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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25화 (25/70)

25화

* * *

동시에 대번에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했다.

그날 신전에서 마주하고 나서 우연인지 운이 좋았는지 마주치지 않고 오늘 만난 것이었으니.

솔직히 리티아도 마주하고 싶지 않고 불쾌하고 꺼림칙한 건 마찬가지였다. 하필이면 최대한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상대가 나타났으니.

지금의 리티아는 그녀가 무섭다거나 두렵진 않으나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도 저렇게 뻔뻔하게 들고 있는 낯을 보고 있는 게 유쾌할 리가 없었다.

마주치고 싶진 않지만, 이 공간이 리티아의 공간도 아니고. 그나마 로아 캐번디시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는 리티아가 테니아가 되는 것이었다.

아마 그 어떤 복수보다도 그녀에게 크게 작용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리티아는 무시하고 주변을 깨끗이 치우며 마무리를 하려고 했다.

“누군가 했더니. 몬트 공녀가 먼저 와 있는 줄 몰랐네요. 그 차림으로 있어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잖아요.”

리티아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역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지.’

리티아는 빙긋 사람 좋은 얼굴을 달았다. 주변에 테메스를 포함해 아이들도 많으니.

“그런데 어떻게 용케 알아봤네요. 마차에서 내린 지 1분도 안 지났는데 말이에요.”

“…….”

대번에 로아의 눈매가 찢어졌다.

이번에도 무서워 변명이라도 하길 바랐던 모양인지 그녀는 씩씩거리며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번에는 리티아가 혀를 차고 싶은 마음이었다. 누가 봐도 봉사를 하든 기부를 하든 뭔가 하기 위해 여기 온 게 분명한데, 로아 캐번디시는 마차에서 내려서도 부채로 입을 가리고 한 손으로는 코를 쥐고 있었다.

리티아의 주변을 살뜰히 쳐다본 로아가 또 한 번 비죽 눈매가 길어졌다. 비웃음이 다분히 보이는 표정이었다.

“고른 테메스는 그게 다인가요? 포기예요, 자신감이 넘치는 거예요? 시간이라도 부족했어요? 그래서 손수 움직이기로 한 건가요? 땀 흘려가면서.”

“몇 명을 고르든, 어느 분을 고르든, 내가 손수 움직이든 그건 로아 캐번디시 영애가 신경 쓸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걱정이 되어서요. 모두가 주시하고 있는데 괜히 나까지 망신당할까 봐. 뭐 해? 내려.”

테메스 다섯 명을 빼곡하게 채운지라 마치 우르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기사들은 마차 뒤 짐칸에 실어 온 상자를 텅텅 바닥에 내렸다.

발로 덮어놓은 뚜껑을 걷어차듯 열자 그 안에는 가게에서 쓸어 담은 것 같은 옷들과 장난감 그런 것들이 널브러지다시피 들어 있었다.

쓰레기를 담은 박스를 직접 옮기려던 리티아가 다시 허리를 폈다.

“…….”

리티아가 로아를 빤히 쳐다보자 그녀가 움찔했다.

“뭐예요? 왜 그렇게 쳐다봐요?”

“로아 영애만 내게서 신경을 거둬가면 해결될 일이에요.”

과격한 소음에 아이들이 겁을 먹고 한쪽으로 몰려들었다.

방금까지 리티아의 눈치를 보긴 했어도 자유롭게 자신들의 공간에서 놀던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몬트 공녀께서 뭘 모르시는 것 같아서. 테니아의 후보라면 테니아 후보에 걸맞는 모습을 보이세요, 공녀. 지금 그 모습이라곤 내 하녀와 다를 바가 없겠어요.”

리티아는 피곤함을 느꼈다.

봉사를 하러 왔으면 봉사나 하고 갔으면 좋겠는데 자꾸만 다가와 말을 거니 피곤할 수밖에.

쓰레기를 세 시간을 줍더라도 이것보다는 개운할 것 같았다.

리티아가 빙긋 웃으며 대꾸를 해줬다.

“아테스 신께서는 하늘 아래 그 누구도 구분 없이 빛으로 품고 사랑하라 이르셨습니다. 로아 영애가 말씀하신 테니아 후보도, 테오스도, 테오리스도 모두 아테스 님의 빛 아래 놓인 자들이에요. 저는 그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뿐입니다. 로아 영애야말로 부디 편협하게 굴지 마시고 그 시간에 가져온 것이라도 나눠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더 설명을 해줘야 하나요?”

“뭐, 뭐라고요?”

리티아는 한숨을 푹 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바빠 죽겠는데 정말. 몸만 성력이 가득 찼을 뿐 신앙심이라곤 없다시피 해 거의 교과서처럼 읊어대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말에 로아 캐번디시가 조용해졌다.

결국 리티아가 먼저 아예 몸을 돌렸다. 더는 대꾸를 하지 않겠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한참 조용하던 로아 캐번디시의 포악한 음성이 뒤에서 들렸다.

“어서 나눠줘! 빨리 가게. 정말 코가 썩을 것 같으니까.”

