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 * *
오히려 로아 캐번디시가 이 모습을 본다면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비웃어보라지.
리티아는 기필코 그 자리를 얻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하지만 또 난관이 있었다.
“이, 인사드립니다! 귀하신 몬트 공녀님께서 어찌 이런 곳까지……! 뭐든 시키실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껏 봉사를 하겠다고 나선 귀족 영애는 없었기에 세리의 부름을 받은 남자는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제임스라고 자신을 빈민가의 관리자라고 소개한 남자는 꽤 험상궂게 생긴 남자였다.
정말로 관리를 한다기보다 이곳을 힘으로 누르고 장악하고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리티아가 말을 하면 대신 빨래를 하거나 쓰레기라도 주울 태세였다.
결국 말이 통하지 않는 남자도 보내고 나서야 다시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내 힘으로 크게 뭐가 바뀌겠냐마는.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하나쯤은 있겠지.’
그간 열심히 비위를 맞춘 탓에 꽁꽁 묶였던 제 몫의 자금도 넉넉하게 풀린 상태니 가기 전에 좀 더 살펴보고 심하게 무너진 곳이나 아이들의 병원비도 추가로 남겨주고 갈 수 있을 것이다.
좀 생색내기 같아 보여도 나쁜 데 쓰는 돈도 아니니 괜찮겠지.
솔직히 몬트 공작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 더욱, 더욱 그렇게 쓰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리티아는 가장 쉬운 일이지만 먼저 눈앞에 보이는 일부터 했다.
길을 너저분하게 막고 있는 쓰레기들부터 치우기로.
* * *
세 시간쯤 지났을까.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허리만 폈다 접었다 하며 리티아는 꽤 많은 구역을 청소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리티아가 허리를 숙여 쓰레기 하나를 줍자마자 주변이 난리가 났다.
세리는 말리느라 기겁한 얼굴을 했고, 함께한 호위부터 하녀들까지 제발 그만해 달라고 말릴 정도였다.
「그럼 같이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 말릴 시간에 한 사람이라도 더 주우면 금방 끝나겠네. 아버지께서도 싫어하지만은 않으실걸.」
그 말에 리티아를 따르던 사람들 모두 리티아를 말리는 걸 그만두고 쓰레기를 줍기 시작한 것이다.
에밀리아에게는 따로 부탁해 금화를 쥐여주고 아이들이 먹을 만한 간식을 한 아름 사 오게 부탁했다.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몸을 움직인 건 정말 처음이었다.
숨은 턱 끝까지 차는데 자꾸만 웃음이 났다. 이게 뭐라고.
바보 같게도 공주처럼 대접을 받을 때보다 몸을 움직이고 나니까 새로운 삶을 얻게 된 것이 더 감사하게 느껴졌다.
“아가씨, 가져왔어요! 하아, 최대한 다 쓸어 오느라 조금 많아요.”
“그래? 얼마나? 허…….”
서둘러 뛰어온 에밀리아의 뒤로 수레 하나가 뭔가를 담고 왔다.
배불리 먹을 정도로 구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수레째로 담아온 것이다.
“아가씨께서 최대한 많이 사오라고 하셔서……!”
“고마워, 정말 잘했어. 아이들부터 줘야겠다.”
빵이며, 과자며 수레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식수통도 있었다.
청소를 하느라 악취도 조금 옅어진 것 같은데,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자 저 멀리서 아까부터 새끼 고양이처럼 지켜보고 있던 아이들이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호기심은 있고.
아까도 어떤 아이가 리티아에게 오려다 더 큰 아이가 막아 오지 못했었다. 절대 가지 말라고, 죽고 싶은 거냐고 다그치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이리 와, 와도 돼. 와서 먹고 싶은 거 가져가도 돼.”
리티아는 아이들을 꾀어내듯 손으로 오라고 살랑거렸다.
하지만 아이들은 몰래 엿볼 때보다 더 경계를 보이며 뒤로 숨었다.
“공녀님께서 이리 오라고 하시잖니.”
세리가 협박을 하듯 아이들에게 무뚝뚝한 목소리를 냈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더 겁먹잖아. 그럴 거면 둘 다 마차에 올라타.”
“죄송합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호위 기사까지 아이들을 데려가려고 해서 리티아가 또 한 번 말렸다.
“얘들아, 나 무서운 사람 아니야. 나는 저기, 저 마을에서 왔어. 리티아라고 해.”
“…….”
“언니, 누나가 무서우면 친구들을 더 많이 부르자. 언니가 여기 두고 갈 테니까 먹을 만큼 사이좋게 나눠서 가져가도 돼.”
제일 앞에선 여자애에게 리티아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까부터 유독 눈에 띄는 아이였다. 아이들 중에서 가장 깨끗한 옷을 입었는데, 계속 자신보다 더 어린아이들을 챙기고 있었다.
궁금해서 엿들으니 “언니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일 또 올게.” 이런 말이 오갔다. 아무래도 이 동네 아이 같지 않았다.
골목대장 같은 건가 해서 리티아가 말을 걸었는데 날카로운 눈초리를 한 여자애가 조금 더 다가왔다.
리티아는 마치 첫 손님을 받은 가게 주인처럼 신이 나서 빵을 집었다.
“……정말 먹어도 돼요?”
“그럼! 뭘 줄까? 빵이 좋을까? 여기 물도 있어!”
“저희가 닿으면 또 혼낼 거잖아요.”
“혼내……?”
