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34화 (34/70)

34화

* * *

제국의 그 어느 인기 있는 스타를 데려온다고 한들 이런 표정을 지을 것 같지 않다.

심지어 황제와 대신관이 먼저 등장했을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리티아는 새삼 휘두르지 않을 뿐 최상의 권력을 가진 존재라고 일컬었던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자리를 빌어 예비 테니아분들의 안전을 기원하고, 여러분들의 안녕을 기원드립니다.”

아니타의 음성이 아테온 홀을 가득 메웠다.

조용하고 나긋한 목소리인데도 불구하고 귀족들이 숨을 죽이고 있던 터라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가운데에 있던 아니타가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모습을 하는 순간이었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는 아니타의 손에 하얀빛이 점점 모여들더니 빠르게 커지며 폭죽이 터지듯 주변으로 새하얀 빛이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 빛을 한 몸에 맞으며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연이어 양옆에 선 테니아도 똑같은 빛을 퍼트렸다.

테니아만 쓸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인 광역 정화, 광역 축복이었다.

“언제 봐도 테니아님들의 축복은 대단한 것 같아요.”

델라의 눈에도 감격과 환희가 차올랐다.

이내 델라가 리티아의 손을 잡았다.

“리티아도 꼭 멋진 테니아가 될 거예요.”

‘나는 저렇게 성실하지 않을 텐데.’

양심이 콕콕 찔렸지만 마지못해 리티아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오래가지 못했다.

황제와 대신관, 테니아의 축복이 차례대로 지나간 자리에는 고위 신관인 레페가 나와 지금의 현 상황을 설명했다.

귀족들도 현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인지하게 된 것이다.

방금까지의 기쁨이 무색하게 이대로 진행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얼굴들이 보였다.

더불어 레페 신관의 입에서 제국이 안전 궤도에 오를 때까지 오브와 힘을 함께한다는 공표가 떨어지자마자 귀족들은 일제히 약속이나 한 것처럼 경악했다.

그들의 추적 능력이 필요할 뿐이라고 말했지만 쉽게 가라앉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브와 함께해야 한다고요? 그 말이 사실입니까? 너무 위험한 것은 아닙니까?”

누군가가 술렁거림 속에서 질문을 던졌다.

레페 신관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외부 균열을 막기 위한 조치일 뿐 여러분들의 일상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러니 위험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더불어 예비 테니아의 안전을 위한 일임을 다시 한번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그들의 도움을 받다니요. 야만족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마수만큼이나 위험한 존재인데.”

각자 참지 못하고 레페 신관에게 항의를 하듯 질문을 던졌다. 아마 대신관이나 황제 폐하가 더 머물렀다면 이런 질문은 없었을 테지만 이미 돌아간 뒤라 거리낌 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그 정도는…… 아닌데.”

“네? 리티아? 뭐라고 했어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실제로 보면 야만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없는 사실을 만들어 욕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레페 신관의 설명과 귀족들의 질문 세례는 꽤 한참 동안 이어졌다.

테니아까지 나서 상황의 심각함을 설명하자 비로소 사그라들었지만 다시 또 혼란이 찾아왔다.

“어머, 세상에……!”

“오브가 우리 땅을 밟다니.”

“정말 큰일이라도 나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아까 혼란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아까는 불쾌, 짜증이 섞인 반응이었다면 오브가 눈앞에 나타나자 귀족들이 얼굴에서 느껴진 건 두려움과 공포였다.

솔직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외형을 제외하면 오브와 테오스는 다를 게 없었다.

지나가며 인사해도 될 정도로 그냥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마 서로 테오스와 오브라고 밝히지 않으면 못 알아볼 것도 같았다.

‘정말 이상해, 여긴.’

리티아는 예전에도 생각했지만 왜 그렇게 다르게 보는지 알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델라는 아예 쥐고 있던 샴페인 잔을 덜덜 떨었다.

“델라, 괜찮아요?”

“아? 괘, 괜찮아요. 리티아는 괜찮아요?”

“뭐가요?”

“저 오브들 말이에요. 기운 때문에 소름이 돋지 않아요? 상성이 안 맞아 그런가 봐요. 실제로 본 건 처음이라서 그런지 몸이 저릿저릿하네요.”

“저릿저릿해요?”

“……리티아는 안 그래요?”

어디가? 아무렇지도 않은데.

델라는 거짓이 아닌지 아예 다른 손으로 제 팔을 주무르기까지 했다.

실제로 귀족들 중에서 아예 고개를 돌리거나 조금 떨어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리티아는 의아함을 느끼며 로아와 다른 후보 영애들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신전에서도 신관들을 제외하고 질색을 하긴 했는데…….’

로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불쾌함을 한가득 안은 채 힐끗거리며 오브를 보고 있었다.

이쯤 되니 자신이 이상한 건가 싶었다. 신관들은 일부러 티를 내지 않는 건지 모르겠지만 신전에서도 종종 불편한 얼굴을 하긴 했던 게 떠올랐다.

“어…… 사실은 참는 거예요.”

