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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66화 (66/70)

66화

* * *

그때 확실히 해결을 해야 했는데.

집에 또 갇히기 싫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그냥 흘려 넘기듯 넘겼더니 뻔뻔하게 낯짝을 들고 온다.

“역시. 뒷모습만 봐도 너였어.”

지트 트레쉬가 성큼 다가왔다.

“거기 서. 다가오기만 해.”

리티아가 한 걸음 더 가까이 오려는 지트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몇 번이고 네게 편지를 보냈는데.”

“하나도 못 받았는데. 아는 척하지 말라던 내 말이 기억 안 나?”

사람들도 저 멀리 떨어져 있겠다. 지트에게는 예의를 다 집어치워 버렸다.

“리티아. 그냥 나는 너랑 제대로 대화를 하고 싶어서 그래. 일방적으로 헤어지자고 한 건 너였잖아.”

“그래,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한 게 뭐가 문제야? 네 꼴이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더 해줘야 해?”

지트가 틈을 타 가까이 다가오려고 했다.

리티아가 손을 뻗어 바닥을 가리키자 움찔 멈춘다.

“나는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난 단 한 번도 널 정리한 적이 없어. 네가 다른 여자 만나는 거 싫다고 해서 다른 여자도 안 만났어. 결백해, 정말이야. 그러니까 이제 그만 마음 풀고…….”

리티아는 진한 두통을 느끼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지트,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네가 여자를 만나든 남자를 만나든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아니, 네가 코끼리와 사귄다고 해도 아무 관심 없을 거야. 처음부터 너한테 관심이 티끌만큼도 없었어. 그냥 네가 사귀자고 하니까 얼떨결에 허락했던 거지. 널 좋아해서가 아니야.”

그러자 지트가 웃음을 흘린다.

“리티아, 거짓말하지 마. 내 관심이 필요해서 일부러 그날 화를 낸 거잖아. 늘 알았다는 대답만 하던 네가 그날 화를 낸 이유를 너무 늦게 알았어.”

뭐라는 거야.

리티아는 가려던 테라스 쪽에서 떨어졌다.

괜히 저 쓰레기한테 저 공간을 들키고 싶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지트가 그 거리만큼 다가왔다.

“오지 말라고.”

“티아, 내가 미안해. 이제 안 그런다니까. 너만 신경 쓰고, 너만 본다니까. 정말이야. 내게 한 번만 기회를 줘. 한 번은 기회를 줘야 하잖아. 오히려 변한 건 너라고.”

“너 귀먹었니?”

“……뭐?”

“싫다니까. 네가 싫다고. 네 얼굴이 별로야. 네 성격도 별로고. 애초에 널 좋아한 적이 없다니까. 얼마나 더, 뭘 말해줘야 네가 알아들을까?”

그러자 지트가 충격 어린 얼굴을 했다.

그것마저도 리티아는 어이가 없었다. 방금 이렇게 무례하게 말해본 적이 생에 있었나 할 정도로 리티아는 단번에 떨어뜨리기 위해 말을 꺼낸 거였다.

여태 스스로 귀를 막고 안 듣고선 난생처음 소리를 듣는 것처럼 구는지.

폭력을 쓴다면 쓰라지. 소리만 지르면 올 사람 천지였다.

예전의 리티아가 거절도 못 하고 벌벌 떨고, 그가 원하는 걸 사주고, 끌려다니고, 심지어 기다리기까지 하는.

그런 호구 같은 짓은 절대 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왜.

“내 얼굴이 별로라고……?”

지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굴었다.

물론 리티아도 다른 사람과 별다르지 않은 심미안을 가지고 있으니 그의 얼굴이 나쁘지 않다는 건 안다.

적어도 어지간한 귀족 영식 중에서 빼어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조금 날티가 나긴 하지만.

그거야 칼리프의 얼굴을 보지 않았을 때 이야기고, 곤도르와 펠루가, 마르마티의 얼굴을 보기 전의 이야기다.

“어, 별로야. 말해 두지만 난 정말 너랑 잘해볼 생각 추호도 없어. 앞으로 영원히 없어. 그러니까 제발 알은체하지 말아줘.”

그때였다.

지트가 성큼 다가와 리티아의 팔을 낚아챘다.

리티아가 아파서 비틀자 그가 팔에 더욱 힘을 줬다.

“좋다고 할 땐 언제고!”

“…….”

“그럼 처음부터 싫다고 했었어야지.”

리티아가 짜증 섞인 얼굴로 내뱉었다.

“싫다고 했잖아, 방금.”

“다른 놈이 생겼어? 설마 다른 놈이 널 좋다고 해? 또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줬어?”

리티아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원래 리티아가 거절 못 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거다. 그걸 이용해 먹고 있다는 사실을 제 입으로 드러낸 거나 마찬가지였다.

“놔. 최대한 조용히 끝내줄 때.”

“말만 하는 협박이잖아. 저번처럼. 내 관심 돌리려고. 네가 아플 때 안 찾았다고 이러는 거잖아.”

“놔.”

“리티아. 내가 잘못했다니까. 반성하고 있어. 이제 정말 널 아낄게. 너만 아낄게.”

“팔 놓으라고…….”

쾅!

