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를 품은 달-7화 (7/47)

#7

“그래, 뭐라고 하던가?”

다음 날 보자마자 대뜸 던진 질문이 염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훤이 답답해하며

답을 재촉했다.

“어제 검은 엿 말이다. 맛있게 먹었느냐?”

“아! 네, 맛있게 먹었사옵니다.”

훤은 그 뒤의 말을 기다렸지만 염은 뒷말 없이 책을 펼쳤다. 답에 주어가 생략되어 있어서

염만 맛있었다는 건지, 아니면 연우가 맛있게 먹었다는 답인지 애매모호했다.

“연. 아니, 네 누이도 맛있게 먹었느냐?”

“네. 무척이나 좋아하였사옵니다.”

훤은 기분이 좋아져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훤이 진정 궁금한 것은 연우가 엿을 맛있게 먹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엿을 통해 연우에게

전해진 자신의 모습이었다. 염이 자신을 연우에게 어떻게 말했는지에 대한 궁금함, 그리고

연우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궁금함이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물어보다간

경망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처음 염을 만났을 때 왜 점잖게

행동하지 않았는지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어흠! 저기, 혹여 날 험담하진 않았겠지?”

“예? 무슨 말씀이온지······?”

“그러니까 연우낭자에게 나에 대해 별말 없었는가 말이다.”

“네, 세자저하에 대한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시지 마옵소서.”

“뭐라!”

훤이 화가 나서 소리치자 염은 의아한 눈길로 훤을 보았다. 훤은 얼른 목소리를 가다듬고

최대한 점잖게 말했다.

“어흠! 그러니까 내 말인 즉은, 어제 가져간 엿은 누가 준 것이라 말했는가 하는 것이지.”

“그냥 궁에서 얻어온 것이라고만 말하였사옵니다. 혹여 소인이 잘못 하였사옵니까?”

훤은 기운이 탁 빠졌다. 염의 말은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은 자신이 준 선물은 허공에

떠버린 격이었다. 한동안 인상을 구기고 앉아 있던 훤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런 것 정도는 말하여도 되느니. 엿을 보내준 이가 나라는 것쯤은 말해도 되는데.”

억울한 훤의 마음을 알 길이 없었던 염은 그대로 수업을 시작해버렸다. 이대로 물러나기 싫었던

훤은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도 내시를 시켜 죽통 하나를 가져왔다. 오늘 간식인

콩강정과 호두강정이었다. 콩과 호두는 머리가 좋아지는 음식이라 하여 세자의 간식으로 자주

나오는 것 중의 하나였지만 일반 민가에서는 호두는 귀한 음식이었다.

“흠! 별것 아니니 가져가거라. 그리고······, 내가 주더라는 말은 해도 된다. 이왕이면 이 나라의

세자에 대해 좋은 말만 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 백성들이 안심할 것이 아니냐.

에, 그리고······, 내가 처음에 너에게 예를 갖추지 않은 것은 내 인품이 못나서가 아니라 네가

스승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시험한 것뿐이니 곡해서 말하지는 마라.”

염은 말없이 환한 미소만 지었다. 갑자기 훤이 생각난 듯 말했다.

“아차! 내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내 비록 지금 너에게 천자문을 배우고는 있지만 이는 글자를

몰라서가 아니라 네가 독특해서 이니라. 난 분명 어릴 때 천자문은 배웠느니라! 이는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네, 소인도 알고 있사옵니다.”

훤은 염의 미소에 안심이 되긴 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좀 더 그럴 듯한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른 스승에게서는 현재 <대학연의>를 배우고 있다. 꼭 전하도록 해라.”

“네? 전하다니, 그 뜻이 무엇이옵니까?”

훤은 융통성 없는 염 때문에 속이 탔다. 그렇다고 연우에게 전해달라는 말이란 것을 자기

입으로 하기도 민망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을 알아두란 말이다. 그리고 난 학문을 사랑하는 세자다. 거기다 육예(六藝,

선비가 익혀야 둬야할 여섯 가지 교양. 예절, 음악, 활쏘기, 승마, 붓글씨, 수학)도 두루 익히고

있고. 오늘 활쏘기에서 총 열 발 중, 여섯. 아니, 일곱 발을 명중했느니.”

