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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47화 (47/70)

47화

* * *

하지만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검은 물을 토한 아이는 계속해서 발작을 일으키며 또 한 번 검은 물을 토했다.

문제는 신관의 성력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성력이 들어갈수록 검은 물을 왈칵왈칵 토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멈추세요!”

안 되겠는지 로제니아가 외쳤다.

다른 사람도 앞다투어 아이를 구하려고 성력을 쓰려다가 멈췄다.

“오히려 성력이 아이를 힘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정화제를 주세요!”

“으, 으……!”

로제니아가 손에 잡힌 정화제의 뚜껑을 열어 아이의 뒤통수를 팔에 받치고 천천히 정화수를 흘려보내며 먹였다.

하지만 아이는 정화제를 그대로 토해냈다.

“아니, 대체 왜…….”

이번에는 로제니아도 당황했다.

그사이 누군가 레페 신관을 부르러 갔었는지 레페 신관이 뛰어왔다.

“제 아이가 왜 그러는 거죠? 살려주세요, 신관님!”

“무슨 일입니까?”

“오염수를 마신 아이에게 정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예?”

아이가 또 한 번 검은 물을 토했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듯 아이의 몸이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리티아와 다른 사람들 또한 너무 놀라 몸이 굳어버렸다.

이들이 다 가지고 있는 건 성력뿐인데, 성력이 들지 않는다니. 이건 리티아도 나설 수 없었다. 행여 자신의 강한 성력이 아이를 더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뭐든 잘못했으니 살려만 주세요…….”

하지만 아이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었다. 입가에 흐르는 거무튀튀한 물을 부모가 연신 닦아내며 살려달라 외쳤다.

레페 신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내 어디로 가려는 듯 급하게 몸을 돌렸다.

“로제니아, 잠시 아이를 보고 계세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러고는 뛰어가듯이 어디론가 향했다.

리티아는 순식간에 멀어지는 레페 신관의 모습을 멀거니 쳐다봤다. 마치 해결 방법을 아는 사람의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어, 흐흑 어떻게, 제 아이 좀 제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자가 된 느낌이 들었다.

잠시 뒤 레페가 돌아왔다. 그 뒤로 나타난 건 오브 멤버 중 하나인 타냐 하디였다. 갑자기 그녀가 왜?

성큼성큼 다가오는 둘의 모습에 사람들이 다 바짝 긴장했다.

레페 신관이 손을 뻗어 사람들을 물렸다.

“…….”

거침없이 다가온 타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에게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한 손으로는 젖살이 오른 아이의 뺨을 입이 벌어지도록 벌리더니 안쪽을 잠깐 확인하고서 다시 눕혔다. 심장 부근에 손을 가져다 댄 건 그때였다.

“뭐, 뭐 하시는 거죠?”

아이의 엄마가 날카롭게 물었다.

타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손에 힘을 주어 아이의 가슴을 내리눌렀다.

연기가 피듯 아이에게 바짝 맞닿은 손바닥에서 검은 그림자가 꾸물거리며 흘러나왔다.

신관들과 성기사들 모두 놀라 레페 신관을 쳐다봤다.

레페는 그저 묵묵히 타냐 하디가 하는 행동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토하게 하세요.”

타냐 하디가 이윽고 그대로 아이를 바로 옆에 있는 부모에게 맡기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언제 도왔냐는 듯 그 자리를 떠나 멀어지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뭘 한 겁니까?”

“왜 오브가…….”

레페는 타냐가 그랬듯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아이의 상체를 일으켰다. 등을 토닥이며 구토를 유발하자 아이는 그새 컥컥거리며 토해냈다. 액체를 왈칵 토하더니 남은 검은 물이 입에서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의식을 찾았다.

“어, 엄……마.”

“괜찮아? 엄마 보여? 메이, 메이.”

아이는 계속해서 기침을 토했다.

레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모든 이들의 의문을 담은 눈을 뒤로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지었다.

“가끔 성력이 역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대의 힘으로 충격을 준 것뿐이니 놀라지 마세요. 아주 오래전에 이런 일을 겪어봐서 아는 것뿐입니다.”

그러고는 타냐가 사라진 복도 쪽으로 가버렸다.

여전히 충격을 받은 모습으로 멀거니 다들 서 있는데 로제니아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아이들이 모두 의식을 찾았어요. 정화제를 마저 먹이고 저녁까지 상태를 봐야겠습니다.”

그 소리와 함께 건장한 기사들이 아이들을 안아 좀 더 편하게 누울 수 있는 신관들의 숙소로 옮기기 시작했다.

“……오브의 힘이 치료된다니 이건 들어보지도 못한 방법인데요.”

“오히려 저 아이가 너무 걱정되는데. 괜찮은 걸까요?”

뒤에서 유디트와 지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일 보면 알겠죠.”

충격을 받은 건 로아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 * *

기도하는 시간과 저녁을 먹는 시간 외에는 낮에 일어난 일로 모두가 아이들이 회복하는 데만 집중했다.

죽을 고비까지 갔던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침대에서 따뜻한 수프와 물을 마시며 부모에게 애교를 부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놀러 온 것 같다고, 내일 집에 가는 거냐고 물어보면서 까르륵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이 모두 회복해서 다행입니다.”

