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 * *
“…….”
리티아는 두 손을 모은 채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렇지 않으면 공포감이 그대로 리티아 자신을 삼켜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로아 캐번디시와 지밀 로베르는 이미 충격으로 기절해 회복을 받으러 간 상태였다.
“공녀님.”
펠루가의 목소리에 리티아가 벌떡 일어났다.
“마르마티 경은요?”
펠루가가 리티아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괜찮습니다. 다행히 부러진 곳도 회복되었고, 지금 멀쩡합니다.”
“하아. 정말 다행이네요, 다행…….”
“공녀님께서는 치료받으신 겁니까?”
“저는 다친 곳이 없어서요. 막아주셨으니까. 하나도 안 다쳤어요.”
“그래도 충격받으셨잖습니까. 아무래도 정신 회복이라도 받으시는 게.”
“우선 다들 괜찮은 거 확인하고 나면요.”
리티아는 파르르 떨리는 제 손을 다른 손으로 맞잡아 떨림을 멈추었다.
펠루가가 그 모습을 보고 리티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습니다, 공녀님. 공녀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아니었으면 정말 크게 다쳤을 겁니다.”
“……고마워요. 곤도르 경과 펠루가 경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마르마티 경도 크게 다치지 않아서…….”
이곳은 대신전이었다.
얼음 산맥 바로 아래에서 거대 얼음 마수를 마주하고 난 후 지금 딱 7시간이 흐른 뒤였다.
포효하는 거대 마수 한 마리가 나타난 후 기사들은 일제히 마수를 향해 맞서 싸웠다.
펠루가와 마르마티, 곤도르 경도 당연히 예외는 아니었다.
리티아는 그들에게 빠르게 축복을 걸고 뒤에서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언제든 치료할 수 있도록 상황을 살폈다.
하지만 전투와 동시에 기사들이 마수의 위력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워낙 크기도 거대하거니와 한 번만 팔을 휘둘러도 기사들이 나가떨어졌다. 단단한 얼음 장막 같은 피부가 어지간한 힘으로는 뚫리지 않았다. 심지어 마르마티도 실패했다. 곤도르의 칼만이 그나마 한쪽 팔을 부서뜨릴 수 있었다.
기사들이 밀려나기 시작하면서 마수와 맞선 건 오브들이었다. 어둠 사슬로 팔다리를 묶고 팔다리 마디를 잘라 움직임을 멈췄다. 그 사이를 멀쩡한 기사들이 파고 들어가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오브가 아니었다면 절대 성공하지 못할 전투였다.
“이거라도 드십시오.”
“오르가 님.”
다치지 않은 신관 중에 한 사람이 리티아에게 병 하나를 내밀었다.
“안정젭니다. 이거라도 드시면서 좀 쉬세요. 이제 어느 정도 대부분 회복이 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수는 쓰러뜨렸으나 마수의 발에 밟힌 두 명의 기사가 죽고 아홉 명의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중 마르마티도 있었다.
거대한 얼음 파편이 테니아 후보들 쪽으로 날아오는 바람에 마르마티가 몸을 날려 보호한 것이다. 너무나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최대한으로 막은 결과가 그 정도였다.
마수를 해치우자마자 주변을 정화할 여력도 없이 사상자를 옮기기 위해 신관들이 모여 텔레포트 마법 진을 그렸다.
그사이에도 리티아는 성력을 뽑아내다시피 해 죽어가는 기사 한 명을 살리는 데 성공했다. 피를 토해낼 정도로 크게 상처를 입은 기사였다.
하지만 텔레포트 마법 진은 이동하는 데 한계가 있어 가장 큰 부상을 입은 사람부터 보내고 다른 사람들은 마차로 가까운 게이트까지 이동해 대신전으로 왔다.
또 다른 마수가 나타나면 그땐 정말 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일행 모두가 일정을 완전히 멈춘 채 며칠 만에 대신전으로 복귀한 것이다.
“얼음 산맥 지역은 현재 폐쇄 조치하였다고 합니다. 방금 소식 들어왔습니다.”
곤도르가 성큼 다가와 펠루가와 리티아에게 전했다.
“그런데 마수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잖아요. 그렇게 큰데도…….”
“그러게 말입니다. 거기다 그렇게 큰 마수가 웅크리고 있을 줄은. 우선 회복을 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금방 안정을 찾을 것 같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펠루가가 답답함에 목덜미를 문질렀다.
“공녀님!”
리티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르마티 경!”
마르마티가 언제 다쳤냐는 듯 손을 흔들며 걸어오고 있었다. 리티아가 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그럼요. 이 정도 다친 것 가지고.”
“이 정도라뇨. 팔이 부러졌었잖아요.”
그러자 마르마티가 쓰게 웃었다.
완전한 넷이 다시 모였다. 안심은 됐지만, 전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 * *
돌아온 지 이틀.
대신전은 두 명의 기사를 추모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역대 원정에서도 사상자는 발생했다고 적혀 있었지만, 단순히 역사로 마주할 때와 직접 피부로 겪는 것은 그 괴리가 컸다.
