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를 품은 달-8화 (8/47)

#8

행복한 마음으로 보슬비를 맞고 있는 훤과는 달리, 훤을 보좌하고 있는 자선당의 모든 사람들은

사색이 되어 각자 자기 위치에서 바삐 움직였다. 세자가 비를 맞아 자칫 감기라도 걸리면

그 책임은 온전히 그들의 몫이 되었다. 제일 먼저 자선당의 동쪽 온돌에 불을 지피고,

대형 가마솥 몇 군데에서 물을 끓였다. 그리고 자선당 내의 북수간에 있는 큰 함지박에 뜨거운

물을 붓고 인삼을 짓이겨 끓인 물을 섞었다. 차차 비가 그치자 훤은 죽통화분으로 다가갔다.

두 손으로 감싸듯 들고 한참을 보던 훤은 환한 미소로 흙냄새를 맡아보았다.

상선내관이 다가와 말했다.

“마마, 어서 안으로 드시옵소서. 감모(感冒, 감기)에 드실까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행복한 자에게 찾아오는 병도 있다더냐?”

“마마, 아무리 먼지잼(조금 오다가 그치는 비)이라고 하나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훤은 행복한 마음이었기에 더 이상 버티지 않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알았다. 내가 젖었으니 상경내관이 비현각 안에 둔 서찰을 정중히 하여 나를 따르라.”

훤은 손수 죽통화분을 들고 자선당으로 갔다. 북수간에 들어서서 상경내관에게 화분을 건넨 뒤,

옷을 벗기는 시중을 받았다. 흰 적삼차림이 되자 이제껏 궁녀들이 옆에서 시중드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내관 서너 명만 두고 다 물러가라

명했다. 그리고 목욕은 왕과 왕비를 제외하고 세자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유모가 시켜주어야 하지만, 훤은 이 또한 물러가라 명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내관 몇 명만이

훤의 목욕시중을 들게 되었다. 훤은 망건과 상투를 풀고 함지박 안으로 들어가 몸을 푹 담갔다.

물에서 진한 인삼향이 올라왔다. 훤은 함지박 안에서도 상경내관이 든 죽통화분과 그 품에 든

서찰만 신경을 썼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시에 대한 답을 시로 받았으니, 이젠 개인 안부를

물어 봐도 될 것만 같았다. 훤은 물속에서 참방거리며 건네 볼 문구에 대해 고민했고, 아주 좋은

핑계거리가 오늘 받은 죽통화분이면 충분하리란 확신이 섰다. 빨리 편지를 쓰고픈 마음에 얼른

목욕을 마치고 동쪽 온돌방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내관들이 서안을 내쫓고 두꺼운 이불을

훤에게 덮어 씌웠다.

“서안을 가져와라! 내 쌍리(雙鯉, 개인적인 편지)를 써야 하느니라.”

“잠시만이라도 기수(이불)아래에 거하시옵소서. 부디 소인을 봐서라도.”

“난 건강하지 않느냐. 이제껏 감모는 고사하고라도 그 흔한 배앓이 한번 하지 않았는데 이리

수선을 피우다니.”

“가벼운 것은 무거이 보라하고 무거운 것은 가벼이 보라 하였습니다. 그중 건강이란 것은

아무리 무거이 보아도 넘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상선내관의 진심어린 간청에 훤은 비록 뽀로통한 표정이긴 했지만 얌전히 이불 속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팔을 쏙 빼서 연우에게서 온 서찰을 달라고 명했다. 상경내관이

품속에 소중히 품고 있던 서찰을 내 놓았다. 훤은 엎드린 채 서찰을 받더니 이내 인상을 썼다.

연우의 그 소중한 난향을 상경내관의 내음으로 지워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서찰을 펼쳐 연우의 시를 읽었다. 다시 웃음만 입가에 배시시 베어 나왔다. 서찰을 접어 봉투에

반쯤 넣다가 다시 꺼내 펼쳐 보기를 몇 차례 거치다가,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서안을 가져오너라. 내 쌍리는 적어두고 쉴 것이니라.”

