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를 품은 달-1화 (1/47)

해를 품은 달

#1

굵지 않은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밤 길, 두 남자가 큰 나무 아래에 비를 피해 서있었다.

하지만 잎이 반쯤 저버린 가을나무였기에 비를 피하는 데는 별 효력은 없었다. 이미 마을에서

상당히 떨어져 돌아가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나무 아래에 있던 두 남자 중 한명은 사대부가의

양반인 듯 연청색 도포에 커다란 갓을 쓰고 있었고 다른 한 남자는 양반을 호위하는 무사인 듯

상투를 틀지 않은 긴 머리를 허리까지 드리우고, 등과 허리에 두개의 긴 환도(還刀)를 차고

있었다. 양반이 하늘을 보며 조용하게 말했다.

“운아. 쉬이 그칠 비가 아닌 듯 싶구나. 보슬비라 가벼이 여겼더니, 아무래도 내 고집으로

또 너를 곤혹케 만들었나 보구나.”

무사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주위의 모든 움직임을 읽고 있었다.

먼 곳을 보던 양반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반갑게 말했다.

“아! 저기 산자락에 집이 한 채 보인다. 잠시 비를 피해 가자꾸나.”

양반은 말을 끝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언가에 홀린 듯 빠른 걸음으로 산자락을 오르기

시작했다. 무사는 미처 만류하지 못하고 주위를 경계하며 뒤따랐다. 가까이 다가가 선 집은

허리 높이의 돌담이 둘러진 작고 깔끔한 초가집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대문만큼은 높고

대문처마까지 있었다. 양반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운아. 주인을 청하거라.”

하지만 무사는 말 대신 눈을 들어 대문처마 위로 솟은 솟대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무사의 눈길을 따라 양반도 눈길을 두었다.

“저것이 무엇이냐.”

“솟대이옵니다. 여긴 무당이 사는 집입니다. 드시면 아니 되옵니다.”

무사의 차분하지만 강경한 목소리에 양반은 더 이상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사는 피곤하고 추운 기색이 만연한 양반의 모습을 어찌 할 수 없어 더욱 고개만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안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져 무사의 오른 손은 재빨리 왼쪽 허리에

찬 환도의 칼자루를 잡았다. 대문 안쪽에서 터덜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바로

대문 앞에서 멈췄다. 무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대문 안쪽에 멈춰 선 자에게서 검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무사의 목소리가 대문을 가르고 들어갔다.

“누구냐!”

“어이가 없습니다. 객이 누구냐고 묻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 물음은 이쪽의 것이

아닙니까?”

퉁명스러운 여인의 목소리였다. 무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인이 어찌 검을 지녔는가?”

“놀랍습니다. 어찌 보지도 않고 제가 검을 가진 것을 아십니까? 역시······. 앗! 이런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흠! 우리 아가씨가 안으로 드시라는 말씀을 올리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검을 지녔는가!”

다시 다잡아 묻는 무사에게 여인이 투박한 답을 던졌다.

“이런 외진 곳에 여인 둘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검이라도 지니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별 시덥잖은 질문을 하십니다. 그나저나 안 들어오실 겁니까?”

양반이 무사를 힐끔 보고 말했다.

“잠시 이러고 있다가 갈 것이니 개념치 마라.”

들어가고 싶었지만 버티고 선 무사 때문에 우기지 못하는 마음이 목소리에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마치 당연히 나올 말이었다는 듯이 안에서 준비되어 있던 말을 던졌다.

“우리 아가씨가 객께서 천한 집이라 드시지 않을 것이니 이렇게 여쭈라고 하였습니다.

천한 집 방안의 따뜻한 아랫목과 천한 집 대문처마 아래가 무에 그리 다른지.”

양반의 얼굴에 호기심 어린 미소가 일었다. 이미 머리 위에 대문처마를 이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아가씨란 여인이 여쭈라고 한 말은 더 이상 집 안으로 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양반이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처마 아래보다야 아랫목이 더 상석임이 분명하니 그럼 실례를 하겠노라.”

양반이 대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성큼 들어서자 무사도 어쩔 수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말하던 여종은 이미 앞서서 뒷모습을 보이며 좁은 마당을 지나고 있었다. 여종은 열린

방문을 가리키며 안으로 들어가란 몸짓을 한 뒤 어디론가 가버렸다. 두 나그네는 여종이

들어가라고 한 방 안에 들어갔다. 그 방 안에는 은은한 난향이 가득 차 있었고 아랫목에는

소박한 소반 위에 간단한 술과 안주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직 겨울철도 아닌데

화로가 따뜻하게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었다. 양반이 아랫목을 차지하고 앉고 그 사선으로

무사가 무릎 꿇고 앉았다. 양반이 화로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마치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구나. 그런데 보통 무당의 방이 이러한가?”

무사도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흔한 방울하나 없는 것이 일반 밧집(민가)과 다른 점이 없사옵니다.

무당의 방이 아닌 듯하옵니다.”