부상자들은 모두 회복해 완전히 자리로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 리티아를 포함한 다섯 명의 후보는 우선 각자의 가문으로 돌아와 대기 상태였다.
“아가씨!”
리티아가 돌아오자마자 에밀리아는 눈물까지 그렁그렁하며 그녀를 반겼다.
“에밀리아, 오랜만이야.”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돌아온 리티아는 제게 안기기까지 하는 에밀리아의 등을 토닥였다.
돌아왔으니 몬트 공작에게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돌아오자마자 반갑지 않은 얼굴을 보려니 급격하게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고 있었다.
“괜찮으신 거예요? 완전히 돌아오신 건 아니고요?”
“응, 대신전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는 집에 있겠지만, 아직 다 끝나진 않았어.”
“큰일인 건가요?”
“조금. 아버지는?”
“아, 주인님께서는 아직 외출에서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그래도 오늘 돌아오실 거라는 건 알고 계실 거예요. 저희 보고 미리 준비해 놓으라고 하셨거든요.”
“그래?”
“네, 아침에 아가씨께서 돌아오실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에밀리아는 그 자리에서 방방 뛰기라도 할 기세였다.
리티아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그보다 에밀리아 미안한데, 나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그러자 에밀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떼었다.
“어머, 세상에! 죄송해요, 아가씨! 아가씨께서 오신 게 너무 기뻐서……! 얼른 준비할게요. 조금만 방에 앉아 계세요!”
에밀리아가 쌩하니 밖으로 나갔다.
시종에게 짐을 부탁한 뒤 리티아는 의자에 잠시 앉았다.
“…….”
며칠 만에 다시 돌아올 줄이야. 과연 다시 복귀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칼리프는 괜찮은 건가.”
얼음 산맥에서 게이트로 이동해 대신전에 올 때까지 그를 신경 쓰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
위험이 닥쳐도 자신을 구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지만, 칼리프는 아예 리티아 쪽으로 마수가 고개조차 못 돌리게 막았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원래 마수는 처음에 리티아와 오히려 가까운 곳에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아예 마수의 몸을 반대로 틀어버린 건 칼리프와 그의 동료들이었다.
마르마티가 막은 얼음 파편마저도 마수가 휘두르다 성 기사 하나가 팔을 부서뜨리면서 생긴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없었다면 정말 전멸을 당했을지도 모를 정도의 상황이었으니까. 그가 유달리 강한 것인지 자신들이 약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땐 무사해 보였는데 지금도 그런지 걱정이 됐다.
“아가씨.”
“…….”
“리티아 아가씨.”
“아, 어. 에밀리아.”
고개를 들자 에밀리아가 배시시 웃었다.
“목욕물 다 준비해 두었어요. 바로 옷도 준비해 둘게요. 오늘은 제가 시중을 들어도 될까요?”
그 말에 리티아가 저도 모르게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여태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까…….
“응, 오늘은 부탁할게.”
“네, 아가씨! 맡겨만 주세요.”
에밀리아가 신나서 팔까지 걷어붙였다.
따뜻한 물에 온몸을 밀어 넣으니 그제야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리티아는 욕조에 가만히 앉아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채 한참을 숙이고 있었다.
리티아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일만 일어나고 있다.
정말 자유를 위해 선택한 일이 맞나. 그렇게 생각해도 별다른 결정권이 없었다는 걸 떠올리면 또 울적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것이 가장 몬트 공작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는 법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럼에도 흔들리는 걸 보면 아무래도 자신도 충격을 크게 느낀 것 같았다.
그냥 이대로 침대로 들어가 몇 날 며칠이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쉬고 싶었다.
에밀리아는 리티아가 힘들었다고 생각해 가만히 기다려 주며 물이 식지 않도록 뜨거운 물을 조금씩 욕조에 흘려주었다. 사람이 많은 걸 싫어하는 리티아를 위해 혼자만 들어온 상태였다.
한참 만에야 리티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제 괜찮으세요?”
“……응.”
“오늘은 아무 생각하지 마시고 푹 쉬기만 하세요.”
“응, 그래야겠다.”
“다시 가셔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오셔서 저는 너무 좋아요.”
“그래?”
“네, 정말로요. 아니, 신기한 일이 있는 거 아세요? 아가씨가 집을 비운 뒤부터 고양이도 안 오는 거 있죠? 얼마나 심심하던지. 이제야 정이 조금 붙었는데 어쩜 그렇게 발길을 끊어요?”
“그래? 몰랐네. 오면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쩌면 또 귀신같이 알고 찾아올 수도요. 아, 도련님께서도 걱정 정말 많이 하셨는데, 하필 오늘 영지까지 내려가신 상태라 아가씨가 오셨다는 소식은 전해 들으셨을지 모르겠네요.”
리티아가 고개를 돌렸다.
“엘라르? 엘라르가 뭐라 그랬는데?”
에밀리아가 비누를 문지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