 하얀 야장의에 창문을
뚫고 들어온 달빛이 서럽게 적셔졌다가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훤의 주위로 흘러내린
달빛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훤의 마음도 그 속에 같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 순간 훤은
자신이 인간임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왕이란 존재만 되어
원자를 보기 위해 눈 감고 중전을 품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눈앞의 중전은 분명 예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어느새 입태시가 다 되었는지 교태전 뜰에서 시간을
알리는, 그리고 빨리 합하기를 몰아붙이는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양기를 북돋워 왕자를
보게 하기 위한 북소리(북의 재질인 나무와 가죽은 양으로 분류. 음인 쇠 소리는 절대 들리면
안 됨)이기도 했다. 그 둥둥거리는 소리에 훤의 심장도 같이 뛰기 시작했다.
이때 소격서의 제당에 혜각도사가 앉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홀로 비밀기도를 하던 혜각도사는 희미하게 교태전 쪽에서 들려오는 북소리가 들리자 하얀
종이 위에 파란 물감으로 알 수 없는 문자를 적어 내려갔다. 그 물감이 다 마르기도 전에 촛불에
불을 붙였다. 종이가 혜각도사의 손 위에서 활활 타오르자 그 불길을 손 안에 확 거머쥐었다.
혜각도사의 눈빛이 무섭게 빛나던 그 순간, 교태전에서 입태를 재촉 받고 있던 훤이 갑자기
자신의 심장을 거머쥐고 방바닥에 쓰러졌다.
“헉! 헉! 누, 누가. 누가 좀!”
중전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황한 중전이 바깥에 소리를 쳤다.
“밖에 누가 있느냐? 누가 좀 도와다오!”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방안의 분위기에 내전상궁이 먼저 듣고 달려왔다.
“중전마마, 무슨 일이시옵니까?”
“마마께옵서 갑자기 쓰러지셨다. 어서!”
“들어가도 되는 것이옵니까?”
“야장의 그대로시다!”
그제야 궁녀들과 내관이 급하게 들어와 왕을 살폈다. 훤은 새하얀 안색에 입술까지 새파랗게 된
상태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숨 쉬는 것조차 괴로운지 거의 컥컥 거리는 숨을
헐떡이자 상선내관까지 새파랗게 질려 급한 마음에 훤을 들쳐 업었다. 어의를 교태전으로
부르면 갖춰야할게 많았기에 차라리 강녕전으로 왕을 업고 가는 것이 빨랐다. 그곳으로
내의관들을 불러오라 명하고 강녕전으로 갔다. 나무 놀란 나머지 상선내관은 없던 힘도 불끈
생겼는지 훤을 거뜬히 업고 날듯이 뛰었다. 그에 앞서 이미 내관 하나가 강녕전으로 달려와
월을 대피시켰다. 월은 원인도 모르고 연생전으로 급히 대피했다. 운도 놀라 교태전 쪽으로
달려가니 이미 훤은 내관의 등에 업혀 침전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강녕전 이불에 내려진 훤은
이제껏 괴롭던 것이 거짓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입술에 붉은 빛깔도 되돌아왔다.
운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시옵니까!”
상선내관은 훤의 몸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고 대신 옆의 다른 내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이때 방으로 내의관이 아니라 관상감 세 교수가 헐레벌떡 나타났다.
“상감마마께옵선 어떠시옵니까?”
상선내관이 더욱 새파랗게 질려 물었다.
“교수들이 여긴 어떻게? 설마 단순한 어환(御患, 왕의 병)이 아니시오?”
명과학교수가 답하기도 전에 어의가 들어왔다. 미처 진맥을 하기도 전에 훤이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난 아무렇지도 않다. 다들 놀란 마음을 가라앉혀라.”
“하오나 조금 전까지는.”
“그래, 당장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말끔히 괜찮아지다니 이해할 수가 없구나.
아! 절대 꾀병은 아니었느니.”
합궁일만 되면 이리저리 핑계를 대던 전과가 있었기에 훤은 미리 선수를 쳤다. 상선내관은
여전히 놀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그 염려하는 마음이 울컥하는 목소리로 튀어나왔다.
“그리 식은땀을 흘리는 꾀병도 있다하더이까! 구순(口脣, 왕의 입술)에 혈이 말랐는가 하였습니다!”
“상선, 날 꾸짖는 것인가. 다들 이러면 내가 미안해지지 않는가. 그만들 하게. 그런데 지금까지
여기에 누가 있었나?”
훤은 물음을 던지며 운을 보았다. 운은 속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놀랐지만 겉모습만큼은 아무
표정 변화 없이 고개만 숙였다. 입이 무거운 운 대신 내관이 대답했다.
