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 * *
동시에 세 명의 시선이 리티아에게 향했다.
다들 워낙 키가 커 위에서 내려다보며 빤히 기다리고 있는 시선에 한껏 부담스러웠지만, 리티아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 다른 건 아니고 저번에 제가 마차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테니아 후보에게도 간단한 무기를 배정해 달라고 부탁드리려고요.”
“무기 말입니까?”
곤도르가 물었다. 그때도 넌지시 “안 될 겁니다, 아마.” 이렇게 읊조리고 말았던 그다.
하지만 그들도 단순히 균열을 막는 게 끝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 테니까.
“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나을 것 같아요. 원래는 무기 소지를 할 수 없다지만…… 비상 상황 때문이라도 제 몸을 지키고 싶어서요. 아까 말락 경이 원칙에서 벗어난 제안을 했을 때 레페 신관께서 들어주셨으니 이것도 들어주시지 않을까 해서요.”
“검을 다루실 줄 아십니까?”
펠루가의 말에 리티아가 다소 자신 없는 얼굴로 끄덕였다.
리티아의 몸은 어려서 엘라르를 따라 하느라 검을 배우기도 했으니까. 원체 약한 몸을 갖고 있어서 엘라르가 열심히 가르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전에도 그걸 알기에 계속 답답했었다.
그리고 테니아가 무기를 소지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테니아에게는 검과 방패인 테메스가 있고 테니아가 검을 드는 건 품위에 벗어난 일이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그 이유로 리티아는 자신을 스스로 더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품위 지키다가 목숨을 잃느니.
이제는 이 상황이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자유를 탐하기 위함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제 몸을 제대로 지킬 수 있어야 몬트 공작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온전히 힘을 거머쥘 것이다.
“……부끄럽네요. 경들한테 견줄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다룰 줄은 알아요. 적어도 눈앞에 있는 들짐승 정도는 보호할 수 있어요. 우스운 힘이라도 없는 것보단 나을 거예요.”
“하긴 이번에는 들어주실지도 모르겠군요. 원칙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이곳에서 계속 돌발 상황이 발생하고 있으니까요.”
“네,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원칙과 규율만 지키다간 또 다른 희생을 막지 못할 것 같아요.”
“공녀님께서 그리하신다면 저희도 공녀님 의견에 보태겠습니다.”
“고마워요.”
* * *
회의는 그로부터 한 시간 뒤에 다시 열렸다.
셋과 중앙 분수대 옆에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회의실에서 마주한 대신관은 이번 일 때문인지 평소 온화한 표정이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리티아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이번에는 꽤 긴장을 한 상태였다.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자신이 앉던 자리에 계속 앉다 보니 오브가 회의에 참여하지 않을 땐 리티아의 한쪽은 빈자리고, 오브가 회의에 참석할 땐 칼리프가 옆을 차지했다.
수장인 그가 굳이 중간에 낀 상태가 퍽 이상한지 오브들은 항상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어쨌든 칼리프도 옮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칼리프가 신전에 아까부터 머물고 있다는 건 당연히 눈으로 봤으니 알았지만, 바로 옆일 땐 그 긴장도가 다르다.
괜히 아까보다 손바닥에 땀도 맺히는 것 같고, 이제는 익숙한 그의 체향은 리티아를 안정시키면서도 반대로 그 어떤 때보다 예민하게 만들었다.
“…….”
그런 이유로 리티아는 아까 회의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집중을 해야 했다.
회의가 시작되자 말락은 아까 했던 건의를 대신관에게 내비쳤고, 리티아도 기회다 싶어 무기 소지에 관한 안건을 제안했다.
그때였다. 할 일 없이 드레스만 만지작거리던 왼손을 칼리프가 툭 쳤다. 동시에 리티아는 감전이라도 당한 것처럼 멈칫했다.
소리 없이 다가온 손은 간지럽히듯 손끝으로 리티아의 손을 쓸었다.
“큼.”
리티아가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서둘러 오른손으로 바로 앞에 있는 물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사이 칼리프의 손가락이 리티아의 손바닥 쪽으로 조금 더 과감히 들어왔다.
“…….”
이제 리티아의 신경은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문지르듯 파고드는 손가락이 손바닥에 지문이라도 남기는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손바닥이 안으로 맞물리고 리티아의 가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굵직한 손가락이 엇갈렸다.
리티아가 마른침을 다시 꿀꺽 삼켰다. 긴장으로 손이 축축할 만큼 땀이 날 것 같았다.
칼리프는 여전히 무료한 눈으로 대신관 쪽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리티아는 입술이 바짝 마르고 눈가에 살짝 눈물이 고일 것처럼 발그레해졌다. 짧게 심호흡을 하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칼리프는 그런 그녀를 달래기라도 할 것처럼 엄지로 리티아의 손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리티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미세하게 떨렸다. 귀가 윙윙, 대신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지고 손의 감각에 집중했다.
