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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51화 (51/70)

51화

* * *

멀쩡한 척은 했지만 사실 리티아는 거의 넋이 나간 상태였다. 저도 모르게 각인이 있을 자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뜨거운 열기와 고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손끝에서는 아직도 그 감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마치 탄산수에 가득 손을 담근 것 같은. 아니, 그보다 더 짜릿한 느낌.

“균열이 모두 벌어졌습니다!”

“마수부터!”

마수 사냥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다행히 오브들과 기사들이 빠르게 마수를 없애고 있어 균열 주변이 휑하니 드러났다.

리티아와 다른 네 명이 테메스의 호위를 받아 균열 가까이 가는 데까지 성공했다.

“최대한 빠르게 하죠.”

리티아의 말에 이번에는 정말 심각성을 느꼈는지 아무도 대꾸하거나 날카롭게 굴지 않았다. 힘이 한데 모였다.

* * *

마수가 모두 죽고 균열이 완전히 사라진 건 그로부터 두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오늘따라 무슨 일인지 균열은 또다시 꿀렁이며 크기를 키웠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의 마수까지 냄새를 맡고 와 한바탕 처치하느라 꽤 시간을 소요한 탓이었다.

결국 시간은 좀 걸렸지만, 사상자를 내지 않고 안전하게 마무리했다.

하지만 기사와 테니아 후보 모두 한껏 지친 상태였다.

리티아는 칼리프의 도움으로 힘을 썼던 상태라 정화하는 내내 바짝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행여 갑자기 힘이 나오지 않을까 봐, 아니면 짜릿할 만큼 강했던 그 힘이 나오기라도 할까 봐.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오늘은 일찍 돌아가는 것으로 해야겠습니다. 여기서 더 마수가 나타났다간 정말 부상자가 나올 수도 있겠습니다.”

처음이야 50마리 정도에 가까웠지 한 번 더 마수들이 출현하는 바람에 거의 100마리에 가까운 마수를 쓰러뜨려야 했다.

정말 죽는 줄 알았다며 거대 마수까지는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는 기사들도 있었다.

그중 반은 오브가 해치웠는데 아마 오브가 없었다면 지금도 마수와 칼을 부딪쳐 싸우느라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을 것이다.

“…….”

철수하는 사이 오브들은 누구의 인사도 받지 않은 채 저들끼리 모여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숲을 가리키며 뭐라고 말을 하는데 아무래도 균열이나 마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지나가던 쓰레기를 줍고 좀 쉬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어쩜 저럴 수가 있지?’

어쨌든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저들이나 테오스나 마찬가지로 불사신이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북부와 케스니카 섬에 마수가 득실득실한다지만 그래도?

“…….”

그리고 무엇보다.

“대체 그게 뭐지.”

왜 상극인 힘이 나한테는 통하지 않는 거지. 어째서 이런 힘을 쓸 수 있는 거지.

분명히 다른 사람은 마수처럼 터져 버릴 거라고 했다. 그게 농담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가까이 있기만 해도 숨을 쉬기 버거워하는 테오스도 있는데 그 힘이 조화로울 수 없다는 건 리티아도 잘 알았다.

리티아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휙휙 살폈다.

‘먼지가 많이 끼긴 했었는데 누가 보진 않았겠지.’

그 누구도 마수를 해치우고 살아남느라 정신이 없어 보지 못했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행여 그 모습을 누가 보기나 했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리티아는 마차를 타 신전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눈치를 보며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러고는 신전으로 돌아오자마자 쉬겠다는 이유로 방으로 향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등을 기댄 채 리티아는 다시금 제 손을 내려다봤다.

“…….”

칼리프 데모드. 당신은 정말 뭘까. 어떤 존재인가.

리티아에게 힘을 빌려주는데도 망설임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입으로 분명히 말하면서도 리티아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게 너무 태연해 익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나? 리티아가 아니고 다른 테오스도 이렇게 오브의 힘을 빌려 쓴 적이 있던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자신만만해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건가.’

앞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지 다시 생각이 들었다.

하룻밤을 보낸 이후, 그의 도움이 필요했던 건 사실이었다.

힘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간신히 그 불안에서 벗어나 제 힘을 찾은 듯했는데…… 이제 정말 맞는 것인지 혼란이 들었다.

스스로도 이제 그 힘과 별개로 그를 만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첫눈에 그가 들어왔든, 하룻밤을 보내서였든 이제는 쌍방이지 않은가. 그건 부정하지도, 외면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좀 더 깊이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

문에 등을 대고 있던 탓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동시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리티아가 문에서 떨어졌다.