염은 갑자기 훤이 왜 이런 말들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미소만 지었다. 훤은 자기 입으로 자기 칭찬을 계속 하자니

멋쩍고 자신이 경박해 보였다. 그래서 옆의 내시를 찌릿하고 째려보았다. 내시가 바로 눈치를

채고 훤의 말을 도왔다.

“네, 참으로 훌륭한 솜씨였사옵니다. 세조대왕께옵서도 울고 가실 명궁이었사옵니다.”

세조대왕의 활솜씨는 명궁 중에 명궁이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런 왕에 비교해서 말해주자

훤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뭐, 그 정도는 아니고. 하하. 아! 내 작금(昨今)은 시문 또한 즐기고 있다네. 들어 볼 텐가? 어흠!

날이 새는 빛이 다락 모서리를 밝히는데, 봄바람은 버들가지에 눈을 틔운다. 첫 새벽을 알리는

소리, 이미 침문(임금의 처소)에 문안하러 가고 없네. 혹여 아는 시인가?”

“네, 김부식이 지은 <동궁(세자궁)에 붙이는 봄의 글(東宮春帖子)>이 아니옵니까.”

“아, 이미 알고 있구나. 음······.”

자랑하고 싶었던 마음에 풀이 죽었다. 하지만 여기서 꺾일 훤이 아니었다.

“여기 시에서 세자가 모두 잠든 이른 새벽에, 임금께 자식으로서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문안을

드리러 간 모습이 참 아름답지 않은가. 아마도 옛날 김부식이 지금의 나의 모습을 보았음이야.”

“정녕 훌륭하시옵니다. 언제나 그러기는 쉬운 일이 아니온데.”

“뭐, 언제나는 아니고······. 아바마마께옵서 워낙에 공무로 바쁘신 분이라 자주는 못하지만.

이제부터 매일 새벽에 일어나 문안을 드릴 거라네. 그것이 바로 효도가 아니겠는가.”

옆의 내시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힘껏 참았다. 어떻게 해서든 멋진 모습을 말하려고

하는 훤의 모습도 귀엽고, 그것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 염의 모습도 재미있었다. 훤은 연우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듣고 싶어서 은근슬쩍 말을 했다.

“네가 그 시를 알고 있다면 네 누이도 알고 있는가? 같이 책을 읽는다 하였으니······.”

“네, 그 아이는 시를 좋아하옵니다. 그래서 저 보다 더 많은 시를 알고 있사옵니다.

예전에 그 시를 읽고 모든 세자저하가 그러한지 궁금해 한 적이 있었사옵니다.”

훤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몸이 저절로 염 쪽으로 쏠렸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가?”

“그때는 제가 과거에 급제하기 전이라 세자저하를 뵈옵기 전이었사옵니다.

그래서 잘 모르겠다고만 답하였사옵니다.”

훤은 실망스러웠다. 그렇지만 자기를 만나기 전이라니 뭐라고 하기도 이상했다. 괜히 그 시를

먼저 읽은 것에 대해서도 원망스러웠다. 훤은 풀이 죽었지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러면 어떤 시를 좋아하는가?”

“시라면 다 좋아하는 것 같사옵니다만······. 얼마 전, 그 아이에게 작은 시책을 선물하여

주었사온데, 그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사옵니다.”

“어떤 시였는데?”

“새벽등불이 정인의 지워진 화장을 비추는데, 이별을 말하려니 애가 먼저 끊어지네. 차마 말

못하고 지는 달이 반쯤 비추는 뜰로 문 열고 나오니, 살구꽃 성긴 그림자만이 옷에 가득하구나.

······이 시였습니다.”

훤은 처음 들어보는 시였다. 그렇지만 연우가 슬퍼했다니 자기도 슬퍼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시를 읽고 눈물을 흘리는 여인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아리따워, 시가 아닌 그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슬프구나. 연우낭자에게 나 또한 그 시에 슬퍼하더란 말을 전해주게. 꼭 전해줘야 하네.”

“네? 아, 네.”

염은 영문을 몰랐지만 같은 시를 같은 감정으로 공유한다는 것을 전하라는 단순한 뜻으로

받아들였다. 염은 비록 학문은 높았지만 인간의 연정에 관한 부분은 상당히 뒤떨어진

소년이었기에, 훤이 연우에게 보이는 관심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못했다.

“그런데 누구의 시인가?”

