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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36화 (36/70)

36화

* * *

곤도르의 도움을 받아 내리니 주변이 보였다.

나와서 쉬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마차가 여럿 줄지어 죽 서 있으니 생각보다 진풍경이었다.

신전에서 내어준 마차라 전부 다 흰색인 데다 테니아 후보들이 입은 옷도, 성기사들의 갑옷도 백색에 가까워 무슨 백의 군단 같은 모습을 자아냈다.

리티아는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작게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옆에 있던 곤도르가 물었다. 내내 마차 안에서 이야기를 안 하다 계단에서 한 번, 지금이 딱 두 번째였다.

“그냥…… 너무 하얀색이라 재밌어서요.”

그와 별개로 리티아는 자신이 입은 제복이 꽤 마음에 들었다.

활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긴 바지이기도 하고 흰색임에도 불구하고 때가 거의 타지 않는 재질이었다.

거기다 허리와 엉덩이를 가려주는 상의가 꼭 기사 제복 같기도 하고 착용감도 좋았다. 기사의 꿈을 전혀 꿔본 적이 없는데도 기사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성기사 몇 명과 신관 몇이 주변에 문제가 된 곳은 없는지 잠시 살피러 떠난 사이 리티아도 한곳에 자리를 잡고 편하게 다리를 뻗고 앉았다.

“이것 좀 드십시오, 공녀님.”

펠루가가 작은 병을 하나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신관들이 따로 챙긴 회복젭니다. 생각보다 많이 챙겼는지 짐이 너무 무거워서 줄여야겠다고 하나씩 주네요. 필요하면 다음 신전에서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으니까요.”

“아, 고마워요. 다른 분들은요?”

그러자 펠루가가 뒤를 가리켰다.

마르마티가 신나는 걸음으로 두 개를 더 받아오고 있었다.

“잘 마실게요.”

“그냥 음료라고 생각하고 드셔도 될 겁니다.”

저 멀리 회복제를 다 나눠주고 땀을 닦는 신관의 모습이 보였다.

가장 뒤에 세운 마차를 보니 정말 짐칸을 넘어 보따리들이 바깥으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나마 회복약을 모두에게 나눠줘 보따리 하나를 낑낑거리며 빈 상자 안에 넣는 모습이 보였다.

다들 마시는 걸 본 리티아도 뚜껑을 열어 그대로 회복제를 마셨다.

물처럼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고 투명했는데 마시자마자 몸에 짧게 청량함이 감돌았다.

그리고 일행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각자의 마차에 올라탔다.

리티아는 올라탈 때도 곤도르가 손을 내미는 바람에 얼떨결에 또 그의 도움을 받아 올라탔다.

과묵한 데다 늘 리티아를 볼 때 난색을 표하는 게 느껴져 저를 싫어하는 걸 알고 있는데 이렇게 도움을 받으니 매번 떨떠름함이 느껴졌다.

다시 굴러가기 시작한 마차는 쉬지 않고 파비 마을 근처의 신전까지 달렸다.

* * *

“빛의 축복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신관이 일행을 반겨주었다.

파비 마을 근처라고 외우기 쉽게도 파비 신전이라 불리는 모양이었다.

모든 일정에 지휘자나 다름없는 레페 신관이 신관과 대화 후 다가왔다.

“신관분들께서 감사하게도 점심 식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여 짐을 풀고 점심을 먹도록 하지요. 그 이후 주변을 확인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파비 신전에서 머무는 신관 여섯이 나와 각 일행마다 방을 안내해 주었다.

테메스와 인사를 나누고 잠시 헤어진 뒤 리티아와 네 명의 테니아 후보를 안내하러 온 사람은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나이 든 신관이었다.

“테니아 후보님들께서는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최대한 불편함 없이 지내시도록 준비하였으나 부족한 점이 있을 수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예비 테니아분들을 뵐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모쪼록 안전하게 계시다 가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자, 여기 다섯 개의 방이 있습니다. 모든 방은 똑같이 준비하였사오니 편히 들어가시면 되겠습니다.”

새하얀 석벽으로 높게 쌓아 올린 건물 안에 일자로 된 복도 그리고 나란히 다섯 개의 고동색 나무 문이 보였다.

로아 캐번디시가 대번에 가장 가까운 곳을 택했다.

“나는 여기 머물겠어요.”

“그럼 저는 여기.”

“여기서 지낼게요.”

“그럼 저는 여기로 정할게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네 명이 차례대로 빠르게 문을 선점했다.

맨 마지막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우연인지 하필이면 나머지 방은 조금 더 뒤에 동떨어져 있었다. 마치 가운데 문이 하나 더 있어야 할 것처럼.

‘오히려 조용해서 더 좋겠네.’

리티아는 나머지 문 앞에 섰다.

“지내는 동안 조심히 쓰다 가겠습니다.”

리티아는 신관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남은 문을 열었다.

문 사이로 늙은 신관이 말했다.

“그럼 천천히 살피십시오. 짐을 곧바로 가져올 수 있도록 말해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신관님.”

