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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15화 (15/70)

15화

* * *

리티아가 몸을 돌리자 세리가 신전에서 보내온 듯한 서신을 내밀었다. 리티아가 열어 확인하는데 세리의 말이 이어졌다.

“다른 후보 영애들께서는 이미 여정을 함께할 테메스를 고르셨다고 합니다. 아가씨께서는 아직 각하께서 염려가 되시어 따로 인원만 추려놓으셨고요. 보름 후에는 순례 일정이 시작되오니 더 늦지 않게 고르심이 좋을 듯싶습니다.”

“아, 그렇지.”

정신이 없어 까맣게 잊고 있었다. 테메스의 존재를.

성녀만큼이나 중요한 존재인데. 특히 테니아에게는 꼭 필요한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테메스는 성기사다. 성기사들 중에서도 예비 테니아들의 호위를 위해 꾸려지는 정예 성기사라고 보면 쉬웠다.

“다른 사람들은 다 골랐단 말이지?”

“예, 그렇다고 합니다.”

테메스는 보통 세 명에서 다섯 명 정도로 추려지는데 이때의 멤버가 추후 테니아가 된 후에도 이어지게 된다.

테니아 신탁의 선택을 받지 못한 영애들은 테메스의 호위도 다시 거둬지고 본래의 삶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다른 네 명의 영애들은 이미 테메스가 모두 배정된 상태였고, 문제가 있었던 리티아만 테메스가 배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다행인 건 몬트 공작도 배정만 늦췄을 뿐이지 신전에서 내어주는 성기사를 어쩌지는 못한다. 제 입맛대로 굴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신전, 즉 대신관과 테니아의 권력은 아테온의 황권과 비등하기도 하고.

보름 후에 순례라고 하면 짧으면 한 달, 길면 석 달 넘게 이어지는 일정으로 테니아 후보들이 가장 활약을 펼칠 수 있는 구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들 여유롭게 준비했던 것과 다르게 리티아는 몇 달이나 밀린 상태라 몹시 촉박한 일정이었다.

‘비명도 지르고 기절하고 난리도 아니라고 했었지.’

테니아 후보 대부분 고위 귀족 출신이라 가문의 영지 외에는 나가본 적도 없을뿐더러 외부에서 천막을 치고 자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기에 일주일도 안 되어 포기하는 이도 나타난다.

그 외에도 온갖 공작이 난무하기도 한다. 가령 유난히 낙후된 지역이나, 마수가 하루가 멀다 하고 기승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는. 그런 유치하면서도 위험한 일들로.

‘그 점에서 로아가 마음에 조금 걸리긴 해. 뭐 또 괴롭힌다고 해도 가만히 있을 것도 아니지만.’

보통은 포기하는 대신 아예 자신들에게 배정된 성기사에게 모든 일을 시키고 공만 가로채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 모든 행동이 신의 종자로서 하는 일이며 신께서 하나도 빠짐없이 어여삐 봐주시어 신탁을 내린다는 게 신전의 정설처럼 내려오긴 하지만 리티아가 보기에는 대신관과 현 테니아의 입김이 더욱 센 것 같았다.

실제로도 봉사와 기부 활동보다 대신관에게 잘 보이고 현 테니아들에게 잘 보이려고 신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든다는 걸 알고 있다.

‘어차피 다 부질없을 텐데.’

테니아의 후보가 있어도 카미야가 나타나면 그 자리를 고스란히 양보해 줘야 할 텐데 말이다.

사실 리티아도 점점 궁금해지고 있었다. 원작이 비틀어진 지금 카미야는 어떤 식으로 등장을 할지.

처음에는 그녀는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했는데 생각해 보니 리티아처럼 존재가 사라질 위험도 없었으니 그녀는 원작대로 확실히 나타나긴 할 것 같았다.

“하여 아가씨께서 무리가 없으시다면 먼저 테메스를 배정받으시고 이후에 기부 활동을 하시는 게 나을 것 같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겠네. 더 늦을 수 없으니 오늘 바로 가야겠다.”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다만 조금 문제가 있었다.

