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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21화 (21/70)

21화

* * *

테메스가 결정된 이후 리티아는 정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거의 매일같이 짧게나마 봉사를 다니고 신전의 기도를 했으며, 기사들과 친해지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오늘도 테메스 후보 활동의 일부를 마치고 돌아가기 전 휴식을 취하는데 마르마티가 말을 걸어왔다.

“공녀님.”

“네?”

“공녀님과 몇 번 나오다 보니까 공녀님은 입만 살아계신 분이 아니라서 좋은 것 같습니다. 악! 왜……!”

마르마티가 칭찬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하는데 펠루가가 옆에서 뻑! 소리가 나도록 마르마티의 뒤통수를 쳤다.

진짜 머리가 잘못되진 않을까 할 정도로 큰 소리라 리티아가 놀라서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못 들은 것으로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 녀석이 아직 사회화가 덜 되어서 할 말, 못 할 말을 가릴 줄 모릅니다.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테메스로 결정이 난 후에야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마치 보호자가 대신해 변호하듯 펠루가가 말했다.

리티아가 결국 웃음을 못 참고 터트렸다.

“솔직해서 좋네요.”

“좋으시다잖아.”

“……하. 진짜로 하신 말이겠냐고.”

“욕만 안 하면 돼요.”

분명 마르마티는 펠루가가 권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셋이 친하니 호흡이 잘 맞아 신관도 셋을 같이 보내는 게 나을 거라고 귀띔을 했었다.

그 말이 사실인 듯 셋은 합이 꽤 잘 맞는 듯했지만 펠루가는 이따금 마르마티를 몹시 골치 아파했다.

“곤도르 경 동생이 에나 맞죠?”

몬트 공작은 리티아가 테메스 후보가 아닌 일반 성기사를 골랐다는 점을 탐탁지 않아 했다.

직접 빈민가를 나가 봉사를 하는 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리티아의 적극적인 의지와 눈으로 보이는 활동에 잠시 노여움을 접어둔 상태였다.

“예, 맞습니다.”

“에나가 그러더라고요. 저 같은 사람들은 거짓말만 한다고. 배고픈데 빵도 먹지 않으려고 하길래, 누구 하나라도 그런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고 보여주고픈 오기가 생긴 것도 있어요.”

“진짜…… 신기하시네.”

“칭찬으로 알아들을게요. 뭐 덕분에 경들도 바쁘네요.”

“저흰 몸으로 때우는 게 더 나아서요.”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갈까요? 내일부터는 연회에 순례 준비도 해야 하니까요. 이제 정말 안 남았네요.”

그 말에 세 명이 일제히 일어나 리티아 앞에 다가왔다.

“공녀님께서 가지신 성력이면 별문제 없을 겁니다.”

그 말에 리티아가 괜히 찔리는 얼굴을 했다.

당장 지금도 성력을 쓸 수 있을지 모르는데 리티아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리티아의 성력만 믿고 있는 듯했다.

하기야 초반에 끝나서 그렇지, 전무후무한 성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으니까.

“그러러면 저 스스로도 절 믿어야겠군요. 정말 가죠.”

“옙, 공녀님 분부대로.”

마르마티가 기분이 좋은지 리티아에게 찡긋 윙크를 했다.

동시의 펠루가의 주먹이 또 한 번 마르마티의 뒤통수로 향했다.

* * *

그날 밤.

리티아는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당장 내일은 순례 전 축하 연회고, 사흘 후면 가장 중요한 임무가 시작되는데 오후에 제 힘을 믿어야겠다 멋대로 떠벌린 탓이다.

그 생각이 미치자 울컥 화가 치솟아 리티아가 옆으로 누웠다.

“아니, 자길 받아들이면 분명 쓰게 해준대 놓고…….”

그리고 그 일이 있고 난 후에도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계약은 하지 않았지만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으니 계약을 어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아까 마차를 타고 올 때 어깨 통증이 다시 더해지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날 이후 항상 어깨를 가리는 드레스나 옷을 입어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누군가 의심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아냐, 아냐. 의지할 생각을 하지 말고 이걸 혼자서 해결할 생각을 해야지.’

이래서야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가.

의도가 어떻든 멋대로 자신을 휘두를 셈인 게 분명했다.

결국 두 시간째 누워 뒹굴거리다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한 리티아가 대충 로브를 걸치고 간이 유리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

그런데 정원으로 나옴과 동시에 누군가에게 팔이 잡혀 몸이 반쯤 휙 돌았다.

너무 놀라 비명도 못 지르고 숨을 삼키며 눈을 크게 뜨는데 눈앞에 칼리프의 얼굴이 보였다.

어째서 저토록 검은색의 눈인데 이 어두운 밤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건지.

리티아는 그를 마주할 때마다 다른 세계에 뚝 떨어진 기분마저 들었다.

“어, 어떻…….”

리티아의 입에서 목에 졸린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뚝, 뚝 음성이 끊겼다.

“안녕.”

전과 다름없는 여상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데 순간 리티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리티아는 곧장 방금 나온 문을 확인했다.

방에 아무도 없었지만 또 모를 일이었다.

리티아는 서둘러 칼리프의 손을 잡고 창과 유리문에서 떨어져 벽에 달라붙었다.

칼리프는 순순히 리티아가 하는 대로 움직였다.