“음······, 여긴 여인의 방이라기 보다는 청렴한 선비의 방인 듯하구나. 방안 가득 차 있는 난향이

그러하거니와 책들 또한 그러하다.”

양반은 손을 뻗어 책장에 빼곡하게 꽂힌 책들 중에 한 권을 꺼내 보았다. <오경천경록>이란

책이었다. 또 그 아래에는 <대학혹문>이 보였다. 양반이 의아해 하며 말했다.

“분명 여인 둘만 사는 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 이런 책들이 있단 말인가.

바깥양반이 쓰던 방인가?”

양반은 인기척이 들리자 책을 얼른 제자리에 놓았다. 네 폭 방문이 가로막힌 건넛방으로

아가씨란 여인이 들어 온 듯 했다. 이윽고 가운데 두 폭의 문이 양쪽으로 소리도 없이 조용히

갈라졌다. 조심스럽게 사이방문이 열리긴 했지만 방과 방 사이엔 발 하나가 가로 막혀 여전히

건넛방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양쪽 방에 등잔불이 켜져 있었지만 어둠이 등잔불빛을 삼키고

있었기에 별 효력은 없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우아하고 기품 있는 여인의 자태뿐이었다.

“소녀, 인사 여쭙습니다.”

짧은 말을 흘리는 목소리는 천상의 것인 양 마음속을 울리며 방안 가득 난향과 더불어 퍼졌다가

사라졌다. 언뜻 보이는 머리 모양새가 길게 댕기를 드린 것으로 보아 처녀임이 분명했다.

조금 전의 여종도 댕기머리였기에 양반은 방안의 광경이 더욱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발 너머의 여인이 두 손으로 이마를 받히고 큰절을 올렸다. 천천히 절을 하는 여인의 자태가

범상치 않아 두 나그네는 넋을 잃고 마치 춤사위를 보듯 절을 받았다. 하지만 여인은 일배로

그치지 않고 두 번째 절을 올렸다. 이배는 자고로 죽은 자에게 올리는 절이기에 두 나그네의

인상이 찌푸려 질 수밖에 없었다. 양반이 무례하다고 외치려 하자 여인의 삼배가 이어졌다.

삼배란 부처에게 올리는 절이라 어리둥절해지려던 순간 여인이 네 번째의 절을 올렸다.

양반이 깜짝 놀람과 동시에 무사의 오른손은 재빨리 왼쪽 허리에 찬 환도의 손잡이를 잡아

반쯤 빼내었다. 사배란 천자, 즉 국왕에게 올리는 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객으로 찾아든

양반은 실제 현재 조선의 23살 젊은 국왕, 이 훤이었다. 절을 끝낸 여인은 고개를 바닥에 붙이고

몸을 최대한 낮추었다. 훤이 놀란 감정을 숨기고 미소로 말했다.

“얼굴을 들어라.”

여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운 왼쪽 무릎 위에 두 손을 다소곳하게 포개 얹고는 그림처럼

앉았다. 성긴 발이었지만 여전히 여인의 얼굴은 육안으로 느낄 수가 없었다. 훤이 다시 물었다.

“어이하여 사배를 하였느냐. 수를 셀 줄 모르는 것이냐?”

“태양에 대한 예를 갖추었을 뿐이옵니다.”

사람의 마음을 요동치게 할 만큼 아름다운 음성이었다. 훤이 그 음성에 말을 이었다.

“태양이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아녀자에게 태양은 지아비를 일컫는 것이 아니더냐?”

“아녀자도 조선의 백성이옵니다.”

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왕이란 것을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번에는 여인이 말했다.

“가진 것이 없는 세간이라 초라하디 초라한 소반이옵니다. 하지만 소녀의 정성으로 준비한

것이니 한 모금이라도 음하여 주시옵소서.”

훤은 여인의 얼굴이 궁금했다. 음성과 자태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그 궁금함이 더해졌다.

“얼굴을 보여 예를 올려라. 얼굴도 모르는 자가 올린 술을 어찌 마시겠느냐.”

“엷게 내리는 비라 할지라도 성체(聖體, 왕의 몸)의 온기를 앗아 가나이다.

온주(溫酒)이오니 부디······.”

“운아. 발을 치워라.”

운의 칼날이 눈 깜짝 할 사이에 방안을 크게 횡회하고 허리의 칼집으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방과 방을 가로막고 있던 발이 싹둑 잘려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운의 칼날에 베어진 것은

비단 발 하나만은 아니었다. 하늘의 먹구름도 칼날에 두 동강이 났는지 순간 비를 흩뿌리던

먹구름이 물러가고 달빛을 방안 가득 불러들였다. 훤은 눈앞으로 칼날이 지나갔음에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앉아있는 여인에게도 놀랐지만 더욱더 놀란 것은 여인의 아름다운

용모였다. 훤은 놀라움을 역정으로 대신했다.

“아무리 미천한 객이라고 하더라도 집 안으로 들였으면 안면을 보여 인사하는 것이 주인의

도리이거늘, 어째서 명을 받잡지 아니한 것이냐.”

