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 * *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한적한 공간에 리티아와 레페만 남았다.
“네, 신관님.”
“쉬셔야 하는데 자꾸 시간을 빼앗아 죄송하군요. 다름이 아니라 어려운 부탁을 드렸는데도 흔쾌히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부탁을 드렸지만 그래도 혹시 생길지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이걸 드리겠습니다.”
레페가 건넨 건 손바닥 반만 한 금색 펜던트가 달려 있는 목걸이였다.
“목걸이네요.”
“이건 성력을 안정하게 다룰 수 있게 해주는 목걸입니다. 잘 쓰이지는 않으나 혹시모를 상황에 대비해 착용하고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쓰고 나중에 돌려주시면 됩니다.”
마치 회중시계를 떠올리는 디자인인데 뚜껑이 열리는 건 아니었다. 다소 묵직해 보일 정도로 컸지만 그래도 생각해 준다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네, 신관님. 감사합니다. 쓰고 돌려드릴게요.”
“그럼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먼저 나가는 레페 신관의 뒷모습을 보다 리티아도 주머니에 목걸이를 집어넣고 밖으로 나왔다. 이런 게 있다면 차라리 네 명에게 이걸 주는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방으로 돌아와서는 목걸이의 성능을 보기 위해 한참이나 정화 연습을 했다. 하지만 이미 안정화된 상태에서는 별 소용이 없는지 목에 걸고 연습을 해봐도 크게 다르게 느끼지 못했다.
“효과 있는 게 맞나?”
행여 이 세계의 부적같은 건 아니겠지. 아무리 쥐고 살펴봐도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이번에는 손에 올려두고 사용하는 순간 리티아는 조금 다른 점을 느꼈다.
“음?”
다시 성력을 꺼내니 희미하게 목걸이가 그 빛을 흡수하는 게 느껴졌다. 단순히 허공에 흩어지는 게 아니라 목걸이가 빨아들이듯 성력을 가져간 것이다.
“흡수?”
안정화를 시켜주는 거라면서 성력을 왜 흡수하는 거지?
일부러 성력을 약하게도 뽑아보고, 강하게 뽑아보기도 했는데 확실히 희미하게 스며드는 게 보였다.
오히려 안정화시키는 도구라기보다 마치 흡수체같았다.
“……써도 되는 거 맞나.”
그래도 고위 신관인데 거짓말 했을 리는 없고.
한참 창문 근처에 기대서서 연습을 하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리티아가 목걸이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인상을 썼다.
어쩐지 문앞에 로아 캐번디시가 서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리티아가 문에 가까이 다가가 묻기도 전에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유디트예요.”
뜻밖의 인물에 리티아가 문을 열었다.
정말 유디트 사보이아가 있었다. 그런데 왜 찾아왔지?
“공녀님, 아직 안 주무셨네요.”
“아, 생각 좀 하느라고요. 혹시 무슨 일이 있나요?”
“아뇨, 그건 아니고…….”
유디트가 다른 할 말이 있는지 복도를 슬쩍 보며 말끝을 흐렸다. 리티아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자 유디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조금 할 말이 있는데 들어가도 될까요?”
“……너무 오래 걸리지 않는다면요.”
리티아가 조금 물러났다.
안 그래도 넷이 워낙 잘 붙어 다녔던데다 리티아를 싫어하는 부류였고, 리티아도 전혀 이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다.
지금 그들에게 대꾸를 하는 건 오로지 테니아 후보 활동이라는 특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일전에도 마르마티와 펠루가가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이미 한번 말했고, 또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라도 신경이 많이 쓰여 최대한 엮이기 싫은데 왜 이렇게 자주 찾아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유디트는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을 때까지도 별 말이 없었다.
“편히 앉으세요.”
“고맙습니다.”
“그래서 무슨 할 말이 있으신데요?”
리티아는 여전히 선 채였다. 솔직히 지금껏 많이 참아줬다고 생각했다. 로아 캐번디시도, 지밀 로베르도, 미젤라 플란트도, 유디트 사보이아도. 애초에 염치가 있다면 찾아오지 말았어야 맞는데.
“제게 감정이 좋지 않은 건 알고 있어요. ……그간 본의 아니게 공녀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렸다면 사과드립니다.”
갑자기 유디트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해왔다.
리티아의 얼굴이 다소 냉랭해졌다.
“제가 왜 사보이아 영애에게 감정이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실까요.”
“그건.”
“또 제가 지금 왜 이 사과를 받아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과거 리티아에게 포도주 잔을 쏟은 건 비단 로아 뿐만이 아니었다. 유디트 사보이아를 포함해 셋은 방관자이기도 했지만 또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했다.
연회에 나선 리티아에게 드레스 뒤쪽을 봐주겠다며 리본을 망가뜨리기도 했고, 리티아를 테라스로 불러낸 뒤 처음 보는 영식과 멋대로 이어주려고 하기까지 했었다.
