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 * *
“상황 파악만 하고 오겠습니다. 먼저 가 있어.”
곤도르가 짧게 말하고 몸을 돌려 소리가 난 쪽으로 성큼 멀어져갔다.
펠루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라는데 먼저 가 있죠. 알아서 찾아올 겁니다.”
“……그래요.”
리티아는 자리를 벗어나며 뒤를 한 번 더 힐끔 쳐다봤다. 어느새 곤도르의 모습은 사람들 뒤로 사라진 뒤였다.
* * *
다음 날.
출발과 동시에 인원이 반으로 갈라졌다.
리티아와 합류한 인원은 테메스와 오브까지 열 명. 남은 인원은 다른 목적지로 향했다.
혼자서 해야 해 긴장을 많이 했는데 막상 다른 후보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한결 편했다. 원래도 불편했지만, 어제 유디트까지 찾아와 대화를 나누고 난 이후에는 더 불편해진 탓이다.
어제 시장에서 일어난 큰일은 다행히 별일이 아니었다.
상인 둘이서 멱살을 잡고 싸운 모양인데 항간에 떠도는 불안한 소문 때문에 실랑이를 벌이다 큰 싸움이 난 듯했다.
자세하게 듣진 못했지만, 제국 전체에 갑자기 이렇게 균열로 혼란이 일어난 게 누군가 일부러 일으킨 게 아니냐는 소문 때문에 싸웠다고 들었다.
아무리 소문이라지만 어느 간 큰 자가 이런 말도 안 되는 혼란을 일으킨단 말인가. 누가 봐도 허무맹랑한 소문이라 리티아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공녀님.”
“네?”
“오늘 컨디션이 별로 신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맞은편에 앉은 펠루가가 물었다.
리티아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잠깐 고민할 게 있어서 그랬어요. 컨디션은 늘 좋아요.”
어제도 내내 리티아 일행이 다니는 방향으로 계속 따라다니던 로아를 알고 있었다. 그 생각을 다시 곱씹는데 표정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리티아가 손사래를 쳤다.
“그럼 다행입니다.”
대형 마차가 들어가기 힘든 곳이라더니, 지나가는 길이 바닥이 평평하지 못한 숲속을 지나야 하는 길이었다.
땅속에 돌이 많은지 위로 삐져나온 바위들이 마차의 속도를 방해했다. 조금만 편하려고 해도 덜컹, 덜컹 그간 폭신하다고 생각했던 의자 쿠션이 딱딱하게 느껴졌다.
“꽤 험준하네요.”
“그래도 여기만 지나면 평평한 길이 나온다고 합니다. 대신 길이 좀 좁지 않을까 하는데.”
“그래도 마수가 나타나는 것 보단 훨씬 낫지 않을까요?”
펠루가가 픽 웃었다.
“혹시 모르죠.”
“하긴, 이 또한 하나의 시험이니. 레페님께서 말씀해 주지 않은 부분이 나타날지도요. 그러더라도 조금만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알고 계셨군요.”
펠루가가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앞으로 계속 이런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요. 역대 테니아 분들도 모두 겪은 일이라고 들었어요. 그러니 이번에는 저지만 다름에는 다른 분들도 같은 것을 겪으시겠죠.”
“진짜 우리 공녀님 은근히 강하다니까.”
“곧 도착하겠네요.”
여전히 과묵한 곤도르를 제외하고 셋은 도착할 때까지 쉼 없이 떠들었다.
이제는 마차에 정적이란 없었다. 펠루가의 말대로 평평한 땅이 조금 이어지더니 이내 마차가 멈추어 섰다.
내리기 전 마르마티가 챙겨온 간이 지도를 확인했다.
“한 번 확인만 하고 내리죠.”
그러고는 의자 밑에 놓인 간이 테이블을 꺼내 중앙에 펼쳤다. 간이 지도를 그 위에 올렸다.
“오늘 저희한테 할당된 지역이 여기에서 여기 까집니다. 저희 마차가 있는 곳이 여기고요.”
리티아는 속으로 거리를 가늠하며 몇 번에 끝낼 수 있을지 확인했다.
레페 신관이 내민 목걸이는 챙겨 온 상태였다. 급하게 계획이 바뀌는 바람에 오늘 지역에 갔다가 바로 다음 지역으로 넘어가게 됐기 때문이다. 원래 잠깐이라도 들려 짐을 싸서 다시 출발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새벽부터 짐을 다시 꽁꽁 싸야 했었다.
대신 챙겨온 목걸이는 마차 안에 잠시 두기로 했다. 어차피 성력을 담아 가늠하는 그릇 같은 거라면 착용하지만 않으면 될 것 같아서.
물론 레페 신관이 나쁜 마음을 먹어서 그런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저 대신관 성하가 저를 테니아로 속으로만 내정하고 예뻐하는 거겠지 하고 우선은 생각하기로 했다.
“공녀님?”
“아, 네? 미안해요. 잠깐 딴생각을 좀 했어요.”
“뭐 미안하실 필요까진 없고요. 구역이 좁지 않으니 굳이 광역 정화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다고요.”
“네? 그래요? 금방 끝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공녀님이 원하신다면 막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계속 강행군이 이어질 겁니다.”
“제가 봐도 성력을 비축할 수 있을 때 이 녀석 말대로 비축하는 게 낫다고 봅니다.”