“내인(궁녀)이었습니다. 상감마마의 어침기수(왕이 잠자는 이불)를 살피느라······.”
훤은 내관이 더듬거리며 말하는 내내 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의가 말했다.
“어환을 살피겠사옵니다.”
훤은 어의가 다가와 앉자 진맥할 수 있도록 팔만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은
운에게서 거두지 않았다. 운은 훤의 눈길을 느끼면서도 입만 꾹 다물고 가만히 고개 숙이고
있었다. 주위내관들은 운의 이상함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지만 훤만은 운이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의가 진맥을 한 후에 안심하여 미소를 보이자 내관과 궁녀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상선내관은 맥이 풀렸는지 어깨가 축 쳐졌다. 어떻게 훤을 업고 여기까지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훤이 웃으며 말했다.
“나보다 상선이 더 걱정이다. 내의원에서 상선에게 청심환을 내어주도록 하라.”
“지금 상황에서 어찌 천신의 몸을 걱정하시옵니까? 조금 전은 어떻게 된 일인지 부터 살피셔야
하옵니다. 어의, 어떻소?”
어의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바닥에 납작하게 숙이고 있는 관상감의 세 교수들을 보았다.
그와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이번일도 내의원 문제가 아니라 관상감의
문제였다. 명과학교수가 두려움에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어떻게 날아온 것인지 모르겠사오나, 북소리가 울릴 즈음에 살(殺)이······.”
“살이라니! 그 무슨 무서운 말입니까?”
어의가 깜짝 놀라 소리치자 명과학교수가 바들바들 떨며 다시 말했다.
“그것이······, 잘 모르겠사옵니다. 이 천신을 죽여.”
“죽여 달란 소리 지겹다. 그 말은 치우고 우선 살이 확실한 것인지 말하라.”
훤이 짜증스럽게 말을 자르고 들어와 묻자 명과학교수는 더욱 떨면서 말했다.
“그, 그것도 잘······.”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살이랬다가 또 잘 모르겠다고 했다가 도대체 뭐란 말이냐?”
훤이 화를 버럭 내자 이번엔 지리학교수가 말했다.
“아뢰옵기 두렵사오나 분명 상감마마의 옥체를 겨냥한 살이 날아온 것은 분명하옵니다.”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왕의 몸에 살을 보냈다는 것은 분명한 역모였다.
지리학교수가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그 살이 치명적인 것이 아니오라 일시적이기만 한 것이어서······. 게다가 이제까지의
어환을 일으킨 것과는 또 달라서······.”
“도대체 지금 그대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것인가? 이 무슨 해괴한 말들인가!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훤의 물음에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엎드렸다. 알 수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손에 잡히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관상감에서 불출주야로 이 일을 알아볼 것이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면 녹봉을 받으면서 아무 일도 안 하려고 하였단 말인가. 당장 물러가
이 일을 조사하거라.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승지나 내관을 거치지 않고 바로 나에게 보고하도록
하라.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해야 할 것이야!”
교수들은 떨리는 발걸음으로 겨우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액받이무녀가 어디 있는지 물어
월이 있는 연생전으로 주위를 살피며 들어갔다. 월이 그림처럼 아무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천문학교수가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느냐?”
“네, 대체 무슨 일이옵니까?”
“넌 몰라도 된다. 이대로 숨어 있다가 상감마마께옵서 침수에 드시면 옆을 지키거라.”
“네.”
세 교수는 조심스럽게 연생전을 빠져나와 밖으로 나갔다. 뜰을 걸어가던 중에 갑자기
명과학교수가 놀란 눈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두 교수도 같이 걸음을 멈췄다.
“뭔가를 알아낸 것이오?”
“아니, 그게 아니라······. 방금 무녀. 이상하지 않소?”
“무엇이, 아!”
세 교수가 일제히 같은 표정이 되었다. 명과학교수가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들릴 듯 말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액받이무녀가 어찌 상감마마의 옥체에 이상이 있었음을 모를 수가 있소? 도리어 우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다니. 그 말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른다는 뜻이 아니오.
우리보다 액받이무녀의 몸이 먼저 느껴야 하는 것이 아니오?”
“하지만 액받이무녀인 것은 확실한 것 아니오? 한 달 동안 상감마마의 옥체가 그리도
좋아지셨으니. 순식간에 스친 살이라 액받이무녀가 못 느낀 것일 수도 있소.”
“하지만······, 저 무녀에게선 일반 무녀들이 보이는 신기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소. 계속 요상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신기가 없는 무녀도 있답디까? 저래뵈도 그 장씨도무녀의 신딸이오. 우스개 소리 그만하고
소격서로 가봅시다. 혜각도사께 자문을 요청해야 할 것 같소.”
