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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24화 (24/70)

24화

* * *

‘그냥 마주치지 말자, 최대한.’

리티아는 밤새 고민하다 결국 이렇게 결정을 내렸다.

분명히 그의 말대로라면 방해가 되게 하진 않는다고 했다.

그가 오브라고 말함으로써 왜 사람들이 없는 사이에 나타나는지 그 이유를 알았으니 그녀의 걱정처럼 사람들 앞에 멋대로 나타나진 않을 것 같았다.

“아가씨, 오늘도 정말 빈민가에 가실 생각이세요?”

“응. 아무래도 그쪽은 다른 후보들이 가지 않는 것 같으니까.”

“그래도 더 좋은 곳도 많은데…….”

절대 각인을 풀어줄 생각은 없다고 했지만 그라도 자신의 수장에게 죽고 싶은 생각은 없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을 하니 결론이 났다.

최대한 피하는 거다. 빈민가에서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한 것도 그가 막은 게 아니라면 힘을 쓰는 게 미흡하다는 것이니 연습을 하는 수밖에.

“곤도르 경의 동생이 그쪽에 자주 간대. 관계를 다지기에도 좋을 거야. 서로 신뢰를 높여야 위험에 더 잘 맞서지.”

“그들은 아가씨를 보호하는 게 숙명이자 철칙이에요. 존재 이유라고요.”

“알고 있어. 하지만 신뢰까지 얹으면 더 좋잖아. 오늘은 머리를 묶으려고.”

“하나로 높게 묶어 드릴까요?”

“응.”

리티아는 거울을 보며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그를 애타게 찾을 때마다 귀신같이 알고 찾아왔으니 최대한 그를 찾지 않으면 오히려 그쪽에서 포기해 오지 않을까. 정말 매번 감시하는 게 아니고서야 각인은 그 용도로 사용하는 것 같으니까.

“그거 아세요?”

“뭘?”

리티아가 거울로 자신을 보다 말고 에밀리아에게 시선을 줬다.

“저번에 봉사하러 가신 거 기사 났어요. 아가씨께서 테니아 그 자체라고. 행보가 너무 기대된대요. 입은 옷까지 묘사된 거 아세요?”

“뭐 그런 것까지…….”

“하녀장님이 그러셨는데 주인님께서 정말 흡족해하신다고 하셨어요. 저는 정말 아가씨께서 깨끗한 곳에만 가셨으면 좋겠지만 또 주인님께서 좋아하시니 아가씨 말씀대로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에밀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열심히 내 머리를 올려 묶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 그 남자만 안 나타나면.

이제 정말 순례 행사가 곧이었다.

리티아는 단장을 하고 나서도 마차를 타기 전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성력을 뽑아내고 정화를 하는 연습을 했다.

* * *

“안녕.”

리티아는 빈민가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자신을 구경하러 온 아이들을 쳐다봤다.

코너에 옹기종기 모여 리티아를 쳐다보기만 하는데 여전히 경계를 하곤 있지만 처음보다 싫어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아마도 뒤에서 익숙한 얼굴인 곤도르 경이 단단히 지키고 있어서 낯을 좀 덜 가리는 것 같았다.

“곤도르 경은 여기 아이들과 많이 친한가 봐요?”

“이 녀석은 주말마다 여기 오는 편입니다.”

과묵한 곤도르 대신 뒤에서 펠루가가 답했다.

처음에 리티아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기사들도 이제 그녀가 이렇게 움직이는 걸 별로 이상하게 보지 않기 시작했다.

곤도르는 여전히 테니아가 되기 위한 행동으로 여기고 불신의 눈빛을 하고 있지만 워낙 귀족에 대한 평가가 박한 사람이니 리티아도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 곤도르가 스스로 테메스가 되겠다고 했으니 리티아는 주어진 일에만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군요. 그럼 오늘은 곤도르 경이 좀 도와주지 않겠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성력 기부인데 오늘은 아이들에게 축복이라도 내려주고 싶어서요. 축복을 받으면 잔병치레가 덜하다면서요. 모든 병을 고쳐주진 못하겠지만 아이들은 간단한 병에도 치명적일 수 있으니까.”

그렇게 부탁하는데 곤도르가 리티아를 빤히 내려다봤다.

거절을 하는 건지 아닌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한참 뒤에야 곤도르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러고 보니 오늘은 에나가 안 보이네요.”

리티아가 둘러보는데 씩씩하게 아이들을 돌보던 에나가 보이지 않았다.

오빠가 이곳에 있으니 에나가 보면 기뻐했을 텐데. 총명하고 또랑또랑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몸이 좋지 않아서 오지 못했습니다.”

“이 녀석이 이래 보여도 동생 하나는 끔찍하게 아껴서 말입니다. 에나도 제 오빠밖에 모르긴 하지만. 이놈들!”

곤도르의 말에 이어 마르마티가 덧붙였다. 이미 마르마티는 아이 두 명이 양다리에 달라붙은 상태였다.

리티아가 여기에 오고 나서 빈민가 내에 깨끗한 식수가 제공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곳도 제국 땅의 한 부분이니 황실이나 신전의 혜택을 받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마차에서 내리기 전까지 계속 연습을 해둔 상태니 오늘은 정말 문제없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곤도르 덕분에 아이들과 좀 더 친한 기사들이 빠르게 애들을 줄 세웠다. 리티아가 말하면 쭈뼛쭈뼛하던 아이들이 세 명이 줄을 서라 말하자마자 순식간에 일자로 쭉 줄을 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걸 보니 리티아는 신기하면서도 속으로는 조금 감정이 상했다.

