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 * *
동시에 펠루가가 검을 잡았다.
“공녀님 아래로 머리 숙이십시오!”
날카로운 것으로 벅벅 긁는 소리와 함께 위에서 더 큰 소리가 났다. 리티아가 두 손으로 머리를 막으며 몸을 있는 힘껏 바닥으로 낮췄다.
펠루가의 검이 그대로 위를 길게 뚫었다.
키에에엑! 꼭 박쥐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펠루가의 검이 정확하게 꿰뚫은 것이다. 동시에 바깥에서도 공격을 했는지 이윽고 바닥에 쿵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리티아가 보던 창문으로 시커먼 게 옆으로 뚝 떨어지는 게 잠깐 보였다.
“죽었어요?”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공녀님, 이제 괜찮습니다. 바깥을 한 번 더 확인하겠습니다.”
“네, 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리티아가 숙였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펠루가가 잠시 내려 주변을 확인하고 그 뒤로 3분도 지나지 않아 마르마티와 곤도르가 돌아왔다.
균열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수 타는 냄새가 났다. 리티아가 잠시 콧등을 찌푸렸다.
“열 마리가 동시에 습격을 하려고 했나 봅니다. 갑자기 제일 작은 놈이 마차 위로 뛰어드는 바람에.”
“마차가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그래도 이번엔 바로 처리했습니다, 공녀님.”
마르마티가 자랑스럽게 말하는데 리티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네, 알아요. 펠루가 경도 바로 소리 나자마자 움직이셨어요. 검이 마차를 뚫기도 하더라고요.”
마르마티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으쓱하다가 깜짝 놀라며 위를 쳐다봤다.
“야, 그래도 구멍을 뚫으면 어떡해. 어쩐지 갑자기 쓰러지더라니. 베드라 신관이 보면 또 한 소리 하겠다. 마차 조심해서 쓰라고 잔소리 엄청나게 하던데.”
뒤늦게 마차 지붕을 확인한 마르마티가 펠루가를 향해 혀를 찼다. 펠루가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었어. 보수하면 되지.”
“네가 했다고 그래.”
위험이 지나가자마자 둘의 유치한 싸움은 또 시작이 됐다.
“다른 마차도 비슷해.”
곤도르가 말하고 나서야 말다툼이 멎었다.
리티아가 탄 마차 말고도 다른 마차도 지붕에 올라타 습격했던 모양이다.
마차는 정리를 마치자마자 다시 출발했지만 또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테메스가 다 지켜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물론 테메스는 성녀인 테니아를 지키는 임무로 존재하는 거지만 매번 도움을 받자니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테니아에겐 무기조차 주어지지 않으니 나설 수도 없고.
뛰어나진 않아도 리티아를 포함한 다섯 모두 가문에서 어느 정도 단련을 했을 테니 검을 아주 다루지 못하는 건 아닌데 말이다.
죽어도 맨손으로 마수를 상대하고 싶은 마음은 리티아도 없었다.
‘여차하면 돌을 집어서 성력이라도 끼얹어야 하나.’
그게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다행히 다음 고정 이동 게이트까지는 아무런 문제 없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 * *
한편 몬드 공작가는 리티아가 떠난 뒤 가뜩이나 조용한 가문이 더욱 조용했다.
몬트 공작이야 워낙 외부 인사들을 만나거나 집무를 보느라 바쁜 사람이었고, 엘라르 또한 가문의 후계자로 늘 바쁜 사람이었다.
그나마 리티아가 있어서 시간을 쪼개 찾아오는 편이었는데 그마저도 없으니 정말 리티아 방 근처는 텅텅 빈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테니아는 시종이 필요하지 않다라는 조건 때문에 함께하지 못한 에밀리아는 리티아의 방을 깨끗하고 안전하게 지키는 일밖에 못 했다.
다른 사람이 아무것도 건들지 못하게 해달라는 제 아가씨의 부탁 때문에 열심히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고양이가 오면 꼭 밥을 챙겨주라고 하셨는데…… 아가씨가 어디 간 걸 알기라도 하나.”
신기하게도 리티아가 떠나자마자 거의 매일 찾아오던 고양이의 발걸음도 딱 멈췄다.
아가씨가 있을 때만 귀신같이 알고 들어와 제 아가씨 앞에서 온갖 아양을 떨더니 털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멋대로 깨물고 상처를 내는 고양인데도 리티아는 정말 귀여워했다.
그녀는 원래 동물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멀리서 보는 건 그나마 괜찮아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더 놀랐다. 안으로 들일 줄은, 거기다 침대까지 내어줄 줄은 정말 몰랐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말 귀엽게 생긴 고양이긴 했지만 어쩜 털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고양이 털은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간 자리에 흔적을 남겨서 빨래방에는 절대 데려오지도 못하는 동물인데 이 고양이는 심지어 아무리 침대 위를 뒹굴고 가도 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린 고양이는 털이 덜 빠진다고 하던데.
에밀리아는 혹시 몰라 정원 문 앞에 깨끗한 물그릇을 수시로 갈아주었다.
“그래도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깨끗하다고 칭찬해 주시겠지.”
리티아가 없는 동안에도 에밀리아는 매일 침대 시트를 갈고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에밀리아.”