소격서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의구심은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살이 날아온 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기에 머릿속은 오늘일로 다시 채워져 두려움이 덮였다. 천문학교수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런 살에 관한 문제는 성숙청의 장씨도무녀란 사람이면 더 잘 알아낼 수 있을 텐데.”
그 말을 옆에 있던 지리학교수가 듣고 말했다.
“궐에 있었다면 그 누구도 감히 살을 날릴 엄두도 못 내었겠지요. 이제 그만 궐로 들어와 주면
좋을 텐데. 저리 허수아비 같은 대리 도무녀는 아무 일도 못하는데, 휴!”
“장씨도무녀가 성숙청을 비운지 7년이나 되었는데 아직 그녀를 대신할 무녀가 없다니, 쯧쯧.
하긴 다른 무녀들의 신력이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장씨도무녀의 신력이 너무나도 높은 탓이지······.”
그들이 침전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훤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걱정되어 자리를 뜨지
않았다. 훤이 아무렇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만 다들 자기 자리로 가거라. 모두 이 방에서 나와 같이 자려는 것은 아니겠지?”
오늘의 침소는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 버렸고 또 걱정된 마음이 많았기에 다들 방에서만
물러나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훤이 있는 방 주위를 에워싸고 앉았다. 모두 눈에서
사라지고 내관 세 명과 상궁 세 명, 그리고 운검만 남았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훤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자기마저 난리피우다간 일이 일파만파로 퍼질 것 같아 가만있었지만, 자신에게
살을 날린 것은 그 누구가 어떤 목적이든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훤은 다시 한 번 운의 표정을
살폈다.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신의 옆에 앉아 있었다. 모두가 넋이 나가 느끼지 못한 열린
창문이 훤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하늘의 달도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재빨리 달에게서
눈길을 거둬 반대편을 보았다. 방금 전의 왁자지껄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귓속이 울릴 정도로
적막했다. 그 적막함 속에 훤이 작은 진동을 일으켰다.
“운아!”
“네!”
“달을 보지 않으려 등을 돌려 앉았더니 외로운 내 그림자만이 덩그러니 보이는구나. 그동안
그림자의 옅어짐에 달빛 옅어짐을 알았고, 그림자의 짙어짐에 달빛 짙어짐도 알아왔느니.”
운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월에 대해 침묵하고 있던 왕이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었다. 이제 말할 틈이 생겼다. 그리고 이대로 오늘을 마지막으로 월을 보낼 수가 없었다.
이 이후의 사태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이 순간만큼은 둘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아니, 둘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기 보다는 월을 궐에 묶어둘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왕이었기에,
자신의 눈앞에 계속 월이 보이도록 잡아 달라 하고 싶었다. 스스로에게조차 치졸하여 외면하고
싶은 그런 부끄러운 마음이었다. 그렇지만 입 밖으로 말을 꺼내기엔 주위에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방 밖을 둘러있는 보이지 않는 눈과 귀가 있었다. 운이 무거운 입을 가까스로
열었다.
“하얀 해가 서쪽 언덕 위로 잠기니, 동쪽 봉우리 위로 하얀 달이 떠오네, 달빛이 아득하니
만 리를 비추니, 밝은 빛만이 허공중에 흩어져 내리네.”(도연명의 <잡시2>中)
훤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운을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해져 운을
보았다. 운은 무표정하게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 시를 통해 말하는 뜻을 훤이
알아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훤은 한참동안 동그란 눈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운아! 너 나를 웃기고자 함인가? 어째 네 입에서 제법 긴 말이 나온다 했더니 그 시의 뒷부분도
마저 읊기에 길더냐? 아니면 갑자기 내 앞에서 네 시문 외우는 실력을 자랑하고자 했는데
그 뒷부분이 기억 안 난 게냐? 내가 이리 보여도 시책은 제법 읽었느니. 도연명의 시 또한 내가
즐기는 것 중에 하나가 아닌가. 하하하. 내가 그 뒤를 이어볼까?”
훤은 운이 뭐라고 말하려고 하자, 먼저 그 시의 뒤를 이어 읊었다. 그리고 시선은 운에게서
하늘의 달로 바꾸었다.
“방문 틈 사이로 찬바람 스며들어, 한밤중 잠자리 베개머리 싸늘하네. 날씨 변한 것에 계절
바뀜을 알고, 오지 않는 잠에 밤 깊음을 알겠네. 말하고 싶어도 대답할 사람 없어, 외로운
그림자에게나 잔을 권하네. 해와 달은 사람을 버려두고 가고, 뜻은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였으니,
가슴 깊이 서글프고 처량한 생각에, 밤새워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였네.”
