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 *
리티아는 저도 모르게 반가워하며 손을 뻗었다.
“저분……!”
그러자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을 향했다.
리티아가 가리킨 남자가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더니 일순간 불쾌함을 표출하며 눈썹을 와락 구겼다.
그야말로 기세를 누르는 눈빛이라 리티아가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혹시 경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선택되어 기쁜 게 아니라 왜 하필 자신을 택했냐는 듯 짜증이 난 것처럼 보이는 남자가 리티아의 질문에 굳게 다문 입술을 열었다.
“……곤도르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리티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단번에 찾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바로 찾을 줄이야!
단연 눈에 띄는 체격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쉽게 찾을 줄은 몰랐다. 이제 영입하는 일만 남았다.
딱 얼굴만 봐도 쉽지 않으리라는 걸 느꼈지만 우선은 선택권은 제게 있었다.
그를 설득하려는 건 잘 지내보자는 배려일 뿐 그가 거절해도 리티아는 자신의 테메스로 영입할 생각이었다.
그러려고 여기까지 걸음을 한 것이니까.
“혹시 저분과 대화를 나누어도 될까요? 시간을 오래 지체하진 않을게요.”
리티아는 한결 편한 얼굴로 옆에 선 레페 신관에게 부탁했다.
곤도르에게도 의견을 묻는 눈짓을 힐끔 했다.
레페 신관은 망설임도 없이 그래도 된다고 말했다.
“당연히 그러셔도 됩니다. 편히 대화를 나누실 곳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괜찮아요. 이 근처여도 상관없어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서서 대화를 하셔야 하는데.”
“괜찮아요. 5분이면 돼요.”
곤도르의 얼굴이 와락 또 한 번 구겨졌지만 그의 의견은 애초에 중요한 게 아닌 것처럼 보였다.
레페 신관과 카디스 경은 모인 기사들을 다시 물렸다.
이윽고 물살처럼 기사들이 빠져나가며 곤도르만 남았다.
혼자 남으니 기사들 사이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마치 우뚝 선 고목나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여기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큰 건지, 그러고 보면 칼리프도 눈에 띄게 키가 컸었다.
레페 신관이나 사라진 기사들을 추려보면 딱히 제국 사람들이 유난히 큰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더구나 곤도르라 말한 기사는 내 예상보다 표정이 훨씬 험악해서 잘 이야기가 될지 살짝 걱정도 됐다.
“아, 저기. 조금 같이 가죠?”
리티아는 다리를 서둘렀다. 왜 이렇게 걸음이 빠르담.
운이 좋게 첫 테메스 후보를 잡았으나 남자는 리티아를 두고 앞서 성큼성큼 걸었다.
드레스를 쥐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따라가는 리티아를 향해 홱 몸을 돌렸다.
“테메스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까?”
리티아가 우뚝 선 그에게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런데 왜 저를 고르셨습니까?”
하고 많은 기사들 중에 하필이면 왜 자신을 골랐냐는 말에 리티아가 싱긋 웃었다.
“저와 잘 맞으실 것 같아서요.”
“…….”
남자는 이제 눈으로 욕을 할 기세였다.
기가 세다고 알고는 있었는데 막상 눈앞에서 대하니 리티아의 예상보다 훨씬 더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 기사를 곁에 두어야 한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리티아는 시종일관 미소를 지었다.
어째 먹히는 것 같진 않았지만.
“다른 좋은 기사들이 많습니다.”
한숨을 쉬는 것 같더니 곤도르의 목소리가 한결 유순해졌다.
“네, 알고 있어요.”
“출신이 좋은 기사들도 있고, 아시다시피 테메스 후보로 거론된 기사들도 많으니 그중에서 고르십시오.”
“음, 그것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럼 현명하신 분 같으니 그들 중에서 고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출신도 좋지 않고 마음에 찰 만한 기사가 아닙니다. 그럼.”
곤도르는 꾸벅 90도로 허리까지 숙여가며 인사를 한 뒤 그대로 자리를 파하려고 했다.
“아뇨! 잠깐만요.”
리티아가 그런 남자를 잡았다.
테니아 후보가 고른 기사라면 거두절미하고 거절을 할 수 없다는 걸 그도 잘 알 터였다.
그렇다면 지금 이 태도는 아무래도 제 자신이 저 기사에게 얕보인 것 같긴 한데…….
원래라면 화를 내야 마땅하나 우선적으로 선택권은 자신에게 있었으므로 리티아는 조금 더 상냥히 굴기로 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우선 저는 리티아예요. 몬트 영애라고 부르셔도 되고 공녀라고 하시든지 편한 방향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
“곤도르 경께서 한 말이 뭔지도 잘 알고 있으나 저는 이미 결정을 한 상태라서요.”
“예?”
“곤도르 경이 제 테메스가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출신은 상관없어요. 경이 부족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말만 하시는 것 같긴 하지만요.”
그러자 곤도르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번졌다.
“물론 곤도르 경이 지금 절 굉장히 싫어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도 느껴지고요. 그래도 제 테메스가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결정권은 제게 있는 것 맞죠?”
“……맞습니다. 하지만 영애께선 다른 테니아 후보들이 고르신 걸 못 보셨습니까?”