그 모든 것은 리티아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도리어 자신의 호의를 무시했다며 망신을 주기까지 했었다.
이제 와서 감정이 좋지 않은 건 알고 있다고? 설령 지금의 리티아가 모두 겪지 않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철면피에 환멸이 났다. 그리고 그 잘못은 모두 신탁이 내려오기 전, 후보가 결정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들이었다.
“왜, 혹시 영애의 과거가 흠집이 될까봐 신경이 쓰여서 그러신가요.”
그러자 유디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아니라.”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후보로 발탁이 되었으니 문제가 없는 것 아닌가요.”
리티아가 다시금 냉랭하게 대꾸하자 유디트가 눈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미안해요. 제 사과 방법이 잘못된 것……같군요. 저는 다른 게 아니라……. 우습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활동을 시작하면서 마음이 크게 달라졌어요. 고민도 많이 했고 조금이라도 하나씩 바로잡고자 이렇게 급하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
“또 괜찮다면 함께 지내는 동안 협력을 했으면 좋겠다고……생각했는데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한 것 같군요.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죄송해요. 늦은 밤에 실례했습니다.”
유디트가 고개를 꾸벅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티아는 그대로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유디트가 문으로 나가며 짧게 말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 공녀님. 캐번디시 영애를 조심하세요.”
그리고 문이 닫혔다.
“하아…….”
답답해진 리티아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대체 무슨 꿍꿍이들인지.”
어디까지가 꿍꿍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캐번디시 영애를 조심하라는 것 만큼은 진실이라는 걸 안다.
아무래도 혼자 알고 준비할 것 같던 로아는 여차하면 다른 영애까지 끌어들여 리티아를 끌어내릴 셈인 듯 했다.
이전까지는 단순한 열등감으로 움직였다면 이제는 대놓고 테니아 신탁이 완전히 내려오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후보를 박탈시키겠다는 의지가 보여서.
리티아는 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조심하면 되지 뭐.
그러고는 다시 창문가에 가서 서성거렸다.
“……와주려나.”
마음 같아선 그를 나가서 찾았을 테지만 지금은 여의찮다.
괜히 걸렸다가 로아 캐번디시에게 빌미만 주는 셈이라.
자신이 기다리면 칼리프가 언제든 오겠다 했으니 큰일이 없다면 와주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
칼리프가 오면 당분간 위험하더라도 조심해달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리티아가 시선을 내리며 살며시 웃었다. 이제는 익숙한 체향이 느껴져 긴장이 풀린 탓이다.
“기다렸어요.”
리티아가 흩날리는 머리에 미처 그의 모습을 완전히 보지 않고서 말했다.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칼리프의 모습이 눈앞에 보였다. 그새 허리를 감싸고 가까이 밀착한 칼리프를 올려다봤다.
“상 받은 기분인데.”
“내가 먼저 기다려서요? 처음 아니잖아요.”
“전엔 다른 의미의 기다림이었으니까.”
“으음.”
리티아가 민망해져 고개를 돌렸다.
하긴 전에 찾을 때는 좀 약간의 살기도 담고, 짜증도 담고, 원망도 담고, 온갖 그런 감정을 다 담긴 했었다. 지금처럼 걱정이나 그런 것이 아닌.
“그런데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붉은 머리 때문인가?”
그 말에 리티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요?”
“계속 너만 보길래.”
“……보고 있었어요?”
칼리프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그날 균열에서 본 것 같아요. 아니, 보고 의심하고 있어서요. 아무래도 조심해야 할 것 같아서.”
“응, 무슨 말인지 알겠어.”
칼리프는 리티아가 말하는 대로 하겠다고 리티아의 손등에 제 입술을 붙였다.
만나서 안 되는 게 맞는데, 들켜선 안 되는 게 맞는데.
이상하게 점점 칼리프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미안해졌다.
분명 시작해선 안 된다고 했던 건 리티아였는데도 그에게 물들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짓궂게 굴다가도 다 맞춰주는 남자라는 걸 이젠 알아서인지도 모르겠다.
“대신 이렇게 찾아오면.”
그 순간 리티아만 바라보던 칼리프의 시선이 옆으로 비껴갔다.
“잠깐만.”
칼리프가 리티아를 안은 채로 책상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리티아는 그의 어깨를 잡은 채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칼리프가 손을 뻗어 잡은 건 좀 전까지 리티아가 연습을 한다고 가지고 있던 목걸이었다. 성력을 안정시켜준다던.
“이거 어디서 났어?”
“그거요? 레페 신관님이 줬어요. 성력을 안정시켜주는 장치라고요. 빌려준 거긴 하지만 아까 회의 때 들었다시피 혼자 떨어지게 됐는데 광역 정화를 쓸 때 성력이 불안정하거나 하면 쓰라고 해서…….”
“그렇게 말했어?”
어쩐지 칼리프의 목소리가 화난 것처럼 느껴졌다.
“왜요? 뭐가 이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