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 * *
에밀리아의 눈썹이 팔(八)자로 휘며 양 끝이 쭉 가라앉았다.
“오늘 정말 최고로 예쁘신데. 진짜 진짜 예쁘신데……!”
“어쩔 수 없지 뭐. 이번에는 벗는 걸 도와줘야겠어, 에밀리아.”
“네에……. 아, 너무 아까워요.”
“그렇다고 입고 잘 수는 없잖아.”
“힝.”
에밀리아는 슬퍼했지만 리티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구두부터 벗어 던졌다.
* * *
연회가 취소된 이유는 정말로 그다음 날 알 수 있었다.
수도 비스티움에서 북쪽 라움으로 가는 외곽 지역에 거대한 균열 세 개가 동시에 생겼다고 했다.
리티아가 곧 가야 할 방향 중 하나이기도 했다.
지진이나 땅이 갈라진 것처럼 거대한 틈 사이로 마물 수십 마리가 튀어나와 그쪽에 기사들이 집중된 것이다.
보고가 된 건 그 정도였는데 계속 나온다고 했으니 수십에서 수백으로 늘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균열 또는 틈이라 부르는 이 현상은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자연 현상으로 마력이 고인 곳이나, 마수들이 무리 지어 오래 머물면서 마기를 침처럼 흘려 오래 노출된 곳에 주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 주변의 마물을 퇴치하고 정화를 하면 벌어진 균열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지만, 문제는 그 때문에 연회가 취소된 것도 모자라 모든 일정이 전면 중지되었다는 부분이다.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해 보였다.
황궁과 신전에는 하루 속히 일정을 진행하겠다고 공표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확실한 건 아니었다.
하나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일정이기에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라고 했다.
“대체 일이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네.”
“그러게요……. 그래도 아가씨가 마물이 득실거리는 곳을 간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해요. 한두 마리 나타나는 것과 달리 무리로 나타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잖아요!”
“그래도 절대 취소는 못 한다잖아.”
“그건 정말 드문 일이긴 하죠……. 아! 예전에 들었던 건데요. 전에도 이렇게 마수의 출현이 많았던 적이 있긴 했었다고 들었어요.”
“그래?”
“그땐 너무 심해서 오브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대요. 그래서 그들과 왕래가 없었지만 그 이후로 서로 필요에 의하면 아주, 아주 가끔 도움을 받았다고 해요. 무슨, 무슨 능력이 있다고 들었어요.”
“능력?”
“그것까진 뭔지 모르겠는데 무슨 능력이 있어서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음, 하긴. 제국은 우리만 사는 게 아니니까. 그들 또한 제국의 주민이잖아.”
서로 왕래가 없고, 각자 머무는 지역이 다를 뿐 한 제국 내에 존재했다.
“그렇죠……. 아가씨 말씀이 맞아요.”
거기다 다들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르게 오브는 꽤 자유롭게 다니고 있는 듯했다. 존재를 숨길 뿐.
그렇지 않고서야 칼리프가 이렇게 쉽게 이곳에 들어올 수나 있었을까?
에밀리아는 오브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단순히 혐오 같은 것이 아니라 공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렇게 무섭니?”
“마주하면 죽을 수도 있다잖아요. 솔직히 입에 담아도 되는지도 잘……. 그래도 아가씨께서 몇 번 물어보셔서 대답했더니 조금 나아진 것 같아요. 전엔 금기어에 가깝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네?”
“아, 아니야. 아무 말도.”
공포라기보단 오히려 진지하지도 않고 좀 치사하기도 하고 얼굴만 봐줄 만한…… 정도가 아닌가 리티아는 생각했다. 거기다 협박성까지 두루두루 겸비하지 않았던가.
물론 리티아의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어쨌든 공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와 관계된 것만 제외하고 보자면, 왜 그렇게 서로를 꺼리는지 이해하지 못할 만큼.
‘그 남자가 이상한 건가.’
하긴 오브는 본 적도 없고 오로지 아는 건 그 남자 하나뿐이니 어쩌면 편협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오브는 어쩌면 에밀리아의 말대로 공포의 대상일지도.
근데 그들이 테오스들을 도와줬다면 그냥 도와주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그들이 우릴 도와주면 그들은 뭘 원하는데?”
“글쎄요……? 그것까진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높으신 분들의 뜻이니까요. 대신관께서 직접 마주하신다고 들었으니 아가씨께서 성하께 물어보시면 아실지도요.”
“……그래.”
이런 일 때문에 그 남자가 연회에 나타났던 걸까 싶다가도 그건 너무 억지 생각 같아서 그만두었다.
오브가 신도 아닌데 미래에 일어날 일을 대비해서 미리 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더구나 굳이 도와줘야 할 필요가 없는 사이에.
* * *
“성력을 무기처럼도 쓸 수 있구나.”
테메스들은 리티아를 데려다주자마자 신전으로 돌아가고, 저녁까지 신전에 있을 예정이었던 리티아는 이후 시간이 붕 떴다.