“소녀 비록 세상이 정한 신분이란 굴레에 얽매인 비천하디 비천한 몸이오나, 또한 하늘이

정해준 여인네이옵니다. 하여 주인 된 도리는 생각치 아니 하고 여인 된 도리만

생각하였사옵니다. 내외법을 따른 소녀의 어리석음을 탓하시옵소서.”

“사대부가가 아님에도 내외법을 따르느냐?”

“비천한 자는 내외법을 따르면 안 된다는 법 또한 여지껏 들어본 적이 없었사옵니다.”

훤은 빙그레 웃으며 술병을 잡았다. 이제까지 왕 앞에서 이렇게 공손한 듯 당당하게 의사를

밝히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손에 잡힌 술병이 따뜻했다. 훤은 소반 위에 놓여 진 두 개의 잔에

각각 술을 부었다. 한 잔을 운에게 밀었으나 운은 술잔에 눈을 두지 않고 방바닥만 보고 있었다.

현재 왕을 호위 중이니 입에 술을 댈 수 없다는 뜻이었다. 비에 젖은 것은 운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훤은 걱정되어 한 번 더 잔을 밀어보았다. 하지만 운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여인이 말했다.

“참으로 불충한 분이십니다. 소녀가 어떤 자인지도 모르는데 그 술에 뭐가 들었는지 알고

기미(氣味)를 마다하시옵니까? 검으로만 운검하실(운검하다:왕을 경호하다) 것이옵니까?”

여인의 말은 또 다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는 수없이 운은 훤에게서 몸을 돌려

술 한 잔을 마셨다. 돌린 고개로 인해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향긋한 난향이 따뜻함과 더불어

온몸에 퍼졌다. 그리고 훤의 호탕한 웃음소리도 방안에 퍼졌다. 훤은 술잔을 입에 기울이자

코로 향긋하게 먼저 들어와 혀끝을 자극하는 향기에 놀랐다. 눈을 감고 그 향을 몇 번이나

음미하며 말했다.

“난향이 나는 술이라······.”

“난향이 아니옵고 울금초로 향을 낸 온주이옵니다. 울금향이 난향과 비슷하지요.”

“이 술은 울금향인지 모르겠으나 방안 가득 차 있는 것은 분명 선비의 향이다.(난향을 곧

선비의 향이라고 함) 그나저나 무슨 연유로 나에게 국왕의 사배를 올렸느냐.”

“어리석은 소녀가 먼저 여쭙겠습니다. 태양이 밤하늘에 걸린다면 그것은 태양이옵니까,

달이옵니까?”

훤은 답하지 않고 술을 마신 뒤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여인이 다소곳하게 말했다.

“태양은 그 어디에 있어도 태양이듯이 상감마마께옵서도 그러하옵니다. 그 광채에 어찌 눈이

부시지 않겠사옵니까.”

“마을 사람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던 것을 그대는 어찌 알아보느냐.”

여인의 대답이 없자 훤은 술잔을 손에 들고 그 따뜻함을 느끼며 혼자 중얼거렸다.

“준비되어 있는 술상과 준비되어 있는 화로······.귀신에 홀리고 있는 것인가······.”

여인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아름다운 음색으로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아뢰면 되올련지요. 운검(雲劒, 조선시대 왕의 보검을 말하기도 하고, 동시에

조선시대에 있었던 왕의 최측근호위무사의 관직명이기도 함)과 별운검(別雲劒, 최측근호위무사

였던 운검의 환도)을 보고 알았노라고······.”

훤이 운을 쳐다보았다. 운은 훤이 아닌 여인을 보았다. 훤은 다시 여인을 보며 물었다.

“이리 외진 곳에 사는 여인이 어찌 운검과 별운검을 아느냐?”

“조금 전 환도를 지니고 있던 여인이 검을 조금 알고 있사온데, 칼집은 어피(魚皮)로써 싸고,

색은 주홍색(朱紅色)이며, 백은(白銀) 장식이 있으며, 홍도수아(紅?穗兒, 붉은 끈과 술)로써

드리우고, 띠는 가죽을 사용하고, 칼자루에 구름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일반 환도 길이보다

한 자(30cm)는 더 긴 것은 세상에 단하나 있는 운검이라 하였나이다.”

훤과 운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운검의 존재를 한양 내에서도 아닌 이런 지방의 여인이

알고 있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훤은 시치미를 한번 떼어보기로 했다.

“그런 것 정도면 얼마든지 가짜로 만들어 가지고 다닐 수가 있는 것 아니더냐.”

흔들림 없는 단아한 모습 그대로 여인이 답을 올렸다.

“백은 장식과 환도의 길이는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들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운검 길이의

환도는 패용할 수 없는 것 아니옵니까?”

“법을 어기는 자도 있지 않느냐.”

“하오나 절대 가짜로 흉내 내지 못하는 것이 있사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그 운검(검)을 등에 짊어진 자, 운검(관직명)나으리십니다.”

“그렇지. 나의 운 만큼은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지. 하하하.”