“……빵도 축복도 내가 나눠주는데. 내 말은 안 듣고.”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느라 쭈그려 앉아서 빵 봉지 하나를 쥔 채 서운한 듯 중얼거리는데 뒤에서 풉 하고 웃음소리가 났다.

리티아가 홱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우뚝 서 있던 펠루가가 빠르게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펠루가 경. 방금 웃었죠.”

“안 웃었습니다.”

“웃었는데.”

“기침한 겁니다.”

의심의 눈초리로 펠루가를 보다 고개를 돌리는데 눈앞에 뽀얀 얼굴을 한 남자아이가 서서 리티아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에 봤을 땐 정말 구정물을 묻힌 것처럼 까맸는데 세수한 것만으로도 뽀얀 살이 드러났다.

“우리도 정말 축복을 받을 수 있어요?”

아이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다.

축복이든 정화든 아니면 다른 것이든 세금을 내고 헌금을 내야 황실과 신전의 혜택을 조금이나마 받을 수 있는데 이곳의 사람들은 전혀 그러지 못하니까 계속 배제되고 배제되다 빈민가를 이룬 것이었다.

그러면서 테니아의 위상을 올리기 위해, 아테스 신의 선택을 받기 위해 봉사는 또 하라고 하니 어불성설이 따로 없었다.

심지어 이 기간이 아니면 테니아의 축복 또한 대가가 있어야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이 또한 웃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 이름이 뭐야?”

“무요.”

“무?”

“네, 무슈할 때 무.”

“아, 그래. 무. 어디 아픈 데는 없어?”

리티아는 빵을 건네주며 아이에게 물었다.

빵을 받자마자 뜯어 입에 넣는 아이는 그렇다며 끄덕였다.

리티아는 그런 아이에게 웃으며 머리에 손을 얹었다.

뒤에서 세리가 움찔하고 움직이는 게 느껴졌으나 일부러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또 해봤자 잔소리일 것이 뻔했다.

이윽고 리티아의 손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이는 신기해하고 리티아는 안도했다.

“고맙습니다!”

그사이 허겁지겁 빵을 다 먹은 아이에게 빵 봉지를 하나 더 쥐여주고 리티아는 그 뒤에 줄 선 아이에게 축복을 전했다.

한 열명쯤 쉼 없이 축복을 내렸을까.

한번 성력을 막 쓰기 시작하자 신기하리만큼 몸에서 성력이 돌기 시작했다.

마치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1을 쓰면 3이 충전되는 느낌이 들었다. 강하고 따뜻한 물줄기가 온몸을 휘몰아치는 기분에 리티아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다시 아이들을 위한 축복을 시작했다.

* * *

“다과회에는 안 나가십니까?”

아이들에게 축복을 모두 내려주고 잠시 쉬는데 마르마티가 물어왔다.

“다과회요?”

“테니아 후보들께서 모이는 모임이 있다고 하던데요. 다른 테메스에게 들었습니다.”

“아…….”

맞다. 그런 게 있다고 했지.

서로 정보 공유 차원이기도 하고 견제 차원이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모임을 가지는 모양이었다.

리티아는 입꼬리만 올려 빙긋 웃었다.

“아마 앞으로도 갈 일이 없을 것 같은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날 반기는 사람도 없을걸요. 날 싫어하는 사람들 틈에서 있느니 조금이나 이런 일에 시간을 쏟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단순한 예상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로아 캐번디시를 포함해 다른 테니아 후보 모두 리티아를 괴롭히던 존재들이었다.

또 와인이나 쏟지 않으면 다행이지. 한번 받아쳐 줬으니 지금 로아 캐번디시는 바짝 약이 올라 있을 텐데 굳이 발걸음을 해 피곤을 사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공녀님은 신기하십니다.”

“제가요?”

“우리를 고른 것 자체만 봐도 그렇고요.”

“괴짜라는 소리로 들리네요.”

“뭐 부정은 못 하겠습니다. 제가 워낙 솔직해서.”

그 말에 리티아가 피식 웃었다.

“정 불쌍해 보이면 이따 다과회라도 열게요. 초대할 테니 와주시든가요. 드레스 코드는 그냥 제복으로 하죠.”

리티아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옷을 툭툭 털었다.

마르마티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남은 일을 마무리 하려는데 대로에서 마차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빈민가 입구는 꽤 폭이 좁아 마차 하나만 들어와도 꽉 차서, 리티아를 태운 마차도 그녀가 내리자마자 대로로 빼놓았는데 입구가 다시 들어차고 있었다.

신나게 돌던 아이들도, 리티아도, 테메스들도 동시에 빈민가 입구를 막은 마차를 쳐다봤다.

이윽고 멈춘 마차 뒤에서 기사가 빠르게 오더니 마차 문을 열었다.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구두가 먼저 보였다.

또각. 하고 내리는데 로아 캐번디시의 얼굴이었다.

“……냄새.”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미간을 찌푸리던 로아 캐번디시가 내려오다 리티아를 보고 그대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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