테메스가 정해지면 테메스에게 아예 거처를 정해주고 저택에 머물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리티아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잡은 게 테니아의 역사를 담은 책이었다.
초대 테니아부터 현재 신전에서 지내고 있는 테니아까지 그들의 발자취를 적어놓은 것들인데, 이 안에는 테니아가 직접 마수와 전투를 벌이진 않아도 테메스의 뒤에서 도움이 되기도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직접 마수를 무찌르는 건 성기사들이었던 것 같지만.
성기사의 주된 무기는 검과 성력. 특히 성력이 마수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일반 기사도 성력을 가지고 있는 기사는 성기사로 직업을 전환하거나 상급으로 올라가 더욱 활약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이 나라에서 성력이 무슨 의미인지 너무나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테니아 반 이상이 신전에서 살았구나.’
강제로 정해진 것도 아닌데 단 한 명의 시작이었던 초대 테니아가 신전에서 평생을 머물렀다고 하고 테니아 자리에서 내려온 이후에도 신전에서 지내다 눈을 감았다고 하니 이를 토대로 따르는 테니아들이 많은 것 같았다.
‘난 절대 그렇게는 못 하지.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몬트 공작은 리티아가 1대 테니아보다 더 테니아 같은 테니아가 되길 바라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지금껏 그래왔듯 몬트 공작은 언제까지고 리티아가 그의 말을 고분고분히 들어줄 줄 안다.
그러다 이 사달이 났는데도 조금도 마음을 바꿔먹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테니아가 되면 다르지. 아무리 몬트 공작이라도 제게 감히 명령을 내리지 못할 테니까.
오로지 존재만으로도 추앙받는 존재가 테니아인데 말이다.
어쨌든 순례의 이유가 초대 테니아의 길을 후보들이 다시 걸어가며 아테스 신의 힘을 널리 알리고 땅을 정화하는 일이라고 하니 생각보다 만만치 않겠단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박박.
박박박.
“음?”
혼자서 한참 읽고 있는데 자꾸만 어디선가 작게 뭔가를 긁는 소리가 났다.
나무는 긁는 것도 같고. 그 소리는 앞 정원으로 나가는 문에서 나고 있었다.
리티아는 곧장 몸을 일으켜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박박 긁는 범인을 찾자마자 리티아의 얼굴에 미소가 폈다.
“나비야.”
리티아가 문을 열자마자 작음 틈 사이로 검은 고양이가 쑥 몸을 밀어 넣었다.
열심히 긁어댈 땐 언제고 언제 그랬냐는 듯 꼬리를 느긋하게 살랑거리며 리티아의 다리 주변을 맴돌았다.
야옹-
목소리마저 나긋하게 들리니 리티아가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내려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한동안 안 보이더니 어디 갔었어?”
먀-
처음 고양이를 보고 이따금 낮에 방에 있을 때 정원에 나가 고양이를 찾아보곤 했었다.
그런데 어디로 간 건지 통 보이지 않아 다른 곳으로 갔나 싶었는데 오늘은 어쩐 일로 정확하게 리티아의 방을 찾아온 것이다.
“어떻게 잊지 않고 내 방을 기억했어? 똑똑하네.”
냐-
고양이는 리티아가 말할 때마다 꼬박꼬박 대답을 했다.
작은 머리통을 다리에 쿵쿵 박아가며 애교를 피우는 고양이를 리티아가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보들보들한 털을 결대로 쓸었다.
“요즘 바깥이 위험하대. 돌아다니더라도 너무 먼 곳까지는 가지마. 알았지?”
리티아는 처음 고양이를 안에 들여왔을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침대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고양이는 몸을 침대에 문지르며 뒹굴렀다. 한참 부드러움을 만끽하는 듯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몸을 뒹굴던 고양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켜더니 리티아를 향해 천천히 눈키스를 보냈다.
“귀여워.”
리티아가 옆에 앉아 귀여움을 참지 못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고양이가 그르릉 기분 좋은 울음 소리를 냈다. 생긴 것도, 행동 자체도 귀엽지만 리티아에게 이 고양이는 남다른 의미였다.
모든 게 낯선 사이에서 가장 익숙하달까.
한참을 쓰다듬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간식을 준비하러 갔던 에밀리아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아가씨, 이것 좀 드셔보세……힉! 고, 고양이? 아가씨, 또! 저번에 그 고양이 맞죠!”
“응. 정원에 있길래 데리고 들어왔어. 보고 싶어서 왔나 봐.”
“저번에도 그렇고 그렇게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앤데 병이라도 옮으면 어쩌시려고요! 고양이는 털도 많이 빠진다는데!”
“얘는 안 빠져. 엄청 귀엽지.”
“그 고양이는 고양이가 아닌가요? 세상에, 또 아가씨 침대에……!”
“……이따가 털어내면 되지 않을까?”
“아가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