상선내관도 포기하고 서안을 들고 오게 했다. 하지만 막상 서안에 앉아 붓을 드니 연우의

서체가 눈에 자꾸만 밟혔다. 자신이 쓴 모든 글씨가 다 어설프고 품격이 없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쓰다만 종이를 몇 장 구겨버린 뒤 침울하게 서안을 밀치고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왜 그러시옵니까? 제게 연유를 들려주시옵소서.”

“상선도 보지 않았느냐. 연우낭자의 서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 것은 너무나 보잘 것 없어

속상하다. 문학의 서체 또한 그 고귀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데, 자신의 오라비와 내가 얼마나

비교되겠느냐. 먼저 보낸 내 봉서를 다시 가져오라 명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면 차후 더 나아지면 될 일이옵니다. 서체란 연습으로 갈고 다듬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니

옵니까. 혹여 뛰어난 서예가를 스승으로 두는 것은 어떠하겠사옵니까?”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내 서체 연습에 게으름을

피우진 않았을 터인데.······지금당장 서예가 한명을 물색하여 데려오너라. 내 열심히 배울 것이다.”

즉시 초빙해온 서예가를 스승으로 모신 훤은 며칠 동안 자신의 서체를 다듬느라 두문불출했다.

그리고 좀 더 나아진 뒤에 연우에게 보내기 위해 서찰은 미뤘다. 그러면서 죽통화분은 정성껏

관리했다. 언제나 햇빛이 가장 잘 드는 곳에 두었고 만에 하나 화분에 그늘이 들면 주위에

호통이 내려졌다. 훤은 화분에서 예쁜 꽃이 피어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 꽃이

피어날 때쯤 자신의 서체도 피어나 아름다운 향기와 더불어 연우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싹이 일주일이 지난 뒤에 돋아나왔다. 그때부터 기다림은 더욱

극진해졌다. 싹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가 자신의 눈독에 싹이 빨리 자라지 못하는 것이란 생각에

화분 쪽을 애써 안 보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연우의 모습은 아끼며

들었고, 연우가 읽는 책을 따라 읽고, 공부하고, 서체 연습까지 하느라 때 아닌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꽃이 피어날 것이란 기대와는 달리 화분의 싹은 잎만이 점점 커지더니 줄기는

나지 않고 잎의 숫자가 점점 불어났다. 훤은 시무룩해져서 화분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아무래도 잘못 키운 것 같구나. 이런 잎을 가진 꽃도 있던가?”

옆의 상선내관이 훤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고는 화분의 잎을 유심히 보았다. 상선내관도 당연히

꽃일 것이란 선입견을 가지고 보았기에 화분의 잎 모양이 의아스러웠다. 자신의 추측에 스스로

놀란 상선내관이 주위의 다른 내관들을 불러 화분을 보게 했다. 내관 중 한명이 말했다.

“이건 필시 상추인 듯한데······.”

“네, 제 눈에도 분명 상추로 보여서. 꽃이 아니라······.”

내관들의 말에 훤은 놀란 눈으로 잎사귀를 뚫어지게 보았다.

“이것이 상추가 확실하냐?”

“네, 분명 상추 잎이옵니다.”

“뭔가가 잘못된 것인가? 어찌 상추가 나온단 말이냐?”

상선이 빙그레 웃으며 훤에게 말했다.

“상추를 심었으니 상추가 난 것이겠지요. 그 연유는 이 화분을 보내 준 이에게 직접 물어보셔야

할 듯하옵니다.”

“하지만 뭔가가 잘못되어 상추가 나온 것이라면?”

“자연은 거짓을 행하지 않사옵니다. 화분을 보낸 이가 필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 것이옵니다.”

