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 * *
고의는 아니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리티아가 서둘러 그를 벽 쪽으로 숨기려는 뜻이었지만 칼리프가 밀리면서 팔을 벌린 탓이다. 하지만 에밀리아에게 들킬까 봐 오히려 더 안쪽으로 붙었다.
“들키면 절대 안 돼요.”
“…….”
리티아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에밀리아 근처에 오는 게 느껴졌다.
리티아는 바짝 벽으로 밀며 숨을 죽였다. 들킬까 봐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뜀박질을 한 것처럼 뛰었다.
그 와중에도 몸을 가까이 맞붙인 탓에 그의 청량한 체향이 느껴졌다. 그날의 체향과 똑같은. 리티아는 괜히 얼굴이 붉어져 홱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밖에 나간 게 아니신가? 어디 계시지?”
지척에서 에밀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티아는 속으로 에밀리아가 얼른 이쪽이 아닌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길 바랐다. 정말 이쪽으로 오는 건 아니겠지.
“…….”
“으음, 서재에 가셨나.”
에밀리아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자 리티아가 칼리프를 조금 더 벽 쪽으로 밀었다.
다행히 칼리프는 리티아에게 협조하기로 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행여 짓궂게 괴롭히고 싶어서 말이라도 하면 어쩌나 리티아는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가만히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칼리프가 손을 들어 리티아의 귓바퀴를 살짝 만졌다.
리티아가 흠칫 놀라며 그러지 말라고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 마요.’
들릴 듯 말 듯 입 모양으로 말을 하는데 에밀리아의 발소리가 나더니 이내 다시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해지고 조금 더 지나고 나서야 리티아가 화들짝 몸을 뗐다. “하아.” 하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뒤늦게야 그와 민망할 정도로 몸을 붙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벽에 최대한으로 붙어 숨을 작정이었는데 어쨌든.
“아, 음. 그러니까, 이건. ……그쪽 탓이에요. 가, 갑자기 나타났잖아요. 약속 상대도 아닌데.”
리티아가 변명에 가까운 말을 뾰로통하게 말하는데도 칼리프는 그저 즐거운 얼굴이었다.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고.
“내 탓 하지 뭐.”
이 남자는 왜 늘 여유로울까.
그러고 보면 첫 만남 때부터 그랬다. 리티아는 사람들을 피하고 있었고 또 황태자와의 자리를 피하고 있었으며 지트가 찾는 소리에 몸을 숨기고 싶었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남에서는 그를 찾아낼 방법을 구하지 못해 초조했고, 이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 하룻밤.
하룻밤의 불놀이.
분명 리티아도 그가 마음에 들었고 궁금해서, 조금은 반항적인 일탈로, 자유로움을 찾아 저지른 짓이라는 걸 안다.
거기다 자신의 처음을 가져간 사람을 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술에 취했었다지만 그 뜨거운 숨을 밤새 나누었는데, 생전 처음 그렇게 살결을 맞대고 시간을 보냈는데.
그러나 좀 더 평범한 만남이었으면 오늘 같은 날은 일어나지 않을 텐데. 그가 수상한 존재가 아니라면 더 기쁘게 만날 수 있었을 것 같았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데.”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리티아가 불퉁하게 삐죽거렸다.
“도둑 연애도 아니고. 대체 이게 무슨 짓인지.”
“그래도 내가 이렇게 나타나 주는 게 고마울걸.”
“…….”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성력에 대한 확인을 위해서라도 그를 찾긴 찾아야 했지만 막상 빈민가에서 성력이 나오지 않아 간절했을 때 그가 눈앞에 나타나기라도 했다면.
멋대로 테메스와의 만남 자리에 나타났다면 아마 더 아찔했을 것이다.
구설수에 오르게 되면 또 집에 갇히게 되거나 다른 후폭풍을 몰고 올지 모르니.
리티아는 제 마음을 마치 열어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남자의 행동에 더욱 뿔이 났다.
거기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다는 저 오만한 말투. 마치 리티아의 의심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리티아는 그런 남자의 눈을 마주치기가 버거워 옆으로 걸어가 벽에 나란히 기댔다.
“안 궁금해졌어?”
“뭐가요?”
“내가 누군지.”
리티아는 괜히 대답을 늦추며 바닥을 발로 툭툭 쳤다.
“알고 싶기도 하고 알고 싶지 않기도 해요.”
당신이 오브가 아니라면 알아도 되지만 오브라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테니까.
옆에서 “흐음.”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줄까?”
“재미있는 이야기요?”
“응. 궁금증은 나중에 해결할까? 언젠가 나에 대해 알게 되겠지 뭐.”
참나. 본인 이야기를 하는데 꼭 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능청스러웠다.
그래, 좀 더 확실한 걸 안 후에. 아니면 이 남자는 순례길에 쫓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러고 보면 이렇게 가려서 나타나고 정말 곤란하게끔 하진 않았으니까.
“뭐……마음대로 해요. 말해주세요.”
그러자 칼리프가 나직하게 웃었다.
“나도 들은 얘긴데.”
“네.”
“태초의 존재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태초의 존재요? 뭐 신 같은 거예요?”
