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7년 6개월 전, 열여섯 살 세자 시절의 훤은 새로울 것이 없는 매일 반복되는 생활에 지쳐,
세자시강원의 스승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그 재미를 찾고 있었다. 머리가 좋은 세자는 스승이
가르치는 것은 한번 듣고도 다 외웠다. 그래서 일부러 틀리게 읽어 그것을 스승이 모르고
넘어가면 바로 꼬투리를 잡아 모욕을 준다거나, 가르치는 것을 안 듣고 딴 짓을 하다가 스승이
왕에게 이러한 사실을 고하면 왕 앞에서는 그 어떤 때 보다 또록또록하게 배운 것을 낭독하여
마치 스승이 거짓을 아뢴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세자시강원에서 세자를 가르치는 스승은
보통 열 명에서 스무 명까지 있었는데, 사·부와 이사처럼 한 번씩 학습 진도를 살피는 상징적인
스승을 제하고 직접 가르치는 보덕, 필선, 문학 등의 스승만 해도 열 명 가까이나 되었다.
이 많은 스승들이 세자의 장난에 안 당해본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자를 가르치는 일에 중압감을 느낀 보덕(輔德, 정3품)이 낙향을 하고 말았다.
훤의 장난이 아니어도 세자시강원의 관리들은 차기 왕을 가르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임무의
막중함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거기에 훤의 장난으로 인해 그 정신적인 병이
가중된 것이었다. 그렇게 비워진 보덕 자리는 아래에 있던 필선(弼善, 정4품)과 문학(文學,
정5품)이 차례로 승직을 하고, 새로운 문학이 제수(除授, 왕이 신하의 추천을 받지 않고 직접
임명하는 것)되었다. 훤도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듣고 새로 오는 문학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물론 골탕 먹일 것을 대비해서였다. 그래서 사령(使令, 세자시강원에서 심부름하는
하급관리들)에게 새로 오는 문학에 대해 알아오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정보를 듣고 온 사령이
훤에게 말하기를 꺼려했다.
“왜 말하지 않는 것이냐? 어떤 자가 오는지 못 알아 낸 것이냐?”
“그, 그것이 아니옵고······.”
“어서 말하라! 어디서 뭐하던 자냐?”
한참을 머뭇거리던 사령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과거에 장원급제한 허 염이란 자라 하옵니다.”
훤은 깜짝 놀랐다. 보통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정·종9품직에 임명받았다. 그중 장원급제한
사람은 아무리 높은 관직을 준다고 해도 정7품직 정도가 가장 좋은 대우였다. 그런데 정5품인
문학에 제수 받았다는 것은 엄청나게 파격적인 임명이었던 것이다. 특히 역대 왕 중에
인사행정에 있어서 가장 빡빡하다고 소문난 왕이라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세자시강원의 관리들은 다른 관직에 비해 선발 기준이 훨씬 엄격했기 때문에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또 알아낸 것이 있느냐?”
“그게······, 나이가······.”
“나이라니? 허 염이란 자의 나이가 어떻게 되기에?”
“올해로 열일곱이라 하옵니다.”
훤이 놀라움과 분노로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열일곱이라면 나보다 기껏 한 살 많다는 것이 아니냐! 아바마마께옵서 나를 어찌 보시고
그런 새파란 애송이를 문학에 제수하셨단 말이냐!”
보통 스승들의 나이대가 서른에서 마흔 사이였는데 기껏 한 살 많은 놈에게 가르침을 받을 것을
생각하니 훤은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호기심도 생겼다. 과거에 급제하는
나이가 대략 정해진 것은 없지만 보통은 스물다섯에서 많게는 마흔까지 넘어갔다. 그런데
열일곱이란 나이에 장원급제를 했다는 것은 천재라는 뜻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훤은
염의 수업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수업시작한 날로부터 단 며칠 만에 쫓아내고야 말리라는
의욕을 불태웠다.