그러고는 냄새가 나서 못 견디겠다는 둥 온갖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어느새 리티아의 뒤에 숨다시피 모여들었다.

“애들아, 왜 그래.”

곤도르나 펠루가, 마르마티에게 목마는 태워달라고 하면서도 한사코 리티아에게는 오지 않던 애들인데 아예 다리에 달라붙다시피 했다.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왜 그러냐 달래자 아이들이 더욱 파고들었다. 덩달아 리티아도 당황했다.

“얘, 얘들아?”

그 모습을 보고 펠루가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안전한 곳을 잘 찾나 보네요.”

리티아는 어정쩡하게 아이들을 토닥였다.

“무서워요. 가까이 가면 때려요…….”

“저번에도 더러우니 다가오지 말라고 했어요.”

“톰은 뺨도 맞았어요.”

“다른 사람도 무서운데…….”

리티아가 아이들을 토닥이자 하나둘씩 약속이나 한 것처럼 리티아에게 고자질하듯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제야 저번에 에나가 때렸다는 둥 경계했던 이유가 로아 캐번디시였음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아이들한테 같이 흉을 보자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야. 표현이 좀 달라서 그래. 괜찮아, 저기서 가지고 싶은 장난감 없어? 편히 가져가도 돼.”

“하지만 닿으면 혼난댔어요.”

그러면서도 장난감은 가지고 싶은지 아이들의 눈은 상자를 향해 있었다.

“실수한 걸 거야. 저기, 곤도르 경, 펠루가 경, 마르마티 경. 아이들이 장난감을 고를 수 있게 좀 도와주실래요?”

“그러죠.”

“가서 골라봐. 늦으면 원하는 걸 못 고를걸?”

그런데도 아이들은 주춤주춤 쉽게 나서지 못했다.

리티아가 좀 더 아이들을 달랬다. 결국 머뭇거리던 아이들은 장난감을 포기할 수 없었는지 기사들과 함께 상자에 있는 장난감을 골랐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하나씩 골라 서둘러 로아 캐번디시 근처에서 떨어졌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데 로아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로아는 표독스럽게 리티아를 보더니 팩 고개를 돌렸다.

금세 나무 상자 네 개가 동이 나버리고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까르르 웃으며 장난감을 가지고 노느라 여념이 없었다. 조금 나이가 찬 아이들은 옷을 서둘러 챙기고 또 어느 아이들은 서로 옷을 대보며 맞는지 살피기도 했다.

로아 캐번디시는 마음에 안 들지만 그녀가 가져온 깨끗한 옷은 아주 쓸 만했다.

“다 된 거지?”

“예, 모두 비웠습니다.”

로아는 상자가 다 비워지자마자 곧장 마차에 탈 기세로 뒤를 돌았다.

테니아의 활동은 이미 했다고 여기며 어서 이곳을 탈출하고 싶어하는 사람 같았다.

여긴 이제 꾸준히 청소도 되고 관리가 되고 있어 악취가 현저하게 줄었는데도 로아 캐번디시는 마치 시궁창 한가운데에 빠진 사람처럼 굴었다.

리티아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신경을 거둘 때였다.

땡- 땡- 땡- 땡

“무슨 소리지?”

이명처럼 느닷없이 귀를 따갑게 하는 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집으로 가자!”

“서둘러!”

갑자기 아이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고 자신들의 집으로 부리나케 뛰어가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마차에 올라타십시오, 공녀님. 가문으로 모시겠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죠?”

리티아는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의아했다.

로아 캐번디시마저 어느새 마차에 올라타 급하게 떠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오히려 리티아의 물음에 기사 셋은 도리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뒤에서 에밀리아가 빠르게 다가와 리티아에게 귓속말을 했다.

“아가씨, 죄송해요.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저 소리는 이 근처 밖에서 마물이 출현했거나 마물이 생성되는 균열이 열렸다는 소리예요. 여긴 수도 안이긴 하지만 외곽이기도 하니까요. 안전을 위해 여기서 피하시는 게 좋아요, 아가씨.”

“그럼 아이들은?”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갔으니 괜찮아요. 안전하게 숨는 법을 잘 알 겁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에밀리아의 말에 빠르게 리티아가 상황 판단을 했다. 기억을 잃었다고 핑계는 대고 있었으나 그건 몬트 공작가 내부에나 핑계가 될 수 있는 일이었다.

“아, 미안해요. 제가 딴생각이라도 했나 보네요.”

“어서 마차에 올라타십시오.”

리티아는 간이 계단을 오르면서도 뒤를 돌아 남은 아이들이 없는지 살폈다.

이대로 가는 게 맞나?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버티는 건 쓸데없는 고집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다.

* * *

“원래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났었어?”

“아뇨, 거의 드물죠. 저도 예전에 한 번 듣고 처음 들었어요.”

리티아는 집에 돌아와서 에밀리아에게 물었다.

미리 알아두어야 나중에 또 이런 일이 생겨도 대처를 할 수 있으니.

“그래?”

“북부도 아니고 숲도 아니면 마수를 보기 힘들죠. 외곽에서나 그렇게 들리지 시내나 중앙에서는 거의 듣지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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