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 * *
물끄러미 보던 칼리프가 리티아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옷으로 덮여 있는데도 그의 손이 닿는 순간 뜨끈할 정도의 온기가 느껴졌다.
“아…….”
아픈 건 아니었지만 열기에 리티아가 작은 신음을 흘렸다.
“나를 새길 수 있게 허락해 줬잖아.”
아, 각인.
여태 그렇게 숨기고 다녔으면서 가장 중요한 걸 놓쳤다. 하지만 그로 인해 더한 궁금증이 일었다.
“……테라스에서 처음 만났을 땐 아무것도 없었는데?”
“나도 그 부분은 의문이 많아.”
“…….”
“그래서 말했잖아. 진짜 이름을 가르쳐 주면 된다고.”
왜 자꾸 원래 이름에 집착하는 건지. 괜히 물어봤나.
리티아는 여전히 순순히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그와 관계를 했다고 해도 이 세계에서 스스로를 빼고 누구를 믿는단 말인가.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리티아라고 했잖아요. 왜 자꾸 똑같은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칼리프는 예상했던 것처럼 미소 지으며 리티아의 머리카락을 쥐고 입을 맞췄다.
“천천히 말해줘도 괜찮아. 언제까지도 옆에 있을 거니까.”
“무, 무슨.”
하여튼 칼리프는 평범하게 해도 될 말을 의미심장하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금방 가봐야 해요.”
“알아.”
그래도 오늘은 무슨 일인지 칼리프가 순순히 리티아를 보내줄 참인 듯 그대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마치 잠깐이라도 봤으니 만족한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모레, 보겠네요.”
“응.”
리티아도 휴게실에 갈 생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매번 붙잡히다 가려니 이 심심한 느낌은 뭐란 말인가. 아주 청개구리가 따로 없었다.
리티아는 그날 약속 꼭 지켜달라고 말을 하려다 너무 같은 말을 반복하는 느낌에 결국 입에 담지 않고 테라스 밖으로 나갔다.
* * *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다.
연회가 끝난 다음 날, 그러니까 어제 종일 해가 나지 않아 오늘도 날씨가 좋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걱정이 무색하게 아침부터 해가 쨍쨍 내리쬈다.
남은 추운 겨울을 방에서만 보내고 이제 막 여름에 가까워져 오는 봄이라 그런지 더욱 싱그럽게만 느껴졌다.
대신관의 지휘 아래 신전의 모든 사제가 한자리에 모였다.
“아테스 님의 가호가 함께하길.”
“빛의 축복을.”
리티아를 포함한 다섯 명의 후보는 신전에서 내어준 새하얀 제복을 입고, 거대할 정도로 높게 솟은 아테스 신의 동상 아래 한쪽 무릎을 꿇고 숙였다.
그러고는 한 명씩 현 테니아들의 축복을 차례대로 받아들였다.
테니아들이 내린 축복은 가장 강한 빛을 품은 채 따스하게 온몸을 휘감고 천천히 흡수하듯 갈무리됐다.
테니아 세 명이 단순히 축복을 내려주는 것만이 아니다.
이 여정에는 균열과 마수로 인해 오염된 땅을 정화하는 임무까지 있기 때문에 테니아의 힘으로 후보들의 성력 또한 최대로 개방시켜 주는 것이다.
로아처럼 성력이 적은 편인 사람도 테니아의 축복과 가호를 받으면 가진 힘의 몇 배는 훨씬 더 웃도는 힘을 쓸 수 있다.
지금 받은 능력으로 쓸 수 있는 성력은 곧 테니아가 되었을 때 스스로가 쓸 수 있는 힘과 거의 동일하기에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도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뒤로 테니아 후보들을 지킬 테메스들이 이어 테니아의 축복을 받아들였다.
따로 함께할 사제와 성기사를 제외하고 테니아 후보 다섯과 테메스 23명이 한자리에 모여 마지막으로 대신관의 축복까지 가호처럼 몸에 둘렀다.
“그대들의 안전을 기원합니다. 부디 제국을 정화하고 아테스 신께서 내려주신 힘을 널리 알리고 오세요.”
대신관의 온화한 목소리와 함께 비로소 마지막 활동의 막이 올랐다.
* * *
첫 시작의 방향은 서쪽인 웨이타스로 향했다.
차례대로 일행을 태운 마차가 대신전을 빠져나와 수도를 벗어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웨이타스에서 라움으로 건너가 다시 테리움 그리고 모리아와 아리아를 지나 다시 수도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모두가 함께 움직여야 하기에 자연스럽게 초대 테니아의 발자취대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불행 중 다행히도 케스니카와 러브 힐을 포함한 섬은 균열이 생겨난 보고가 전혀 나오지 않아 일정에서 제외되었다.
더구나 케스니카는 애초에 오브의 땅이기 때문에 그들의 허락 없이는 들어가지도 못할뿐더러 또 다른 섬인 러브 힐은 그와 반대로 청정지역이나 다름없는 곳이라 원래 일정으로 진행이 되어도 제외되는 곳이라고 했다.
러브 힐은 테오스, 오브 어느 관련도 없는 특수 지역이기도 해 아무런 힘도 가지지 않은 사람들만 산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테오스 기준에서는 그들을 테오리스라고 부르긴 하지만 그들은 그것조차 정의하지 않는 듯했다.
“공녀님, 긴장하셨습니까?”
창문에 붙어 삐딱하게 앉아 콧노래를 부르던 마르마티가 물었다.