테메스가 배정되기 전에 활발한 기부 활동을 할수록 능력 있는 성기사가 배정된다고 알고 있는데 리티아는 가서 테메스를 고른 적도 없고 활동도 고작 신전에서 축복을 내린 것밖에 없으니 대단한 능력을 가진 성기사는 이미 다른 후보들에게 배정되었을 것이다.

기부 활동을 하다 보면 마수가 출현할 수도 있고 사람이 모이다 보니 돌발상황도 일어날 수 있어서 테메스의 능력도 꽤 중요할 텐데 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성기사 중에서도 추려진 이들이니 문제는 없을 테지만.

‘그렇다면 주어진 것에서 최대한 내게 도움이 될 패를 쥐어야지.’

리티아가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들었다.

“준비를 조금 서둘러 줄래?”

“네?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거의 다 끝나가요!”

이제 정말 남들과 제대로 부딪혀야 하는 건가.

리티아는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다시금 신전에서 온 서신을 만지작거렸다.

* * *

외출 준비를 마치자마자 리티아는 신전으로 향했다.

가면서도 내내 혹시라도 힘이 막힐까 전전긍긍하며 수시로 확인하는 걸 잊지 않았다. 칼리프의 말대로 순조롭게 성력이 도는 게 느껴졌다.

못된 건지, 짓궂은 건지.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네, 아가씨?”

“응? 아니야. 그냥 날씨가 좋다는 소리였어.”

이윽고 마차는 신전 문턱에 다다랐다.

마차에서 내려 신전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불청객을 만났다.

“어머, 몬트 영애, 이게 얼마 만인가요? 신전에 온 거예요?”

로아가 활짝 웃어 보이며 리티아의 앞에 섰다.

마치 찍어누르려는 듯 가까이 다가온 모양새였다.

뒤에는 인원을 꽉꽉 채운 다섯 명의 테메스를 달고 이미 신탁을 받은 것처럼 새하얀 드레스에 황금색 장신구들을 주렁주렁 하고서.

“네, 여기서 뵙네요.”

“몸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리티아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마주 섰다.

로아는 리티아가 이 몸에 들어와서 처음 대면하는 것이었다. 본래 리티아가 호수에 풍덩 빠지기 전이 로아와 만난 마지막 자리였으니까.

그녀는 연회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사람 중 하나였는데 우연히도 그간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도 원작에 따르면 소문에 예민한 사람이라 리티아가 연회에 열심히 참석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감쪽같이 모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진 지 꽤 됐어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걱정 많이 했어요.”

로아의 시선은 리티아를 훑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리티아가 싱긋 웃었다.

“진짜 걱정은 맞을까요?”

“……네?”

로아가 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눈을 깜박거렸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로아가 다시 물었다.

“못 들었으면 됐어요. 이제 정말 괜찮아졌어요.”

“큼, 그래요? 괜찮은 거 맞아요? 좀 더 요양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고?”

로아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것처럼 부채로 입을 가리며 미소 지었다. 눈매가 가느스름해지도록 웃으면서도 연신 리티아를 훑고 있었다.

원래라면 진작 겁을 먹고 로아의 눈치를 봐야 했을 것이다.

얼마나 무서웠길래 그러나 싶었는데 막상 보니 좀 화려하게 꾸몄을 뿐 두려워할 존재랑은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럼요. 왜요? 캐번디시 영애께선 제가 그러길 내심 바라기라도 하셨나 봐요.”

로아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귀를 의심했다. 제 앞에서 벌벌 떨어야 하는데 뭘 잘못 먹기라도 했냐는 얼굴로 리티아를 쳐다봤다.

“아뇨……? 설마요. 그냥 걱정되어서 한 말이었어요.”

“그래요, 고마워요. 하지만 저도 테니아 후보인데 이제 부지런히 움직여야죠. 안 그런가요? 다들 기대가 크셔서.”

놀란 눈을 깜박이던 로아의 표정이 빠르게 갈무리됐다. 당황이 사라지고 난 얼굴에는 다소 적대감이 비쳤다.

“아니, 뭐…… 그렇긴 하죠. 한데 아직 테메스도 없는 것 같은데.”

떨떠름하게 대답하던 로아의 입꼬리가 다시 비죽 솟았다. 마치 자신의 테메스들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 부채를 팔랑였다.