훤은 더 이상 서체 연습을 하느라 편지를 미룰 수가 없게 되었다. 궁금해서라도 이 이유를

물어야 했다. 서안에 앉아 정성껏 먹을 갈았다. 먹을 가는 것조차 옆에 있는 내관을 시키기가

싫어서 자신의 손으로 갈았다. 붓을 들고 제일 먼저 인사말부터 적어야 했는데 여기서부터

말문이 막혔다. 감정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인사말을 꺼내는 말의 깊이를 책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고민 끝에 감정을 드러내는 말은 생략하기로 했다.

연우낭자 보시오.

보내주신 화분 안에서 무엇이 나올까 많이 기다렸소. 그 궁금함에 매일을 기다리느라 눈이 빠질

지경이었다오. 그런데 현재 싹이 나와 그 잎이 어느 정도 자랐는데, 다들 꽃이 아니라 상추라

하니 어찌 된 연유인지 묻고 싶소.

훤은 마지막 보내는 이에 무슨 이름을 쓸 것인지에 대해 또 고민했다. 세자라 쓰기도 싫었고

일성대군이라 쓰기도 싫었다. 연우 앞에서는 그저 한 사람이고 싶은 마음만이 절실했다. 그래서

편지 끝에 ‘이 훤’이라고 적었다. 태양이 되라는 뜻으로 왕이 날일 변을 명하고, 그 명에 따라

관상감에서 성명학을 토대로 세자의 사주에 맞는 날일 변이 들어가는 한자 세 개를 올려,

그중 왕이 하나를 낙점하여 받은 이름 훤. 누구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 아버지와 어머니조차

불러주지 않는 이름, 그러나 단하나 자신의 이름임이 분명한 훤을 적었다. 이렇게 짧은 글을

쓰는 데에만도 하룻밤과 그 다음 날 낮을 꼬박 투자하였다. 문제는 염이란 거대한 산이었다.

석강을 마치고 어렵사리 내밀은 봉서에 염의 눈길은 아예 지나가지도 않았다. 급히 책을 챙겨

일어나는 염의 옆을 막은 건 훤을 옆에서 지켜보며 같이 그 화분에 궁금함을 가진 세자익위사

(세자 경호기관) 관원들과 내관들이었다. 상선내관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문학, 봉서를 가져가 주십시오.”

“아니 될 일입니다!”

“이건 세자저하만의 서찰이 아니라 죽통화분에서 상추가 난 것을 본 모든 이의 궁금함을 담은

서찰이옵니다. 그러니 이에 대한 답은 그 화분을 보내신 분이 직접 들려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그 이유를 문학께서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염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건 염도 모르는 의문이었다.

“단지, ······제 누이의 방 앞 화단에도 죽통화분에 난 것과 똑 같은 상추가 있는 것으로 봐서

별 뜻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만 관심을 접으심이······.”

염의 눈치만 살피던 훤이 조용히 사정하듯이 말했다.

“가져가 다오. 아무 이유가 없다는 짧은 글이라도 좋으니 받아서 가져와 다오. 문학, 그 화분을

들고 온 사람은 바로 네가 아닌가.”

주위의 사람들도 훤을 거들어 염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또 다시 염은 화분에 대한

답만을 위한 목적으로 봉서를 가져가게 되었다. 하루를 꼬박 숨 막히는 두근거림으로 답장을

기다렸다. 그리고 염이 답장을 훤에게 건넸고 수업 후 훤은 궁금해 하는 모든 눈을 물리치고

혼자서 조용히 봉서를 열었다.

무어라 부를 수 없는 분 보시오소서.

어떠한 것이 올라올까 궁금하여 그리도 기다리셨나이까. 그 기다림이 아무리 길어도 농부가

벼를 수확하기까지 기다리는 마음에 비하겠나이까. 우리 입에 취하는 여러 가지 중에 그중 빨리

자라는 축에 드는 것이 상추이옵니다. 상추는 채소로 취하며, 약재로 취하며, 분명 오래두면

꽃을 보실 수는 있을 것이나 먹지는 못하는 것이 되고 마옵니다. 기다리셨다는 기다림에

몇 배를 곱하면 조선의 백성인 농부의 마음이 되옵니다. 잎이 몇 개가 났사옵니까?

