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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33화 (33/70)

33화

* * *

“미쳤지…….”

다음 날 늦은 기상으로 정신을 차린 리티아는 뒤늦은 후회에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 늦게까지 칼리프와 함께 있긴 했지만…… 마지막에 그가 어떻게 인사를 하고 갔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잘 자라고 했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이런 본능에 충실한 짐승 같으니. 스스로를 탓했다.

칼리프의 말대로 끝까지 가진 않았지만 몇 번이고 그에 의해 갔으니 이걸 끝까지 했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여전히 온몸이 저릿저릿한 기분이었다.

리티아는 온몸을 샅샅이 다 확인한 후에야 설렁줄을 당겼다.

평소보다 일어나는 시간이 늦어 기다렸던 모양인지 에밀리아가 몇 분도 되지 않아 들어왔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정말 피곤하셨나 봐요. 어제 일찍 주무셨잖아요.”

그 말에 리티아는 다시 턱이 뜨끈해지는 걸 느꼈다.

칼리프의 말대로 안 들키긴 한 듯했다.

“아, 응. 조금.”

“그럼 오늘 목욕물은 안으로 준비할까요? 또 내일부터는 연회 준비다 뭐다 바쁘실 텐데 오늘은 푹 쉬세요. 손 하나 까딱하지 마시고요.”

그 말에 리티아가 잠시 고민했다.

이제는 때에 따라 몸을 보여도 되긴 하니까.

“그럴까? 그렇게 해줘, 에밀리아.”

“네, 얼른 준비해 올게요!”

에밀리아가 웃으며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 * *

이틀 후.

아테온 홀의 불이 밝게 빛났다.

테니아 후보들의 마지막 행보를 축하하기 위해,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귀족들이 앞다투어 아테온 홀로 향했다.

어지간한 인원은 모두 흡수할 정도로 거대한 홀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빽빽해 보일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본래대로라면 전야제를 포함한 기념제 한 달, 빛의 신탁이 끝나고 후야제를 포함한 뒤풀이가 또 한 달 동안 꾸준히 이어져야 하는데 멈췄으니 오늘 모두가 나온 것이다.

내일부터는 고생길이 훤히 펼쳐지는데 사람들은 뭐가 그리 기쁜지 모를 일이었다.

“아가씨, 오늘 정말 완벽해요!”

“조금만 있다가 나올 수 있겠지?”

“오늘은 아마 무리이지 않을까요? 모레 출발이라 다들 붙잡으려고 난리일 거예요.”

“나는 별로 친한 사람도 없는걸.”

“아가씨한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으니까요.”

리티아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마차에서 내렸다.

이미 몬트 공작이 앞 마차에서 먼저 내려 리티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바빠서 통 얼굴을 제대로 못 봐 좋았는데 오늘은 피하기가가 불가능했다.

그래도 달라진 건 있었다. 리티아가 스스로 테니아 활동에 열을 올리자 오히려 공작이 리티아의 기분을 맞추려는 것인지 조금씩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아름답구나.”

“……감사해요.”

“오늘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모레면 바로 출발을 해야 하니.”

“네, 아버지.”

“그래.”

몬트 공작이 흡족하게 웃으며 아테온 홀로 향했다.

오늘도 역시나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시선이 한데 모였다.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 * *

“공녀님의 무사 귀환을 기원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로어 백작님.”

“저를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리티아가 빙그레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벌써 100번째 인사였다. 다른 후보도 리티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리티아가 제대로 나서기 전까지는 로아 캐번디시가 차기 테니아로 기대를 받았던지라 리티아 못지않게 사람이 몰려들었다.

실제로 로아 캐번디시의 드레스는 현재 테니아들이 입는 사제복과 비슷한 느낌을 자아내는 드레스였다.

반짝임을 다이아몬드로 가공해 훨씬 화려했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당장 테니아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비슷했다.

지밀 로베르도, 유디트 사보이아도, 미젤라 플란트도 일부러 맞춘 듯 각기 다른 드레스의 새하얀 드레스를 꾸며 입고 사람들 사이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몬트 공녀님, 조심히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무사 귀환하셔서 차기 테니아의 자리에 반드시 오르시길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오늘 이 자리에 오브도 함께한다고 들었는데.

아직 신전에서도, 황실에서도 사람이 오지 않은 터라 함께 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리티아와 다른 후보들은 이미 대신전에서 이야기를 들은 상태지만 아마 이곳에 모인 귀족들은 아직 다른 소식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알아도 공표하기 전까지는 입을 다물 테고.

한편으로는 얼마나 놀랄지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이미 균열로 영지에 문제가 일어난 귀족들은 이곳에 오지 않았을 테니까.

“저기…….”

조금 쉬어야겠다 생각하고 뒤를 도는데 누군가 리티아의 드레스를 살짝 잡아당겼다.

놀란 리티아가 당기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리티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카미야?’

은발의 생머리만 보고 순간 여주인공 카미야가 나타난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다시 보니 눈이 녹색이었다.

‘아니구나.’

하기야, 카미야가 등장을 하더라도 여기에 나올 리가 없지.

마치 겨울 들판에 피어난 꽃처럼 평민들 사이에서 등장할 테니까.