“현재 폐쇄된 얼음 산맥은 아마 내일 중으로 다시 진입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일 인원을 추려 먼저 진입한 후 직접 상황을 확인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저희는 다음 목적지인…….”
어느새 대신관의 말이 지나가고 레페 신관이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행여 누군가 갑자기 이 거대한 테이블을 뒤집어엎지는 않을까, 누군가 아래 숨어 있진 않겠지. 누군가 보고 있기라도 하다면. 로아 캐번디시가 감시라도 붙여놓지 않았을까, 이 안에?
온갖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면서도 리티아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각인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이상하게 그와 접촉을 하면 늘 발꿈치를 들고 걷는 것 같은 불안한 내면이 단단하게 가라앉는다.
그러나 이것은 본능에 가까운 감각이고, 여전히 리티아는 칼리프 데모드라는 존재에 의문을 품고 있고 그가 이따금 던지는 말의 뜻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마음 놓고 그 안정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모든 의문이 해결되어야 그가 온전히 자신의 편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은 칼리프가 완전히 제 편인 건지, 어쩌면 훗날 있을 전쟁에 관한 미끼로 이용하기 좋아 각인을 새긴 것인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만약 후자라면 리티아가 아는 대로 흘러갈 것이고, 칼리프와의 끝도 좋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서 마음 놓고 그가 제 편이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공녀님.”
“…….”
“몬트 공녀님.”
“아, 네? 네, 성하.”
리티아가 눈을 깜박였다. 대신관이 저를 보고 있었다.
놀라 바르작거리며 손을 빼내려는 순간 칼리프가 좀 더 단단히 깍지를 꼈다.
“아까 무기 소지에 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네, 성하. 물론 테니아는 테메스를 무기와 방패로 여김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테니아의 손은 아테스 신의 손을 잡기 위해, 또 하나는 시련을 겪는 이에게 손을 내밀어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두 손이 항상 비어 있어야 한단 말인가.
리티아는 이런 규율을 들을 때마다 영혼이 튕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최선을 다하려고 해도…….
리티아가 빙긋 웃었다.
“그 뜻을 받듭니다. 다만…….”
“알고 있습니다, 공녀님. 자신을 스스로 지켜 더 오래 빛을 널리 알리는 일 또한 테니아의 사명이지요. 아니타, 아그네스 님과 의논을 드려보겠습니다.”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신관이 리티아를 향해 흐뭇하게 웃었다. 대신관이 리티아 자신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알기에 잡은 손에 더욱 긴장이 서렸다.
회의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회의가 마무리되자마자 칼리프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리티아를 놓아주었다. 그 전까지는 리티아가 손을 꼼지락거려도 절대 놓아주지 않던 그였다.
이쪽으로는 시선 한 번 안 보이면서 대담하게도.
훗날 전쟁을 일으키는 그라지만 지금 부딪치고 싶은 마음까지는 없는 것 같다. 칼리프가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도 함께 어서 찾으면 좋을 텐데.
“공녀님, 가문까지 모시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우르르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리티아도 정리를 하고 일어났다.
“아, 네.”
긴장으로 축축해진 손을 리티아가 드레스를 꾹 쥐는 것으로 숨겼다. 인사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고개를 돌리는데 로아 캐번디시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아까부터 보고 있었던 듯 시선에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아직도 마음을 안 접었나.’
지밀까지 그만둔 마당에 며칠 사이 로아 캐번디시의 눈은 더욱 독기가 올라 보였다.
빌미를 줘서 좋을 게 없지. 리티아가 몸을 다시 돌려 자신의 테메스와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 * *
저녁에는 절대 바라지 않았던 연회에 참석해야 했다.
테니아의 후보가 웨이타스로 떠난 뒤에도 아테온 홀에서는 한 달여가량 계속 축하 연회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얼굴을 비치기 위함이었다.
“하아.”
그래도 오늘은 좀 나았다. 몬트 공작이 바빠 대신 엘라르와 함께 참석하게 됐기 때문이다.
준비를 마친 엘라르가 리티아를 찾아왔다.
“준비 다 됐어?”
“아, 잠깐만.”
마무리를 하고 엘라르에게 가자 엘라르가 팔 한쪽을 내주었다.
팔짱을 끼라는 신호에 리티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팔짱을 꼈다. 어차피 마차에 타야 하는데 이게 무슨 소꿉장난이람.
“가볼까요?”
어째 신이 난 것 같은 엘라르가 웃으며 리티아에게 말했다.
“연회 가는 게 그렇게 좋아?”
“아니, 내 동생하고 놀 수 있어서 좋은 건데.”
“누가 보면 어린앤 줄 알겠다.”
“그럴 리가. 음? 리티아.”
“응?”
엘라르의 손이 리티아의 왼쪽 어깨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