훤은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술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23살의 젊은 무사, 운검(雲劒). 김 제운(金題雲)! 조선팔도에서 헛으로 라도 검을 쥐어 본 자들

중에 운검 김 제운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따를 자가 없는 검술도 유명했지만 그 수려한 외양은

검술만큼이나 유명했다. 왕을 호위하는 운검의 자격 요건 중에 뛰어난 무예실력과 문과급제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 수양, 병법의 지략, 6척(180cm)이 넘는 키, 단려(端麗, 단정하고

아름다움)한 외모. 이 모든 자격 요건을 갖춘 사내는 김 제운만이 유일했다. 단하나 서얼 출신

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그런 운검 김 제운 못지않게 잘생긴 훤이 다시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참으로 대단한 눈을 가졌구나. 이 거리와 이 어둠 속에 그리도 자세히 운검의 칼자루 구름문양

까지 볼 수 있다니. 아니, 보기도 전에 알다니. 역시 귀신에 홀리고 있는 것인가······.”

한참동안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들여다보고 있던 훤은 눈동자만 들어 여인을 차근차근

쳐다보았다. 왕의 시선이 느껴짐에도 여인은 아무 미동이 없었다.

“이리 가까이 다가와 앉으라. 건넛방에 앉아 있으니 치마 아래로 꼬리 아홉 개를 숨기고 있는 지

알 수 없지 않느냐.”

잠시 망설이던 여인은 살며시 일어나 문지방 너머로 발을 들였다. 치마 아래로 살짝 모습을

보이고 금새 숨어버린 하얀 버선발이 여인의 젖가슴마냥 봉긋하여 훤은 애써 술잔을 비우는

것으로 눈길을 접었다. 여인은 문지방만을 넘어온 거리에 다시금 다소곳하게 자리 잡고 앉았다.

다가온 거리만큼 난향도 짙어졌고, 달빛도 짙어졌으며, 또한 여인의 미색도 짙어졌다.

달빛으로 길쌈을 한 소복을 입었는지 옷에서 조차 하얀 달빛을 품어내고 있었다. 좁은 방이라

가까이에 마주하고 앉은 셈이지만 훤의 마음엔 그 거리조차 지척으로 느껴졌다. 훤의 마음을

대신해 등잔불빛이 파르르 떨렸다.

“참으로 요기스러운 미색이구나. 이것은 어둠의 조화냐, 달빛의 조화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 생각하는 어리석은 눈의 조화이옵니다.”

여인의 말에서 알 수없는 원망이 느껴졌다. 훤이 다시 사람 같지 않은 그 미색에 의문을 던졌다.

“귀신이냐······, 사람이냐······?”

“뭇사람들은 소녀를 일컬어 사람이 아니라 하더이다.”

여인의 말은 바람 한 점 섞임이 없이 단정했다. 그래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말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하면 정녕 귀신이란 말이더냐.”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한 맺힌 넋이 바로 소녀이옵니다.”

“나를 농락함이더냐. 세상천지에 그림자가 있는 귀신도 있다더냐.”

“거짓을 아뢰지는 않나이다. 노비보다 비천한 무녀(巫女)를 어느 누가 사람이라 한다더이까.

하여 감히 사람이라 답 올리지 못하옵니다.”

자신을 스스로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그 말에도 감정의 느낌은 실리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가슴 한구석이 무너질 것 같은 야릇한 감정을 목소리에 실은 건 훤이었다.

“무녀······. 무녀였구나. 그래서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나보구나.”

“아니옵니다. 소녀는 비록 무녀이나 예지하는 신력도, 사람을 읽는 신력도 없사옵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녀이옵니다.”

“그런 무녀도 있느냐?”

“송구스럽게도 그러하옵니다. 단지 이곳에 이리 사는 것만이 소녀가 할 수 있는 신력의

전부이옵니다.”

“도통 알 수 없는 말만 하는구나. 운아, 너는 들은 적 있느냐?”

운은 여인을 힐끔 본 후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도 들은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훤이 의아해 하며 말했다.

“정녕 무녀가 맞단 말이냐?”

“끊을 수없는 질긴 목숨으로 이렇게 무녀로 살고 있사옵니다. 무녀로 아니 살 수 없기에,·

·····이리 사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여인에게서 훤이 오히려 알 수없는 서글픔을 느꼈다. 그녀에게 다가가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대 이름이 무엇이냐.”

“아무개라 하옵니다.”

“이름이 무어냐고 물었느니.”

“지엄한 법도가 있사옵니다. 상감마마의 안전에 어느 것인들 미물이 아니오니까.

아무개라고만 아뢰올 수 있게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왕 앞에서는 신분이 낮은 자는 이름을 말하면 안 된다는 법도를 빌려 답하지 않는 여인에게

훤은 답답하여 음성을 높였다.

“어허! 고약한 여인이로고. 어찌하여 여러 번 묻게 하는 것이냐. 다시 한 번 묻겠다. 이름이

무엇이냐. 사람이면 성과 이름이 있을 것이다. 그대가 정녕 귀신이 아니라면 이름을 고하라.”

