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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63화 (63/70)

63화

* * *

“네, 그만! 말락 경, 우선 앉으십시오.”

말락이 의견을 내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계속해서 생기는 충돌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레페는 중재와 동시에 다시 활동이 재개될 때까지 대신관과 회의해 결정을 하겠다 통보했다.

말락은 만족하지 않는 눈치였으나 여기서 더 의견을 얹어봤자 제게만 불리하다는 걸 잘 아는 눈치였다. 애초에 테니아 후보에서 박탈이든 반납이든 행위가 일어나면 테메스 지위까지 반납해야 하는 게 맞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슷한 일이 있어서 오늘과 같이 실랑이했다고 해도 인원을 더 충원했다거나 변경이 있었다거나 하는 전례는 없었다.

회의가 끝이 났다.

하지만 신전에서 좀 더 대기를 해야 했다. 대기도실에서 대신관이 예배를 끝내고 나면 다시 회의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마르마티는 레페 신관이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서 말락의 멱살을 잡아챘다. 마르마티가 워낙 몸이 빠르긴 하지만 미처 말릴 새도 없었다.

“선 넘지 말라고 했다.”

“주제도 모르고 날뛰지 말고.”

“주제는 누가 모르고 있나. 응?”

말락까지 마르마티의 멱살을 잡았다. 금방이라도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기 직전이었다. 말락의 동료와 펠루가가 서둘러 둘을 막으려고 다가섰다.

“마르마티 경, 그만해요.”

둘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기세라 리티아까지 말려야 했다. 다른 영애도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하고 말락을 말렸다. 지밀 로베르가 없으니 다른 사람이 말리는 수밖에.

“후보가 자리를 반납했으면 알아서 물러서. 질척거리지 말고. 멋대로 공녀님 들먹여서 모면하려고 하지 말고.”

일갈하듯 마르마티가 말락에게 쏘아붙였다.

“공녀님, 제가 교육 좀 시키고 오겠습니다.”

리티아가 쓰게 웃었다.

“마르마티 경, 시원하게 바람이라도 쐬고 오세요.”

펠루가가 제발 사고 좀 치지 말라며 마르마티를 데려갔다.

리티아의 바로 뒤에는 곤도르가 지키고 있었다.

“곤도르 경, 우리도 나가서 있죠.”

“예, 공녀님.”

회의실을 완전히 나오고 나서야 소란이 잦아들었다. 다른 테메스들도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서 있어 더 있다간 또 다른 싸움에 휘말릴 것 같았다.

“계속 혼란이네요.”

“누군가 후보 반납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요. 아무래도 이번 일로 충격이 컸던 분들이 계셨던 건가 봐요.”

“공녀님은 그간 좀 쉬셨습니까?”

그 말에 리티아가 곤도르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네, 푹 쉬었어요. 오빠가 와서 에나가 좋아했겠네요.”

그러자 곤도르의 입꼬리에 희미한 웃음이 서렸다. 무뚝뚝한 얼굴에 표정 변화가 가장 클 때는 아무래도 동생 이야기할 때였다.

대부분 성기사 또한 성력을 가진 테오스기에 귀족 가문이거나 아니면 한쪽이 귀족인 경우가 있는데 곤도르는 후자였다. 그마저도 동생은 테오리스고 곤도르만 성력을 갖고 있었다.

곤도르는 그 점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에나의 이유 모를 발작은 성력으로 안정으로 찾을 수 있는데 저처럼 성력을 타고났다면 이렇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동생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 성기사가 된 것이지만 그 점을 항상 안타까워했다.

“보내주신 의사 선생님이 친절하다고 좋아합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곤도르는 언제든 의사를 만날 수 있게, 언제든 신전으로 갈 수 있게 마차까지 내어준 리티아가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귀족에 대한 반감과 혐오는 사라지지 않았다. 뼛속까지 박힌 혐오가 조금의 배려로 떨어져 나갈 리가.

“에나는 인형을 좋아하나요? 그때도 친구들 먹을 걸 나눠주는 데만 신경을 썼던 것 같아서요.”

에나를 도와준 데에 보답을 하기 위해서라도 후보 기간 동안 테메스 활동에 최선을 다하려고 했었다. 그 후로는 몬트 공녀가 테니아가 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그만둘 생각이었다. 평생 귀족을 호위할 생각은 없었다. 오죽하면 다리라도 부러뜨려 그만둘 각오까지 했으니까.

“잘 때 갖고 있는 걸 보면 좋아하기는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성기사에 남아 있는 건 동생의 치료를 위해 돈을 벌기 위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본심에 아테스 신을 향한 존경이나 경외 따윈 없었다. 성력을 지원받으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그뿐이었다.

“에나랑도 나중에 친해지고 싶은데 그럼 그 부분을 공략해 봐야겠네요.”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됩니다.”

“제가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요.”