성기사들은 리티아와 눈이 마주치자 짧게 고개를 숙였다. 리티아도 짧게 눈인사를 했다.

“네, 안 그래도 오늘 제 테메스분들을 뵈러 온 거예요.”

성기사는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신을 향한 믿음만 있으면 정당한 시험을 치르고 들어갈 수 있다. 대게 성력을 강하게 가진 자들의 계급이 높은 편이나 우선 기사란 타이틀에 맞게 검술 실력이 뛰어나야 한다.

실력, 경력 등에 따라 어깨에 달린 계급 마크가 달라진다고 하더니 최고 등급인 뾰족한 다이아몬드 형태의 5성 계급 마크가 달려 있었다.

‘아직까진 그대로 순조롭게 이어지나 보네.’

묘사로만 봐서 정확하진 않지만 구불거리는 금발의 단발머리를 한 성기사와 진녹색의 짧은 머리를 한 성기사는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나머지 세 명의 성기사도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원작에서 로아가 골랐던 그대로 멤버가 정해진 것 같았다.

리티아가 기억하는 둘은 바로 아로와 콜로스.

성기사가 되며 부여받은 이름이나 테메스의 임무를 갖게 되면 아로 테메스와 페콜로스 테메스라 불리기도 한다.

둘은 성기사 중에서도 특출난 검술과 성력으로 최고 성기사라고 불리는 자들이다.

어쨌든 가장 먼저 로아 캐번디시가 선점을 해 다른 후보들의 부러움을 샀다는 부분을 본 기억이 있다. 그런데 아직 로아가 모르는 문제가 있다.

지금은 순조로울지 몰라도 저 기사 둘은 유난히 긍지가 높은 자들로도 유명한데 처음에는 합이 잘 맞는 듯하다가 나중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마찰을 일으켜 이탈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킨다.

‘특히 금발 머리. 아로.’

더 처참한 건 저 금발 단발머리의 성기사가 공개적으로 다른 후보에게 가 자신을 거둬 달라는 말을 해버리는 바람에 로아는 씻을 수 없는 모멸감을 겪게 된다. 이유는 별것 없었다. 바로 로아 캐번디시의 성력이 너무나 형편없어서.

일반 성기사와 달리 테메스는 성기사가 가지고 있는 성력과 힘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앞으로 주인으로 따를 테니아의 성력도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테니아 후보가 얼마나 성력을 많이 운용할 수 있느냐에 따라 성기사가 더 강하고 빠르게 명령을 이수하고 보호가 가능하기에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분이었다.

그 와중에 뒤늦게 성력을 개방한 카미야가 활발하게 활동을 해나가면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아 여주인공으로서 발돋움하게 되는 에피소드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로아는 얼굴에 행복감과 성취감, 우월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는 건 리티아가 살아 있더라도 이대로 진행이 된다면 그 장면을 직접 보게 될 예정이라는 건데.

리티아는 말을 아끼며 그저 은은한 미소로 대신했다.

“당장 보름 후에 순례 시작인데? 괜찮겠어요? 아무리 몬트가라도 각하께서 전지전능하신 건 아닌가 보네요.”

로아의 말에 리티아가 다시 생각을 접었다.

“늦은 만큼 열심히 움직여야겠죠. 그리고 아버지께서 테니아 후보신 건 아니니까요.”

“그냥 포기하는 건 어때요? 뭐 하나 이룬 게 없는데 기대에 부응은 할 수 있겠어요? 그거 욕심이에요.”

“포기는요. 저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에요. 그동안 왜 그렇게 눈치를 보고 살았나 싶더라고요. 이제 눈치 보지 않고 뭐든 해보려고요. 캐번디시 영애 덕분이에요.”

“내, 덕분이라고요?”

로아의 눈썹이 구겨졌으나 리티아는 천진하게 끄덕였다.

“네, 영애 덕분에요. 그날 제게 고의적으로 포도주를 쏟았던 날이요. 그날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왜 그렇게 참았나 싶더라고요. 별것도 아닌데.”

“별, 것……. 그보다 고의라뇨? 그건 엄연한 실수…….”

“실수. 굳이 다가와 제게 쏟아부었지만 실수요. 어쨌든 고마워요. 영애가 아니었다면 계속 바보같이 있었을 텐데.”

로아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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