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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39화 (39/70)

39화

* * *

리티아가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칼리프가 바로 옆에서 걷고 있었다.

“…….”

그냥 서른 명이 훌쩍 넘는 인원이 우르르 한꺼번에 이어서 몰려나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데. 고작 바로 옆에서 걷는 것뿐인데도 괜히 긴장감이 감돌았다.

리티아가 복도를 걸으며 힐끗힐끗 쳐다보는데 칼리프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리티아는 어쩐지 그 입꼬리가 불안해 옆으로 게걸음을 하듯이 걸어가 거리를 벌렸다.

칼리프의 입꼬리가 더욱 짙어졌으나 리티아가 미처 거기까지 알아채지는 못했다.

“와, 이제 쉬나?”

“첫날부터 힘들다.”

외부에 따로 빠진 건물이라 숙소로 가려면 기다란 외부 복도를 통해 가야 했다. 바깥 공기를 쐬자마자 기사들은 숨을 토해내듯 “와.” 하고 기지개를 켜고 난리가 났다.

리티아와 칼리프는 그들 사이에서 아무도 모르게 나란히 꽤 한참 동안 같이 걸었다.

* * *

씻고 나온 리티아는 반쯤 노곤한 얼굴로 열쇠를 꺼내 단단히 잠가두었던 문을 열었다.

욕실에 가기 전 미리 켜두었던 등이 은은하게 방을 밝히고 있었다. 생각보다 밝아 책을 읽을 수도 있을 정도다.

리티아는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뒤늦게 피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대로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않고 잘까 고민하는데 똑똑 나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칼리프?”

작게 말하다 아차 싶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서 한 번 더 똑똑 문을 두드렸다.

“누…….”

“곤도릅니다.”

누구라고 묻기도 전에 바깥에서 먼저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곤도르? 곤도르가 왜?

리티아는 얼른 수건을 갈무리한 뒤 겉옷을 걸쳤다. 이미 공동 욕실에서 옷을 다 갈아입은 상태였지만 너무 놀란 탓이었다.

“네, 곤도르 경. 잠깐만요.”

고리를 풀고 문을 열자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인 곤도르가 커다랗게 문을 막듯 서 있었다.

“……늦은 시간에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무슨 일이세요? 문제가 생겼나요?”

“…….”

곤도르는 대답 대신 뭔가를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보다 조금 큰 쟁반 위, 투명한 유리병에 액체가 가득 들어 있었다. 리티아가 아까 이곳에 올 때 마셨던 것과 똑같은 모양의 회복제였다.

“아……. 감사합니다.”

리티아가 얼떨떨하게 받아 들었다.

곤도르는 꾸벅 인사를 하고 그대로 성큼 멀어졌다.

회복제를 받을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제이드가 저녁 먹는 내내 몸이 괜찮은지 물어보긴 했지만 정말 놀라울 정도로 멀쩡한 상태였다. 단지 오래 마차를 타고 움직여 피곤했을 뿐. 거기다 곤도르가 이걸 가져오다니?

“아, 저기!”

리티아가 금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저 멀리 곤도르의 등만 보였다.

“……뭐지?”

리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닫았다.

하지만 몸을 돌리자마자 누군가 다시 똑똑 문을 두드렸다.

곤도르 경이 또 돌아왔나 싶어 문을 열었는데 이번에는 곤도르가 아니었다.

리티아는 눈앞의 상대를 보자마자 본능처럼 주변을 살피곤 그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쿵. 문을 닫고 단단히 고리를 잠갔다.

“빠른데.”

칼리프가 벽에 몰린 채로 느긋하게 웃었다.

체격 차이가 커 가뒀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리티아가 칼리프를 가둔 모양새였다.

“올 것 같았거든요.”

사실 처음에 곤도르가 아니라 칼리프가 문을 두드렸다고 생각했다. 이제 몇 번 겪고 나니 그의 패턴을 알 것 같아서. 짓궂지만 정말 딱 들키지 않을 그 아슬아슬한 선에서 자신을 놀린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리고 또한 가라고 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머리 젖었네.”

칼리프가 리티아의 미처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을 손에 감았다.

“아, 좀 전에 들어와서. 말릴 시간이 없었거든요.”

“감기 걸려. 말려줄까?”

“머리를요?”

칼리프가 침대 쪽을 눈짓했다. 고개를 돌리니 대충 내팽개쳐 놓은 수건이 보였다.

“아, 괜찮아요.”

리티아는 서둘러 수건을 집어 대충 의자에 올려두려고 했다.

하지만 칼리프가 조금 더 빨랐다.

“줘봐.”

“……정말 말리게요?”

“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앉아봐.”

정말 말려주겠다는 기세로 다시 침대를 가리켰다.

리티아는 몇 번 고개만 돌리고 주저하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눈빛으로 앉으며 그를 쳐다봤다.

“더 엉키거나 하면 안 돼요.”

“안 엉키게 잘 말리면 칭찬해 주나?”

리티아가 대꾸하지 않자 뒤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내 정말 머리를 말리려는 것인지 수건을 부드럽게 움켜쥐며 머리를 살살 털기 시작했다.