“고려조에 정 포(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란 사람의 <양주객관별정인(梁州客館別情人)> 이란

시입니다.”

“음. 참! 시를 즐기는 세자라는 것도 꼭 말해야 하네.”

염이 인사하고 나가자 훤의 마음은 급해졌다. 얼른 책색서리에게 명하여 시책이란 시책은 다

가져오라 명하고 없는 시책은 구해오라는 명까지 내렸다. 그리고 열심히 시를 읽었다.

다음 날 새벽부터 자선당(資善堂, 세자가 기거하는 곳)의 움직임은 다른 날과 달리 분주했다.

세자가 새벽 파루의 북소리가 울리기 전에 꼭 일어나야 한다고 명했기 때문이었다. 내시가

조심스럽게 깨우자 훤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기는 했다. 하지만 정신까지 잠에서 쉬이 깨어나진

못했다. 비몽사몽 하는 훤을 보좌하여 궁녀와 내시는 칫솔(나무토막에 돼지털이나 말총을

촘촘히 박아 만든 고급품. 현대의 칫솔 모습과 비슷하리라 추정됨)에 고운소금과 당근가루,

금가루를 묻혀 양치를 시키고 세수까지 시켰다. 그동안도 훤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내시가 걱정되어 물었다.

“다시 주무실 것이옵니까? 아니면······.”

여전히 눈을 못 뜨고 잠속을 헤매면서도 훤은 말했다.

“아니다. 아바마마께 문안드리러 갈 것이다. 말을 했으니 행해야 한다.”

훤의 고집으로 내시는 졸고 있는 훤의 옷을 갈아입혔다. 의관을 정제할 때도 훤은 내내 졸고

있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왕의 침전으로 갔다. 가는 길에서조차 훤은 졸면서 걸었다.

뒤를 따르는 내시들과 궁녀들은 훤이 비틀거릴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세자가 침전에

나타나자 왕을 모시는 내시가 나와 왕의 침소로 세자를 안내했다. 왕은 이미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세자가 문안인사를 하자 왕은 기쁘게 맞았다.

“웬일로 우리 세자가 이리 일찍 문안을 나선 것이냐?”

“효를 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동안 아침마다 문안을 드리지 못한 마음이 무거웠사옵니다.

이제부터 마음을 다해 이리 할 것입니다.”

여전히 눈은 게슴츠레한 상태였지만 말만큼은 또렷하게 했다. 왕은 굉장히 흡족한 모양인지

연신 웃고 있었다.

“우리 세자가 이리 기특한 것을 보니 모든 대신신료들에게 자랑해도 될 것 같구나. 아니 그런가,

상선?”

“네, 그러하옵니다.”

옆의 내시까지 맞장구를 치자 훤의 어깨는 더욱 으쓱해졌다. 게다가 대신신료들한테 자랑을

한다는 것은 염뿐만 아니라 홍문관 대제학으로 있는 염과 연우의 부친에게도 말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여러모로 연우에게 자신의 좋은 모습이 전해질 방도가 많아 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신이나 한 술 더 떠서 말했다.

“아바마마, 초조반은 드셨사옵니까?”

“아니다. 아직 전이다. 혹여 초조반까지 살피려는 것이냐?”

“네, 시선(視膳, 세자가 왕의 수라를 살피는 것) 또한 효이기 때문입니다.”

훤의 생글거리는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왕은 상선에게 일러 초조반을 가져오라 명했다. 그리고

세자의 몫도 같이 가져오라고 말했다. 잠이 덜 깬 훤의 얼굴을 보며 왕이 말했다.

“요즘 예학(睿學, 세자의 학문)은 어찌 되어 가느냐? 혹여 새 문학이 마음에 안 드는 점은

있느냐? 네가 원한다면 바꿔 주겠노라.”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있사옵니다.”

“회강(會講, 한 달에 두 번, 세자가 배운 것을 복습·평가하는 강의로 왕과 시강원 관리 모두가

참석) 때 보니 문학과의 학습 진도는 따로이 없다하여 하지 않아 걱정되었느니라.

문학이 알아서 하리라 생각하고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만.”