그리고 서찰 끝에 정갈하게 박힌 이름, 허 연우가 쓰여 있었다. 서찰의 길이보다 내용의 깊이에

더 마음이 떨렸고, 그리고 마지막 물음이 그리도 행복할 수가 없었다. 또 다시 봉서를 보낼 수

있는 핑계거리가 확실하게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연우의 질문에 답하겠다는데 염이 뭐라고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흐뭇해하고 있는 훤에게 상선내관이 물었다.

“왜 상추를 심은 것이란 답은 있사옵니까?”

“나에게 농부의 마음을 말하고자 한 모양이다. 내가 기다린 것 보다 더 많은 기다림으로 농부가

기다린다니. 규방의 어린 여인이 어찌 농부의 마음까지 헤아린단 말인가. 헤아린 데서 끝내지

않고 직접 자기 화단에 심어보고 느끼고, 또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주고······. 보통내기가 아니다.”

이 이후부터 훤과 연우가 본격적으로 서찰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미 연우와 훤의 편이 되어버린

주위사람들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이뤄진 일이었다. 짧게 상추에 대한 질문을 주고받던 내용은

어느새 서로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고, 점점 내용의 길이도 길어졌다. 그리하여 사사로운

매일의 자신의 생활을 적어 보내게 까지 되었다. 연우가 먹어보래서 아까워 덜덜 떨리는

기분으로 상추를 먹으면서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쌀 한 톨의 소중함까지 훤은 배워나갔고,

연우에 대한 감정이 호기심에서 설렘으로, 또 더 깊은 마음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렇게 행복한 나날이 계속 되던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어왔다.

갑자기 세자의 혼례를 위한 가례도감(嘉禮都監)이 설치되고 전국에 금혼령(禁婚令)이 내려진

것이다. 훤에게도 이 소식이 바로 들어갔다. 처음 이 소식을 접한 훤은 뛸 듯이 기뻤다. 전국에서

처녀단자를 올린다면 연우 또한 반드시 빠지지 않을 것이고, 연우가 자신의 아내가 될 것이란

부푼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훤은 연우의 처녀단자를 올렸는지에 대한 여부가 궁금하여 염의

석강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석강에 들어온 염의 안색은 너무나 어두웠다. 평소에 평온한

미소를 보이던 염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훤은 자신의 혼례문제에 들떠 그 표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석강이 끝나기가 무섭게 훤은 염에게 신이 나서 물었다.

“연우낭자의 처녀단자는 올렸는가?”

염은 침울한 표정으로 한참을 있다가 겨우 말했다.

“아직······.”

“왜? 홍문관 대제학에게 말해서 어서 올리도록 하여라. 연우낭자는 제외 대상(종실의 딸,

이씨의 딸, 과부와 첩의 딸, 고아는 제외대상)에 들어가지 않으니 반드시 올려야 하지 않느냐?”

염은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잠시 주위를 물러주실 수 없사옵니까?”

훤은 의아했지만 우선 주위의 모든 사람을 물러가라 명했다. 모든 사람이 나가고 단둘이 남게

되자 염은 서안을 밀치고 바닥에 엎드려 간청했다.

“세자저하, 부디 원컨대 소인의 작은 주청을 들어주시옵소서.”

훤은 그간 부탁이란 것은 하지 않던 염이 이렇게 나오자 깜짝 놀라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무엇이냐? 혹여 무슨 문제라고 있는 것이냐?”

“조선의 백성이라면 응당 처녀단자에 이름을 올려야 하는 것이 도리인 줄 알고 있사오나,

우리 연우만큼은 제발, 제발 제하여 주시옵소서. 소인 이렇게 엎드려 비옵니다.”