여인은 달빛에 눈이 시린 듯, 슬픔에 눈이 시린 듯 고운 눈동자에 짙푸른 설움을 담더니

목소리만은 더 없이 평온하게 말했다.

“본디 성이라 하오면 아비가 있는 자가 받는 것이옵고, 이름이라 하오면 어미가 있는 자가

받는 것이옵니다. 소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사와 그 어느 것도 받지 못하였나이다.”

“이름이 없더란 말이냐?”

“소녀······, 이름 없이 살았나이다.”

“어허! 답답하다. 나를 또 농락하는 것이냐?”

“소녀, 거짓을 아뢰지는 않는다고 분명 하였사옵니다.”

훤이 갑갑한 심정을 술 한 잔으로 마시고 다시 물었다.

“무녀에겐 반드시 신모(神母)가 있다 들었다. 그대의 신모는 그대를 무어라고 이름하였느냐?”

“소녀의 신모는 소녀를 단 한 번도 이름하지 않았나이다.”

“어찌 이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이름하여 묶이는 인연이 무섭다하여 소녀에게 이름하지 아니 하였나이다.”

“그대의 나이는 그럼 어찌되었느냐?”

“햇수를 헤아려 본적이 없었으매, 그 또한 알지 못하옵니다.”

“이곳에서 산지는 오래되었느냐?”

“기나긴 세월, 이곳에 갇혀 살았사옵니다. 참으로 오랫동안······.”

“하지만 그대의 말은 이 고을에서 들은 방언이 아니다. 한양의 말이니 필시 이곳 사람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는 어디의 누구였느냐?”

여인은 왕에게 아뢸 수 없는 슬픔을 달님에게 아뢰듯 긴 눈길을 들어 창밖의 둥그런 달을

보았다. 여전히 목소리는 담담히 답했다.

“그것은 이미 전생이 되어버렸을 만큼의 먼 이야기 인지라 소녀, 기억치 못하옵니다.”

훤이 화를 담아 술잔을 소반 위에 사정도 없이 쾅하고 내려놓았다.

“그리도 많은 질문을 하였는데 어찌 내가 들은 답은 하나도 없는 것이냐!”

“많은 답을 하였사온데, 상감마마께옵선 아무 것도 수렴치 아니하였사옵니다.”

“대체 무엇을 답하였느냐! 이름을 답하였느냐, 나이를 답하였느냐? 어떤 무녀인지도 답하지

않았는데! 무녀이기는 한 것이냐?”

“답을 답이 아니라 하오시면 소녀가 거짓을 아뢰어 드리리까? 거짓을 아뢰면 답을 들었다

화락(和樂)해 주시겠사옵니까?”

훤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술잔만 입에 기울였다. 한동안 세 사람 사이에는 어둠만이 켜켜이

자리했다. 훤은 그 어둠의 틈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입을 열어 명령했다.

“그 자리도 멀다. 가까이 다가와 앉으라.”

여인이 한 두어 걸음 당겨 앉자 훤이 다시 말했다.

“그 자리도 멀다. 더 가까이 다가와 앉으라.”

결국 여인은 훤이 손을 뻗히면 닿을 거리까지 와서야 자리 잡고 앉을 수 있게 되었다.

훤의 마음에는 그 거리도 지척이었지만 더 이상 당겨 앉을 공간이 없었기에 더 가까이 오란

명령을 하지 못했다. 훤의 눈앞에 백옥보다 하얀 여인의 얼굴이 있었다. 짙고 긴 속눈썹이

있었고 그 아래 깊이 있는 새까만 눈동자가 있었다. 그리고 운의 눈앞에는 여인의 그늘 진

슬픈 옆얼굴이 있었다. 사람의 앞모습은 거짓을 말해도 옆모습은 마음의 표정을 담는다고

했기에, 운에게 보이는 슬픈 모습은 분명 마음의 표정이었다. 운은 여인의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훤이 긴 숨을 삼키며 말했다.

“그대에게로 흐르는 내 마음이 보이느냐?”

“달여울에 어른거려 보이지 않사옵니다.”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아니 보겠단 말이냐? ·······그대를 안으면 아니 되는 것이냐?”

“남겨두고 가시는 걸음이 무거우실까 저어되어 옷고름을 여미겠나이다.”

“남겨두고 가지 않을 것이다. 너를 데려 갈 것이다. 그럼 안게 해줄 것이냐?”

“소녀는 이곳을 떠나면 아니 되는 몸입니다. 정박령(碇泊靈, 한 곳에만 머무르며 그 곳을

떠날 수 없는 귀신)의 처지이옵니다.”

“주상인 내가 널 데려간다고 했다. 떠날 수 없어도 나를 따르라.”

“하늘 아래엔 섞일 수 있는 것이 있고, 섞일 수 없는 것이 있고, 섞이면 안 되는 것이 있사옵니다.

주상과 무녀는 너무나 멀리 있기에 섞이면 안 되는 것이옵니다.”