드디어 염의 첫 수업 날이 되었다. 훤은 석강(夕講)을 담당하게 된 염이 비현각(丕顯閣, 세자가
공부하던 건물)에 들어서는 것을 삐딱한 자세로 앉아 얼굴을 돌리지도 않고 맞았다. 아무리
세자라고는 하지만 스승에 대한 예를 따진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맞아야 하는 것인데 훤은 염을
골탕 먹이기 위해 일부러 일어서지 않았다. 그런데 훤과 떨어진 스승의 자리에서 세 번의 절을
마치고 앉은 염의 얼굴을 본 순간 훤은 넋이 나가고 말았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너무나도
아름다운 청년이었기 때문이었다. 주위에 보아왔던 그 어떤 궁녀보다 아름다웠다. 훤은 그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염을 내쫓아야 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자칫 잊을 뻔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삐뚤어진 익선관을 바로 쓰지도 않고 서안에 턱을 괴고 앉아 있기만 했다.
스승이 먼저 세 번의 절을 하면 세자 또한 스승에게 세 번의 절을 해야 하는 것이 예절이었다.
훤은 이대로 있다가 염이 뭐라고 말만 하면 세자의 권위로 호통을 쳐서 기를 죽여 놓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염의 반응은 다른 스승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바른 자세로 정좌한 채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었던 것이다. 훤이 아무리 기다려도 바로
앉아라던가, 아니면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추라던가 하는 요구가 없었다. 꼼짝도 않고 정좌하여
앉아 있는 염보다 삐딱하게 앉아 있는 훤이 먼저 지쳐갔다. 하지만 훤도 고집이 있는
놈이었기에 허리가 아프고 팔이 아파도 상대가 먼저 공격하기만을 기다리며 끝까지 버텼다.
그러고 있던 어느새 45분이라는 수업시간이 지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비현각 바깥에서
울렸다. 종이 울리기가 무섭게 염은 단 한마디도 없이 눈웃음 그대로 인사하고는 물러나 나가
버렸다. 훤은 기가 막혔지만 왠지 재미가 있었다. 이제껏 스승들은 감히 세자 앞이라 꾸짖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훤이 바라는 대로 함정에 빠져주었는데, 염처럼 아름다운 미소만
남발하다 가는 경우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경전이 하루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염은 그저 아름다운 눈웃음만을 보일 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훤이 지치고 심심해졌다. 그리고 염의 목소리가 궁금하기도 했다.
며칠을 삐딱한 자세를 유지하던 훤은 결국 염에게 스승의 삼배를 올리고 자세를 바로하고
앉았다. 그렇다고 염을 스승으로 받아들여서가 아니었다. 단지 다른 공격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이전까지 배우고 있던 <중용>을, 염의 코를 납작하게 하기 위해 미리
예습까지 해 와서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염의 입에서 예상하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제부터 천자문을 익히겠사옵니다.”
훤은 잔잔한 물결같이 아름다운 목소리에 순간 매료되었다가 얼른 정신 차리고 말을 되새겨
보았다. 어이가 없었다. 천자문은 4살 원자시절, 강학청(講學廳, 원자의 유아교육기관)에서
이미 다 배운 것이었다. 훤이 화를 버럭 내기도 전에 염은 책색서리(冊色書吏)를 불러 천자문
책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우물쭈물 거리며 훤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책색서리는 염의 미소에
화들짝 놀라 책을 가지러 나갔다. 참다못한 훤이 소리쳤다.
“감히 나를 욕보이려 하는 것인가! 난 지금 <중용>과 <자치통감>등을 배우고 있는 몸이다!
그런데 천자문이라니!”
화가 나서 소리치는 훤과는 달리 염은 고요한 미소로 차분하게 말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인은 이제껏 누군가를 가르쳐본 적이 없었사옵니다. 그래서 문학에
제수 받았을 때 상감마마께 고사(苦辭) 하였사온데, 제가 배운 대로만 가르치라 윤언
하시었습니다.”
“대체 그것과 천자문이 뭔 상관이란 말이냐?”