“저번에도 빵을 준다고 해서 갔는데 로이가 뺨을 맞았어요. 안 닿았는데, 닿았다고. 또 그럴 거면서.”
“아냐, 무슨.”
“거짓말하지 말아요. 언니랑 비슷한 옷 입은 언니가 와서 그랬단 말이에요.”
리티아는 아이를 더 설득하려고 했지만, 경계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오히려 더 했다간 공포심만 줄 것 같아서 리티아는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어차피 여기서 계획보다 조금 더 오래 있었으니 갈 시간이기도 했다.
야무진 여자아이의 뒤에서 호시탐탐 빵을 노리고 있는 아이들의 시선도 무시할 수 없었다.
리티아가 비켜주어야 굶주린 배를 채울 것 같았다. 하긴 멋대로 찾아와 이곳을 돕겠다고 한 건 자신이니 빠질 땐 빠지는 게 맞았다.
“그럼 친구야, 언니가 이거 두고 갈 테니까 이따가 친구들 나눠주고 맛있게 먹어, 알았지? 우린 가는 게 좋겠어.”
그 말을 리티아가 꺼내자마자 세리를 포함한 호위들이 이제야 간다는 듯 크게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침에 다른 일정은 말씀해 주시 않으셨는데 괜찮으시다면 집으로 바로 모셔도 될까요?”
“음, 아무래도 그래야겠다. 이 상대로 다른 일정을 가기도 애매하니까.”
“네, 그리하겠습니다. 아가씨께서 아까 말씀하신 다른 지원은 저희가 이곳 관리인을 통해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응, 다른 곳에 쓰이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어.”
“반드시 확인하겠습니다. 어서 타세요.”
세리는 얼른 리티아를 데려가야겠다 마음먹었는지 마차 문부터 열었다.
리티아도 자신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을 더 고생시키는 것도 무리다 싶어 바로 마차에 올라타려고 할 때였다.
“에나!”
어떤 아이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동시에 마차에 막 올라타려던 리티아도 보좌를 하던 세리아와 에밀리아도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방금까지 똘똘한 말투로 리티아를 받아치던 아이가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쓰러져 있었다.
리티아가 놀라 눈이 커다래졌다.
방금 외친 이름이 분명 에나랬다. 리티아가 빠르게 뒤를 돌아 아이에게 뛰어갔다.
“너 왜 그래, 괜찮아?”
동시에 세리가 리티아의 앞을 막았다.
“아이가 쓰러졌잖아.”
“지저분한 것에 닿으십니다. 그것까진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뭐라고?”
“정 신경 쓰이시면 저희가 따로 치료사를 부르라고 하겠습니다.”
세리아의 뒤로 발작을 일으키듯 몸을 뒤트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리티아가 바락 화를 냈다.
“너 제정신이야?”
“네? 아가씨?”
“비켜, 아이가 쓰러졌잖아. 이럴 시간에 의사를 불러, 얼른!”
리티아는 세리를 옆으로 치우듯 밀어내고 아이에게 뛰어갔다.
“괜찮아? 왜 이러는지 너흰 알고 있니?”
이미 아이들은 울음바다였다.
“에, 에나는 원래 아파요. 매번 이렇게 아파요. 치료사 선생님도 모른다고, 했어요. 오늘은 괜찮았는데.”
“에나 언니, 일어나 봐.”
“에나 누나, 얼른 일어나!”
“치료사도 모른다고 했다고?”
빈민가라 의사를 불러도 시간이 다소 걸릴 것 같았다.
리티아는 급한 대로 성력을 써보기로 했다. 이런 것에도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도 이로운 기운이 해를 끼치진 않을 테니까.
리티아는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아이를 껴안듯 안고 작은 가슴 부근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제발, 제발. 이번에는 제발.’
하지만 리티아의 간절함을 비웃기라도 한 듯 힘이 나오지 않았다.
리티아는 당황을 드러내지도 못한 채 식은땀을 흘렸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딱 한 번만이야. 제대로 쓸모있는 일 좀 해보자, 제발.”
리티아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성력을 끌어올릴 때의 느낌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에나!”
그때였다.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아이들이 일어나서 알은체를 하는 게 느껴졌지만 리티아는 뒤에서 소리가 나든 말든 아이를 치료하려는 데만 집중했다.
“으…….”
에나가 고통에 몸부림치고, 이윽고 순간적으로 힘이 터졌다.
“……하.”
손끝으로 따뜻한 물줄기가 뻗어나가듯 순간적으로 연한 연두빛의 성력이 쏘아져 나왔다.
이게 치료법이 될지 모르지만 우선 의사가 올 때까지만.
리티아는 에나가 고통을 느끼는 부분에 계속해서 성력을 주입시켰다.
고통이 더해져 땀을 뻘뻘 흘리며 가슴을 벅벅 긁고 쥐어뜯던 아이의 움직임이 점점 멎기 시작했다.
의식을 잃는 것이 아닐까, 리티아가 잠시 주춤했지만 다행히 아이의 표정은 편안해지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되겠다 싶은 순간 누군가 리티아의 팔을 억세게 잡아챘다.
“지금 내 동생한테 뭐 하는 짓입니까!”
몸이 휘청할 정도로 강한 힘에 리티아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기껏 끌어낸 성력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만큼 놀란 이유가 있었다.
“곤도르?”
방금 외친 목소리가 곤도르였던 모양이다.
곤도르는 리티아를 밀치고 방금 내 동생이라 말했던 아이를 품에 껴안았다.
동생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