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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60화 (60/70)

60화

* * *

“요즘 아가씨에게서 달라진 거 없느냐고 물으시고, 또 요즘 일기도 쓰시냐고 물었어요.”

“일기?”

“아, 네! 아가씨께서 예전부터 일기를 쓰셔서 요즘도 쓰시나 궁금하셨나 봐요.”

“음, 그리고?”

“아가씨가 잘 있는지 걱정도 된다고 하시고. 또 신전에도 직접 물어보셨나 봐요. 아가씨께서 잘 계시다고 제게 말씀해 주셨거든요.”

“그랬구나. 그래도 떠날 때 담담해 보여서 덜 걱정하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도련님께서는 매일 아가씨 걱정 많이 하세요. 저도 아가씨 걱정 정말 많이 했고요.”

그런데 왜 일기는 계속 쓰는지 물어봤지. 더 찝찝한 건 달라진 게 없냐고 묻는 말이었다.

본래 리티아가 긴장하면 약간씩 더듬거릴 정도로 말하기를 어려워하거나 워낙 소심해서 피하는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엘라르는 오빠라 편하게 대했을 테니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행여 다른 의심을 산 건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됐다. 그냥 안 좋은 일이 있으니 노파심에 물어본 거겠지.

“아가씨, 다 됐어요! 조금 더 계시겠어요? 뜨거운 물 조금 더 가져올게요.”

“아니야, 이제 충분해.”

리티아가 깨끗한 물을 건네는 에밀리아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 정도는 바로 휴식을 취할 줄 알았지만 리티아는 목욕 후 바로 단장을 해야 했다.

리티아가 목욕을 하는 사이 공작이 돌아왔단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어쩜 타이밍도 그렇게 마음에 안 들 수 있는지.

방으로 찾아오는 걸 보느니 리티아가 먼저 움직여 짧게 인사만 하고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또 집에 왔으니 연회에 나가거나 황태자를 만나라고 하진 않겠지.

그런 걸 사전에 차단하려고 더 열심히 한 건데 그러라고 하면 몬트 공작이 더 싫어질 것 같았다.

리티아는 가볍게 단장을 한 뒤 공작의 집무실을 찾았다.

“아버지, 리티아예요.”

“들어오거라.”

미리 뵈러 가겠다고 시종에게 말을 해놓은 참이라 문을 두드리고 말하자마자 안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단단히 굳어 있던 입매가 슬쩍 올라가며 몬트 공작이 제 딸인 리티아에게 고개를 들었다. 이내 그가 몸까지 일으켜 리티아에게 다가왔다.

“티아.”

그가 무료한 얼굴로 대충 이야기만 하고 나가라고 할 줄 알았던 리티아는 다소 놀란 상태였다.

“문제가 생겨 잠시 돌아왔어요.”

“그래, 들었다. 다친 곳은 없느냐? 돌아오는 데 힘들지는 않았고? 대체 왜 그 위험한 소식을 뒤늦게야 알린 건지.”

다가와 리티아의 얼굴을 살핀 몬트 공작이 물었다.

리티아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제 아버지를 올려다봤다.

“네, 괜찮아요. 테메스분들께서 지켜주신 덕분에 하나도 다치지 않았어요.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이렇게 무사히 왔고요. 부상자들도 모두 치료했어요. 다 막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 역할들을 톡톡히 한 모양이구나.”

두 명의 죽은 기사를 말하려고 했는데 몬트 공작은 조금도 관심 있어 보이지 않았다. 말투 자체가 도구로서 잘 쓰였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리티아는 열심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럼요. 당연히 그러라고 고른 사람들인데요.”

“그래, 내 걱정이 컸다. 네 눈이 옳았구나. 네가 어쩔 땐 엘라르보다 날 더 닮았다는 걸 가끔 잊곤 해.”

“……아버지를 존경하니까요.”

리티아가 일반 성기사 중에서 테메스를 골랐다고 했을 때 누구보다 리티아에게 야단을 쳤던 건 몬트 공작이었다.

생각이 있느냐며, 없느냐며 다시 고르라고 할 땐 언제고.

믿어달라고 말을 하고 나서야 마지못해 허락해 줘놓고 이제 와 자신을 닮았다고 하니 작은 조롱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우리 가문도 웨이타스로 병력을 지원한 상태다. 곧 괜찮아질 게야.”

“병력을요?”

“그래. 황실에서도 지원한다기에 우리 쪽도 보내기로 했다. 단순히 성력으로 정화하기에는 부족했는지 신전에서 요청을 해왔다. 널 위해 이 아비가 해줄 게 그런 것밖에 없구나. 네 활동도 모두 잘 들었다. 아주 자랑스러워. 제일 먼저 광역 정화에 성공했다고.”

“……감사합니다.”

“안정화될 때까지는 후보들의 활동을 멈춘다고 하니 그동안 신전에 부지런히 드나들도록 해.”

“네, 아버지. 그럴게요.”

“그간 무리했을 테니 내일까지는 푹 쉬도록 해라.”

“……쉬세요.”

리티아는 꾸벅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숨 막힐 듯한 공기에서 벗어나자마자 “휴.” 하고 숨을 내쉬었다. 기껏 목욕으로 풀어놓은 피로가 다시 쌓이는 기분에 리티아는 곧장 방으로 향했다.