훤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세자빈 간택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기분이 나빠졌다. 이러한 의견이 연우의 뜻인 건 아닌지 두렵기까지 했다.

“난 연우낭자와 함께 하고 싶다. 그런데 왜 이러는 것이냐. 연유를 말하라.”

“함께 하실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

“내가 아바마마께 긴히 청을 올릴 것이다. 나의 세자빈으로 연우낭자만을 생각하고 있노라

내 말씀드릴 것이다.”

“아니 되실 것이옵니다. 우리 연우를 조금이라도 아끼신다면 부디 처녀단자에서 제하는 것을

상감마마께 주청 드려주시옵소서, 제발.”

“내가 싫다!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물러가라!”

훤은 화가 나서 소리친 뒤 먼저 비현각을 나와 버렸다. 그리고 성난 걸음으로 자선당에 들어가

쪼그리고 앉았다. 옆에 상선내관이 따라와 훤의 노기에 대해 물었다.

“여쭤 봐도 되올련지 모르겠사오나 제게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문학이 무어라 하였기에 이리도

노하셨사옵니까?”

훤은 슬픔과 노여움이 지나쳐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무릎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상선, 신민(臣民)이 나를 아니 좋아하는 겐가? 모두 처녀단자를 올리는 것을 꺼리는 것인가,

아니면 연우낭자가 나를 싫어하는 것인가?”

“만에 하나 연우아기씨가 세자저하를 싫어한다면 그간의 서찰을 보낼 턱이 없지 않겠사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문학은 내게 연우낭자의 처녀단자를 빼 달라 청을 하는 것인가.

내가 연우낭자와 함께 할 수 없을 것이란 건 또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아무리 생각해도

문학이 나를 탐탁찮게 여기는 것이어니.”

상선내관은 침울하게 웅크리고 있는 세자에게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망설였다. 그간 주고

받는 서찰을 꾸준히 보아오던 상선이었다. 그러기에 연우의 성품에 내심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상선내관은 심호흡을 하고 훤에게 조용히 말했다.

“마마, 이런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문학은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옵니다.”

“그럼? 상선은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인가?”

“비록 처녀단자를 올리라고 하여 세자빈을 간택하는 것이 법도이긴 하지만, 이미 세자빈으로

한사람을 내정해 두고 이러한 절차를 밟기 때문에······.”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훤의 얼굴이 번쩍 들려졌다. 그리고 눈으로 급하게 그 뒷말을

재촉했다. 상선이 애통한 심정으로 말했다.

“이번 간택령만이 아니라 이제껏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처녀단자를 올리는

것을 꺼리는 것이옵니다. 초간택에 참여를 하라는 명을 떨어지면 의복이나 가마의 형식을

갖추는데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거니와, 만에 하나 재간택을 거처 삼간택까지 올라가게

되면······.”

상선내관은 감히 말하기 어려워 한참을 망설였다. 훤이 어서 말하라고 재촉하자 다시 말을 이었다.

“마지막 삼간택의 세 후보에 들어가게 되면 내정자가 분명 세자빈으로 간택 될 것이고, 탈락된

나머지 두 여인은 그 또한 세자저하의 여인이라 하여 평생 홀로 살아야 하는 숙명을 가지게

되옵니다. 흰 소복만을 입어야 하고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틀어 올려 비녀를 꽂는 그런 운명

말이옵니다. 그렇게 한들 내명부 첩지조차 받을 수 없는. 그래서 모두가 처녀단자를 올리기를

꺼리는 것이지 세자저하 때문이 아니옵니다. 문학은 누이를 아끼어 그런 청을 한 것이옵니다.

이미 내정되어 있는 여인이 있기에.”

“그렇다면 탈락한 그 여인들은 궐로 들어올 수는 없는 것인가?”

“간혹 그러한 여인들이 가엾다 하여 후궁으로 들이긴 합니다.”

“아! 혹시 형님(양명군)의 모친도?”