“처음 학문을 접할 때 천자문부터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제일 처음 배우는 것은 학문을
배우기 전의 마음가짐과 자세이옵니다. 세자저하께옵선 학문하기 전의 자세를 며칠 동안에
거쳐 이제야 익히셨으니 그 다음은 천자문을 하실 차례이옵니다. 소인은 배운 대로만 행하란
어명을 받잡습니다.”
훤은 화가 났지만 공격할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사이 책색서리가 천자문을 가져다
서안에 올려두었다. 염은 조용히 책을 펼쳐 음부터 읽었다.
“천지현황”
하지만 훤은 분노로 인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염이 다시 미소로 음을 읽었다.
“천지현황”
이번에도 훤은 입을 다물고 화를 담은 눈빛만 염에게 보냈다. 염이 조용히 말했다.
“세자저하께옵선 이 한자들을 익히셨다 하시었는데, 그러면 天은 무엇이옵니까?”
“하늘이다!”
“그럼 하늘은 무엇이옵니까?”
훤은 언뜻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가만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뭐냐는 질문에 하늘을 정의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염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말만 생각하느라 쉽게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이제껏 중용을 배우고 계셨다 하시었습니다. 그럼 중용에 나오는 하늘은 어떤 모습입니까?”
분명 배운 것인데 이렇게 물어보니 훤은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염이 말했다.
“하늘은 곧 도의 근원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명한 것을 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하였습니다. 그렇게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평안히 하고 만물이 육성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염의 코를 납작하게 하여 쫓아내리라는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있는 중이었다. 천자문의 제일
처음에 나오는 하늘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현재 배우고 있던 중용도 제대로
이해 못하고 있다는 따끔한 질책이었던 것이다. 훤이 나름대로는 공격을 했다.
“그럼 문학은 하늘과 땅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제가 답을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자저하께옵서 앞으로 학문을 하면서 배워 가셔야
하는 것이옵니다.”
“너도 제대로 설명을 못하는 것이 아니고?”
염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 후 말했다.
“저 또한 알고자 계속해서 학문을 하는 것이옵니다. <열자>에 따르면 맑고 가벼운 기운은
올라가 하늘이 되고, 흐리고 무거운 기운은 내려가서 땅이 되고, 하늘과 땅이 화합한 기운이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정기를 품어 만물이 변화 생성 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훤은 열자는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귀가 솔깃해서 듣고 있는 훤에게 염이
다시 말했다.
“하늘과 땅이 화합한 인간의 정신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고, 육체는 땅에서 나누어 받은 것이라
합니다.”
“그런가? 그래서 인간이 죽으면 정신은 하늘로 돌아가고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염은 환하게 웃었다. 훤은 이미 진지하게 염의 말을 듣고 있었다.
“방금 세자저하께옵서 하신 말씀이 바로 <열자> 안에 있사옵니다.”
“음······. 그 책을 구해서 한번 읽어봐야 되겠구나.”
“그리고 <육도삼략>에는 하늘을 임금에 비유하고 신하를 땅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골고루 미치게 하는 것이고, 땅은 정하여진 대로 하는 것이라 하였기에······.”
이렇게 시작된 천지, 두 글자에 대한 수업은 수많은 책에 있는 것들을 설명하며 눈 깜박할
사이에 45분이 흘러가고 말았다. 염을 골탕 먹이리라는 목적은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염의 부드러움에 휘말린 훤은 매일 반복되던 생활에 조그마한 재미가 생겨나게 되었다.
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훤이 아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생소한 것들이었고, 알고 있던
것도 전혀 새롭게 와 닿았다. 그리고 염을 골탕 먹이기에는 훤이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한번쯤은 염을 곤혹스럽게 만들어 보고자 하는 일념으로 그 어떤 때 보다
열심히 공부 하게 되었다. 훤은 천자문을 배우면서 모르는 사이 많은 책을 같이 익혀갔고,
천지현황에는 왕과 신하, 왕과 백성의 도를 익혔고, 일월영측에서는 우주의 변화와 생성을
배워나갔다. 그러던 사이에 훤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염을 좋아하고 있었고, 그 어떤
스승보다 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석강이 짧게만 느껴져 퇴궐하려는 염을 잡아 저녁을 같이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게 되었다.