훤이 거부하는 여인을 질책하듯 소리를 높였다.

“섞일 수 없는 이유를 말하라! 내가 되게 하겠다!”

“하늘은 존엄하고 땅은 가까우니 건과 곤이 생기고, 가깝고 존엄한 것이 위아래로 배열되니

귀하고 천함이 생긴다고 하였사옵니다. 그 귀함은 귀함으로 어우러지고 천함은 천함으로

어우러져야 천지가 평온하다 하였사옵니다.”(<주역-계사전>中)

“나도 <주역>을 읽었지만 그리 배우지 않았느니라. 하늘이 곧 건이라 존엄하여 귀한 것과,

땅이 곧 곤이라 단지 가깝다고 하여 천한 것이 아니라 친근히 여겨야 하는 것이니 땅이 어찌

천한 것이리라 배웠다. 귀하고 친근함이 서로 변화를 주고받음으로 자연의 질서가 돌아간다고

배웠느니라. 그러니 백성도 친근하고 존엄하다 배웠느니라.”

“하늘이 존귀하고 땅이 비천한 것은 영특한 자연의 계급이라 하였사옵니다. 봄과 여름이 먼저

오고 가을과 겨울이 뒤에 오는 것이 사계절의 순서인 것처럼, 대저 하늘과 땅 모두 가장 신령한

것임에도 존귀하고 비천함, 앞서고 뒤짐의 서열이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야 말해 무엇 하리라

하였사옵니다.”(<장자-외편>中)

“나의 스승은 내게 <장자>를 그리 가르치지 않았다. 앞서는 것이 군주고 뒤서는 것이 백성이나

앞서는 군주가 본보기로 모범을 보여야 뒤따른 백성이 더불어 어질어진다 배웠느니라.

내가 어질어지면 백성도 어질어지고 내가 존귀해지면 백성도 존귀해지니 그것이 서열이라

배웠느니라. 내가 그대를 안는다 하여 내가 비천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도 나와 더불어

존귀해질 것이니라. 그것이 도의 질서라 알고 있느니라.”

“참된 도를 말하면서 그 질서를 말하지 않으면 도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저를 품지 않으시는

것이 신분의 질서이며 백성의 모범이시옵니다. 그것이 참된 도이십니다. 소녀는 비천한

몸이옵니다. 상감마마와 교합해선 안 되는 신기를 담은 그릇이옵니다. 이름조차 없는

천것이옵니다.”

여인이 담담히 또박또박 아뢰는 말에 훤은 더 애가 타서 말했다.

“나 또한 이름 없기는 마찬가지다. 태어나자마자 원자로 책봉 되어 이름을 가져선 안 되었고,

세자가 됨과 동시에 훤(暄)이란 휘(諱, 왕의 이름)가 내려지자 그 순간부터 어느 누구도

그 이름을 입에 담아선 안 되는 것이 되었다. 나에겐 훤이라 불러주는 이도, 일성(日成)대군이라

불러주는 이도 없이 단지 세자로만 불리었다. 왕이 된 지금은 훤이란 내 이름은 글로도 써서는

안 되는 이름이 되었다. 이러하니 그대와 나의 처지가 이름이 없기는 매한가지가 아니더냐.”

“같지 않사옵니다. 천지가 다른 것 보다 더 다르옵니다.”

흔들림 없는 돌 같은 느낌이었다. 더 이상 이을 말이 없었던 훤은 한참을 조용히 생각하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그렇다! 그대의 신모가 그대와 묶이는 인연이 무섭다하여 이름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대에게

이름을 명하면 그대와의 인연이 묶인단 말이렷다. 그러하면 내가 그대에게 이름을 명하겠노라.”

이번만큼은 여인도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세상 인연이 어찌 좋은 인연만 있다 하더이까. 찰나에 불과한 인연에 이름을 명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심중을 거두어 주시오소서.”

훤은 여인의 말은 안 듣고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했다.

“무어라 이름하는 것이 좋을까·······.”

“이어져선 아니 되는 인연이옵니다. 찰나의 인연이어야 하옵니다.”

훤은 간곡한 여인의 말을 외면하며 창밖의 달을 보았다. 이번엔 훤이 돌이 되기로 한 모양인지

흔들림 없이 여인의 이름을 명했다.

“그대가 달을 닮았느냐, 달이 그대를 닮았느냐······. 내 그대를 월(月)이라 이르겠노라.”

훤이 이름을 명한 순간 여인은 월이 되었다. 월이 되어버린 여인의 깊이 있는 눈동자를 떨리는

눈꺼풀이 덮었다. 감정을 담은 눈동자가 가려졌기에 그 눈동자에 기쁨을 담았는지 슬픔을

담았는지, 아니면 두려움을 담았는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은 훤은

그것만으로도 월과의 인연이 이어진듯하여 안심이 되었다. 훤은 손을 뻗어 월의 얼굴을

쓰다듬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의 복사꽃 같은 볼을 차마 쓰다듬지 못하고 손을 거두었다.