“…….”

똑똑.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리티아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밖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바로 문앞에 있는 것 같은데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다.

“…….”

잠시 고민한 리티아가 고리를 풀고 열었다.

열린 문 사이로 로아 캐번디시의 냉랭한 얼굴이 보였다.

“몬트 공녀, 안에 있었네요.”

“아, 네. 무슨 일이죠?”

오늘은 괴롭힐 힘도 없어 보이던데. 그리고 이곳에 온 이후 그 누구도 리티아를 건들지 않았다.

피곤하기도 하거니와 네 명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었다. 리티아를 견제하는 걸 그만둘 정도로 사이가 안 좋은가 보다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눈앞에 또 로아 캐번디시가 나타나자 리티아도 피곤해지려고 했다.

“들어가도 될까요?”

“긴 이야기가 아니면 여기서 할 순 없고요? 이제 곧 쉴 참이라서요.”

그러자 로아 캐번디시가 픽 웃으며 리티아를 기울여 쳐다봤다.

“아까 일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는데도요?”

아까?

리티아의 미간이 살짝 좁혀들었다. 설마, 뭘 봤나?

“균열에 관한 건가요?”

“균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정말 여기서 이야기 해요?”

“…….”

자신만만한 태도가 평범한 이유로 왔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들게 해 리티아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로아 캐번디시가 봤다면 더욱 곤란한 일이다.

가장 자신을 적대시하고 까내리려고 준비된 사람 앞에서 의심을 사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플 테니까.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들어오세요, 그러면. 짧게 끝날 이야기가 아닌가 봐요.”

리티아가 침착한 척 뒤로 물러났다.

잠시 리티아를 노려보더니 로아 캐번디시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리티아가 문을 닫았다.

“의자가 하나뿐이니 침대든 의자든 편한 곳에 앉으세요.”

말을 하자마자 로아 캐번디시가 의자 쪽으로 향했다.

리티아는 당연히 반대편인 침대에 마주 앉았다.

“아까 일이라면 균열밖에 없는 것 같은데, 혹시 정화할 때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

“…….”

그 말에도 로아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리티아를 쳐다보기만 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내심 입이 바짝 바르는 기분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기만 했다.

“몬트 공녀.”

“네, 영애. 말씀하세요.”

“내가 아까 이상한 걸 좀 봐서요.”

리티아는 조금도 표정을 허물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떤 걸 봤는데요? 마수를 피하느라 정신이 없지 않았나요.”

“정신없었죠. 그래서 보이더라고요.”

“말씀하세요, 무얼 봤는지. 왜 저한테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로아는 리티아를 면밀히 살피듯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까 오브와 붙어 있는 걸 봤어요. 오브의 수장이라죠?”

“아까 토벌을 도와주신 분들 말씀하신 건가요? 캐번디시 영애도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아는데요.”

“네, 하지만 그렇게 껴안고 있지는 않죠.”

그 말에 주변 공기가 한층 가라앉았다. 리티아가 반응을 하지 않았다.

“껴안고 있었다고요?”

“네.”

리티아가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이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로아 영애는 그들과 곁에 가까이 있으면 아무렇지 않나요?”

“불쾌해요.”

“그래요. 그걸 알면서 내게 그런 말을 한다고요?”

가당키나 하는 거냐며 리티아가 거의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는데 마음이 이상하게 따끔거렸다.

그들을 대놓고 옹호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고, 힘이 상극이라 서로에게 불쾌감을 느끼는 건 사실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그 불편함보다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하는 게 더욱 컸다.

“얼마 전 파비 신전에서도 둘이 함께 나갔죠.”

“네, 그건 제 테메스분들도 모두 보았고, 레페 신관께서도 허락하신 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영애한테까지 보고를 해야 하나요?”

그러자 로아가 잠시 침묵했다.

리티아는 이대로 그냥 넘어가길 바랐다. 그녀의 말로 봤을 때 리티아와 칼리프가 붙어 있는 걸 본 건 확실했다.

이렇게 찾아온 건 그녀밖에 본 사람이 없으니 이리 찾아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 자신에게 뭔가 원하는 게 있어서 찾아온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 위기만 잘 넘기면…….

“내게 보고를 해야 할 필요는 없죠. 그런데 단순히 안고 있던 게 아니라 공녀 이상한 힘을 썼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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