“문학은 뛰어난 사람이옵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훤은 초조반을 끝내고 신난 걸음으로 교태전으로 갔다. 조모인 대비는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분이기에 가지 않고 모친에게 간 것이었다. 중전 또한 말끔히 의관을 갖추고 훤을 맞아 칭찬을

해주었다. 문안을 끝내고 자선당으로 돌아온 훤은 그사이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그래서

마당에 서서 열심히 체조(아기 때부터 중요한 학습 중의 하나)를 했다. 그 무엇을 해도 신나고

행복했다. 내시에게 일러 자기가 오늘 한 일을 염에게 꼭 말하라는 것도 잊지 않고 몇 번이나

되새겼다. 그리고 조강과 주강 짬짬이 시를 읽으며 어서 석강이 오기를 기다렸다.

석강 시간이 되자 어김없이 염이 왔다. 훤이 내시를 꾹꾹 찔러 말하라고 시키자 내시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세자저하의 효심이 어찌나 지극하신지 상감마마께옵서 참으로 사랑하십니다. 새벽 파루의

북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의관을 정제하시고 상감마마께 문안을 하시옵고, 시선도 하시었습니다.”

“세자저하께옵선 모든 자식의 모범이시옵니다. 어찌 본받지 않을 수 있나이까.”

염의 진심어린 칭찬에, 훤은 피곤하더라도 언제나 문안을 하리라 다시 한 번 마음먹었다.

그리고 어제의 간식 선물과 더불어 자신의 말이 전해졌는지 궁금하여 물었다.

“강정은 맛있게 먹었느냐?”

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아직 먹지 못하고 제 방에 두었습니다.”

“왜?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게······, 제 누이가 어제 또 부친께 종아리를 맞았사옵니다. 하여 미처 강정을 전할 경황이

없었사옵니다.”

“혹여 연우낭자가 말썽꾸러기인 건가?”

“그런 뜻이 아니옵고, 여자인 몸으로 너무 많은 책을 읽기에 부친으로부터 금서를

당하였사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기고 매일 동호(독서당, 서재)에 숨어들어 책을 몰래

훔쳐내 읽곤 합니다. 매일 종아리를 맞아도 다음날 또 책을 훔쳐 읽으니 당해낼 재간이

없사옵니다. 그러니 제 누이의 종아리엔 회초리 자국이 지워질 날이 없사옵니다.”

연우의 종아리에 새겨진 회초리 자국에 훤의 가슴이 괜히 아파왔다. 마치 자신의 종아리도

욱신거리는 듯했다. 연우의 부친이 원망스러운 마음에 퉁명스럽게 말했다.

“홍문관 대제학은 학식이 높기로 이름이 있는 자가 아니냐? 그런데 어찌 여식에게는 그리 박한

것이냐. 네가 책을 읽는 것에는 회초리를 들지 않을 것인데. 많이 맞았느냐?”

“네, 어제는 특히 심하게 맞았기에 걱정이 되옵니다. 허나 아마 지금도 책을 훔쳐내 읽고 있을

것이옵니다. 어제 종아리에 약을 바르면서도 읽고 싶은 책에 대해 제게 이리저리 물어보았기에

필시 그러할 것입니다.”

“허허. 많이 맞았단 말이지, 많이. 그 여린 종아리를 때릴 데가 어딨다고. 참으로 너무 허이.

약을 바를 정도로 많이 맞았단 말이지. 허허, 참.”

훤은 속이 상해 혼잣말처럼 계속 중얼거렸다. 이리저리 중얼거려 보아도 속상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윽고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 혹여 무슨 책을 읽고 싶어 하더냐?”

“사마천의 <사기>이옵니다. 읽던 중에 압수를 당하였기에 뒤를 몹시도 궁금해 하였사옵니다.”

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번에는 자신 있게 말했다.

“나도 그 책은 좋아하느니라. 연우낭자도 그런 책을 좋아한다니······.”

훤은 안타까운 마음과 들뜨는 마음이 공존하는 상태로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염에게 기다리라고 해놓고는 춘방책고(세자 전용 도서관)로 달려갔다. 그곳

책색서리에게 <사기>가 있는 곳을 물어 손수 몇 권을 골라잡았다. 그리고 옆에서 대신 들겠다는

것을 거절하고는 책을 껴안듯이 들고 염 앞에 가져다놓았다. 훤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거 가져가서 연우낭자에게 전하라. 그리고 이 뒤 권도 차례로 보내줄 것이니 오늘은 이것만

가져가거라.”