왠지 손을 대면 그 즉시 그녀의 몸이 재로 변해 폭삭 내려앉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단정한 손목 한번 취하지 못하고 술잔만 잡았다.

“오늘만 날이겠느냐. 내 그대의 이름을 알고,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그대의 신세를 아는데

다음도 있지 않겠느냐. 세상의 만물은 온 곳이 있고 갈 곳이 있는데 그대와 같은 사람이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인지······.”

훤은 술잔을 비우고 월의 앞으로 그 술잔을 내밀어 술을 채우며 다시 말했다.

“존재하는 만물은 오고 또 와도 다 오지 못하니, 다 왔는가 하고 보면 또다시 오네, 오고 또

오는 것은 시작 없는 데로부터 오는 것, 묻노니 그대는 처음에 어디로부터 왔는가.”

(화담 서경덕의 <유물> 1연)

훤이 읊조린 시는 월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묻는 듯 하지만 이것은 월에게만 묻는 것이

아니었다. 훤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알 수없는 감정에 대한 근원을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오늘밤의 이 만남을 시작으로 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했다.

월은 훤이 채워준 술잔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훤의 마음을 보지 않겠다는 의지인지 눈을 감은

그 상태로 조용히 답하듯 말했다.

“존재하는 만물은 돌아가고 또 돌아가도 다 돌아가지 못하니, 다 돌아갔는가 하고 보면 아직

다 돌아가지 않았네,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끝까지 가도 돌아감은 끝나지 않는 것,

묻노니 그대는 어디로 돌아갈 건가.”(화담 서경덕의 <유물> 2연)

훤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시가 의미하는 바는 알겠는데 월이 의미하는 바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훤은 월이 건드리지도 않은 술잔을 들어 자기 입속에 넣고는 물었다.

“나에게 무엇을 말하였느냐.”

“뒷부분을 채워드리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밤이 인연의 마지막이니

다음을 기약하지 마시라는 청이었습니다.”

“화담의 시를 아는 무녀가 있다니······.”

“화담의 시를 아옵시는 임금도 계시더이까.”

훤은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화담의 글은 어렵다 하여 쉽게 읽을 수 없는 글이긴 하지만 정학이

아니라 사학이라 하여 왕이 배워선 안 되는 학문이기도 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여인이

신기했던 것이다. 월이 다시 말했다.

“이곳은 여(廬, 나그네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곳)일 뿐이옵니다. 그러니 이제 가시오소서.

비는 그치었고, 온기가 채워지매 술병은 비워졌으니 이제 행궁(行宮, 왕의 별장)으로

돌아가셔야 하옵니다.”

훤은 갑자기 밀어내는 월이 서운했다. 월에게 서운했다기보다는 헤어지기 싫은 마음에 이리

마주한 시간이 서운했다.

“같이 가자. 날이 밝거든 나와 같이 가자.”

“지금 가지 않으시오면 운검나으리께 어떤 화가 미칠 것인지 여쭈고 싶사옵니다.”

월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몰래 행궁을 빠져나와 마을에 미행을 간 것이었기에 이일이

잘못되면 훤에게 책임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책임이 운에게 날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공격은 언제나처럼 운의 신분인 서출에 맞춰져 곤혹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비와 달이 함께 있는 밤이옵니다. 채워진 온기를 빼앗기지 않게 조심하여 가시오소서.”

“월아! 내 너를 반드시 다시 찾을 것이다. 기다려다오.”

“오늘밤이 인연의 마지막이라 아뢰었사옵니다.”

“난 분명 우리 인연의 시작이라 하였다. 그러니 내 그냥 갈 순 없다. 그대에게 정표를 받아가고

싶느니.”

월은 정표라는 말에 감고 있던 눈을 떠, 알 수 없는 서글픈 미소를 보였다. 훤은 처음으로 미소를

보인 월이 반가워 몸을 바짝 다가가 앉았다. 월이 변함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소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상감마마께옵서 이름으로 하사하신 저 달이

전부이옵니다.”

훤은 고개를 들어 휘영청 밝아진 달을 보며 미소로 말했다.

“그러면 정표로 그대의 전부인 저 하늘의 달을 받아가겠노라.”

월이 힘들게 끊어내는 인연을 훤은 끊임없이 이어대었다. 월이 간곡하게 말했다.

“아니 되옵니다. 부디······, 거두어주시옵소서.”

“나에겐 아니 될 것이 없다! 내 그대에게 받아간 저 달에, 그대에 대한 나의 마음을

묶어두겠노라.”

“······하오면 소녀도 정표를 청해도 되올련지요.”

훤은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조급하게 말했다.

“무엇이든 말하라. 다 들어주겠노라.”

“원컨대 오늘밤의 짧은 기억을 베어서 주시옵소서.”

“베어서 두고 가면······, 그대는 나의 기억까지 품겠다는 말이더냐.”

훤은 오늘밤 일을 잊으라 말하는 월이 원망스러웠다. 아주 잠시 마주하고 앉았을 뿐인데 감정의

길이는 길어져 감이 더 원망스러웠다. 재빨리 자리를 옮겨 다니는 달도 원망스러웠다.

