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 * *
리티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설마 제 이야기가 아니길 바라면서.
“공녀님.”
하지만 워낙 식당 안이 소란스러워 지밀의 그 놀란 소리 이후로는 잘 들리지 않았다. 일부러 시선은 그쪽으로 주지 않았다. 그럼 로아 캐번디시가 원하는 대로 신경을 쓰고 있다 반증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공녀님?”
“아, 네? 저 부르셨어요?”
리티아가 뒤늦게 자신을 부르는 걸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
로제니아가 어느새 오른쪽에 자리해 있었다.
“오늘 아무래도 무리하셨나 봅니다.”
“아, 아니에요. 잠시 제가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다른 건 아니고, 내일은 마을에서 작게 저희를 맞이하는 행사를 열겠다고 해서요.”
“행사요?”
“작은 축제같은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조금 이따 레페 신관께서 직접 말씀하시겠지만, 오기 전부터 준비한 거라 내일은 외부 활동은 마을에 다녀오는 것만 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하지만 일정이……”
그러자 로제니아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아마 말씀해 주실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오늘 생겨난 큰 균열을 막은 것만으로도 이미 저희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닙니다. 신관님께서도 고생 많이 하셨죠.”
“저희만 있었다면 절대 막지 못 할 일이었어요. 때마침 테니아 후보들께서 이곳에 와주신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더구나 신전 외에 마을 지하에도 대피소가 있긴 하나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서요.”
“아.”
“당분간은 안전할 테니 안전에 더욱 힘써야겠습니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부디 부족하지만 음식을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리티아에게 감사를 표한 로제니아는 다른 테이블에서 가서도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로제니아의 말대로 레페 신관은 내일 일정에 변동되었다는 말을 전했고, 다행히 로아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무사히 저녁 식사를 마무리 지었다.
저녁을 끝난 후에는 밤까지 회의가 이루어졌다.
내일 행사에 참여하고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일정 조율과 인원 배치에 대한 회의였다.
이번에도 회의는 오브와 함께 이루어졌다.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이리 모두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은 행사도 있고 하니 최대한 일찍 끝내도록 하지요.”
“아무리 봐도 레페 신관님은 단장님 급 체력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옆에서 마르마티가 리티아에게 작게 말했다. 다행히 좀 떨어진 곳에 있어 레페 신관이 있는 곳까지 들리진 않았다.
“레페 신관님이요?”
“언제고 지친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신전에서도 그랬고요. 여기서도 제일 멀쩡해 보이시지 않습니까?”
“좀 그런 것 같긴 해요. 고위 신관님들은 모두 그런 걸까요?”
“지금 대신전에 계신 이보에 신관님을 뵈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습니다. 그분은 환자예요, 환자. 매일 힘들다고 하시거든요.”
성기사가 신관을 욕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르마티는 재밌는지 낄낄거리기까지 했다.
“더 말하면 혼날 걸요.”
“공녀님께서 대신전에 가서 말씀만 안 하시면 괜찮습니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리티아에게 기울었던 상체를 세웠다.
회의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아직 웨이타스에 다른 큰 균열의 조짐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여 당분간은 원래 일정대로, 원래 목적지대로 이동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두 팀으로 나뉘어져야 하는데 괜찮습니까?”
유디트의 테메스인 마렘이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아직까진 크게 위험하진 않을 겁니다. 두 신전 모두 성벽과 가까운데다 대비가 잘 되어있고 마차로는 30분 거리이니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한곳으로 모일 수 있으니 그렇게 문제가 되진 않을 겁니다.”
레페 신관이 기다란 회의 테이블 위에 올려진 지도를 가리켰다.
“그래서 저희가 인원 분배를 이제 해야하는데.”
다들 말 잘 듣는 학생처럼 대다수가 지도에 시선을 향했다.
“몬트 공녀님.”
느닷없이 부르는 소리에 리티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왜 부르지?
“네?”
“현재 다섯 분 중 아직 공녀님께서만 유일하게 안정적으로 광역 정화를 하실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
리티아는 대답 대신 말을 아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테니아의 축복과 가호를 받고 원래는 다섯명 모두 광역 정화와 축복이 가능해야 맞았다.
하지만 몸을 사리는 것인지, 미숙한 것인지 리티아를 제외한 네 명은 시도를 하지 않거나 하다가 중간에 성력이 흩어지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그로 인해 어쩌다 보니 리티아만 완벽하게 광역 정화를 성공하게 된 것이다.
“혹시 한 번에 몇 번 정도 가능하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횟수요……?”