마르마티에 이어 펠루가까지 그렇게 말하니 리티아도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딱 세 번만 쓰면 되겠다 이미 계산을 마친 참이었기 때문이다.
“근데 저 먼저 쓴다고도 안 했는데.”
마르마티가 일순간 낄낄거렸다.
“아닌데. 딱 세 번에 끝낼 수 있겠다고 공녀님 얼굴에 쓰여있는데요.”
“어, 어떻게 알았는데요?”
리티아가 제 뺨을 가리며 화들짝 놀랐다. 마르마티가 아예 배꼽을 잡고 웃었다.
“공녀님 계속 혼자 중얼거리면서 지도에 원 세 개를 그리셨잖습니까.”
그 말에 리티아가 얼굴이 확 붉어지는 걸 느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네 명이 동시에 문 쪽 창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기사 한 명의 머리가 보였다. 곤도르가 문을 열었다.
“저희는 준비를 다 마쳐서요.”
그 말에 리티아가 기사를 향해 끄덕이며 말했다.
“저희도 내릴 거예요.”
“그럼 오늘도 또 힘내봅시다.”
마르마티가 지도를 접으며 간이 테이블도 한쪽에 밀어 넣었다.
마차를 가볍게 뛰어내린 마르마티가 리티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은 제 차례.”
찡긋, 윙크까지 하는데 리티아가 헛웃음을 지으며 손을 잡았다.
* * *
“다들 아직 도착 안 한 것 같죠?”
할당된 구역의 정화를 마치고 리티아의 일행은 곧장 다음 중간 목적지로 향했다. 밤을 묵을 곳이기도 하여 최대한 빠르게 합류 지점으로 움직였는데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게요. 여유 부려도 됐었나 봐요.”
“그럼 우리 먼저 신전 안에 들어가 있는 게 좋겠습니다. 쉬다가 다 도착하면 또 움직여야 하니까요. 또 고생하지 않게 부디 얼른 왔으면 좋겠습니다.”
리티아도 펠루가의 말에 동의했다.
여기는 합류를 위해 잠깐 머무는 중간 지점으로 신관들이 머물 수 있는 건물 하나밖에 없어서 이곳에서 짐을 풀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여기서 합류해 다음 목적지까지 다시 쉴 새 없이 달려야 한다.
하지만 다음 지역까지는 고정 포털 게이트도 없어서 다섯 시간이 넘는 거리를 마차로 달려야 하는데 만약 다른 쪽 일행이 너무 늦게 도착하면 정말 바깥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 수도 있었다.
남들 다 한다는 캠핑이라고 생각하면 훨씬 나아지지만, 그마저도 겪어봤어야.
하지만 리티아와 펠루가의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저녁이 되도록 다른 일행들이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더 늦으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그러게요. 무슨 일이라도 났는지 확인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
이 작은 신전을 관리하는 노신관 한 명이 다가왔다.
네 명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신관님.”
“다름이 아니라 오신다고 하여 미리 저녁 식사를 간단하게 준비해두었는데, 시간이 늦어 괜찮으시면 먼저 드십사 말씀을 드립니다.”
“아, 감사합니다. 거기까진 미처 생각을 못 해서요.”
“대단한 차림은 아니지만 괜찮으시면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새하얀 덥수룩하게 난 수염이 입술을 모두 가려 목소리만 들리는 신관이 푸근하게 웃으며 따라오라 몸을 돌렸다.
노신관이 안내한 식당에 7명이 모두 들어서자 그야말로 공간이 꽉 찼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오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습을 감춰버려서 그나마 식당에 틈이 났다.
아까 정화할 때도 저 멀리 보이는 칼리프의 뒷모습밖에 보지 못했었다.
“저녁 먹을 때까지도 안 오면 천막 확정이네요.”
펠루가가 자리에 앉으며 아쉽다는 듯 말했다.
“마수가 많이 나타난 것만 아니면 좋겠어요.”
“그래도 그쪽으로 스무 명 넘게 인원이 배정됐으니 크게 다치진 않을 겁니다. 대규모 마수가 발생했다면 이미 마을에서 큰 종을 울렸을 거예요.”
“종을 울려요?”
“예, 이쪽은 통신 마도구가 그렇게 많지 않아서 한 곳에서 비상종을 울리면 다음 마을까지 가까운 곳에 종을 울리면서 소식을 전한다고 합니다. 마도구 다음으로는 소리가 가장 빠르게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요.”
“아, 그럼 문제가 생기면 종소리가 들리겠군요.”
“뭐 그렇죠. 우선 배를 채우는 게 좋겠습니다. 먹다가 일행이 와도 식당이 터져나가겠어요.”
펠루가의 말이 맞았다. 리티아는 제 앞에 놓인 수프를 얼른 떠먹었다. 진한 토마토 스튜의 향이 입안에 한가득 퍼졌다.
“맛있어요. 경들도 얼른 드세요.”
“예, 공녀님도 천천히 드십시오.”
저녁을 먹고도 소화까지 거의 다 된 저녁 8시에 가까워져서야 신전에 마차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마차 가까이 걸어가는데 마차에서 내린 사람들 모두고 초췌해진 채 지친 기색으로 하나둘 발을 내렸다.
“먼저 와 계셨군요.”
먼저 내린 레페 신관이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하지만 어딘가 다소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네, 다행히 정화가 일찍 끝나서요. 마수라도 나타났었나요?”
“아,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