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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38화 (38/70)

38화

* * *

펠루가는 처음부터 오브를 반기는 편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셋 중 가장 경계가 심한 편이었다.

“성하께서 깊은 뜻이 있으시겠죠. 고생 많았어요, 펠루가 경, 곤도르 경, 마르마티 경. 저녁 식사 때 봬요.”

“예, 공녀님. 고생하셨습니다.”

“공녀님 쉬어요!”

“쉬십시오.”

테메스가 모두 인사를 하고 그들의 숙소가 있는 반대편 복도로 몸을 꺾었다.

리티아는 다시 칼리프를 잠시 눈에 담은 뒤 숙소 쪽으로 아예 몸을 틀었다.

* * *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을 땐 지밀 로베르를 제외하고 모두가 도착해 홀에 자리해 있었다.

“로베르 영애는 아직인가 봐요.”

유디트가 리티아가 앉는 것을 보며 제 옆자리에 앉은 미젤라에게 물었다.

“그러게요. 첫날부터 이렇게 버거워하면 하면 앞으로 어쩌려고 그러나 몰라요.”

미젤라는 혀까지 차며 말했다.

유디트는 그런 미젤라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것도 잠시 그녀의 대화 주체는 로아로 바뀌었다.

“마을은 어떠셨어요?”

로아가 우아한 웃음을 지었다. 저녁 식사를 위해 머리를 새로 했는지 연신 만지작거렸다.

“아주 좋았어요. 마을 분들도 모두 친절하시고 받아주셔서 축복을 모두 내려드릴 수 있었답니다. 영애는 어땠어요?”

“저희 쪽은 작은 마수 두 마리가 남아 있었어요. 다행히 테메스들께서 처리하셨지만 마수는 처음 보는 거라서…….”

둘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이내 신관들까지도 남은 자리를 채웠다. 다섯 자리가 남은 것을 보아 오브의 자리가 분명한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아직 음식도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공녀께서는 일찍 들어왔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오염된 땅이 적었나 봐요.”

이번에는 지밀이 아니라 리티아를 겨냥하기로 한 모양인지 로아가 빙긋 웃으며 리티아에게 물었다.

“그냥 평범했어요.”

리티아가 식전주로 간단하게 입을 적시며 대꾸했다.

“거긴 숲이 많은 쪽 아녜요? 들어가긴 조금 겁났나? 테니아 후보로서 그러면 안 되지만.”

리티아는 대답 대신 미소로만 답하고 다시 식전주에 입을 가져다 댔다.

리티아 대신 로아의 물음에 답한 건 제이드 신관이었다.

“아닙니다. 공녀께서 애써주셔서 거의 한 두 시간 만에 모든 정화 작업을 끝낸 것입니다. 숲에 들어가지 않고서도 광역 정화 두 번으로 끝냈는걸요. 덕분에 기사들이 체력을 소모하지 않아 내일도 거뜬히 더 많은 곳을 정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이드 신관은 말하면서도 더욱 신나서 떠들었다.

“……광역 정화를 했다고요? 그럼 여기 앉아 있을 수가 없잖아요. 아무리 농담이라 하셔도 그런 거짓말을.”

로아가 수줍게 웃으며 대꾸했다.

제이드가 손사래까지 쳤다.

“정말입니다. 저도 바로 광역 정화를 하실 수 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만, 도착하자마자 농장 하나 전체를 정화하셨는걸요.”

그러자 세 명의 영애가 동시에 리티아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리티아는 그사이 다른 기사들의 인사를 받느라 미처 그 시선을 다 느끼지 못했다.

로아 캐번디시가 대번에 입술을 짓씹었다, 이내 금방 온화한 미소를 장착했다.

“대단하네요, 공녀.”

리티아는 뒤늦게 로아의 목소리를 듣고 눈썹을 까딱였다.

“아, 네. 고마워요.”

로아의 눈매가 더욱 싸늘해졌다. 로아가 한 마디를 더 하려는데 주변이 기다렸다는 듯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대리석 바닥을 딛는 구두 소리는 오브들의 것이었다.

그들의 분위기만큼이나 정적인 걸음걸이로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입을 다문 상태였다.

리티아는 이럴 때마다 먹지도 않은 음식에 체하는 기분이었다.

손을 잡기로 했다길래 그래도 첫 만남보다는 나아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단지 테오스만 그렇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오브 또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으면서도 팽팽하게 긴장을 놓지 않았다.

정말 물과 기름처럼 전혀 서로 섞이지 않으려는 신경전이 대단했다.

리티아는 오브의 검은 힘을 느낄 수 없었지만 그 분위기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어서 오십시오. 데모드 님, 노크 님, 헤게 님, 하디 님, 베르노사 님.”

결국 그 분위기를 푸는 건 또 레페 신관의 몫이었다.

뒤늦은 합류에 서로 소개를 하지 못한 터라 레페 신관이 저녁을 먹기 전 서로의 소개를 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제야 칼리프의 이름을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칼리프 데모드, 초록 머리 여자는 타냐 하디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검푸른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남자는 이든 노크, 칼리프와 똑같은 검은 머리에 검붉은 눈이 인상적인 남자는 트리 베르노사, 어두운 금발이지만 그래도 그나마 다섯 중에서 가장 밝은색을 가진 남자는 페르난 헤게라고 했다. 특히 빙긋 웃는 것 같은 처진 눈매가 선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마저도 레페 신관이 소개해서 알았지 그들은 입을 여는 법이 거의 없어서 말해주지 않았다면 이름조차 몰랐을 것 같았다.