리티아가 문을 닫으려는데 다른 문으로 가서도 신관이 똑같은 말을 전하는 게 들렸다.

짐까지 친히 가져다준다는데 고맙지 않을 수가. 하녀를 둘 수 없음에도 지금까지 오는 데 크게 어려움을 못 느꼈다.

리티아는 문을 닫고 방 안을 살폈다.

공작저의 침대 하나 반만 한 공간에 몸 하나 누일 정도의 아담한 침대. 그리고 공부나 기도를 할 수 있는 작은 책상 하나, 옷장 하나, 창문, 의자 하나, 새하얀 이불과 베개 그리고 책상 위에 경전이 다였다.

곱게 정리된 이불에서는 깨끗하게 잘 말린 햇빛 냄새가 났다.

리티아는 커튼을 양쪽 고리에 걸어놓은 뒤 창문을 열었다.

덜컹거리고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긴 하지만 투박한 나무로 된 창문도 마음에 들었다.

“와.”

창문 풍경은 신전의 뒤뜰이었는데 신전이 파비 마을보다 조금 높은 편이라 작은 창문을 통해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유난히 빨간 지붕이 많이 보이는 파비 마을.

여기서 어떻게 마수가 튀어나오고 땅이 오염된다는 건지, 리티아의 머릿속에서는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마치 근처에 양떼 목장이나 젖소 목장이 있다면 딱 어울릴 것 같은 풍경인데.

날씨가 엄청 좋은 날이라 그런지 저 멀리 콜른 남작령의 성벽도 흐릿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무슨 동화 속 같네.”

옹기종기 아담하게 보이는 마을을 보니 오히려 공작저에서 눈 떴을 때보다 훨씬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똑똑.

“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짐을 가져왔겠다 싶어 문을 열었는데 찾아온 손님은 로아 캐번디시와 지밀 로베르였다.

빨간색 머리카락을 가진 로아 캐번디시, 자주색 머리카락을 가진 지밀 로베르. 둘 다 채도는 다르지만 붉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어선지 생김새가 전혀 다른데도 자매처럼 느껴졌다. 셋 중에서 지밀 로베르가 로아 캐번디시와 가장 많이 붙어 다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슨 일이죠?”

반갑지 않은 상태라 말투가 상냥하게 나가지 않았다.

“무슨 일이긴요. 공녀께서 불편한 거 없나 봐주러 왔죠.”

“걱정해 줘서 고맙네요. 불편한 거 없으니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영애.”

“우리 사이에 그럴 수나 있나요.”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데 마음 같아선 바로 한 소리를 하려다 말았다. 처음 온 신전인데 큰 소리를 내고 싶지도 않고 벌써부터 삐걱거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잠시 참기로 했다.

일부러 신경을 긁고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부류니까.

“뭐 다른 방도 죄다 똑같네요.”

로아 캐번디시와 함께 들어온 지밀 로베르가 중얼거렸다.

혼자 있으면 그렇게 좁은 방은 아닌데 둘이 들어오니 방이 꽉 차버렸다.

리티아는 문가에서 팔짱을 낀 채로 있다가 방을 멋대로 살피고 있는 둘에게 말했다.

“확인하셨으면 나가주시죠, 영애들.”

로아 캐번디시가 리티아에게 다가왔다.

“기분 나빴어요? 미안해요. 하도 동떨어져 있길래 부족한 건 없는지 대신 봐준 거예요. 몬트 공녀는 불편한 걸 잘 참으시지만 걱정이 되어서요. 테메스도 부족한데 그래도 같은 후보로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적어도 석 달 동안은 이런 여정이 계속될 텐데 서로 도와야죠.”

“네, 그래요.”

리티아가 얼른 나가라는 심산으로 대충 대답을 하고 시선을 돌리는데 로아가 그런 리티아를 빤히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이상해요.”

“…….”

“사람이 이렇게나 달라질 수가 있나. 안 그래요, 지밀?”

“그러게요.”

리티아의 손끝이 움찔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제가 변한 건 이상하고, 영애들께서 저지르는 무례는 이상하지 않은가 보네요.”

“무례라니요?”

“멋대로 남의 방에 들어와 휘젓는 걸 보통은 무례라고 하죠. 그간 제가 영애께 배려를 참 많이 했다고 생각해요. 영애 말대로 세 달. 그사이 내가 또 한 번 마음이 바뀌어서 물귀신처럼 캐번디시 영애를 붙잡고 후보 탈락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러자 로아 캐번디시가 대번에 코웃음을 쳤다.

“그게 가능할 것 같아요? 변해도 너무 변했네.”

“글쎄요. 몬트가가 움직이면 못 하는 게 과연 있을까요?”

“뭐, 뭐라고요?”

리티아가 피식 웃었다. 가문 권력 들먹이는 거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지금 가장 조용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일 것 같았다.

“저도 그게 궁금하네요. 정말 못 할지.”

로아 캐번디시와 지밀 로베르는 둘 다 속눈썹만 파르르 떨 뿐 대꾸를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쿵!

묵직한 게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짐이 온 모양이에요. 가봐야겠네요.”

그러고는 휙 돌아 각자의 방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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