세 달의 여정을 함께하는 만큼 또 지켜야 하는 의무를 가진 만큼 테메스들도 모두 함께 마차에 탄 상태였다.
자리가 부족한 경우 짐마차에 타는 경우도 있지만 리티아의 일행은 딱 네 명이라 누구 하나 불편함 없이 여유롭게 탈 수 있었다.
“조금도 안 했다면 거짓말 같고,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아직 별로 실감이 안 나요. 그냥 어디 봉사하러 가는 느낌인데.”
“여전히 솔직하십니다.”
옆에서 펠루가가 덩달아 키득거렸다.
“그럼 뭐라고 해요?”
“왜 있잖아요, 그 교과서 같은 말.”
마르마티가 주먹을 말아 쥐고 헛기침을 하더니 마치 스스로 테니아 후보가 된 것처럼 경건하게 입을 열었다.
“아테스 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일인데 긴장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반드시 테니아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목소리까지 가늘게 내는데 리티아가 짧게 웃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예요, 그게.”
“아까 누가 비슷하게 그러더라고요.”
“……진심일 수도 있잖아요.”
“그럼 오히려 다행이지 말입니다.”
짓궂게 장난하던 마르마티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리티아가 놀란 눈을 했다.
“왜 그래요?”
“이간질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만, 일정 중에 다른 테니아가 권하는 호의는 받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호의?”
“그냥 좀 찝찝한 대화를 잠깐 들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냥 노파심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가 모시는 분은 몬트 공녀님이시니까요.”
“아.”
대충 이해는 갔다.
테니아 후보들끼리 무조건 선의의 경쟁을 하는 건 아니지.
더군다나 그들이 봤을 땐 리티아가 가장 견제해야 하면서도 가장 얕보는 존재이기도 했다.
특히 로아 캐번디시를 두려워한다고 아직도 여기고 있는 것 같으니 아마 대놓고 괴롭힘도 있을 것이다.
테니아 후보들의 견제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게 봉사와 마지막 이 순례 일정이라고 했으니 마르마티가 말하는 게 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전에는 각자 가는 길이 달라 마주치기 전에는 견제가 불가능했는데 이번에는 다섯 명이 한꺼번에 움직이니 운이 좋지 않다면 세 달 내내 견제가 일어날 수도 있겠다.
“괜찮아요. 이미 전적이 있어서 이젠 호락호락하게 받아주진 않을 거예요. 미리 말해줘서 고마워요.”
리티아가 빙긋 웃자 마르마티가 잠시 놀란 얼굴을 했다.
“걱정하실 줄 알았는데.”
“그럼 오히려 더 얕보일 테니까요. 마르마티 경의 말씀대로 조심할게요.”
“저희가 곁에서 든든히 호위할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설마 큰일이야 나겠습니까.”
“그러게요.”
글쎄, 죽음까지 밀어 넣었던 그들이라 큰일까지 벌일지 안 벌일지는 봐야 알 것 같았다.
뭐 여기 있는 경들이 절대 알 리가 없겠지만.
* * *
초대 테니아가 처음 힘을 써 정화를 했다는 마을인 웨이타스의 파비 마을은 2만 명 정도의 인구가 모여 사는, 농업이 유달리 발달한 곳이었다.
그만큼 사는 인구에 비해 땅이 넓고 근처에 자유 마을 두 개와 콜른 남작령까지 붙어 있는데 이번에 이 근처에서 커다란 균열이 하나 만들어졌다고 들었다.
마수는 일부 처리하였으나 숲에 숨은 마수들이 있을 수 있고 오염된 땅도 드러나 한꺼번에 대대적인 정화를 할 예정이었다.
대신전에서 파비 마을까지는 한 번의 고정 포털 게이트를 타고 이동해서 세 시간여를 더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오브는 그 마을에서부터 합류를 한다고 들었는데.
대신전에서 축복을 받고 준비를 한 뒤 8시에 출발을 했으니 점심때쯤이면 파비 마을에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행들은 모두 파비 마을 근처에 딸린 신전에 정화가 끝날 때까지 머물기로 되어 있었다.
예상 일정은 사흘 남짓이지만 균열이 생기는 순간 그 일정은 어그러지게 될 것이다.
마차는 열심히 달려 이동 게이트를 통해 수도를 벗어나 웨이타스 경계선까지 이동한 뒤, 경계선을 넘어 열심히 달렸다.
두 시간쯤 달렸을 때 마차가 멈춰 섰다.
“쉬어가려나 봅니다.”
펠루가가 반대편 창문을 확인했다.
그때까지도 리티아의 옆에 앉았던 곤도르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침 대신전에서 만나 꾸벅 인사를 한 게 다였다.
곤도르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사실쯤은 리티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에나를 구해준 이후로 사과도 받았고 조금 나아진 줄 알았는데 늘 대면하면 별로 말이 없었다.
펠루가가 먼저 고리를 풀고 마차에서 내렸다.
덩달아 마르마티와 곤도르가 차례대로 내리고 리티아가 그 뒤를 따라 내리려고 했다.
“……아.”
간이 계단이 생각보다 높아 그대로 뛰어내릴 생각을 하는데 굵직한 손이 리티아에게 내밀어졌다.
곤도르였다.
반쯤 뚱한 얼굴로 손을 내미는데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차마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고마워요, 곤도르 경.”
리티아는 곤도르의 손을 잡고 사뿐 땅에 발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