“음, 봤어요. 인원을 꽉꽉 채워 데려갔더라고요. 대단하신 분들로요.”
“그런데도 저를 고르고 싶으십니까? 이유가 뭡니까?”
곤도르는 그야말로 정말 궁금하다는 어투로 리티아에게 물었다.
다들 테메스 후보 중에서 추리고 추려도 모자라 더 대단한 기사가 없냐고 물어보는 게 정상인데 일개 성기사 한 명을 붙잡아 테메스가 되어라 하니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대체로 테니아는 귀족 출신의 영애고 자신들에게 살갑게 굴며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곤도르는 귀족을 싫어했다.
성기사라는 자리가 신전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귀족들을 보호하는 일이 많은 것은 알고 있으나 그와 별개로 고개를 숙이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더 대놓고 불쾌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귀족 영애를 모욕했다고 화가 나서 저를 벌하라 하면 테메스가 되는 것보다 벌을 받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일부러 유도한 것이었다.
성정이 유약하고 극도로 조심성이 많고 또 조금만 겁을 먹어도 눈물을 쏟는다는 소문을 곤도르도 들어서 알기 때문이다.
아마 제국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제국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 중에 몬트 공작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더구나 성기사 교육을 받을 때 몬트 공작가는 아예 가계도까지 배우는데 모를 리가.
그런데 몬트 공녀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다 알고 있다고, 그래도 테메스가 되어달라 하니 기가 찰 뿐이었다.
도대체 이 여자는 뭐지? 내가 소문으로 들었던 몬트 공녀가 맞는 건가?
이미 테메스를 추려간 후보 영애들을 다 봤다면서.
곤도르가 더욱 격렬하게 거절을 하고 있는 건 이 여자가 테니아 후보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후보이기 때문이다.
가까이에서도 느껴지는 신성력이며 타고난 혈통. 유약한 성정만 제외하면 무엇 하나 빠진 게 없는데 애초에 정해진 결과나 다름없었다.
후보에서 그냥 끝날 영애라면 몰라도 강력한 후보의 테메스가 된다면 이후 테니아가 된 후에도 종속되어야 하는데 곤도르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성기사가 된 것도 정말 신앙심이 깊어서 된 것이 아니다. 곤도르가 성기사가 된 건 순전히 가장이나 다름없는 제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함이지 다른 이유가 없었다.
다행히 타고난 체격과 실력 덕에 성기사로 발탁됐고 덕분에 벌어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테메스가 되면 인정을 받을지는 몰라도 제 생활에 큰 문제가 생긴다.
오로지 테니아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하니 동생들을 돌보는 데도 문제가 생긴다.
“저랑 잘 맞을 것 같아서요!”
“…….”
도리어 해맑게 웃으며 그의 불쾌함을 반사하듯 튕겨내고 있었다.
그사이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움찔하는 건 있어도 전혀 겁을 먹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저는 부족한 게 많습니다.”
“알아요.”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천한 출신이고.”
“안다니까요?”
“충성심도 부족합니다.”
“음, 그건 몰랐지만 이제 알았네요.”
결국 곤도르가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곤도르 경이 필요해요. 대신 제가 조건을 걸게요.”
“무슨 조건도 있습니까?”
“제가 후보로 있는 동안에만 테메스를 해주세요. 그 이후에는 자유로이 결정권을 드릴게요.”
“……무슨 말씀입니까?”
“만약 후보에서 떨어진다면 지금 제가 한 말이 소용이 없겠죠. 하지만 그치지 않고 제가 테니아가 된다고 해도 테메스로 남을지 말지 결정권을 곤도르 경에게 주겠다는 뜻입니다.”
“그게 무슨.”
“대신 후보들이 순례길을 오르는 중에는 저를 확실하게 보호하고 서포트 해줘야 해요. 제가 테메스로 있는 동안 기사님의 대한 지원은 아끼지 않을 거고요. 그건 제가 또 고를 다른 테메스 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리티아의 차분한 말에 곤도르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잠시 생각에 빠졌다.
테니아 후보들이 하는 활동 중에서도 순례길은 가장 어려운 코스다.
무엇보다 수도를 떠나야 하고 마수를 마주할 수도 있으며 지금껏 온실 화초처럼 지내왔던 삶과 전혀 상반되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건 또 제대로 알고 있는 듯했다.
이런 제안을 한다는 테니아 후보도 처음인데.
대체 무슨 꿍꿍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더욱더 굳이 제가 아니어도 되지 않습니까?”
“아니요. 곤도르 경이어야 한다니까요.”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정권은 테니아 후보에게 있기에 겁이라도 준 건데 거기다 조건까지 걸고 고려해 보라고 하니 더 의심이 갈 수밖에.
그것도 아니라면 제게 마음이라도 있다는 건가. 가끔 찾아와 고백을 하는 영애들이 더러 있으니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는 볼 수 없었다.
“혹시 저를 오래 보셨습니까?”
방금 생각을 뉘앙스에 담아 곤도르가 물었다.
“아뇨, 오늘 초면이에요!”
그 물음에 리티아는 해맑게 대답했다.
곤도르는 더 할 말이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