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 * *
마차가 한참을 달려 멈추어 섰다.
리티아는 내내 창문을 보고 있어 마차가 멈추기 전에 이미 도착했음을 확인했다.
같은 웨이타스 지역이라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낼 것이라 여겼던 다음 마을은 생각보다 황폐했다. 높은 건물은 전혀 없고 성벽도 수도에 비하면 턱없이 낮았다. 한쪽은 깎이듯 부서져 내렸던 모양인지 복구 흔적이 보였다.
“또 왔나 봅니다. 여기선 그래도 이틀만 머물면 되니 그리 힘들진 않을 것 같네요.”
펠루가의 말에 리티아가 창문 커튼을 치며 끄덕였다.
“파비 신전에 신관분들이 정말 친절하셨죠, 배려도 많이 해주시고.”
가장 걱정이 됐던 게 먹는 것과 씻는 것이었는데. 음식은 대단했고 거기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뜨거운 물이 연신 콸콸 나오니 솔직히 그게 가장 좋았다.
“예. 반만 되어도 고마울 것 같습니다.”
칼리프는 분명히 리티아가 도착하기 전에는 아마 먼저 도착해 있을 것이라 그랬다. 그럼 이쯤이면 왔으려나.
리티아는 내리면서도 힐끗 주변을 한 번씩 살폈다.
“그래도 다음 목적지보다는 나을 겁니다. 어젯밤에 잠깐 듣기로는 다음은 천막일 수도 있다던데요. 아우, 죽겠다.”
마르마티가 마차에서 내려와 포효하듯 팔을 벌리며 기지개를 켰다.
“천막이요?”
“바깥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균열이 예상되는 곳과 신전 사이가 먼 편이라서요. 근처에는 마을도 없을 예정이라. 말 그대로 예정이니 아닐 수도 있고요.”
방금 파비 신전의 장점을 속으로 읊었던 리티아는 괜히 생각했다 싶었다.
천막 치고 바깥에서 잠든다는 건 생각지도 않은 부분이었다.
하기야 석 달 동안 외부에서 움직이는데 매번 편할 수는 없겠다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전쟁터도 아닌데 천막은 좀 아닌 것 같지만.
“빛의 축복을. 여기까지 방문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빛의 축복을. 머무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신관들이 인사를 나눔과 동시에 다른 일행도 모두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숙소 청소는 모두 해두었다고 하니 바로 짐을 내릴 수 있을 겁니다. 안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인원이 많다고 하여 세 곳을 모두 비워두었습니다. 각 신관이 안내를 해드릴 예정이오니 따라오시면 되겠습니다.”
새로 도착한 신전은 낮고 구조 또한 신기했는데 오각형의 뾰족한 2층 건물 다섯 채가 오각형을 이루고 있고 그 사이에 기도실이 조금 더 높게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여섯 개의 건물 사이를 지붕이 설치된 복도가 단단하게 잇고 있었다.
건물 자체는 크지 않으나 창문이 많은 것으로 보아 안에 방이 좁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파비 신전은 마을 규모에 비해 신전이 큰 편이었다.
성기사들은 숙소에 들어가기 전 주변을 시찰하러 갔기에 먼저 후보들만 더 안쪽으로 들어왔다.
“로제니아라고 합니다. 여러분들께서 머무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저를 찾으시면 됩니다.”
구불거리는 백금발 머리카락을 곱게 올려 묶은 신관의 안내를 받아 걷는데 뒤에서 지밀과 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좁네요.”
“네, 좁아 보여요.”
“전 신전도 너무 불편했는데. 무슨 방이 침대보다 작더라고요.”
“그걸 견뎌내야 테니아라고 할 수 있죠.”
“네? 유디트. 그게 무슨 뜻이죠?”
지밀이 돌연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다른 뜻 없이 말 그대로 말씀드린 거예요.”
“말이 이상하네요. 아직 테니아는 정해지지 않았어요. 후보 이후 신탁이 내려온 적이 없다고요.”
“하아, 그걸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리티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목소리만 들었다.
사실 커다란 균열에 다섯 명이 동시에 성력을 쏟아부은 이후부터 네 명이 좀 이상해졌다.
마치 처음부터 넷이 한 팀인 듯 리티아만 배척하고 굴더니 어제는 계속 둘, 둘이 나뉘어 다니고 특히 유디트는 로아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2층에 다섯 개의 방이 모두 비어 있습니다. 원하시는 방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저는 1층 문 오른쪽 방에 있으니 필요하시면 언제든 오세요.”
로제니아의 말에 따라 두 사람이 간신히 엇갈릴 정도의 좁은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두 개의 진녹색 나무 문이 좁게 붙어 있는 방이 두 개씩 네 개.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리티아가 일순간 눈썹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그러고는 냅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문을 잡았다.
“저는 이 방으로 짐을 가져다주시겠어요?”
리티아가 곧장 금색 문고리를 잡아 돌려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네 명이 복도에서 리티아가 들어간 방을 빤히 쳐다봤다.
“가끔은 빠르게 움직이기도…… 하네요.”
유디트가 꽤 놀란 듯이 말했다. 이내 자신과 가장 가까운 문을 잡았다.
“저는 여기로 짐을 부탁드려요.”