로제니아가 아이들을 바라봤다.

“당분간은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겠네요. 한데 평소 인원으로는 힘들지 않나요?”

이곳에 있는 신관은 총 다섯.

그중 로제니아와 관리 신관, 또 다른 신관을 뺀 둘은 이곳에 온 지 석 달도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 이제 막 적응을 끝낸 참인데 돌발 상황이 매일 일어나는 걸 몸소 겪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어렵습니다. 예전에는 신관이 셋이었는데 그나마 더 인원이 필요하여 두 분이 온 거라서요.”

“아, 그래요.”

“다른 지역이 안정화될 때까지는 더 인원을 보충하기도 어렵습니다. 우선 안정화되기를 바라야죠. 무턱대고 인원부터 또 늘릴 수는 없는 일이라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5, 6년에 한 번씩 대대적으로 균열이 일어나 혼란을 준다지만 로제니아는 이번이 가장 심하다고 했다.

혼란이 일어나더라도 이렇게 잦게,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건 처음이라고 깊은 한숨을 흘렸다.

“이제 후보님들께서도 쉬십시오.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녁 아홉 시.

아이들이 모두 언제 그랬냐는 듯 편히 잠들었다.

부모들은 혼잡함을 덜기 위해 한 명씩만 남은 뒤 아침 일찍 아이들을 데리러 오겠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야간 경비를 하는 성기사와 신관 둘이 간간이 아이들의 숙소에 들러 확인하기로 했다.

리티아도 로제니아가 이제 쉬라며 떠밀어 바깥으로 나왔다.

일은 별로 없었는데 시간 내내 긴장하고 있었더니 몸이 저릿저릿한 느낌마저 들었다.

리티아는 숙소 쪽으로 걸어가며 연신 팔을 주물렀다.

“하루가 기네.”

여러모로 오늘은 좀 신기한 날이었다.

아까 아이를 구해주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한 타냐도 뒤늦게 신경이 쓰였다.

존재만으로 사람을 살려놓고서도 의심받지 않았던가. 하지만 테오스들은 그걸 당연시하고 있었다.

대체 왜?

그때 오브가 신전 안에 없었다면 아이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걸 알기에 레페 신관도 오브를 찾아 나섰던 것일 텐데.

아이들을 치료하는 내내 그랬다. 오브 때문에 잘못된 게 아니냐며, 아침까지 지켜봐야 한다며 수군거리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하여튼 이 세계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게 분명했다.

리티아는 바람이라도 좀 쐬고 들어가자는 생각에 뒤뜰로 나왔다.

뒤뜰이어 봤자 둥글게 한 바퀴를 걷는다고 해도 100걸음이 채 나올까 말까 한 작은 곳이었지만.

하지만 그곳에 선객이 있었다. 듬직하게 느껴질 정도로 우람하고 커다란 등이 보였다. 스스로도 눈썰미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고 여기는 리티아도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저 정도 되는 체격은 성기사 중에서도 곤도르밖에 없으니까. 아까 아이의 모습을 곤도르 또한 봤을 게 분명한지라 뒷모습에서 깊은 수심이 느껴졌다.

리티아의 발소리에 곤도르가 뒤로 몸을 틀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리티아가 조금 더 다가가며 물었다.

아까 자신을 대신해 정화 지역을 맡아준 것 때문에 고맙기도 하고, 또 동생이 생각이 났나 걱정이 되기도 해서. 어쨌든 한 팀이니 말이다.

“바람 쐬고 있었습니다.”

불쾌해하는 기색이 아니기에 리티아는 슬쩍 가까이 가서 그의 옆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의자라고 할 수는 없는, 잘 가꾼 높은 화단의 돌이었지만 높이가 앉기에 딱이었다.

리티아는 가만히 옆에 있다가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사탕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하나 드실래요?”

“뭡니까.”

“아까 아이가 사탕을 주더라고요. 제가 예쁘대요.”

예쁜 언니라고 사탕을 한 주먹 쥐여주는 걸 주머니에 다 담아왔었다.

곤도르가 픽 웃으며 사탕을 받아 들었다. 리티아도 하나를 꺼내 껍질을 까 입에 넣었다. 레몬 맛이었다.

“아까 일 때문에 동생이 걱정될 것 같아서요.”

리티아는 곤도르가 테메스가 되겠다고 했을 때 기쁘면서도 걱정했었다. 동생이 있다는 걸 빈민가에서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오빠를 너무 따르는 것 같기에 둘만 있는 줄 알고, 괜히 동생하고 떨어뜨리는 일인가 싶어서 먼저 부탁해 놓고서도 다시 없던 일로 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행히 곤도르 말고도 다른 가족도 있어서 문제가 없다고 했다. 테메스가 되기 싫어서 그런 것뿐 일반 성기사여도 외부에 훈련을 나갈 땐 몇 달씩 집을 비운다고 했었다.

리티아가 테메스가 되어주면 문제없게 해준다는 약속대로 그가 부재할 동안 에나에게 의사를 붙여주고, 언제든 문제가 생기면 신전으로 갈 수 있게 조치까지 해두었다. 에밀리아와 세리에게 빈민가를 봐달라고 말은 했지만 그걸로도 부족할 것 같았다.

“공녀님께서도 형제가 있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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