“어? 도련님!”
엘라르의 목소리가 들려 에밀리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열린 문으로 어느새 엘라르가 들어오고 있었다.
에밀리아가 닦던 것을 내려놓고 엘라르 앞에 두 손을 곱게 모아 섰다.
“부르셨어요?”
“리티아가 없어서 적적한가 보구나.”
그러자 에밀리아가 배시시 웃었다.
“네, 매일 아가씨와 함께했는데 떨어졌으니까요. 지금은 잘 계시는지는 모르겠어요. 거긴 욕조도 없고 편히 주무시기도 쉽지 않을 텐데. 신전에서 머물게 되신다면서요? 매일 마차도 오래 타야 한다고 하던데.”
“응, 신전에 연락이 닿았는데 다들 무사히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더라.”
“그래요? 아가씨도요? 역시 도련님이세요! 아가씨를 걱정해 주시는 건 도련님뿐이잖아요. 소식을 알 수 없어서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리티아와 엘라르 남매가 사이가 좋은 건 에밀리아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늘 서로를 챙기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가씨께서 무사하시다니 그보다 기쁜 일이 없었다.
“그래, 네가 궁금해할 것 같아서 알려주러 왔다. 리티아가 돌아와서 기뻐할 수 있도록 신경 좀 써주길 바라.”
“네, 도련님!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런데 에밀리아.”
그대로 나갈 줄 알았던 엘라르가 나가지 않고 에밀리아를 불렀다.
“네?”
엘라르의 시선이 천천히 방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리티아가 다시 눈을 뜨고 나서 달라진 건 혹시 없었나?”
“달라진 점이요?”
“어떤 것이라도 괜찮아.”
“아……. 음, 전처럼 상냥하신데. 좀 활달하게 변하신 것 빼곤 크게 없는 것 같은데요.”
“그래?”
에밀리아가 연신 끄덕였다.
“네, 여전히 상냥하고 좋으세요. 도련님 걱정도 많이 하시고, 요즘은 주인님 생각도 많이 하시고요. 아!”
“다른 게 있어?”
에밀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달라진 점이라고 해야 할지, 예전보다 혼자 있고 싶어 하시는 날이 많아요. 아무래도 테니아 후보가 되겠다고 하시고 나서 생각이 많아지셨나 봐요.”
“그래, 별일은 없다는 말이구나.”
“네, 아가씨께서는 별일 없으세요.”
“요즘도 리티아가 일기를 써?”
“일기요? 원래도 제가 있을 땐 안 쓰셔서……. 나중에 한번 여쭤볼까요?”
“아니야, 괜찮아.”
“네, 도련님.”
엘라르가 알았다며 몸을 돌렸다.
“리티아가 고민이 있는 것 같다거나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꼭 알려주길 바라, 에밀리아. 나는 예전처럼 또 아픔을 겪고 싶지 않으니.”
“네, 도련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아가씨를 꼭 챙기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엘라르가 그대로 나갔다.
에밀리아는 잠시 멈칫하고선 다시 몸을 돌려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제 아가씨가 예전에 비해 오브에 관한 질문을 많이 한다거나 찾는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말해야 하나 싶었지만 제게도 말하기 힘들어하던 걸 느꼈기 때문이다.
“근데 왜 그런 걸 물어보시지.”
사실 엘라르의 질문은 이번 한 번이 아니었다.
저번에도 에밀리아가 리티아의 빨랫감을 가지고 복도를 지나가는데도 그렇게 물어봤었다. 세 번 정도 그랬던 것 같다.
여전히 많이 걱정이 되시나.
엘라르는 동생을 향한 걱정이 남달라 리티아의 일이라면 모든 제쳐두고 오는 편이었다. 엘라르의 제일 우선순위가 리티아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거기다 일부러 혼담까지 여러 번 거절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공작가의 후계자니 일찍부터 몬트 공작가에는 문턱이 닳도록 혼담이 들어왔다.
리티아는 어려서부터 몬트 공작이 테니아로 키우기 위해 막았지만 엘라르는 그렇지 않았다.
몬트 공작도 엘라르가 자리를 잡으면 후계 자리를 내주기에도 편하니 먼저 혼처를 권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엘라르가 다 거절한 것이다.
에밀리아도 오며 가며 제 주인님이 노하시는 걸 몇 번 봐서 아는 것뿐이지만 그냥 평범한 남매애였다면 그렇게 하면서까지 동생을 챙기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엘라르가 결혼을 해 작위를 받고 나가면 리티아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챙겨줄 사람이 없다는 게 혼담 거절의 이유였다.
그 정도로 엘라르는 리티아를 소중한 동생으로 여기고 아끼고 있었다. 물론 리티아도 에밀리아에게 말하지 않은 속내를 엘라르에게는 말했을 것 같았다. 아끼는 만큼 리티아도 엘라르를 정말 좋은 오빠로 여기고 몬트 공작보다 훨씬 더 의지를 하니까.
“얼른 오셨으면 좋겠다.”
이제 며칠밖에 안 지났지만 에밀리아는 다음에 제 아가씨가 무사히 돌아오면 도련님이 많은 걱정을 했다고 꼭 전달할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안전하게 돌아오는 게 가장 먼저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