기사들은 레페 신관이 설득하고 설득해 그나마 이름을 툭툭 내뱉는 수준에 불과했다.

정말이지 레페 신관은 지휘자이자 관계 유지를 위해서라도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출발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벌써 얼굴에 살이 빠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자 칼리프를 포함한 오브 다섯 모두 짧게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동시에 뒤늦게 지밀의 일행이 들어왔다.

“늦어서 송구합니다.”

“오, 로베르 영애께서도 도착하셨군요. 아닙니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레페 신관이 먼저 일어나 인사했다.

리티아는 다른 이들이 하는 것처럼 짧게 고갯짓만 했다.

지밀은 조금 숨이 찬지 크게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윽고 파비 신전의 신관들이 커다란 트롤리를 굴리며 들어와 음식을 식탁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휴식을 위해 준비한 모양인지 포도주도 아예 오크통 통째로 끌고 와 한쪽에 준비를 해두었다.

“빛의 축복을.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부족함이 많지만 부디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홀은 나이프와 포크 소리 그리고 접시가 긁히는 소리, 잔을 부딪히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서로 불쾌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기운 때문에 참느라 입을 열지 않는 듯했다.

결국 정적을 참지 못한 리티아가 옆에 앉은 마르마티에게 말을 걸었다.

“음식, 맛있네요.”

“그러게요. 파비 신전의 신관들은 요리도 따로 배우나 봅니다. 눌러앉아도 되겠는데요.”

분위기를 읽은 건지 마르마티가 협조하듯 웃으며 말했다. 맞은편에 앉은 제이드가 갑자기 들썩였다.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이네요. 다들 괜찮으십니까?”

“아주 근사해요.”

“매일 먹고 싶을 정돕니다.”

유디트와 다른 기사들도 대꾸를 하니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다.

“맛있네요.”

아까 타냐라고 불렸던 초록 머리의 여자가 짧게 덧붙였다.

잔머리 하나 없이 오늘도 높게 묶고 있었는데 눈꼬리가 양쪽이 올라가 꼭 새침한 고양이를 연상하게 했다.

그 순간 다시 귀신같이 정적이 일었으나 제이드가 재빨리 웃음을 터트렸다.

“아, 이거 정말 기쁘군요. 음식을 넉넉히 만들어두었으니 여유롭게 즐기세요.”

“신관님께서도 오늘 정말 고생하셨으니 많이 드세요.”

“감사합니다, 공녀님.”

한결 부드러운 분위기에 리티아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쉬운 것 하나 없는 식사 시간이었다.

밤이라도 일정이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신관과 다섯 명의 후보, 테메스, 오브 모두 회의실에 모였다.

회의가 시작되고서야 오브들이 늦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리티아보다 훨씬 더 빨리 이곳에 도착해 주변 외곽까지 균열을 탐지하느라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마을 바로 옆에 균열이 감지가 되었다니…….”

오브가 탐지해서 표시한 지도에는 두 곳에 큰 균열이 일어날 것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었다. 한 곳은 제법 멀리 떨어진 곳이고 파비 신전이 아닌 다음 신전으로 넘어가야 하는 곳이었지만, 남은 한 곳은 파비 마을의 바로 옆이자 오늘 유디트가 정화를 한 지역이기도 했다.

“……거, 거긴 오늘 저희가 정화를 마친 상태입니다.”

유디트가 입을 열자 옆에 합류했던 다른 신관도 덩달아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저희가 오늘 그 지역을 정화 처리하였는데요.”

“이틀 후 직접 확인해 보면 될 것 같은데요.”

가만히 듣고 있던 오브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푸르스름한 검은 머리를 포마드처럼 깔끔하게 넘긴 남자였다. 이 남자 또한 서늘한 기운을 마구 풍기고 있었다.

이내 유디트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아직 시간이 더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화란 게 완벽하기가 원래 쉽지 않은 법이니까요.”

“그럼 이틀 후라면 여기서 머무는 마지막 날인데 출발을 하루 늦춰야 하나요?”

“우선은 그렇습니다. 만약 열린다면 확실히 재정화를 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다들 고생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기자 앓는 소리를 냈다.

오늘 아침 수도 대신전에서 출발했고 벌써 회의 시간도 한 시간째라 저녁 먹은 시간까지 합치면 곧 잘 시간에 가까워져 다들 지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죠. 작은 균열이었다면 어느 정도 정화가 된 이후 알아서 소멸이 될 텐데 커다란 균열은 직접 없애는 수밖에 방도가 없으니까요.”

“그럼 이틀 후 균열이 다 열리기 전에 확인하는 것으로 회의를 마치죠. 다들 괜찮으십니까?”

“예, 그렇게 하죠.”

“그게 좋겠습니다.”

큰 주제가 지나가고 내일 정화를 하고 축복을 내릴 구역을 다시 나눈 뒤 회의를 파했다.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회의실을 박차고 나왔다.

리티아도 그들 사이에 합류해 일자 복도로 나오는데 옆에 커다란 그림자가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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