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 * *
“…그래. 나는 또 되게 큰일인 줄 알고.”
“아마 순례길에 오르시면 정말 마물을 마주하실 수도 있어요. 테메스분들이 든든히 버티고 계시니 문제는 없겠지만요. 걱정 마세요, 저도 아가씨를 든든히 지킬게요!”
“네 몸도 지켜야 하지 않을까.”
리티아가 작게 웃었다.
에밀리아가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그 부분은 리티아도 알고 있었다.
테니아 후보의 활동을 최대한 완벽히 마무리하기 위해 공부하고 또 공부하는 중이니까.
마물을 눈앞에서 마주한다는 건 아직 상상이 잘 되지 않지만 언젠가 겪어야 할 일이니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로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그래 줄래?”
“조금만 계세요!”
에밀리아가 신이 나서 방 밖으로 나갔다.
“오늘도 빈민가에 다녀온 거야?”
“아, 오빠.”
에밀리아가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엘라르가 찾아왔다.
낮이라 외부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집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엘라르가 웃으며 리티아에게 다가왔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무리는 무슨. 엄연히 테니아 후보 활동에 있는 일이야.”
“집에 있는 줄 몰랐어.”
“서재에 있었지. 밀린 일이 조금 있었거든.”
엘라르의 손이 리티아의 어깨에 닿았다.
쓰다듬듯 문지르는 느낌에 리티아가 움찔했다.
리티아는 자연스럽게 엘라르의 손을 떼어내며 웃었다.
“고른 테메스들은 어때? 세 명밖에 안 골랐잖아.”
엘라르는 잠시 멈칫했으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딱 셋만 이동하는 것도 아니고 사제들도 대규모로 돌아다닐 텐데. 그리고 셋 다 아주 좋은 사람들이야.”
“되게 마음에 드나 보네?”
“응, 우선 든든하기도 하고 다들 겉치레 따지지 않아서 좋은 것 같고…… 여러모로?”
“힘들지는 않아? 요즘 매일 나가고 있잖아.”
리티아는 엘라르가 동생을 무척이나 아낀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리티아가 다시 깨어났을 때 몬트 공작과 달리 진심으로 눈물을 보이기도 했고 언제나 리티아에 대한 걱정투성이였다.
테니아의 후보가 되는 대신 편안한 선택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던 것도 엘라르였다.
거기다 리티아보다는 훨씬 선도 짙고 남성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워낙 비슷하게 생긴 데다 머리까지 긴 은발이라 꼭 자매 같은 기분마저 들게 했다.
동생과의 사이가 좋아 쓰다듬거나,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허리를 감거나 하는 등의 친밀한 스킨쉽도 익숙해 보였다.
이건 단순히 보이기 위한 친밀함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안다.
무엇보다 엘라르의 눈이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아끼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지금이 더 좋은 것 같아. 우울한 것도 덜한 것…… 같고. 무엇보다 아버지께서 좋아하시잖아.”
“리티아…….”
문제는 자신을 소중히 대해주는 게 확실한데도 이상하게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이상하게도 몬트 공작에게서 느낀 불편함과는 또 다른 불편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니 그 불편함을 뭐라고 해야 할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왕 빙의를 시켜줄 거 리티아의 기억을 온전히 흡수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원작 내용만 알면 뭐 하나. 알맹이가 부실한데. 이럴 때마다 리티아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니,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이게 나은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었어. 아버지께서도 이제 내가 외출하는데 의심도 안 하시고 오히려 지지해 주시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마음을 먹는 건데 왜 이렇게 힘들었는지 모르겠어.”
리티아는 양심이 콕콕 찔렸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다.
“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 리티아.”
“알아. 오빠는 언제나 내 편이지.”
그때였다.
어느새 치웠던 엘라르의 손이 다시 리티아의 어깨에 닿았다.
하필이면 각인이 새겨진 그곳에.
리티아가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낚아채듯 엘라르의 손을 막아 섰다.
“……리티아?”
다행히 닿자마자 떨어졌지만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엘라르의 손을 거의 쳐내다시피 했다.
“아, 미안. 순간 간지러워서 놀랐……나 봐.”
어깨를 완전히 가리는 드레스임에도 혹시나 들킬까 두려워서였다. 아무리 엘라르가 자신을 아끼고 있다지만 행여 각인이 겉으로 드러난 상태라면, 그 문양을 엘라르가 알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저라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차라리 에밀리아에게 들키는 게 나았다. 에밀리아는 똑같이 오브들을 불순물 취급하더라도 리티아가 잘못되게 만들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엘라르는 아직 시기상조였다. 아무리 오빠라도 그는 테오스였다. 테오리스인 에밀리아와 달리 훨씬 더 적대감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하다. 에밀리아가 오브에 관해 설명하며 빗댄 반응을 보았을 때 그러고도 충분했다.
“놀라라. 난 또 내가 잘못한 줄 알았네.”
“하하, 오빠는 참. 요즘 이상하게 간지러움을 잘 타더라고. 너무 오래 누워 있었어서 그런가?”
긴장해서 피부가 다 따가울 지경이었다.