나머지 셋도 늦을세라 각자 자신의 방에 짐을 부탁했다.
* * *
“여기도 농작물이……다 죽었네요.”
이튿날.
리티아는 오늘따라 유난이 쨍쨍 빛나는 햇빛을 손등으로 가리며 펼쳐진 풍경을 암담하게 쳐다봤다. 어제는 짐을 내려놓고 기사들의 시찰을 마무리로 끝났다. 곧장 내일모레 떠나야 하기에 짐은 거의 풀지도 않은 상태였다.
“올해 농사는 끝이죠. 이제 한여름이 곧인데 싹을 틔울 수도 없으니까요. 땅은 정화로 복구가 될 테지만 완전히 죽어버린 농작물은 어떻게도 살릴 수가 없죠. 이틀 만에 일어난 일이랍니다, 이게. 약 일주일 전에 말이죠.”
리티아가 봤던 테니아의 책에서는 좀 더 아름다운 순례길이 펼쳐졌던 것 같은데.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것들만 모아두어서 그런지 아무래도 실제로 보는 건 차이가 큰 것 같았다.
책에선 사람들에게 환호받고 어디든 숭배받았으며, 어디를 가든 꽃잎이 흩날렸다고 하더니 가는 길마다 먼지만 날리게 생겼다.
조금의 지역적인 특성도 있었다. 서쪽인 웨이타스 지역은 얼음 산맥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산맥이 북서쪽에 가로지르는데 그 위는 사막지대가 펼쳐져 있다고 들었다. 그래선지 얼음 산맥 근처에 가면 사시사철 눈이 덮인 산맥에 차가운 모래바람이 분다. 한여름에도 절대 녹지 않는 여름 산맥에 비가 오지 않는 날은 건조한 바람이 불 때가 많았다.
빛이 바랜 땅은 오염이 심해 땅을 밟는 족족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럼에도 단단하게 느껴지는 게 신기했다.
“이틀…….”
신전에서 출발하기도 전에, 큰 균열이 한 번 열렸었다고 한다.
단 이틀 만에 주변이 초토화가 되고 균열은 사라졌다. 하지만 오염도가 넓고 깊어 또 다른 균열이 생길 위험이 큰 지역이었다. 사상자까지 꽤 발생했다고 들었다.
실제로 며칠 전에 오브들이 큰 균열을 감지하기까지 했으니 리티아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조금이나마 균열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얼른 하고 쉬는 게 나았다.
리티아는 같이 따라나선 신관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손바닥을 펴 힘을 끌어올렸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조절할게요. 가호 때문인지 그래도 힘이 들진 않아요.”
그러자 마르마티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녀님께서 성력이 많으신 거지, 가호가 만능은 아닙니다. 겸손하신 거예요, 일부러 그러시는 거예요.”
“네?”
“테니아님의 축복과 가호를 받았다고 성력이 어마어마하게 느는 게 아니잖습니까. 기존에 가진 성력이 강해야 확장도 가능한 거죠.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그것도 강해야 가능한 겁니다.”
“아……. 그래도요.”
“뭐 성녀님과 저희가 조합이 잘 맞는 것도 있긴 하지만요. 안 그렇습니까?”
마르마티는 연회장에서 아로와 싸운 이후 오늘 아침에도 출발할 때 저렇게 말했다.
리티아는 그게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제 팀인 기사들과 친해진 증거이기도 해서.
“맞아요.”
정화 작업은 세 시간이 넘게 이뤄졌다.
리티아는 마저 주변을 정화했다. 마음 같아선 저번처럼 광역으로 넓게 정화해 버리고 치워 버리고 싶었지만 또 시선이 몰릴 게 분명했다. 까딱했다간 여기 전 구역을 리티아가 다 맡는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단순한 우려가 아닌 게 두 시간쯤 지나서면서부터 후보들이 나가떨어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쉬겠다고 회복제를 먹으면서 번갈아 가며 쉬기 시작했는데 휴식을 취한 로아가 앉아서 일어나지를 않았다.
“캐번디시 영애, 일어나셔야 하지 않을까요?”
옆에서 먼저 일어나 정화 준비를 하던 지밀이 주변의 눈치를 보며 로아에게 말했다.
“조금만 더요. 아직 얼마 쉬지도 못했어요, 저는.”
“…….”
그렇게 말했지만 로아는 지금 벌써 30분 넘게 쉬고 있었다.
덕분에 아로와 콜로스, 남은 세 테메스인 브렌과 루케, 올리버가 대신해 로아 캐번디시의 구역까지 정화 중이었다.
아로마저 로아 캐번디시에게 눈치를 주듯 쳐다보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아는 계속 앉아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럼 저는 저기로 가서 해야겠어요.”
결국 눈치가 보인 지밀이 조금 떨어져서 제게 할당된 구역으로 뛰어갔다.
금세 제 테메스와 합류해 서둘러 밀린 정화를 시작했다.
“공녀님.”
곤도르가 리티아에게 다가왔다. 키도 그렇고 덩치도 커서인지 곤도르가 다가오면 꼭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네?”
“조금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거의 다 해가는데요?”
“남은 건 저희가 마무리하겠습니다. 좀 쉬고 계십시오.”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곤도르가 뒤를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