“네, 희빈마노하(마노하:후궁과 세자빈 뒤에 붙이는 칭호. 후궁과 세자빈 뒤에 ‘마마’는 붙일 수

없음)도 삼간택에서 탈락한 것을 상감마마께옵서 가엾다하여 후에 불러들인 것이옵니다. 이는

희빈마노하 외의 다른 한명이 목을 매달고 자결하였기에 상감마마께옵서 아시게 되었던 것이지

대부분이 그대로 잊혀져버립니다.”

가만히 앉아 생각에 빠진 훤의 얼굴은 떼 부리던 소년의 표정에서 어느덧 비범함을 숨긴

눈빛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입술을 비틀며 짧은 말을 내쉬었다.

“할마마마!”

“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이번 세자빈의 내정자는 할마마마의 먼 친척 중 한명일 것이다. 어마마마가 윤씨 일파가

아니니 이번 나의 세자빈 자리만큼은 내어주지 않으려 기를 쓸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번

가례도감을 주관하는 가장 웃어른이 대비, 즉 할마마마시다. 외척세력들에게 이보다 더 절묘한

기회가 어디 있겠느냐. 그런데 이미 내정되어 있다면······, 빌어먹을!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훗날 연우아기씨를 후궁으로 불러들이시면······.”

상선내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훤의 눈빛이 매섭게 상선내관에게로 가 꽂혔다.

“후궁이 정비와 같더냐! 감히 연우낭자를 첩으로 삼으란 말이냐?”

“하오나 방도가 없사오니······.”

“아바마마는 훌륭한 군주이시나 효라는 덜미에 잡혀 있다. 백성을 위하는 것과 모친에게 효를

다해야 하는 모순 속에 갇혀 군주의 덕을 행함에 있어 그 도를 채우지 못 하는 것이 내 눈에도

보인다. 내 비록 지금 잠룡(潛龍, 승천(昇天)의 때를 기다리며 물속에 잠겨 있는 용이라는

뜻으로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사람)의 처지이나 훗날 나의 어버이는 곧 백성이 될 것이다.

자식은 어버이 없이는 없다 하였다. <전국책>에 따르면 백성 없는 왕도 없다 하였다. 그러니

백성의 어버이는 왕이나 왕의 어버이 또한 백성. 난 아바마마를 존경하나 이와는 다른 길을

걸을 것이다! 그러기에 꼭 연우낭자여야만 한다.”

훤의 온몸을 휘감은 황금용이 때를 기다리며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이 상선내관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눈을 빛내며 잠룡의 눈을 하고 있던 훤은 다시 풀 죽은 소년의 모습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내 지금 처지에선 아바마마께 주청 드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게다가 아바마마도 직접 간택에 참여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아는데. 아니 그런가?”

“국왕이 이제껏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간혹 예외라는 것이 있었던 것으로

아옵니다.”

“하지만 아바마마는 할마마마를 뛰어넘지 못하신다. 아바마마만 힘을 빌려주신다면 내정된

세자빈을 바꿀 수가 있을 텐데······.”

골똘히 생각에 빠졌던 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자! 내 아바마마를 뵙고 친히 주청을 드릴 것이다.”

“아니 되옵니다. 그러면 그동안 봉서를 주고받은 것이 발각될 것이고 이는 자선당 내관들뿐만이

아니라 자칫 문학도 화를 입게 될 것이옵니다.”

“그러면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연우낭자의 처녀단자를 빼 달라 주청이라도 드리란 말이냐?”

훤이 화가 나서 날뛰자 상선내관은 어쩔 줄 몰라 고개만 조아렸다. 방안을 서성거리며 화를

이기지 못하던 훤은 결국 자선당을 나서고 말았다.

“내 목이 날아갈지언정 주청을 드릴 것이다. 대신 다른 사람들의 목은 안전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니

아마마마의 침전으로 가자! 세자빈으로 연우낭자가 아니 된다면 외척일파도 절대 아니 된다!”