“오늘 아무래도 내 동생이 많이 피곤한가 보다.”
“……그, 러게. 에밀리아가 목욕물을 준비해 올 때가 됐는데. 하하…….”
다행히 엘라르는 리티아를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아쉽지만 동생이 쉬게 해줘야지. 내가 도와줄 거 있으면 참지 말고 말해, 알았지?”
“으응, 꼭 그럴게. 걱정 마, 오빠.”
이윽고 엘라르가 오늘은 더 무리하지 말고 쉬라며 인사를 하고 나갔다.
리티아는 크게 한숨을 쉬며 안도했다.
“……들키는 줄 알았네.”
괜히 각인이 새겨진 어깨 부근을 만지작거렸다.
오늘은 다행히 성력을 그렇게 썼는데도 통증이 없었다.
“아가씨, 목욕물 준비 다 됐어요.”
“그래? 고마워. 너도 오늘 힘들었을 텐데 고생이 많네.”
“고생은요. 늘 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요. 그런데 오늘도 끈만 풀어드리고 혼자 하실 거예요?”
리티아는 일어나며 끄덕였다.
각인이 생기고 나서 생긴 습관이었다.
아직까지 칼리프를 만나고 나서 드러나진 않았지만 또 모를 일이라, 에밀리아에게 드레스 끈을 푸는 것만 부탁하고 나머지는 안에서 혼자 벗고 목욕물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덕분에 벗을 때마다 낑낑거리며 온갖 고생을 다 해야 하지만 그 방법밖에 안전한 방법이 없었다.
“응, 필요하면 부를 테니까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해.”
“네, 아가씨.”
* * *
어느덧 며칠이 지나 마지막 활동이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순례일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아가씨, 어떤 게 마음에 드세요?”
“……아무거나?”
“그런 건 없어요, 아가씨.”
에밀리아의 단호한 말에 리티아는 색이 차분해 보이는 남색 드레스를 골랐다.
사실 색을 보고 고른 게 아니라 드레스 중에서 이게 가장 어깨와 등을 안전하게 가려주는 스타일이어서였다.
연회용 드레스라 혼자 입을 수는 없어 미리 거울을 보고 각인이 나타나지 않은 걸 확인하고 서둘러 입을 생각이었다.
사흘 후에는 출발을 해야 해 오늘부터는 준비와 함께 테니아의 후보들을 위한 연회가 시작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무려 황궁에서 열리는.
리티아는 그와 관련해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저택으로 드레스 수십 벌이 준비되어 들어오고 온갖 치장을 위한 장신구들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장신구 색은요? 이건 어떠세요?”
“그것도 아무거나……?”
“…….”
“최대한 투명한 걸로 고르자.”
리티아가 끙 소리를 내며 에밀리아의 시선을 피했다.
에밀리아는 은근히 리티아를 조련할 줄 알았다. 늘 아가씨를 위한다며 뭐든 말하라고 해놓고서도 대충 대답하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다른 하녀들도 그걸 아는지 거의 다 에밀리아에게 맡기는 편이었다.
그럼 또 리티아는 에밀리아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는 수밖에는 없었다.
“연회는 왜 이리도 많이 열리나 몰라.”
리티아는 봉사 활동을 다니는 중에도 몬트 공작의 비위를 맞추느라 연회에도 틈틈이 참석을 해야 했다. 그것도 지치는데 또 연회라니.
연회 자체가 거북스러운 건 아니지만 모이는 시선이 싫었다.
약속이나 한 듯 쳐다보니 그런 시선을 즐기지 않는 리티아로서는 꽤 고역이었다.
“물방울 모양이 좋겠죠?”
“진주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가씨!”
“지금 내 대답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구나?”
“티 났어요?”
에밀리아가 배시시 웃었다.
부지런히 준비를 했는데도 벌써 출발을 해야 할 시간이 왔다.
마차가 준비되는 대로 확인하고 오겠다던 에밀리아가 급하게 뛰어왔다.
“아가씨!”
“응? 왜 이렇게 뛰어와. 이제 나가면 돼?”
“아뇨, 그게 아니라…….”
에밀리아가 뛰어오느라 턱 끝까지 찬 숨을 한 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방금 황궁에서 사람이 도착했는데요.”
“황궁에서?”
“연회가 취소되었대요.”
“왜?”
곧 연회가 열리니 이미 준비는 다 끝났을 것이다.
이미 출발한 귀족들도 있을 텐데. 리티아가 놀란 눈을 했다.
“그건 모르겠어요. 연회가 취소되어 사람을 보내 알리는 모양이에요. 이미 준비를 다 끝냈는데…… 이를 어쩌나.”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리티아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구두까지 딱 맞추어 반짝거리는 옷을. 장장 다섯 시간을 넘게 준비한 건데.
“다른 것도 아니고 황궁에서 자체적으로 취소를 했다니 어쩔 수 없지……. 이유는 내일이나 되어야 알 수 있으려나.”
“주인님께서 먼저 황궁에 가셨으니 돌아오셔서 알려주시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다. 으음, 이 옷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