행여 머리카락이라도 안 뽑히면 다행이겠다 싶었는데 그 조심스러운 손길에 스르르 눈이 감길 정도였다.

“……잘하는데요.”

뒤에서 또 한 번 웃음소리가 들렸다.

바로 뒤라 그런지 리티아는 이상하게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그…… 이제 괜찮아요.”

잔잔하면서도 어딘가 몽글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리티아가 몸을 돌리는데 칼리프의 입술이 리티아의 목덜미에 짧게 닿았다.

리티아가 움찔 놀라며 몸을 비틀었다.

“안 돼. 하지 마요.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입술만 댔는데.”

칼리프는 퍽 억울하다는 얼굴을 했다.

리티아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것도 안 돼요. 아무것도, 다 안 돼요.”

아예 몸을 돌려 두 손으로 엑스 표시를 하자 칼리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뭐야.”

“안 된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큰 소리도 안 돼요.”

“괜찮아. 어차피 옆에 다 비었어.”

“비었다고요? 다른 방도 다 배정됐는데.”

“두 명은 후원에 갔고, 두 명은 따로 시종을 부른 건지 바깥에 마차 대기시켜 놓고 뭘 하던데.”

“바깥에?”

리티아의 시선이 저절로 창문으로 갔다.

그래봤자 창문은 커튼이 이미 쳐져 있고, 봐봤자 후원이었다.

“아, 시종.”

뒤늦게 어제부터 자꾸 몬트 공작이 시종을 따로 붙여줘야 하지 않냐고 계속 물어보던 게 생각이 났다.

괜찮다고 했는데도 평소 몬트 공작답지 않게 불편한데 괜찮겠냐며 마음에 안 든다는 눈초리를 했었는데. 에밀리아도 리티아가 오라면 따라왔겠지만.

보나 마나 시종을 부른 사람은 로아와 지밀일 가능성이 높았다. 주변인을 부르면 안 된다고 레페 신관이 아침에도 한번 못 박긴 했지만…….

지금 가장 위험한 건 그들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걸 리티아도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시종을 데려오는 게 덜 위험했을 것이다.

리티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칼리프에게 고개를 돌렸다.

침대가 성인용이라 한 사람이 눕기에 작진 않았지만 칼리프가 앉아 있으니 무척이나 작아 보였다.

“당신들은 다 균열을 추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거예요?”

칼리프가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의아해하며 리티아가 손을 잡자 그대로 그녀를 품에 껴안았다. 졸지에 그의 다리 위에 앉게 된 리티아가 벌떡 일어서려고 했다.

“조금만.”

“…….”

“안고만 있을게.”

결국 리티아가 버티던 힘을 풀었다.

“그래서 내 질문은요.”

“그냥 보이는 거야.”

“그냥 보여요? 레이더처럼?”

“레이더?”

“아, 그냥 보인다고요……. 신기하네요.”

“네가 더 신기한 건 알고 있어?”

칼리프는 대놓고 리티아의 허리를 감싸 안아 더욱 제게로 당겼다.

“아, 너무.”

“안기만. 응?”

늘 생각하지만 칼리프의 행동은 정말 오래도록 애정을 나눈 사람 같아서 이럴 때마다 간질거리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싫은 건 아니지만 누군가와 이렇게 부대끼고 있는 게 익숙지 않아서였다. 원래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다 이런 건가. 도통 뭘 해봤어야, 겪어봤어야 알 텐데. 오로지 이런 경험이라곤 이 남자와 시간을 보낸 것밖에 없었다.

전혀 불쾌하진 않지만 낯섦 그 자체였다.

밀착되다시피 붙은 몸과 몸 사이를 옮겨 다니는 온기 사이로, 느끼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마저 옮겨갈 것 같은 아슬아슬함.

등에 맞닿은 그의 가슴에서 뛰는 심장인지, 제 심장이 크게 뛰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의 가까움이라 그랬다.

“무슨 생각해.”

“……그냥 이런 게 낯설어요, 나는.”

생각만 하던 게 그대로 튀어나와 리티아가 잠시 놀랐다.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낯설어?”

“그냥 뭔가 이렇게 친밀하게 나누는 거요.”

“이렇게?”

칼리프가 리티아의 어깨에 턱을 얹고 좀 더 가까이 왔다.

고개만 틀면 서로의 입술이 닿을 정도의 거리.

리티아가 뒤로 슬쩍 물러났다.

“몸으로 안 가르쳐 줘도 돼요.”

칼리프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나직하게 웃었다.

“아쉽네.”

“내일부터는 동행해요?”

“응. 그런데 무슨 말 할지 알 것 같아.”

“제가요? 뭐라고 말할 것 같은데요?”

“아는 척하지 말라고?”

이번에는 리티아가 생각지 못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또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꼭 불만을 담은 사람처럼 삐죽거리며 그가 대답을 한 탓이었다.

저 얼굴이 귀엽다고 생각이 들 줄은 전혀 몰라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아냐, 이미 얼굴이 다 했어.”

하지만 칼리프는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리티아가 다시 웃는데 바깥에서 약간 소음이 일었다.

외출했던 누군가가 방으로 오는 듯했다. 리티아의 몸이 살짝 굳었다.

칼리프가 리티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안 들키려면 새벽에 가야겠다,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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