왕의 침전인 강녕전에 들어서니 그제야 공무를 마친 왕도 들어서고 있었다. 훤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간략하게 인사하자 왕은 환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훤도

따라 들어갔다. 아들을 눈앞에 두고 앉은 왕은 그저 웃기만 했다. 훤은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아바마마, 소신 가까이 다가가 앉게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그래? 우리 세자가 긴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하니, 다른 이는 모두 물러가라.”

주위 사람들이 다 물러가고 단 둘만 방안에 남겨지자 세자는 왕 앞에 바짝 다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이번 세자빈 간택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세자. 거기엔 본인인 네가 간여해선 안 되는 것이 법도다.”

“그렇다면 미리 세자빈을 내정해 두는 것은 어떠한 법도 입니까?”

웃고 있던 왕의 얼굴에서 웃음이 싸늘하게 비워졌다. 그 무서움에 훤은 마음이 졸아들었지만

물러서진 않았다.

“미리 내정되어 있다 들었사옵니다. 아니옵니까?”

훤을 노려보던 왕은 그 무거운 입을 떼었다.

“미리 내정되어 있다. 그래서?”

“철회하여 주시옵소서. 엄격한 기준에 맞춘 정당한 세자빈 간택이 되었으면 하옵니다.”

“그 또한 나의 관할이 아니다. 그런 부탁은 대비전으로 가서 하거라.”

“아바마마께옵서 할마마마를 넘어주시옵소서!”

“건방진! 너는 지금 세자의 위치를 넘어서려 하고 있다! 경거망동은 삼가거라.”

“세자빈이옵니다. 장차 이 나라의 국모가 될 여인을 뽑는 자리이옵니다. 그런데 어찌

할마마마의 기준에서 마음대로 선택한 여인을 내정할 수 있다 하옵니까.”

“그것조차 알고 있는 것이냐?”

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훤 못지않게 왕의 고민도 극심했던 모양이었다. 이마를 짚고 있던 왕이

조용히 말했다.

“더 이상 말하지 말고 물러가거라. 어서 석수라를 들고 편전에 나가 낮 동안 덜 끝낸 업무를

보아야 한다. 그러니.”

“소자의 마음에 품고 있는 여인이 있사옵니다!”

“어허! 입 조심! 지금 말은 아니 들은 것으로 하겠다.”

왕은 훤의 입에서 성급하게 나온 말에 전혀 놀라지 않고 단지 입 조심만 시켰다. 어떤 여인인지

알 필요도 없다는 듯 그 어떤 질문도 않고 훤을 보았다.

“입조심을 해야 하는 것은 신하나 백성만이 아니다. 가장 입조심해야 하는 자는 바로 왕이다.

그리고 너, 세자다! 물러가라.”

“아바마마. 부디 세자빈 내정자만큼은 철회를.”

“나도 그건 어찌 할 수가 없구나. 그동안 막아보려 하다가 네 가례가 늦어진 것인데 결국은

이리 되고 말았으니. 석수라 시선은 필요 없으니 넌 나가거라.”

왕은 훤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얼른 바깥에 소리쳤다.

“그만 다들 들어오너라. 그리고 수라도 어서 들여라!”

왕 주위의 내관들과 궁녀들이 방안으로 들어오자 훤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떠밀리듯 강녕전에서 나온 훤은 절망스런 발걸음으로 자선당으로 돌아갔다. 그 뒤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자선당의 내관과 궁녀, 세자익위사 관리도 따랐다. 훤은 자선당 뜰에 서서 애꿎은

하늘만 원망하며 노려보았다. 너무나 힘없고 허울만 좋은 세자란 위치를, 그리고 무능한 자신을

원망하며 아프도록 아랫입술만 깨물었다. 그리고 차라리 연우를 처녀단자에서 빼 달라 청하지

못한 자신의 간사한 이기심에도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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