염은 상당히 당황했다. 세자가 읽는 책을 선뜻 받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친절을 베푸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연우를 향해서임을 알 수 있었기에 어찌 할 바를 몰라

눈앞의 책만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매일 책을 훔쳐내는 연우 때문에 집안에 들어온 부친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없어진 책을

점검하는 일이었다. 그리고는 어김없이 회초리로 이어졌다. 어제는 채워둔 동호의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갔기에 다른 날보다 더 많은 매질을 당하였다. 이 책들을 가져가면 한동안 부친

몰래 읽을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연우의 종아리의 멍 자국도 어느 정도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염은 연우의 종아리를 위해서라도 이 책들을 챙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잠시 빌려갔다가 다시 가져오겠사옵니다. 그리하면 되올지요?”

“어? 그래, 그럼. 그걸 다 읽으면 다시 다른 책을 빌려 가면 되겠구나. 그렇게 하라.”

염이 책을 빌려가기 시작하면서부터 훤의 연우에 대한 마음은 더욱 깊어졌다. 염이 빌려가긴

하지만 읽는 것은 연우였기에, 훤은 빌려준 책을 한 번 더 읽게 되었고 다 읽고 가져온 책도

한 번 더 펼쳐보게 되었다. 때때로 훤이 읽지 않은 책도 빌려갔다. 그러면 훤 또한 그 책을

반드시 읽어보았다. 그렇게 연우가 읽는 책으로 연우를 좇았다. 혼자 연우의 모습을 이리저리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그리움이 되었다. 간간히 염을 통해 전해 듣는

연우의 모습을 접할 때마다 훤은 마냥 신기하여 큰소리로 웃곤 했다. 그러다가 차차 염의

입에서 연우가 세자에 대해 하는 말들이 섞여 나오게 되었다. 별다른 말들은 아니었다. 이렇게

자주 책을 빌려주는 세자는 마음이 넓다거나, 감사하다거나 하는 인사말 수준이

대부분이었지만 훤에겐 특별한 언어로 들렸다.

그러던 어느 날, 훤은 결심을 했다. 염의 입으로 전해 듣는 연우의 모습만으로는 오히려 갈증만

더 깊어졌기에 직접 연우에게 편지를 써 보낼 욕심을 내고야 말았다. 하지만 이것도

고민거리였다. 융통성 없는 염이 편지를 가운데서 전해줄 리가 만무하거니와 연우 또한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스러웠다. 아직 혼인 전인 세자가 규방의 처녀에게 연정을 품은 편지를

보낸다면 자칫 큰 문제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여건도 훤의 고집을

꺾지 못하였다. 문제는 어떤 내용의 편지를 쓰느냐는 것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하던 훤은

연우가 시를 좋아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때부터 시책이란 시책은 모두 뒤졌다. 그중 연우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담긴 시를 선별하였다. 그리하여 단 한편의 시를 종이에 곱게 적었다.

자신의 필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이나 다시 쓰고 다시 써서 그중 가장 멋지게 써진 것을

봉서로 봉했다. 아무 덧붙이는 말없이 딱 한편의 시만 적었다. 혹여 문제가 되면 그냥 시만

적었을 뿐이라 발뺌하면 그만이고, 연우가 세자의 경망함을 탓해도 그저 좋은 시여서 읽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라 변명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연우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다면

분명 답시를 보내 줄 것이란 기대도 했다. 그리고 왠지 그동안 전해들은 연우란 여인이면

기대해 볼만 했다.

바다 위에 밝은 달이 떠올라, 하늘 저 끝까지 고루 비추네. 사랑하는 연인들 서로 멀리 있는

이 밤을 원망하여, 님 그리운 생각에 잠 못 이뤄 하노라. 촛불 끄고 방안에 가득한 달빛

아끼다가, 저고리 걸치고 뜰에 내려서니 촉촉이 이슬이 젖어 오네. 손으로 가득 떠서

보내드릴 수 없는 터에, 다시 잠자리에 들어 님 만나는 꿈이나 꾸어보리라.

<달밤에 임 그리며(望月懷古)> - 장구령(당나라 현종 때의 재상 겸 시인)

훤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빌려주는 책 사이에 봉서를 끼워 넣어 염에게 건넸다. 예상한 대로

염은 펄쩍 뛰며 봉서를 거부했다. 훤은 시치미를 뚝 떼고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했다.