시강원 관리들의 임무 중에 돌아가면서 직숙을 하며, 세자를 밤에도 지도하는 것이 있었다.
이때는 학문이 아니라 생활지도의 책임이 강했다. 그런데 염은 직숙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서운하게 여긴 훤이 어느 날 염에게 물었다.
“난 너와 같이 놀고 싶은데 왜 밤에는 곁에 머물러 주지 않는 것인가?”
염은 조금 미안해하며 말했다.
“그 또한 저의 본분이긴 하나, 제가 아직 나이가 어려 오랫동안 입궐해 있기 힘들기도 하지만······.”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저에겐 누이가 하나 있사옵니다. 그 아이 때문에······.”
“너에겐 부모가 다 있지 않은가? 누이를 네가 돌봐야 하지는 않을 것인데?”
“그것이 아니옵고, 제가 그 아이와 있고 싶어서입니다.”
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여동생과 있고 싶다니, 이상한 취향의 사내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염이 누이를 생각하며 얼굴 한가득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전 제 누이와 같이 책을 읽는 것이 즐겁습니다.”
“같이 책을 읽다니? 네 누이가 책을 읽는단 말이냐? 너와 같이?”
“네, 그러하옵니다. 제가 가르치는 것이긴 하지만······.”
“그런데 예전에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은 내가 처음이라 하지 않았는가?”
염은 한동안 당황한 표정을 하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 아이는 다릅니다. 분명 제가 가르치기는 하지만 오히려 배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 누이가 몇 살인데?”
“저 보다 세 살 아래로 열넷 이옵니다.”
“그렇다면 나보다 두 살이나 아래가 아니냐? 그런데 너 같은 천재가 배우다니?
대체 무슨 말인가?”
“보통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고 하는데, 그 아이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 가지 의문을
제기 합니다. 그 아이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기 위해 저는 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즐겁습니다. 제 누이는 제게 가장 소중한 스승입니다.”
훤은 아무리 상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공부하는 여자란 신기한 존재였다.
“내게도 여동생이 있는데, 민화공주라고······. 본 적은 없겠지만 들은 적은 있을 것이다.”
“아! 한번 뵈었던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 바로 앞에서. 면부(面膚, 왕족의 얼굴)를 뵈옵진
못하였지만.”
“그래? 아무튼 민화공주도 나 보다 세 살 아래인데 어찌나 떼쟁이에다 제멋대로인지. 아는
글자라고는 하늘 천 따지 밖에 모르고. 열세 살 여자나, 열네 살 여자는 거기서 거기 아닌가?”
이때 비현각 바로 밖에서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비현각 문이 벌컥 열렸다.
문 밖에는 민화가 울면서 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옷은 당의 차림이 아니라 생각시옷을
어디서 훔쳤는지 입고 있었다. 내시들과 궁녀들이 일제히 당황하여 우왕좌왕했다.
훤이 호통 쳤다.
“너 그 꼴이 무엇이냐? 그리고 어찌 이곳에 감히 들어온단 말이냐?”
민화는 엉엉 울면서 훤에게 다가가 사정도 없이 훤을 때리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미워요! 미워!”
“왜 그러는 거냐? 뭐야!”
“날 험담했어!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사람 앞에서 저를 험담할 수 있어요?
미워! 미워! 미워!”
“대체 왜 이래!”
훤이 화를 버럭 내도 민화는 계속해서 훤을 때렸다. 뒤늦게 민상궁이 놀라서 공주를 찾으러
오자 민화는 얼른 염에게 다가갔다. 염은 공주의 얼굴을 보면 안 되기에 재빨리 고개를
숙였지만 민화는 염의 양 볼을 손으로 감싸 쥐고 강제로 자기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아니다! 세자저하 말은 모두 엉터리다. 난 떼쟁이가 아니라 정숙한 여인이니라. 천자문도 다
배워간다. 그러니.”
