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 * *
리티아가 깜짝 놀라며 흠칫 뒤로 물러났다.
“……왜? 왜?”
“아, 목선 프릴이 조금 접혔어. 에밀리아가 제대로 확인 못 했나 보다.”
그 말에 리티아가 눈을 깜박였다. 반사적인 움직임이었지만, 너무 크게 반응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아, 난 또 벌, 벌레라도 있는 줄 알고. 오빠가 눈을 갑자기 크게 떠서 그렇잖아.”
리티아는 서둘러 변명했다. 엘라르가 큭큭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벌레 싫어하는 건 똑같네.”
“…….”
“됐다. 이제 정말 가자.”
목과 어깨선 사이에 접힌 주름 장식을 정리한 엘라르가 문을 열고 리티아를 에스코트했다.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리티아가 엘라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참, 오늘 테니아 후보 한 명이 자리를 반납했어.”
“한 명이?”
“응, 지밀 로베르 영애.”
“갑자기? 어디가 아파서?”
리티아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포기하는 사람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나오더라고.”
“그러게. 어려운 자리를 포기했네.”
“근데 말이야.”
“응?”
“만약에, 아주 만약에, 지밀 로베르 영애한테 신탁이 내려오면 그건 어떻게 되는 거지?”
예전부터 드는 의문이었다. 로아 캐번디시가 얼렁뚱땅 빈민가 봉사 활동을 할 때부터.
그 누구도 그 의문을 말하지 않은 게 리티아는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그럴 일은 없어.”
엘라르가 다소 단호한 말투를 했다.
“응? 그럴 일은 없다고?”
“아, 그러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고.”
금세 누그러진 말투에 리티아가 다시 물었다.
“왜? 아테스 신께서 내려와서 보신 것도 아닌데, 애초부터 지밀 로베르 영애가 테니아에 어울린다고 이미 마음으로 못 박았을 수도 있잖아. 아테스 신의 총애를 받는 사람은 성력도 많이 받고 타고난다며.”
“그럼 리티아 네가 되어야지.”
“어. 음. 그건 그렇지만 만약에 그렇다면 말이야. 총애하는 후보가 따로 있다면?”
엘라르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건 나도 모르겠다. 동생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고 싶지만 신의 권위에 도전하고 싶진 않아서.”
“그런가. 역시 불경한 생각인가.”
“리티아. 설령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모두 아테스 신의 뜻이겠지.”
“응, 뭐 그렇겠지.”
* * *
아테온 홀은 오늘도 역시나 화려하고 시끄러웠다.
어떻게 몇 달이 되는 시간 동안 연회를 열 수 있는 걸까.
엘라르에게 듣기로는 이곳을 하루도 빠짐없이 참석한 귀족도 있다고 했다.
일도 안 하나. 리티아는 그 생각부터 들었다.
엘라르의 에스코트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리티아를 본 귀족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둘씩 다가왔다.
“테니아의 후보님을 뵙습니다. 몬트 공녀님, 활약 잘 들었습니다.”
“몬트 공녀님, 혹시 저를 기억하시는지요? 저번에 인사드렸던 카로스…….”
“몬트 공녀님.”
“공녀님을 뵙습니다. 무탈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나중에라도 꼭 따로 대화를 나누고 싶…….”
엘라르가 있는데도 다들 리티아에게 말을 거느라 여념이 없었다.
정신없이 대꾸를 해주고 나니 순식간에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기력을 탈탈 털린 느낌에 리티아가 엘라르의 팔을 잡았다.
“……시원한 걸 마셔야겠어.”
“인기가 장난 아닌데. 자.”
근처 시종에게 받은 사과주를 리티아에게 건넸다.
단숨에 비운 리티아가 가까운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몬트 공작과 오지 않으면 인사를 피하겠다 싶었는데, 웬걸 몬트 공작과 있을 때보다 적어도 세 배의 인원이 몰린 것 같았다.
“휴게실에 데려다줄까?”
“아니야. 이제 사람들 인사는 다 받은 것 같은데 지금 가면 억울하잖아.”
피식 웃는 엘라르를 보며 마주 웃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에요?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요.”
“역시. 사람 취급을 해선 안 됐었는데.”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들에게 죄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지?
죄를 묻는다는 둥, 괘씸하다는 둥 하는 이상한 소리가 리티아의 귀에 들려왔다.
괜히 가까이 다가갔다가 알은체하면 이야기가 끊길 것 같아 리티아는 그 자리에 뒤돌아선 채로 귀만 기울였다.
“지능을 가진 마수라는 게 맞나 봐요.”
“이 땅을 차지하고 싶은 걸까요? 감히? 마수를 불러들이다니.”
“더 위험해지기 전에 안건을 올려야겠어요. 더러운 오브를 싹 다 내쫓자고요. 균열을 일으킨 것도 다 그들의 짓이겠죠.”
“아, 이미 진행이 되고 있다고요? 황실에서 곧 말이 나오겠군요.”
리티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뭐라는 거지?
모인 영애들만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다른 곳도 귀를 기울이자 별로 어렵지 않게 다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옹기종기 모여 오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슨 소문이라도 퍼진 모양인지 균열과 마수를 불러들인 게 오브의 짓이라는 소문이 사실처럼 돌고 있었다.
“…….”