충격으로 대신전 안에만 있어서 몰랐는데 벌써 일반 병력 지원까지 들어갔을 줄은 몰랐다. 하기야 그들도 보고받았다면 그 정도 인원으로는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는 걸 잘 알 거다.

리티아가 만난 건 한 마리였지만, 그들이 두 마리 이상 무리로 있다면 가까운 영지의 병력으로도 힘들 것 같았다.

그럼 오브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대신전에서도 방금 몬트 공작도 오브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없었다. 이야기가 나오기엔 너무 빠른가 싶다가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가씨, 시원한 주스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아니면 차는 어떠세요?”

에밀리아는 방으로 돌아온 리티아를 살뜰히 챙기려고 노력했다.

“괜찮아. 그보다 저녁까지 눈 좀 붙이고 싶은데.”

평소라면 몬트 공작의 귀에 들어가 낮잠을 자느냐며 혼날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쉬라고 했으니 정말 쉬어도 될 것 같았다.

“아! 그럼 커튼을 쳐드릴게요. 혹시 엘라르 님이 오시면 깨워 드릴까요?”

리티아가 잠시 고민했다.

원래 리티아였다면 당연히 깨워달라고 했을 것 같긴 한데 전혀 내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피곤하기도 하고.

“음, 아냐. 내가 저녁에 오빠가 있으면 직접 찾아갈게. 저녁까지 깨우지 말아줘.”

에밀리아가 세차게 끄덕였다.

“네, 아가씨. 편히 주무세요. 이불 덮어드릴게요.”

리티아가 침대에 들어가자마자 에밀리아는 또 이불을 덮어주며 리티아를 챙겼다.

그러고는 수면등만 남긴 채 커튼까지 쳐 방을 어둡게 만들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자마자 리티아는 몸 전체가 땅 깊숙이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 * *

케스니카 성.

까마득한 높이에 웅장할 정도로 커다란 성은 케스니카 정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검회색의 강철을 연상케 하는 단단한 벽돌로 세운 성은 마치 그들의 특성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오브들은 거취에 자유로운 편이지만 중요한 일이 있을 땐 자연스럽게 이 성을 본거지처럼 여기고 돌아왔다.

“…….”

또각, 또각, 또각.

검은 대리석 바닥에 딱딱한 소음이 일었다.

늘 잔머리가 하나도 없이 머리카락을 높게 위로 올려묶은 타냐가 다소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누군가를 찾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뒤로 둔탁한 구둣발 소리가 뒤따랐다.

“다음에 가.”

뒤따라온 이든이 그런 그녀를 잡아 세웠다.

“놔.”

“다음에 가라니까.”

제발 한 번 말하면 좀 들어라. 이든이 귀찮은 기색을 드러내며 타냐에게 말했다.

타냐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려고 했다.

“충분히 참고 기다렸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언제까지고 이 광대 짓을 하라는 건가?”

이든이 피곤한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가 폈다.

“따라가겠다고 한 건 너였잖아. 그럼 뭐 전쟁이라도 하러 가는 줄 알았어?”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다.”

타냐가 이든에게 잡힌 팔을 풀고 다시 알현실로 향했다.

말리는 걸 포기한 이든이 뒤에서 천천히 따라 걸었다.

“어차피 지금 안 계신다.”

“또 어딜 갔는데.”

“요즘 가는 데야 뻔하지, 일부러 묻는 건 아닐 테고.”

“…….”

결국 우뚝 선 채 화를 삭이던 타냐가 뒤로 휙 몸을 돌렸다.

눈에 이글거리는 분노가 튀더니 그 불똥이 이든에게 향했다.

“대체 그 여자가 뭔데.”

“……글쎄.”

타냐는 느긋한 이든의 성격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늘 한발 물러서 방관하는 자세에 매번 속이 터지는 것도 그녀인데 오늘도 별반 다르지 않아 혈압이 조금씩 상승하고 있었다.

“그 여자가 뭐길래 저들 비위를 맞추고 이 같잖은 연극 따위를 해야 하는 거야?”

“그걸 나도 알면 좋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차기 테니아가 확실해서 죽이기라도 할 게 아니라면 대체 왜 그렇게 꽁무니만 쫓아다니는지.”

“말했지. 이해 못 하겠으면 빠지라고. 몇 번을 말해. 언제 우리가 이유 물어보고 움직였나. 그냥 따르고 싶으면 따르고 아니면 마는 거야. 뭐가 문제야?”

이들이 스스로 칼리프 데모드를 따를 뿐, 칼리프는 단 한 번도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 그저 태생부터 본능처럼 강한 힘을 따르는 것뿐. 그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의문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

“너 머릿속 복잡한 것 같으니까 어디 가서 뭐 하나 때려 부수든지 해. 그러다 말실수하지 말고.”

이든이 타냐를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번에 타냐가 눈을 부라렸다.

“미쳤나.”

“성질머리하고는.”

타냐가 이든의 손을 탁 쳐냈다. 얼굴에 짜증과 분노가 한데 섞였다.

“됐어. 말려도 난 그 정체를 알아야겠어.”

그러고는 다시 왔던 길로 그대로 나가 버렸다.

주머니에 손을 대충 구겨 넣은 이든이 멀어지는 타냐의 뒷모습을 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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