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23화 (23/70)

23화

* * *

“…….”

리티아는 또 갈등했다.

칼리프가 오브든 아니든 그가 이상한 문양을 남기고 약점을 쥐고 있는 이상 당분간은 더 엮일 수밖에 없으니 차라리 정체를 알아버리고 어떻게든 뒷수습을 하는 게 나을까 생각하다가도, 이렇게 답답하게 고민만 하는 건 단순히 테오스와 오브가 사이가 안 좋아서가 아니다. 또한 그들이 무서워서라거나 불순물 취급을 받아서도 아니다.

물론 오브와 내통하는 테니아 후보라는 걸 들키는 즉시 찾아올 후폭풍도 당연히 무섭기는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무슨 생각해.”

“그냥 당신이…….”

오브에 관해 깊은 정보를 알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이곳에서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원작은 주인공에게 해피엔딩이지만 누구에게나 해피엔딩일 수 없는 내용이 담겨 있다. 리티아가 초반에 죽은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큰 사건이자 희생이 원작에 감춰져 있었다.

바로 테니아와 오브와의 전쟁.

원작에서는 첫 전쟁의 시작은 오브의 습격으로부터 이루어졌다고 했었다.

귀족들은 오브가 빛의 힘을 탐내 일으킨 전쟁이라고 했지만 묘사된 것으로 봤을 땐 분노에 의한 학살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버프 때문인지 큰 희생을 치르고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주인공은 해피엔딩을 맞이하지만 그 피해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그렇다는 건.’

만약에 이 남자가 오브의 일원이라면, 만에 하나 그렇다면 그 위험을 가진 남자라는 건데.

아직 일어나지 않을 일을 바로 설득할 수도 없고, 또 그 위험을 막는 막중한 일을 맡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것이 칼리프가 오브가 아니었으면 하는 가장 큰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정보를 찾았던 건데.’

제국 내에서는 아테스 신을 향한 추앙과 신앙심을 담은 정보와 물건은 많아도, 오브에 관한 건 전멸하다시피 한 상태니 정답은 직접 물어보는 것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한창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리티아의 뺨에 칼리프의 손이 와 닿았다.

아까와 달리 얼굴에 장난기를 싹 지운 상태였다. 무서우리만큼 무표정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리티아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네가 물어보면 답해줄게.”

“…….”

“그러니 네 입으로 물어봐. 뭐가 알고 싶어?”

다만 다른 의미로 불안했다.

여느 때처럼 장난기가 있는 얼굴이었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텐데 정말 진지한 얼굴이라.

그렇다면 정말 이 아름다운 남자가.

자신과 첫날밤을 보낸 남자가.

“당신, 오브…… 아니죠?”

그 물음은 아니라고 답해달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칼리프의 새카만 눈동자가 리티아를 응시했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맞으면.”

“…….”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역시, 하는 생각과 함께 깨질 듯한 표정을 짓는 건 리티아였다.

리티아가 칼리프의 눈이 이상하게도 조금 더 가라앉는 것 같다고 여기는 순간, 그가 말했다.

“답이 별로야? 원하는 답이 아니라서?”

불안한 촉은 항상 맞아떨어진다고 했었나.

‘그럼 내가 정말로 제국의 그 많은 사람 중에 하필 오브를 고른 거야?’

자신을 오브라고 답해주는 남자를 보면서 리티아는 정말 그 첫날밤 하루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

마치 그래야 한다는 듯이 말하자 칼리프가 미세하게 눈썹을 꿈틀하더니 빙그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실망했어?”

“아뇨…….”

어느새 칼리프의 손은 리티아의 눈 아래 언저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애틋하게 느껴질 정도로 조심스러운 손길에 리티아가 눈을 파르르 떨었다.

“내가 무서워서?”

“그게…… 아니라. 내가 테니아가 되어야 한다는 걸 알잖아요, 그쪽은.”

자신이 누군지 밝힘으로써. 그리고 리티아가 성력이 필요한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으니, 당연히 서로의 존재가 가장 걸림돌이 된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리티아는 지금 알았지만 그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을 테니까.

하룻밤으로 칼리프가 각인하듯 제 몸에 새긴 힘과 문양을 없애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했던 게 기억났다.

“모르겠어요.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데 더 혼란스러워져서. 당신들은 이곳에 오지 않는다면서요. 누군가 당신하고 내가 내통하고 있는 걸 알아채기라도 하면요?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쪽도 잘 알 거 아니에요.”

서로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필요에 의해 협의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만나지 않는다며. 아예 평생 서로를 마주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며!

그런 존재를 어찌 이렇게 쉽게 만난단 말인가.

몇 달간 집에 갇혀 있다시피 하다 처음으로 나온 외출이었는데. 그것도 그는 떡하니 귀족들 연회에 나타났었다.

그래서 안까지 들어오지 않았던 건가. 그럼 이 남자는 그날 왜 거기에 왔었던 걸까? 귀족과의 만남이 있어야 하는 자리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리티아가 제 어깨에 손을 얹어 지금 있을지도 모르는 문양을 짚었다. 살자고, 자유롭게 살아남자고 하는 짓인데 여기다 섣불리 목숨을 걸 수도 없었다.