“알 수가 없구나. 정말 알 수가 없구나. 어찌 내 마음이 이리도······.”

“가시오소서.”

“야속한 여인이구나. 무정한 여인이야. 들어오라 하여 들어왔거늘 이젠 가지 않겠다 하는 데

밀어내는 심보는 무엇이냐. 내 오늘은 이리 가나 이 인연을 이어갈 것이다.”

“아무것도 없었던 인연이었사옵니다.”

“몸을 섞은 인연만이 인연이던가, 마음을 섞은 우리의 인연도 인연이니라. 그대 입으로 내게

거짓을 아뢰진 않는다 말하였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 간에 아무것도 섞이지 않았다 하진 못할

것이다. 그대를 지금 취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그대를 귀이 여기기 때문이니 앞으로 비천하다

입에 담지 말라. 글을 아는 이는 신분이 천해도 그 인품까지 천하지 않다 하였다.

그러니 이대로 달만 품고 가겠노라.”

아무 말도 답하지 않는 월을 두고 훤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침묵하며 고개 숙이고 있던

운이 훤보다 한발 늦게 일어섰다. 월은 돌로 빚은 돌부처 마냥 아무 미동도 없이 그대로

앉아만 있었다. 훤과 운이 대문을 나서자 헐레벌떡 뛰어 나온 것은 부엌에 있던 여종이었다.

떠나가는 그들을 지켜보던 여종은 황망한 표정으로 발만 동동 굴렀다. 산자락을 무거운

걸음으로 내려온 훤이 달만 보고 걸음하며 운에게 말했다.

“운아. 마음이 아려 차마 돌아보지 못하겠구나. 대신 봐다오. 혹여 월이 나를 보고 있느냐?”

운은 왕의 명령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마음에 의해서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돌아보았다.

멀리 낮은 담 안으로 여종이 이쪽을 원망스럽게 보고 있었다.

“보고 있지 않사옵니다.”

훤은 조용히 탄식하듯 말했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내 마음이 덜 아리지. 운아, 달빛이 이리도 눈부신 줄 예전엔 미처

몰랐구나.”

방 안에 여전히 돌부처마냥 앉아 있던 월이 여종에게 물었다.

“설아. 가시는 것이 보이느냐?”

여종인 설이 울분 섞인 말을 했다.

“네! 가셨습니다. 가시고야 말았습니다!”

“혹여 이쪽을 한번쯤은 돌아봐 주시더냐?”

“아뇨! 단 한 번도 돌아봐 주시지 않고 그대로 가버리셨습니다!”

월은 조용히 탄식하듯 말했다.

“그래, 그러셔야지. 그래야 내 마음이 덜 서글프지. 설아, 달빛이 이리도 눈부신 줄 예전엔 미처

몰랐구나.”

“왜 배웅하시지 조차 않으십니까! 왜 그렇게 앉아만 있으시는 겁니까!”

월은 은은한 미소로 조용히 말했다.

“그분을 이쪽으로 인도한 촉촉한 보슬비가 풀 위에 쉬다가, 땅 위에 쉬다가, 바람결에 묻혀

쉬다가 그분의 도포자락이 스칠 때마다 어복(왕의 옷)에 스며들고, 어혜(왕의 신발)에 스며들고,

어립(왕의 갓)에 스며들어 행궁까지 내 마음을 실어 배웅할 것이니······.”

같은 시간, 한양 경복궁 내의 소격서(昭格署, 조선시대 제천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

예조에 속해 있었음.) 뜰에 혜각도사(도사:소격서의 정 4품의 관리. 국가자격증이 있는 도인)가

하늘을 보고 있었다. 비의 내음을 품은 바람이 눈물 섞인 바람인양 하늘에 떠있는 달로 솟구쳐

오르자 참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맺힌 한이 드디어 울음 하였구나.”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본 도류(아직 도사에 이르지 못한 공부하는 생도. 소격서의 종 8품의 잡직)

가 머리를 숙여 물었다.

“도사님. 어이하여 슬픔을 담으십니까?”

“하늘도 보인 슬픔이다. 내가 어찌 하늘을 닮지 않을 수 있겠느냐.”

“소인은 아직 수도가 부족하여 하늘을 읽을 줄 모릅니다. 하지만 불길한 것은 느낄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옵니까?”

혜각도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달만 쳐다보았다. 도류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금 오던 길에 관상감청(觀象監, 조선시대 천문·측우, 지리·풍수, 역학·점복·음양술 등의 일을

관장하던 관청. 소격서와 같이 예조에 속해 있었음.)을 지나쳤사온데, 그곳의 발걸음도 바빠

보였습니다. 미천한 소인의 눈으로는 온양행궁에 행차해 계옵신 상감마마께 혹여 무슨······.”

혜각도사는 여전히 달만 쳐다보다가 고개를 떨구고는 슬프게 말했다.

“발걸음이 바쁜 곳이 비단 관상감뿐이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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