민화는 결국 염에게 하던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엉엉 울면서 상궁들 손에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염과 훤은 놀라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한동안 있었다. 훤이 옆의 내시에게 물었다.
“대체 쟤 왜 저러냐? 생각시 옷을 어디서 훔쳤으며 여기엔 뭐 하러 온 것인지.
하여간 철 없다니까.”
내시는 아무 말 없이 염을 한번 본 뒤 빙그레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었다. 민화의 난입으로 인해
염의 누이에 대한 대화는 끊어졌다. 하지만 며칠 가지 않아 또 다시 염의 누이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세자 간식이 있었다. 원자시절엔 수업시작 전엔 반드시 조청 두
숟가락을 먹고 시작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주로 당분으로 되어 있는 간식을 먹었다. 당분이
학습효과를 높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루는 중국에서 수입해 오는 검은 엿이 간식으로
나왔다. 단연 최고급품의 간식이었다. 훤은 염과 같이 먹기 위해 그것을 먹지 않고 기다렸다.
그런데 먹으라고 준 엿을 염은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왜 안 먹느냐? 좋아하지 않는 것이냐?”
“그게 아니옵고······, 제 누이가 좋아할 것 같아서······.”
“아! 그때 말했던 질문 많이 한다는 그 누이? 동생을 많이 귀여워하는 것 같구나. 좀 유별난 것
아니냐?”
염은 멋쩍은지 웃기만 했다. 훤은 염의 아름다운 미소를 보자 갑자기 염의 여동생이 궁금했다.
“혹시 너를 많이 닮았느냐? 널 닮았다면 굉장히 예쁠 것 같은데.”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하는 염의 표정에서 이미 누이의 사랑스러움이 묻어났다. 왠지
누이의 얼굴을 본 것처럼 훤의 마음이 이상야릇하게 설레었다. 처음 느껴보는 사춘기 소년의
감정이었다.
“저기, 혹시 누이의 이름이 어찌 되는 것이냐?”
“네? 그건 아뢸 수가 없사옵니다. 그 아인 아직 당호(堂號, 여자의 호)도 없사옵고.”
비록 아직 어린 여자이긴 하지만 사대부가의 여자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아선 안 되는
것이었다. 굳이 이름을 불러야 한다면 당호를 불러야 하는 것이 법도였다. 더군다나 세자 앞에
미혼 처자의 이름을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름만 묻는 것인데 뭐가 그리 어려우냐? 너의 성이 허씨이니 앞은 허일 테고, 이름은?”
염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이 없었다. 훤은 어쩐지 꼭 알고 싶었다. 그래서 염을 협박했다.
“흠! 내 너를 통하지 않고 네 누이의 이름을 알아내려고 하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가 있다.
그러면 오히려 일이 더 커질 텐데?”
훤은 한다면 하는 고집쟁이였기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연우, 연우라고 하옵니다.”
“연우라······. 혹여 보슬비란 뜻의 연우(煙雨, 안개비 또는 보슬비)이냐?”
“네, 그 한자를 쓰옵니다.”
“연우······.”
훤은 마음속으로도 몇 번이나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어여쁘다. 왠지 모습 또한 어여쁠 것 같구나. 한번쯤 보고 싶다.’
염이 수업을 시작 하려고 하자 훤은 얼른 옆의 내시에게 귓속말을 했다. 내시는 바깥으로
나가더니 수업이 끝나자 나타나 작은 죽통을 염에게 가져다주었다. 염은 눈으로 의문을 던졌다.
“네가 먹지 않아 따로 검은 엿을 준비했다. 가져가서 누이와 같이 먹도록 해라.”
이때 까지만 해도 엿을 보내는 훤이나 가져가는 염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엿을 보내놓고 밤에 곰곰이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이 나라의 세자인 몸으로
한 여인에게 선물을 보낸 것이 아닌가. 그것도 둘 다 혼기가 된 나이였다. 훤은 연우가 자기가
보낸 선물을 보고 어떤 반응일지 궁금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춘기 시절의 훤은
얼굴도 모르는 여자로 인해 춘밤을 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