“별 것 아니다. 내 어젯밤 읽은 시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 마침 네 누이가 시를 좋아 한다기에

그 시 한편만 적었을 뿐이다. 네 누이가 진정 시를 즐기는 이라면 내가 보내는 이 시에 대한

감상을 들려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동안 내가 빌려 주는 책과 그 봉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하오면 이 봉서는 두고 그 시책을 빌려주시옵소서. 이는 아니 될 일이옵니다.”

훤은 염의 이 같은 완강함에 순간 당황했다. 열심히 변명할 말을 찾다가 겨우 말했다.

“시책이 전부 좋았던 것이 아니라 그 시 딱 하나만 좋았을 뿐이다. 그리고 아직 그 시책을 다

못 읽었기 때문에 빌려 줄 수가 없다.”

“굳이 시를 보여주고 싶으시다면 다 읽으신 연후에 빌려주시옵소서. 이건 아니 가져가겠습니다!”

염이 강경한 만큼 훤도 강경하게 소리를 높였다.

“가져가라 하였다! 이 봉서를 뜯어 볼 사람은 네가 아니라 네 누이이니, 네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네 누이가 뜯어보고 정 예의가 아니라 여기면 다시 내게 가져오면 되는 것이고, 시에

대한 감상을 들려주고자 한다면 그 또한 네 누이의 몫이 아니겠는가. 이는 네 누이가 판단할

일이다.”

“제 누이는 규방의 정숙한 여인입니다. 기방의 여인이 아니옵니다!”

“네가 나를 어찌 보고 그리 말하느냐! 내가 기방의 여인이나 희롱하는 못난 사내란 말이냐?

난 너의 인품을 높이 사는 것처럼 네 누이의 인품 또한 높이 사기에, 같이 서책을 나누고 감상을

나누려 하는 것이다. 감히 나의 서책을 같이 보는 여인을 내가 기방 여인으로 취급할 리가

있겠느냐?”

여전히 염은 봉서를 넣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훤은 눈을 부릅뜬 채 염을 노려보고

있었다. 옆의 내시는 잔뜩 긴장하여 둘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염이 봉서만큼은 안 가져 갈

모양이었다. 내시는 만약에 이대로 거절당한다면, 어제 오늘 내내 들떠 시를 고르고 서체

연습을 하던 훤이 가여울 것 같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훤을 거들었다.

“문학, 저 또한 같이 그 시를 읽었사옵니다. 당대 명재상의 시이니 그리 이상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경치 좋은 누각에 올라 서로의 시를 나누는 선비들이 서로를 희롱하는 것은 아니지

않사옵니까? 그리고 규방의 부녀자들 또한 서로의 시와 글을 나눈다 들었습니다. 이 봉서 또한

그리 생각 하십시오. 제가 생각건대, 문학의 누이는 나이가 어려 어느 누구와도 생각을 나눌 수

없음에 외로울 거라 생각하옵니다. 아무 뜻 없는 이 봉서에 문학께옵서 이리 하시니 세자저하만

이상한 분이 되어버릴까 저어되옵니다.”

이쯤 되자 염은 안 가져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안의 내용도 모른 채 버티다간 세자를 욕보이는

것이 될 위기였고, 그동안 서책은 가져 가 놓고 시 한편을 안 가져가겠다는 것도 어찌 보면

모순이었다. 애초에 검은 엿부터 가져가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염은 마지못해 서책과 봉서를 같이 가져갔다.

무척이나 길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다음날을 기다리기가 지루할 지경이었다. 어쩌면 염의 손이

빈손일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고, 어쩌면 시에 대한 짧은 감상이 전부인 서찰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긴 밤이 지나고 새벽 문안까지 마치고도 하루는 더디게 흘러갔다.

애타게 기다리던 석강이 되었다. 비현각으로 들어서는 염의 모습에 훤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런데 손에는 편지는 없고 간식을 넣어 보낸 죽통만이 있었다. 훤이 어리둥절하여 염을

보았다. 염은 세 번의 절을 하고 훤 앞에 죽통을 건넸다. 그리고 품속에서 하얀 봉서를 하나

꺼냈다. 순간 훤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기다렸던 것이지만 직접 눈에 들어오니 그 순간은

숨이 막혔던 것이다. 염의 손에서 봉서를 받았다. 언제나 염에게서 나는 난향이 그 봉서에

스며있었다. 그래서 연우의 향도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봉서에 정신이 팔린 훤은 죽통은 늦게

눈에 들어왔다. 죽통은 빈 것이 아니었다. 안에 흙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게 무엇이냐?”