마수를 불러들이기는커녕 그 마수를 물리친 게 그들인데.
어쩐지 이상하게 그들의 도움이 입에 오르지 않는다 싶더니 반대의 소문이 퍼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혼란이 모두 오브의 짓이라는. 테오스의 영역을 침범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칼리프가 들어도 피식 웃을 것 같았다. 리티아는 이유 모를 짜증이 치솟는 걸 느꼈다.
“리티아.”
“……응? 왜?”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졌어? 표정이 너무 안 좋길래.”
그 말에 리티아가 구겼던 미간을 폈다.
“아냐, 그냥 정신이 없어서 인상 쓰고 있는 줄도 몰랐어. 이제 됐나?”
“거봐, 휴게실로 갈래?”
“아니, 여기 좀 더 있어야겠어.”
이야기를 더 들어야겠거든.
리티아는 인사를 받는 척 계속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했다. 와전된 소문은 그 어떤 것보다 빨라 시시각각 부풀고 있는 것 같았다.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둥, 여기저기 오브가 침입한 흔적이 보인다는 말도 있었다.
‘장난하나.’
와전된 소문을 더 크게 키우는 건 다른 사람도 아닌 테니아 후보들이었다.
소문에 의문을 참지 못한 귀족들이 테니아 후보들에게 다가가 물어보는데 웃음으로 대꾸하거나 그 누구 하나 정정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인사를 오던 사람들이 또 리티아에게는 묻지도 않는다. 하필! 누구 하나 묻기라도 했으면 조금 정정이라도 해줄 마음이 있는데.
“……오빠. 오빠는 저 소문 어떻게 생각해.”
바로 옆에 있는 엘라르가 그걸 못 들었을 리가 없다. 소곤대던 귀족들이 점점 말소리를 키웠기 때문에.
“오브 이야기 말하는 거지?”
“응.”
“음, 네게 그 사건에 대해서 듣지 않았다면 아마 나도 저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역시 엘라르도 테오스라 이건가.
실망할 이유가 없는데도 조금 실망이 되려고 했다.
“……그렇네.”
그래선지 저도 모르게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네 말을 들었잖아. 조금은 잘못된 소문도 있는 것 같네.”
“응, 만약 내가 오브라면 꽤 억울할 것 같아.”
“리티아, 그런 말은 하면 안 돼.”
“아, 미안. 실수였어.”
그대로 두는 게 좋은 건가. 칼리프에게라도 귀띔을 해주는 게 좋을까?
여기에 오브는 없지만, 오브가 나타나면 분위기가 어떻게 바뀔지 조금도 예상할 수 없었다. 큰 싸움이 날 것 같진 않지만, 기껏 좋아진 관계가 다시 얼음장처럼 바뀌면 그를 만나기가 더욱 힘들어질 텐데.
“……오빠, 나 테라스에서 잠시 쉴게.”
역시 그를 찾으려면 테라스로 가는 게 낫겠다.
도움을 줬으면 줬지, 마수를 불러들였다니. 그들이 테오스를 위험으로 몰아넣기 위해 합류한 거라니.
먼저 도움을 요청한 건 이쪽이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아무렇지 않게 음모를 퍼트리고 그걸 또 믿고 웅성웅성하는 모습이 역겨워지려고 했다.
“같이 갈까?”
“아니야. 조금만 바람 쐬고 오면 될 것 같아. 누가 나 찾으면 오빠가 대신 말 좀 들어줘.”
“알았어. 너무 힘들면 말해. 오늘은 아버지도 없으니 금방 가도 될 테니까.”
“응.”
리티아는 그 공간에서 살짝 벗어났다. 엘라르에게 지었던 미소를 싹 지웠다.
단순히 칼리프와 그의 사람들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라 저 편파적인 사람들에 환멸이 나려고 했다. 어쩜 그럴 수가 있지. 아무리 뻔뻔해도 그렇지.
오늘이 지나면 기정사실로 퍼지며 오브와의 관계가 크게 악화될지도 몰랐다. 그럼 멸망에 가까워진다는 건 리티아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걸 빼고서도 자신들을 구하려고 나섰던 칼리프를 그런 식으로 놔두고 싶지 않았다.
리티아는 로아 캐번디시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을 확인하고 조금 빠르게 테라스 방향으로 나왔다.
여기서 찾으면 칼리프가 와주지 않을까. 처음 만났던 장소니까. 저번처럼 또 좋은 야경이 보이는 곳으로 데려다줬으면 좋겠다. 그럼 속이 뻥 뚫릴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리티아는 금세 복도와 맞닿아 한적해진 공간에 들어왔다. 행여 로아 캐번디시가 따라올까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귀찮은 건 딱 질색이었다.
“리티아?”
서둘러 테라스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리티아를 불렀다.
멈칫, 어쩐지 익숙한 음성에 리티아가 드레스를 쥔 채로 휙 몸을 돌렸다.
동시에 앞에 선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한쪽 눈썹이 짜증으로 꿈틀거렸다.
전혀 반갑지 않은 사람이 자신을 보고 반가워하고 있었다. 아니, 조금 놀란 얼굴인 것도 같았다. 무엇보다 왜 하필. 하고많은 사람 중에 하필!
“지트…… 트레쉬?”
저 쓰레기가 왜 또 저기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