“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말입니다.”
회의실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리티아에게 꽂혔다.
가뜩이나 시선이 몰리는 게 싫은데 레페 신관이 대놓고 물어보니 시선이 몰릴 수 밖에 없었다.
레페 신관도 같이 외부로 나가 정화를 하긴 했지만 여기저기 흩어져서 다들 정화를 한 탓에 제대로 확인을 한 건 리티아의 테메스들 밖에 없었다.
“음, 아직까지 한 번에 세 번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요. 그런데 이제 해본 게 오늘까지 큰 균열이 일어났을 때 단 두 번이라 그 이상으로 해본 적은 아직 없습니다.”
“그럼 세 번이 가능하시다고요?”
“그때까지 문제가 없으니 네 번까지는 확실히 가능할 것 같은데, 왜 그러세요?”
그러자 주변에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때 파비 마을 근처에서 하셨던 게 처음이셨단 말씀이시죠?”
“네, 그런데 처음 그때는 제가 좀 미숙한 편이었는데요.”
불안하게 왜 그러지.
리티아가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다고 다 본 마당에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따가운 시선이 또 느껴진다 싶더니 로아 쪽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찢어진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레페 신관이 두 구역 중 하나를 리티아에게 가리켰다.
“이곳을 공녀님 혼자서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 혼자서요?”
“아, 물론 테메스 세 분과 성기사가 따라 붙을 겁니다. 저분들 중에서도 일부 함께 합류하실 테고요.”
레페가 말한 저분들이라는 건 오브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레페는 두 구역으로 나눠서 움직이되 한 곳은 리티아와 테메스, 성기사들이 그리고 세 명의 오브가. 그리고 남은 모든 인원이 다른 한 구역을 맡겠다는 말이었다.
레페의 발언은 위험하기도 하거니와 큰 오해를 살 수 있는 일이었다.
리티아가 문제를 더 크게 만들지 않기 위해 물었다.
“꼭 해야 한다면……해야겠지만. 굳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저도 여쭙고 싶습니다. 레페 신관님. 그게 무슨 뜻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니나 다를까. 유디트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방금 리티아에게 광역 정화가 가능하냐고 물어본 것과 네 명과 한 명을 따로 묶은 것. 그것은 실력으로 가른 것이나 마찬가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저도 인원 배치에 의문이 있습니다.”
레페 신관이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리티아 조차도 굳이 그가 이렇게 위험한 발언을 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석달 내내 서로 합을 맞춰야 하는 자리에, 그것도 통솔자가 다름없는 레페 신관이 입에 담았으니 말이다. 미젤라까지 손을 들어 말했다.
“아,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전에 미리 그쪽의 상황을 받은 상태인데 공녀님께 부탁드린 쪽은 균열은 아직 생기진 않았지만 깊고 오래 오염이 방치된 땅이 있다고 합니다. 험준하여 대형 마차가 가기에는 다소 비좁아 좀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고자 함이니 절대 오해하지 마십시오.”
“…….”
레페 신관은 두 손바닥을 들어보이며 친절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반대편은 넓은 평야에 가까워 오염도는 낮지만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따라 인원이 언제고 변동이 될 수 있다고 말씀드렸기 때문에 당연히 이해해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이 또한 오전의 일이고 오후에는 함께 합류하는 것으로 권해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
유디트는 여전히 얼굴에 불만을 담고 있었지만 더 논의를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 결정은 리티아에게 남아 있었다.
리티아는 혼자 결정을 내리는 대신 곤도르, 펠루가, 마르마티에게 의견을 물었다.
“세 분은 괜찮으세요?”
“저야 공녀님만 괜찮으시다면 서포트 하겠습니다.”
“저도 문제없죠.”
“편한대로 하십시오.”
세 명의 테메스는 조금의 불만도 내비치지 않고 리티아의 의견을 존중하겠다 말했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모레 출발 때 다시 한 번 더 주의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분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로베르 님! 어제 제가…….”
경계하던 분위기가 흐려지고 다시 회의가 진행됐다. 그리고 30분 정도 더해진 회의가 드디어 끝이 났다.
“몬트 공녀님.”
사람들 틈 사이로 빠져나오는데 뒤에서 레페 신관이 또 리티아를 불렀다.
“네?”
“바쁘신 일이 없다면 잠깐 남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일 일로 설명을 잠시 더 드리겠습니다.”
“아, 네! 잠시만요.”
외부로 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리티아가 기다리기 위해 옆으로 비켜서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