“그렇죠? 성력이 강할수록 반발심이 심해진다고 들었어요. 리티아는 정말 잘 참네요.”

델라는 아예 주춤주춤 멀어졌다. 여기서 오브와의 거리가 그렇게 가까운 게 아닌데도 조금 더 멀어지려는 것 같았다.

그보다…….

어제 봤던 사람들이 아니다. 인원도 딱 셋. 오늘은 짙은 초록색 머리를 한 여자도 보였다.

그 말은 칼리프도 여기에 없다는 뜻이다.

어제 말하는 걸 봤을 땐 분명히 나타나 또 빤히 쳐다보거나 그럴 줄 알았는데.

매번 약속을 해도 지키긴 지키나 한참을 곤란하게 한 다음에 지켜주니까. 다른 건 제쳐두고 성격만 볼 때 확실히 좋지 않은 성격을 가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 안 왔지. 정말 어제 약속을 지키려고 일부러 안 나온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어제는 꼭 지키겠다고 몇 번이고 말했으니까.

“델라, 아니면 테라스라도 가 있을까요? 휴게실도 있잖아요, 여기.”

리티아는 계속 불편해하는 델라를 다독였다.

“잠시 그래야겠어요. 리티아도 갈래요?”

“아, 나는 조금 이따 갈게요. 먼저 가 있어요.”

“네, 그래요.”

델라는 기다렸다는 듯 연회장을 나갔다.

‘그런데 왜 자꾸 쳐다보지.’

아까부터 초록색 머리를 한 오브가 자꾸만 리티아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기분 탓인가 했는데 리티아가 조금 움직이는 사이 그녀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비단 초록색 머리만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가 유난히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지만 다른 두 명의 오브도 자꾸만 시선이 마주쳤다.

오늘은 몬트 공작 때문에라도 최대한 자리를 지키려고 했는데 자꾸만 저런 시선이 부추기니 리티아도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 한적한 테라스 쪽으로 몸을 틀었다.

* * *

중앙에서 벗어나니 한결 소음이 덜해졌다.

오늘은 특히나 밖의 경비가 철저해 안에서도 호위를 데리고 다니지 않아도 되어서 너무 편했다. 인원이 워낙 많아 시종까지 데리고 오지 못한다는 점은 조금 불편했지만.

리티아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테라스 앞까지 다다랐다. 그러다 아예 복도 반대편으로 나가 델라가 있는 휴게실로 갈까 생각했다.

커튼이 하나만 쳐져 있는 걸 보니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칼리프와의 첫 만남이 떠오른 탓이다.

정말 그는 그날 왜 여기에 있었을까. 균열도 일어나지 않았고 도저히 접점이 있을 법한 일이 없었는데.

‘델라에게 가는 게 낫겠다.’

테라스 앞까지 갔다가 다시 몸을 꺾는데 순간 리티아의 팔이 빨려 들어가듯 테라스 커튼 안으로 당겨졌다.

“……!”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리티아가 눈을 크게 뜨는데 눈앞에 칼리프가 있었다.

너무 놀란 리티아가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팍 쳤다.

“놀랐잖아요!”

“어디 가려고 그랬는데?”

“……휴게실이요.”

“아까부터 기다렸는데.”

리티아가 서둘러 그의 품에서 벗어나 남은 한쪽 커튼의 줄을 당겼다. 그러자 테라스 안에 온전히 둘만 남게 됐다.

“……내가 이쪽으로 올 줄 어떻게 알고요?”

“안 오면 어쩔 수 없지.”

“…….”

“그런데 왔잖아.”

“평범하게 부를 수도 있었잖아요.”

“그럼 모른 척하고 지나갈 것 같아서.”

……어떻게 알았지.

리티아가 슬쩍 눈을 피하는데 칼리프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답이지?”

“몰라요. 원래 휴게실 갈 거였거든요.”

“여기가 더 좋잖아.”

말을 말지. 하여튼 단 한 번도 평범한 만남을 마주한 적이 없다. 리티아가 먼저 찾아도 그럴 수밖에 없다지만 좀 놀라야지.

“왜…….”

“음?”

“왜 아까 홀에는 안 나타났어요?”

“기다렸어?”

“……그건 아니고, 그냥 다른 사람이 보여서요.”

분명히 상성이 강하면 반발력이 심하다고 했는데 델라가. 그럼 오브의 수장인 그가 가장 힘이 강할 터.

그럼 테오스 중에서도 강한 성력을 가진 신관과 테니아, 테니아 후보들은 더 거부감을 느껴야 하지 않나. 특히 이 남자한테. 거기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오늘 본 오브보다 신전에서 본 오브들이 훨씬 더 강한 느낌이었다.

그들은 제어기를 했다고 했으니 그렇다고 쳐도 이 남자는 아무것도 없는데.

역시 스스로 힘을 누르는 건가.

“뭐가 궁금한데.”

칼리프가 리티아의 표정을 읽듯 다정하게 물었다.

“힘을 누르고 있는 거예요? 나 때문에?”

“잊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