훤은 따뜻한 눈길로 다시 운을 보았다. 그리고 팔꿈치로 운의 가슴팍을 쿡쿡 찌르며 장난스런
표정과 말투로 말했다.
“운아. 내 마음을 알아주는 벗 하나 갖는 것이 나의 소실 적 부터의 소원이었다. 요즈음의 나의
마음을 표현한 시를 네가 먼저 내게 말하여 주다니. 이는 곧 내 마음을 알아주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내 여러 일들로 바빠 외로운 내 그림자 하나 돌볼 여가가 없었는데······. 하하하!”
“상감마마, 그.”
운이 그것이 아니란 말을 하고 싶어 입을 열려고 하는데 훤이 갑자기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하는
바람에 말이 잘려버렸다. 모두가 놀라 훤에게 다가오려 하자 훤은 손으로 입을 막고는 겨우 말했다.
“아니다. 내 운 때문에 웃다가 침을 잘못 삼켜 사래든 것뿐이다. 콜록콜록! 수긴(수건) 좀. 콜록콜록!”
상궁이 훤의 입에 수건을 가져가 대려고 하자 훤은 그 수건을 낚아 채 손수 입을 틀어막았다.
“콜록콜록!”
“상감마마, 어의를 불러오리이까?”
“사래든 것뿐이다. 그것보다 어서 차를 안 가져오고 뭘 하느냐? 오늘은 아니 가져오는 게냐?
어서 잠자리에 들고 싶구나.”
“네, 곧 가져 올 것이옵니다.”
훤의 기침이 다행히 멈춘 것 같아 안심했다. 차를 마시고 자면서부터 하루가 거뜬했기에 언제나
훤이 차를 먼저 청하곤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다음날의 많은 공무가 걱정된 모양인지 빨리
차를 마시고 자고 싶은 모양이었다. 국화향이 가득한 차가 훤의 손으로 건네졌다. 운이 급한
마음에 대뜸 말을 던졌다.
“차향이 짙사옵니다.”
이번에도 훤은 동그랗게 뜬 눈만 운에게 던지며 말했다.
“나에겐 딱 맞구나. 갑자기 웬 차향 타령이냐?”
운은 훤의 손에 든 차를 빼앗아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훤에게 차를
마시게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오늘을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란 이젠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훤의 입안에 순식간에 쏟아지듯 들어가는 차를 막기엔 늦어버리고 말았다. 운은 훤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차를 덧없이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야속한 국화향만이 온 방에 가득
차오름을 무너지는 가슴이 느껴야했다. 차를 다 마신 훤은 다시 기침이 나왔는지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상선내관이 걱정되어 물었다.
“정말 괜찮으신 것입니까?”
“어. 이번엔 급히 차를 마시고 나니 목이 컬컬해서 기침이 나온 것이니라. 내 이만 자겠노라.
놀랐더니 몸이 많이 피곤해서.”
훤은 그대로 이불 속에 들어가 누웠다. 그리고 이내 잠에 빠진 듯 했다. 훤이 잠에 빠진 것을
확인 한 사람들은 각자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다. 운도 방문 앞에 자리를 지켰다. 마지막
절망까지 완전히 자리했다. 이젠 운도 더 이상 어찌해볼 수 없었다. 훤이 잠들었다는 것을
궁녀 하나가 알렸는지 월이 드디어 마지막 날을 훤과 함께 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다른 날과 같이 훤의 잠든 옆에 앉았다. 그렇게 앉아 어느새 누군가가 닫아버린 창을
보았다. 그리고 그 너머에 떠있는 보이지 않는 마지막 달을 보았다. 운도 마지막 월의 옆모습을
보았다. 첫날과 다름없는, 그 표정 그대로였다.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운의 통탄한 심정은 미처 월에게로 꺼내지지 못한 채 그렇게 사그라 들어야 했다. 월의 애통한
그리움도 훤의 감은 두 눈 위에만 그쳐야 했다. 저 눈이 떠져 자신을 볼 일은 없을 것이었다.
단 한 번도 훤의 눈동자를 보지 못하고 가야했다. 다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잠든 훤이 몸을
옆으로 뒤척였다. 그리고는 떠져선 안 되는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월의 눈동자와 훤의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만났다. 그 순간 월의 숨이 멎었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훤의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내 훤의 두 눈꺼풀이 한번 꿈뻑 움직였다.
그제야 놀란 월이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이미 훤의 손이 월의 발목을 잡이 쥔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