그 순간 지트가 그대로 뒷벽에 날아가 처박혔다.

벽이 무너질 것처럼 큰 굉음에 리티아가 깜짝 놀라 지트를 보고 연회장 쪽을 쳐다봤다.

그쪽에도 분명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그 누구도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쿨럭! 아, 으윽.”

지트가 고통이 심한지 엎어진 채로 일어나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성력을 쓰지도 않았지만, 성력으로 이런 폭력적인 일을 하지는 못할 텐데? 당황스러움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운데 뒤에서 구두 굽 소리가 나직하게 들렸다.

리티아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옆에 검은 인영이 지트 쪽으로 걸어가다 멈췄다. 뒷모습만 봐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대체 언제……? 그보다 지금 나타나선 안 될 것 같은데.

“카, 칼리프. 지금 여기는 좀. 저기 사람들이.”

“괜찮아.”

“……응?”

“지금은 안 보이니까 괜찮아.”

뒤를 돈 칼리프가 리티아의 손목을 잡았다. 금방이라도 툭 치면 풀어질 것처럼 약하게. 방금 지트가 비틀다시피 쥐어짠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손길이었다.

칼리프가 그새 붉어진 팔목에 천천히 고개를 내려 입을 맞췄다.

리티아는 얼떨떨하게 그를 쳐다봤다. 안 보인다는 건 무슨 뜻일까? 힐끗 뒤를 보자 정말 이쪽으로 시선 하나 오지 않는다.

기이하게도 전혀 다른 세상에 뚝 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하늘에 별 떴던데.”

“별……?”

갑자기?

리티아가 영문을 모르고 쳐다보자 칼리프가 싱긋 웃는다.

“테라스에서 잘 보여. 네가 봤으면 좋겠다.”

그러고는 리티아의 손을 잡고 옆으로 걸어가 한쪽이 쳐져 있던 테라스 커튼을 걷었다. 첫 만남 장소 그곳이었다.

“봐, 정말이지?”

일부러 손을 뻗어 방향까지 가르쳐 준다. 영문을 모르고 홀린 듯이 쳐다보는데 “예쁘지. 보고 있어.” 이 말만 남기고 그가 커튼 뒤로 나가 버렸다.

“…….”

뭐지.

아팠던 팔을 보는데 확신의 멍이 들겠다 싶었던 부분에 붉은 기운이 사라져 있었다. 뒤늦게 지트가 벽에 부딪혔단 사실을 상기했다.

“……죽은 건 아니겠지.”

정말 심했는데. 리티아는 순간 너무 놀라 벽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걸 보긴 했는데, 막상 커튼을 걷고 나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지트를 향해 온갖 말을 꺼낸 것도 꽤 용기 낸 일이었다.

아무래도 칼리프가 한 게 맞는데. 바보처럼 커튼만 보면서 가만히 있는데 몇 분 더 지난 후에 칼리프가 커튼 안으로 들어왔다.

방금 충격적인 일을 벌인 사람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을 미소를 지으며 칼리프가 리티아를 내려다봤다.

“별 봤어?”

리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

지트 트레쉬가 살아 있냐고 물어보려는데 괜히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 말문이 막혔다.

만나면 이것저것 할 말이 많았는데, 왜 말이 안 나오지.

살았겠지. 설마 죽었으려고.

“왜 그래. 늦게 와서 화났어?”

도리도리. 리티아가 또 말 대신 고개를 저었다. 정말 할 말이 많았는데. 소문을 말해주고 어서 정정해야 하지 않느냐며 그런 말을 할 생각이었는데. 적어도 신전에는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다고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칼리프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리티아가 말을 하는 대신 팔을 뻗어 칼리프를 그대로 껴안은 탓이었다. 놀란 것도 잠시 칼리프가 부드럽게 웃으며 리티아를 마주 안았다.

“나 잘했어? 그래서 상 주는 거야?”

한참 뒤에 리티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정말 떼어내고 싶었거든요. 고마워서요.”

가슴팍에 얼굴을 붙인 채 리티아가 웅얼거렸다.

칼리프가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늦게 와서 또 혼날 줄 알았는데 상을 받았네.”

“……딱 맞춰 온 거예요.”

리티아가 조금 더 파고들었다.

좀 더 이 안정을 느끼고 싶었다. 할 말은 좀 더 나중에 해도 되니까. 지금은 이 혼란스러움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제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리티아는 눈을 감은 채 저를 아끼는 손길을 받아들였다.

“가고 싶어요.”

“어디?”

리티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칼리프의 손이 제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제가 오롯이 담긴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마치 리티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그렇게 칼리프도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도 놓치지 않겠다는 시선이 느껴진다.

리티아가 입을 달싹이다 말을 꺼냈다.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에.”

누구도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졌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는 곳에.

전혀 숨지 않아도 되는 곳에.

칼리프가 처음에 리티아를 자유롭게 해줬던 그날처럼 또 자신을 어디론가 데려가 줬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이었다.

칼리프의 눈이 잠시 또 커졌다. 이내 부드럽게 휘는 눈매가 리티아를 안정시켰다.

“위험한데.”

“뭐가요……?”

어쩐지 입꼬리에 짓궂은 장난기가 스며든 듯했다.

“내가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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