“누구…….”

“아, 저는 델라예요. 전에 몇 번 인사를 나눴었는데…….”

부드러운 은발을 머리띠로 단정하게 꾸미고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영애를 조금 더 자세히 쳐다봤다.

델라, 델라, 어디서 들어봤는데.

“아.”

뒤늦게 리티아가 델라를 떠올렸다. 그녀는 주인공이라거나 주요 인물은 아니었지만 리티아의 주변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친한 사이는 아니고 델라의 말대로 몇 번 인사를 나눈 사인데 로아 캐번디시 무리와는 정반대라고 보면 된다.

얼마 전 남은 일기장을 살펴봤을 때도 본 기억이 났다.

로아 캐번디시가 리티아에게 물을 뿌리거나 괴롭힐 때 직접 도와주진 못해도 몇 번 손수건을 건네주었다던.

활동적인 로아 캐번디시 부류가 있다면 델라는 리티아처럼 조용한 부류였던 것이다.

고맙다는 인사를 못 해서 미안했다고, 손수건을 돌려주지 못했다고 마지막에 쓰여 있었다. 그 손수건의 행방은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그 뒤로는 일기장을 더 펼쳐 보지 않아 잊고 있었는데.

“델라, 알아요. 저번에 우리 인사한 거.”

그러자 델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기억하네요.”

“그때 손수건 돌려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리티아는 원래 리티아가 전해주지 못한 사과를 대신 전달했다.

그러다 델라의 얼굴이 금방 울적해졌다.

“무슨 일 있어요? 표정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아뇨, 손수건은 괜찮아요. 그날 선물로 드린 것이었어요. 그냥…….”

“그냥?”

“그냥 기운 차리신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런 말 불편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걱정했었습니다.”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준 건 엘라르와 황태자 전하를 빼고 처음이지 않나.

델라와 친구를 했다면 덜 외로웠을 텐데.

잠시 고민한 리티아가 손을 먼저 내밀었다. 힘든 시기에 도움을 줬던 사람이라면 조금 더 친해져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델라가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걱정해 줘서 금방 기운을 차렸던 것 같아요. 고마워요. 앞으로도 종종 인사하고 지내요.”

이윽고 델라의 얼굴이 환해지며 미소가 번졌다.

리티아도 내심 기뻤다. 여기서 만난 제대로 된 첫 지인이지 않나. 더군다나 선한 사람이라면 더욱더 기뻤다.

“네! 몬트 공녀. 앞으로 인사해요.”

“리티아라고 불러도 돼요.”

“저, 정말요?”

“그럼요. 델라도 방금 델라라고 소개했잖아요.”

“아…….”

델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지 고개를 끄덕였다.

“리티아, 부디 무사히 다녀오길 바라요. 누구보다 멋진 테니아가 될 거예요.”

“고마워요, 델라.”

델라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는데 주변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리티아와 델라가 동시에 무슨 일인가 시선을 돌렸다.

아테온 홀의 가장 높은 자리에 황제와 대신관이 함께 등장했다.

귀족들이 일제히 상석을 향해 예를 갖추어 몸을 낮추었다.

리티아 또한 델라와 함께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몸을 낮췄다.

“빛의 축복을. 대신관 성하를 뵙습니다.”

“빛의 축복을.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무리 봐도 특이한 풍경이었다.

신전의 권력이 황실과 엇비슷하다 보니 우위를 가리기 힘들어-실제로는 대신관이 조금 더 위지만-중요 연회를 여는 공간을 따로 만들어 아테온 홀로 지정한 것도 모자라 동시에 인사를 받는 상황이 생소할 정도였다.

아테온 홀이 황궁과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하다는 게 좀 웃긴 점이긴 하지만.

“뜻깊은 자리를 함께해 주어 모두 고맙네. 이 자리에 모인 모두의 기원을 담아 앞으로를 걸어나갈 예비 테니아들의 앞날에 행운을 빌겠네. 모두가 함께 즐겨주길.”

황제 베어스 베일리움 아고스가 짧은 인사를 남기자 귀족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황제 베어스는 이시안의 딱 30년 후를 보는 것 같았다. 갈색 머리에 황금색 눈동자를 하고 있었으나 그 생김새가 몹시 비슷했기 때문이다.

자리가 자리니만큼 황제의 옆은 황후, 황태자가 함께했는데 붙어 있으니 정말 똑 닮았단 소리가 절로 나왔다.

대신관 또한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대신관의 양옆으로 테니아 셋이 모두 나타났다.

한 명은 신탁이 내려온 이후 필요한 일에만 나온다고 들었는데 축하를 위해 셋이 모두 나온 것 같았다.

리티아는 이미 묘사를 봤는데도 불구하고 왜 자신을 보고 사람들이 차기 테니아라고 믿고 있는지, 테니아를 직접 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셋 중 가장 오래 테니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테니아이자 대성녀 아니타, 그리고 그 오른쪽을 지키는 가장 마지막에 테니아 자리를 차지한 성녀 아그네스, 그리고 곧 자리를 비키게 될 성녀 레아까지 모두 백발과 은발을 하고 있었다.

테니아가 나타나자 이곳에 모인 귀족들의 눈이 모두 감격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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