“책을 빌려주신데 대한 제 누이의 선물이옵니다.”

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자세히 보니 죽통을 화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무엇을 심은 것이냐?”

“그건 저도 잘 모르옵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고 기다리시면 무엇인지 알게 되실 것이라

하였습니다.”

훤은 흥분되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염이 수업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봉서는 품안에 고이

품었다. 그리고 죽통은 행여나 넘어질 새라 옆에 조심스럽게 두었다. 수업을 끝내고도 염은

걱정스러운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인사하고 돌아갔다. 훤은 다른 때와 달리 염을 붙잡지 않고

얼른 돌려보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내시들도 저 멀리로 가 서라고 명했다. 근처를 다 물리친

훤은 그제야 품속의 봉서를 꺼냈다. 하늘에 비춰보니 안에는 분명 글씨들이 적혀있었다.

다시 한 번 내시들을 더 멀리 물러가라 손짓한 뒤에 봉서를 열었다. 안에는 훤이 보낸 내용처럼

단 한편의 시만 있었다.

서로 그리는 심정은 꿈 아니면 만날 수가 없건만, 꿈속에서 내가 님을 찾아 떠나니 님은 나를

찾아 왔던가. 바라거니 길고 긴 다른 날의 꿈에는, 오가는 꿈길에 우리 함께 만나지기를.

<서로를 그리는 꿈(相思夢)> - 황진이

짧은 시였다. 하지만 몇 번을 읽고 또 읽어 보았다. 어제 보낸 시에 꿈속에서나마 만났으면 하는

마음을 적어 보낸 것이기에, 서로의 꿈에서 만나지지 못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찾아갔기에 못

만난 것이란 이 답시에서 연우의 또 다른 일면을 보았다. 그리고 연우 또한 훤이 연우를 그리는

것처럼 같은 마음이란 확신이 들었다. 몇 번을 감격하여 읽으니 차차 연우의 서체가 눈에

들어왔다. 먼저 보낸 자신의 서체가 부끄러울 정도로 정갈하고 어여쁜 서체였다. 줄 간격도

딱 맞춰 열네 살 소녀가 적은 한자체 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품격이 넘치는 서체였다.

한자에서 삐침으로 올라가는 부분도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맞춘 것이 심성 또한

그러하리란 느낌이 들었다. 훤은 멀리 서 있는 상선내시관만 살짝 오라 명했다. 내시가 와 서자

훤은 자랑하듯이 서체를 보여주었다.

“보아라. 이게 어디 열네 살 여자가 쓴 서체가 하겠는가. 혹여 이런 솜씨를 본적 있는가?”

내시 눈에는 내용보다 서체가 먼저 들어왔다.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보통 서체가 아니었다.

서체에서 고귀한 선비의 품격이 스며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여인의 아름다움 또한

가지고 있었다.

“진정 열네 살이라 하옵니까?”

“나도 놀랐느니. 한자를 아는 여인도 신기하지만 이런 서체를 구사하는 여인 또한 신기하구나.

민화공주와는 단 한 살 차이일 뿐인데 이리 다르다니.”

“홍문관 대제학은 본인뿐만 아니라 자식까지 이리 뛰어나다니. 문학도 감탄에 감탄을

하였사온데, 이건······.”

훤이 연우에 흠뻑 젖어 있던 중에 황금빛 햇살이 가득한 하늘에서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현각에 앉아 내리는 보슬비를 바라보고 있던 훤은 갑자기 일어나 죽통화분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주위에서 만류를 해도 속 안에서부터 뜨거운 감정이 솟구친 훤을 말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훤은 죽통화분을 비를 맞게 두고는 마당 한가운데로 나가 섰다. 황금빛 햇살과

어울려 보슬비조차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빗물인 듯, 바람인 듯 조용히 내리던 보슬비는 어느새

훤의 옷자락과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훤은 팔을 벌려 보슬비를 품에 안아보았다. 훤의 품안에

뛰어든 보슬비는 열여섯 소년인 훤의 얼굴을 타고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렇게 훤의 온몸을 적시며 보슬비는 해와 더불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