둘의 모습이 금방 어둠에 가려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여길 어떻게 들어왔어요?”

“나 찾고 있던 거 아니었나.”

리티아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칼리프를 쳐다봤다.

여긴 몬트 공작저 안에서도 집 바로 앞이었다.

거기다 리티아의 방 바로 앞 정원은 나무가 울타리처럼 한 번 더 막혀 있어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인데.

“내가 찾아서 온 거라고요?”

리티아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아마 에밀리아가 지금의 칼리프를 봤더라면 아마도 곤도르 경보고 무례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이 남자를 보고 무례하다고 했을 것이다.

“응, 그래서 왔잖아.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네가 불러 자신이 기꺼이 여기까지 왔다는, 왜 찾았느냐는 눈빛에 리티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반갑긴요. 그럼 내가 왜 찾았는지도 알겠네요.”

“내가 보고 싶어서?”

“……설마요.”

“대답이 너무 빠른데.”

리티아가 삐죽 눈을 흘겼다.

“당연하죠. 칼리프, 당신이 거짓말을 했으니까.”

“무슨 거짓말.”

“당신을 받아들이면 성력을 쓸 수 있게 해준다고 해놓고. 나는 또 곤란해질 뻔했어요.”

그날 간절하게 빌었던 게 또 생각나 울컥하는데 칼리프의 손이 리티아의 눈매에 닿았다.

마치 달래려는 듯 살살 문지르는 손길이었다.

“나는 약속 지켰어.”

“지켰다고요?”

“응.”

“……그럼 대체 왜 내가 힘을 잘 못 쓰는 건데요?”

따지듯 말하자 칼리프가 고개를 모로 천천히 기울였다.

리티아의 말을 곱씹듯 잠시 침묵했다.

“내가 이유인 건 맞아?”

“그쪽밖에 이유가 없단 말이에요.”

“이제 화난 이유는 알겠는데, 나는 정말 약속 지켰어. 아예 힘을 쓰지 못했어?”

“……그건 아니지만.”

이 남자가 막은 게 아닌가?

그럼 성력이 나오지 않은 다른 이유가 또 있다는 말인가?

그럼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시간은 얼마 안 남았는데 이 남자가 그 이유가 아니라니.

차라리 이 남자여야 해결법을 찾는데 말이다.

“조급해하지 말고.”

“……조급할 수밖에 없어요. 모레가 당장. 하…….”

리티아가 결국 답답함에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 남자가 아니면 이 남자에게 화를 낼 이유가 없는 건데.

리티아는 자신을 바라보고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을 올려다봤다.

“오해했다면 미안해요. 당연히 그쪽이 장난을 치는 줄 알았어요.”

“괜찮아. 그럼 화는 좀 풀렸나?”

“……진짜 내 부탁을 들어준 거 맞죠?”

“정말이야.”

그럼 대체 무슨 이유로…….

설마 영혼이 바뀌면서 아예 힘마저 잘못되어 버린 걸까.

그렇다기에는 처음에 성력이 잘 나왔는데…….

“도와줄까?”

“네?”

“도와줄까.”

“뭘 도와줘요? 성력 쓰는 걸?”

“어떤 것이든. 방법은 많을 거야.”

언제든, 어디서든 태연자약할 정도로 여유로운 모습에 리티아는 할 말을 일었다.

대체 이 남자는…….

느닷없이 나타난 게 너무 놀랍고, 오해로 인한 건지 화도 났지만 리티아는 그가 찾아온 김에 묻기로 했다.

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자신이 생각하는 존재가 맞는 것인지를.

“칼리프.”

“응?”

“……당신 말이에요.”

칼리프가 말해보라는 듯 리티아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하지만 막상 불러서 질문을 코앞에 두고 리티아가 멈칫했다.

만약 그가 오브라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가 곧이곧대로 말해준다는 보장은 없지만 설령 그의 존재를 물어본다면 자신의 존재를 안 리티아 자신에게 어떠한 행동을 보일지 불안했다.

사실 저 여유로운 태도 때문에 자신을 가지고 노는 건지, 아니면 정말 마음에 들어 함께하고 싶은 것인지 아직까지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물어봐야, 리스크가 적을까. 어떻게 물어봐야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 있을까.

“내가 맞혀볼까.”

“…….”

그를 불러놓고 눈만 도르륵 굴리며 생각에 빠진 리티아에게 칼리프가 물었다.

“네가 뭘 궁금해하는지.”

“…….”

한참 뒤에야 리티아가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네, 맞혀봐요. 내가 뭘 궁금해하는지.”

그러자 칼리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겁먹을 줄 알았는데.”

“그쪽이 못 맞힐 수도 있잖아요.”

“맞히면 안 도망가고?”

“어차피 여기서 도망갈 곳도 없어요. 내가 뭘 궁금해하는 것 같은데요?”

그래, 네가 말해보라며 리티아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다리며 한참을 바라보는데 칼리프가 피식 바람 소리를 냈다.

“그렇게 쳐다보면 말해주기 싫은데.”

“……장난해요?”

그때였다.

갑자기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가씨, 밖에 계세요?”

에밀리아의 목소리였다.

리티아가 깜짝 놀라 칼리프를 좀 더 벽으로 밀며 그의 품으로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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