‘진짜 미쳤지.’

명백한 실수였다. 왜 하필 오브를.

에밀리아도 리티아가 하도 정보를 찾으니 그랬었다.

테오스가 그들을 친구로 여기거나 사랑을 한다면 그 대가는 죽음이 될 거라고. 예전에도 그런 비슷한 일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위험하다. 리티아가 감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직 공작에게서 제 권한을 다 가져오지도 못했는데 무슨. 차라리 나쁜 년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한데 어떻게 목숨을 걸지 않고 이 각인을 없애달라고 할 수 있을까? 이미 그는 한번 내기를 했고, 리티아는 졌기 때문에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때 칼리프의 손이 다시 리티아의 뺨에 닿았다.

“내 존재가 널 테니아로 만들지 못할까 봐?”

“아뇨. 테니아가 되기도 전에 들키면 갈가리 찢기지 않겠어요? 귀족들이 날 가만히 두지 않을 거예요. 칼리프, 꼭 이 위험한 만남을…… 해야겠어요?”

“…….”

단순한 유흥이라면 제발 여기서 그만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일주일 내로 그를 다시 찾으면 그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했지만 그건 칼리프가 오브인지 몰랐을 때의 이야기였다.

리티아는 그를 더 설득하려고 했다.

“나만 위험한 거 아니잖아요. 당신 수장이 이 사실을 알면 당신도 가만히 두지 않을걸요. 그래도 괜찮아요? 분명히 배신자 취급을 받을 거라고요. 그냥, 그냥 이 각인을 없애주고 없던 일로 하면…… 안 돼요? 다른, 다른 원하는 걸 말해요.”

우리들이 자신들을 불순물 취급 하는데 그쪽이라고 이쪽 취급이 좋을까. 평가가 더 박하면 박했지, 나을 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렇다 해서 설득한답시고 이 남자한테 대놓고 미래에 오브가 전쟁을 일으킨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건 오히려 있지도 않은 취급을 해 더 화를 내게 만드는 상황을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니 방법은 부탁을 하는 수밖에.

리티아가 부탁하자 칼리프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

“분명 당신도 위험해질 거라고 내가…….”

“위험해져도 상관없다고 하면?”

“……하룻밤에 그 위험을 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단순한 흥미에 목숨을 걸다니. 원래 오브들은 그런가?

찾지 못한 정보를 이 남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 같았다.

“정말 하나도 기억 못 하는구나.”

그 순간 칼리프가 허탈한 듯이 리티아에게 말했다.

“무슨……? 그날 기억이라면 어느 정도는 다 하고 있.”

“아니, 너는 그날조차도 다 기억 못 하고 있어.”

“…….”

“그럼 네가 내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테니까.”

무슨 말이지.

그날 뜨문뜨문 기억이 끊기긴 했어도 리티아는 대부분 다 기억을 하고 있었다.

그와의 대화도 어느 정도 다 기억하고 있고 설령 기억에 없다고 해도 술김에 취한 허무맹랑한 약속일 게 뻔했다.

“아녜요. 정말 대부분 기억하는데.”

“걱정하지 마.”

“…….”

“널 위험하게 안 해.”

“왜 계속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만.”

“억울하면 네가 내게 한 말을 떠올려 봐. 그럼 생각해 볼게. 그 외엔 안 돼.”

“대체 내가 무슨 말을…….”

리티아가 그날을 다시 떠올리며 생각을 되짚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중요한 말을 한 기억이 없는데.

칼리프가 야속하게도 리티아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생각해 내는 건 네 몫이야.”

다시 생각해 달라고 말하려는데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티아가 흠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에밀리아가 아예 밖으로 나와 리티아를 찾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아가씨, 여기 계신 거 맞죠? 어디 계세요?”

리티아가 입술을 짓씹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

하지만 칼리프가 있던 자리는 그새 텅 비어 있었다.

“하.”

아직 다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도대체 어쩔 셈이지? 원하는 게 뭐야?

결국 짜증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데 이번에는 에밀리아가 리티아를 찾아 빠르게 뛰어왔다.

“아가씨, 왜 여기 이러고 계세요! 감기 걸리시면 어쩌려고요.”

“……잠깐, 잠깐 바람 쐬러 나온 것뿐이야. 들어갈 거야.”

“주인님께서 노하실 거예요. 어서요. 요즘 아가씨 건강 챙기라고 얼마나 닦달하시는데요.”

“……알았어. 걱정 마. 이 정도로 감기가 걸리거나 하진 않을 거잖아.”

리티아는 들어가며 그가 다녀간 자리에 한 번 더 눈길을 줬다. 대체 그 말이 뭐길래. 답답함이 더해졌다.

안으로 들어와서도 밤을 지새울 정도로 생각했지만 리티아는 결국 그 중요한 말이라는 걸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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