“글쎄. 뭐 동화 같은 거 아닐까?”
“제가 모르는 역사일 수도 있죠.”
리티아는 조금 더 옆에 붙었다. 의식적으로 움직인 게 아니라 나지막이 말하는 목소리에 더 잘 듣기 위함이었다.
“네가 가진 성력과 상반되는 힘을 가진 자는?”
리티아가 고개를 들어 칼리프를 쳐다봤다.
“……오브 말하는 거예요?”
“오브라고 부르나.”
“그렇게 들었어요. 모습을 잘 안 나타낸다고 하더라고요. 보기도 힘들다던데.”
“보기 힘들다라.”
“그런데 왜요?”
“그 두 가지 힘을 동시에 가진 존재가 있었다고 해.”
두 가지 힘? 이건 리티아도 모르는 내용이다.
이미 리티아가 알고 있는 부분과 또 온갖 정보를 뒤적이며 찾아낸 내용에도 성력은 아테스 신이 내린 거라고 했는데.
두 가지 힘을 가진 자라면 그 아테스 말고도 또 다른 신이 있다는 말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상반되는 힘을 가지는 게 당연한가?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은 있겠지만 그건 자연적인 현상이고 동시에 상반되는 힘을 가질 수 있진 못할 것 같았다.
“그럼 그 존재도 신이에요? 신이라도 두 가지 힘을 가질 수 있나?”
“신이 아니면?”
“더더욱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리티아가 듣다 말고 다시 칼리프를 흘겼다.
“뭐예요. 아는 이야기 맞아요?”
“만약 그 두 가지 힘을 가진 존재가 누군가에게 하나의 힘을 나누어주었다면 어떻게 생각해?”
그 말에 리티아는 또 곰곰이 생각했다. 칼리프를 향한 불신의 마음을 제외하고 물어보는 것에는 대답을 해야 하니까.
“만약 그런 존재가 존재했다면 그럼 아테스 신께 선물을 준 존재겠네요. 더 위의 존재? 아니면 먼저 이 땅에 온 존재라든가.”
“으음.”
“왜요? 잘못 이해했어요?”
“아니. 실은 그 존재가 선물을 준 사람은 아테스가 아니래.”
“아테스 님이 아니라고요? 그럼 힘을 빼앗기라도 했다는 걸까요?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요.”
아테스 신은 이 땅에 고결하고 고귀한 존재로 추앙받는다.
이 제국의 존재 이유나 다름없는 존재이고, 신이며, 테니아들이 가진 힘의 근원이었다.
그런데 그 힘을 누군가에게서 훔쳤다니. 그런 불경한 말이 어디에 새어 나갔다간 정말 큰일이 날 것이다.
거기다 아테스 신이 고결하고 고귀한 이유는 오직 혼자였기 때문이다.
힘을 나누어준 사람이라면 적어도 애틋한 존재였을 텐데 아테스 신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심지어 신이 아닌 존재의 힘을 빼앗았다? 신이?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가.
무엇보다 리티아가 아무리 모른다고 해도 이미 원작의 내용을 아는데 무슨. 리티아는 괜히 눈을 흘겼다.
“내 생각에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리티아를 빤히 보고 있던 칼리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뭐예요. 지금 막 지어낸 거 아니에요? 정말 말도 안 돼. 신이 남의 힘을 왜 탐내겠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가 그냥 심심하게 받아치는데 오히려 리티아가 궁금해졌다.
이 주제 자체가 귀족들에겐 무척이나 불경하고 모욕이니 입에 담아선 안 되겠지만 이 남자는 해도 될 것 같아서.
“그럼 빼앗긴 존재는 어떻게 됐어요? 음, 그러니까 진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알겠고, 당신이 지어낸 이야기 안에서요. 만약에, 아주, 아주, 아주, 아주 만약에 아테스 신께서 빼앗았다고 하면요. 다른 곳에서는 절대 말하지 말고요. 우리만 나누는 이야기로 해두고요.”
리티아가 경고하듯이 말하자 칼리프가 나직하게 웃었다.
“사라졌어.”
“어디로?”
“그야 모르지. 그것까진 안 나와 있던데.”
리티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칼리프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뭐야. 그런 것도 없다니 너무 불친절해요. 그럼 그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던 존재는 어떻게 됐는데요?”
리티아는 또 한 번 칼리프와 눈을 마주쳤다.
칼리프는 대답 대신 리티아를 유심히 살피듯이 쳐다봤다.
아까부터 계속 이야기는 겉돌고 리티아의 표정만 살피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뭔가를 찾는 사람처럼.
리티아는 괜히 눈을 마주치기가 부끄러워 시선을 슬쩍 피했다.
“찾아다녔나 봐.”
“선물해 준 사람 아니, 존재를요?”
“응. 그런데 그게 아주 오래 걸렸던 거지.”
“오래 걸렸다는 건……찾긴 찾아요?”
“음, 아마도?”
“뭐야. 재미없어.”
리티아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재미없어서 아쉽네. 재미있어 할 줄 알았는데.”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잖아요. 당신이 오브 같…….”
리티아가 웃으면서 말을 하다가 멈칫했다.
“나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