하지만 그럼에도 리티아를 향한 색안경은 거의 다 벗겨진 상태였다. 귀족 중에서도 황실 다음으로 정점에 있는 귀족 영애라 상냥함에 오히려 의심스러웠지만, 이제는 그게 꾸민 얼굴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절대 섞일 수 없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시선이 가고 있었다.

“저기 있네요.”

곤도르가 가리킨 곳에 마르마티가 펠루가에게 헤드록을 당하고 있었다.

리티아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세 분, 합이 정말 잘 맞는 거 아세요?”

“저희 말입니까?”

“네, 저는 솔직히 지금처럼 세 분께서 절 지켜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제 선택에 최고였다고 자부할 수 있거든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몰라도 저는 이대로가 좋을 것 같아요. 세 분도 아까 회의실에서 하신 말씀대로라면 저와 같은 생각이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해도 되나요? 다른 테메스분들은 필요 없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저흰 공녀님 의견에 따를 겁니다.”

“그런 거 말고, 세 분의 의견이 필요하다니까요. 또 제멋대로 할 수는…….”

리티아가 말을 하다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풍경을 보겠다고 고개를 돌리다 반대편 복도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새하얀 기둥과 벽, 천장 그리고 바닥까지. 그리고 그 안에 새카만 인영이 우뚝 서 있는데 아주 찰나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 한참 칼리프의 옆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맞은편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며칠 만에 얼굴을 본 것이었다. 문제라도 생긴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오늘 회의에서도 오브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어서 조금 걱정했었더랬다.

“공녀님?”

“아, 가요. 마르마티 경 기분이 다 풀렸으려나.”

리티아가 서둘러 고개를 돌려 언제 그랬냐는 듯 마르마티에게로 향했다.

“마르마티 경.”

“……죄송합니다, 공녀님.”

고개를 꾸벅 숙이는 마르마티의 머리를 펠루가가 더 꾹 눌렀다.

“얘를 아예 빼버릴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녀님.”

“아, 또 뭘 그렇게까지.”

마르마티가 슬쩍 리티아의 눈치를 봤다.

“그래도 그렇지. 말락 경의 멱살을 잡으면 어떻게 해요.”

“죄송합니다.”

“차라리 검을 들어요, 아무 말도 못 하게. 어딜 끼어들겠다고.”

리티아의 뒷말에 마르마티가 얼빠진 얼굴을 하더니 이내 히죽 웃었다.

“공녀님도 그렇게 생각하실 줄 알았어요.”

“좋단다. 넘어가지 마세요, 공녀님.”

“최대한 잔류만 하는 쪽으로 우리는 의견을 내도록 해요.”

리티아는 셋과 대화를 하면서도 신경은 뒤쪽에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 죽겠다. 마음 한쪽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다가도 꼭 그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는 것 같아서 반항심이 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칼리프가 끌리는 이유 또한 설명할 수 없으니까.

“…….”

그런 혼란스러운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칼리프가 외부 복도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테오스의 성지나 마찬가지인 대신전에 새카만 그의 모습은 늘 이질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오히려 주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긴, 그가 어디에 있다고 한들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리티아가 저도 모르게 칼리프를 빤히 쳐다보았던 모양이다. 칼리프의 시선이 일순간 리티아에게 향했다.

리티아가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계속 훔쳐본 걸 들키기라도 한 것 같았다.

“오브네요.”

펠루가가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러네요.”

리티아가 모른 척 대답했다. 전혀 관심 없는 것처럼, 방금까지 전혀 몰랐던 사람처럼.

“정말 괴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더군요. 직접 그런 전투를 본 건 처음이었는데 압도적으로 몰아세울 줄은 솔직히 몰랐습니다.”

펠루가는 마치 감탄이라기보다 충격을 받은 것 같은 말투였다.

리티아도 그날의 전투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힘이 휘몰아친다는 게 뭔지 뇌리에 박힐 정도로 강렬한 기억이었다.

“관계가 어떻든 이번에는 저분들의 도움이 컸다고 생각해요.”

리티아가 긴장하며 괜히 옹호처럼 보일까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예, 한데 여전히 저들의 힘은 의심스럽습니다. 마수와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테오스는 빛의 힘을 제외하고는 모두 악의 힘이라고 생각하니까. 마수의 힘이든 오브가 가진 어둠의 힘이든 같은 힘으로 치부해 버린다.

당연한 것인데도 펠루가가 그렇게 말하니 조금 속이 상하긴 했다.

“마수와 같지는…… 않잖아요.”

“저들의 힘의 원천을 알 길은 없죠. 예전에는 지능 있는 마수라고 여겨질 정도였으니까요.”

“그건.”

리티아는 행여 칼리프에게 그 말이 들릴까 봐 말을 막았다. 이런 말로 칼리프가 상처를 입는다거나 속이 상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지만. 오히려 조금도 흠이 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예,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 이 말은 지금 하기에 좀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리티아는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저 이번 회의에서 대신관님께 부탁드릴 건이 있는데, 먼저 들어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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