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 * *
“왜요? 왜 그렇게 웃어요?”
리티아는 제 말에 찔려 물었다.
“그냥. 덫에 걸린 토끼 같은 얼굴이라. 정말 다 찾아봤어?”
“아, 안 찾아봤다고 했잖아요.”
“아쉽네.”
칼리프가 모호한 답변을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싱글싱글. 그는 뭐가 그렇게 즐거울까.
설마 아니겠지. 칼리프의 알 수 없는 반응에 리티아는 더욱 불안해졌다. 아니겠지. 거기에 오브가 나타날 리가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운이 없는 편이라도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그가 귀족이 아닌 게 낫지.
리티아는 몇 번이고 입을 달싹이며 물어보려다 결국 포기했다. 대신 다른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칼리프. 이미 말했지만 당신 말대로 당신이 이겼어요. 그쪽 말대로 당신을 감당하고 책임질게요. 그런데 그 전에 부탁할 게 있어요.”
“어떤 건데? 말해봐.”
“……당장은 둘이 있는 데서만 유효한 걸로 해요.”
“음…….”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성녀 후보예요. 테니아가 될 몸이라고요. 대신관의 총애도 받고 있고요, 나는 구설수에 오르고 싶지 않아요. 반대로 당신도 나와의 관계가 드러나면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나 좋자고만 하는 소리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 하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비밀로 하자고?”
“네. 그건…… 괜찮죠? 당신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죠? 적어도 후보 기간에만이라도…….”
리티아가 간절하게 부탁했다.
칼리프가 리티아의 표정을 살피듯 물끄러미 쳐다봤다.
대부분 말에 거짓은 없었지만 어쩐지 긴장이 됐다.
리티아는 시선을 피하면 그가 무슨 의심이라도 할 것 같아 일부러 더욱 마주했다.
한참 만에 칼리프의 입이 벌어졌다.
“그렇게 하면 너는 내 제안도 들어줄 건가?”
“네? 무슨 제안을 할 건데요?”
자신이 먼저 제안을 했으니 칼리프 쪽에서 똑같이 제안을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이미 그와의 내기에서 진 전적이 있었다.
리티아는 좀 불안해서 얼른 덧붙였다.
“그, 너무 어려운 건 말고요. 나도 그렇게 어려운 부탁은 아니잖아요.”
“나는 쉬운데. 별거 아냐.”
“그럼 말해도 돼요.”
“나중에라도 좋으니 네 진짜 이름을 알려줘. 그리고 절대 도망치지 않는다면 들어주지.”
“…….”
“어때, 쉽지?”
왜 이렇게 이름에 집착하는 걸까? 벌써 몇 번째 물음인지 몰랐다.
그는 리티아가 자신의 이름이라고 확신하며 몇 번이고 말해줘도 귓등으로도 안 들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중에’라면 별 상관이 없을 것 같다.
어차피 테니아가 되기 전까지 그가 언제든 성력을 쥐락펴락 할 수 있으니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정말 쉬운……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때도 쉬웠는걸.
“다른 의미는 없는 거죠?”
“왜 또 저번처럼 속을 것 같아?”
칼리프는 리티아의 생각을 읽는 듯 즐겁게 말했다.
리티아의 눈빛이 다시 매서워졌으나 이내 인정하고 끄덕였다.
“말 그대로야. 의미도.”
“정말이죠? 절대 말 바꾸지 마요.”
칼리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이야기가 끝난 것 같으니 다시 데려다줄 수 있어요? 이제 돌아가야 해요.”
리티아가 그를 천천히 밀어냈다. 어쩌다 보니 대화를 하는 동안 리티아는 그와 밀착하다시피 있었다.
리티아가 주춤 물러날 때마다 칼리프가 더욱 가까이 온 탓이다. 어쨌든 이제 힘도 돌아왔으니 돌아가야 했다.
“분부하신 대로.”
그 순간 리티아가 칼리프의 팔을 잡았다.
“아, 저기.”
“응, 말해.”
“다음에도.”
“응?”
“다음에 또 당신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요?”
칼리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이내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원하면 언제든 네가 있는 곳으로 찾아갈게.”
“내가 원하는 걸 그쪽이 어떻게 아는데요? 지금도 며칠이나 당신을 찾았었다고요.”
“알아. 네가 허락했으니까 이제 그럴 일 없을 거야.”
칼리프가 다시금 리티아의 머리카락에 입을 짧게 맞추며 단언하듯 말했다.
리티아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럼 일부러 내가 찾는 걸 알고도 안 나왔다는 말인가요?”
곡해하고 싶진 않았는데 꼭 그렇게 들렸다.
칼리프의 침묵이 리티아의 생각을 더욱 부추겼다.
“……일부러 그런 거군요.”
“미안.”
칼리프가 뒤늦게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데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어조였다.
“…….”
“나도 너처럼 확신이 필요했거든. 이제 안 그럴 테니까 용서해 주겠어?”
그러곤 리티아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손등을 문질렀다.
친밀한 사람들 사이에서나 할 법한 행동이다.
불쾌하진 않았지만 그런 은밀한 행동이 익숙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과거에도 지금도 누군가 이렇게 친밀한 행동을 할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리티아는 가만히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 입을 달싹였다.
“뭐 알았어요. 피차일반이니 한 번씩 넘어가기로 해요. 이제 정말 가야겠어요.”
칼리프는 리티아의 바람대로 곧장 다시 연회장 테라스로 데려다줬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힘도 돌려줘서 고맙고요.”
“별말씀을.”
“칼리프, 이번에도 연회에 참석하진 않을 거죠?”
칼리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티아는 그런 그를 부러워하며 몸을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말이야.”
“왜요……?”
리티아가 커튼을 잡은 채 불안스럽게 물었다.
“너 그날 다 기억하는 거 아니야.”
“네? 무슨…….”
그때였다.
“정말 근사하지 않아요? 하, 정말. 아무래도 좀 쉬다 들어가야겠어요.”
“저도요.”
안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에 리티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쪽으로 오나 싶어 살짝 커튼 사이로 살폈는데 두 명의 영애가 휙 지나갔다. 그리고 이내 안심하며 다시 돌리는 순간 그 자리에 칼리프는 없었다.
애초에 존재조차 안 했던 것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아.”
그날 다 기억을 하는 게 아니라니. 하필이면 궁금증을 남기고 사라지다니.
어쩐지 일부러 그런 것 같다는 의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 * *
어쨌든 덕분에 리티아는 무사히 연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몸 안에 성력은 멀쩡했고. 남은 연회 내내 다시 또 힘이 사라질까 봐 몇 번이고 확인했던지.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맡기고서야 비로소 긴장을 풀었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
리티아는 손을 들어 제 왼쪽 어깨 부근을 만지작거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맨살.
「그냥. 덫에 걸린 토끼 같은 얼굴이라. 정말 다 찾아봤어?」
「무슨 뜻이에요?」
「글쎄.」
그건 정말 무슨 뜻이었을까?
“아가씨, 저 에밀리아예요.”
에밀리아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어, 들어와.”
리티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에밀리아는 찻잔과 주전자가 든 쟁반을 들고서도 종종걸음으로 잘도 다가왔다.
“시원한 차예요. 아까 두통이 있으신 것 같아서 박하차를 타왔어요.”
아까 마차에서 내내 이마를 짚고 있었더니 에밀리아가 착각한 모양이다. 속이 답답하긴 했으니 오히려 고마웠다.
“고마워, 에밀리아.”
“별말씀을요.”
리티아는 에밀리아가 내미는 차를 마셨다. 얼음으로 차 온도를 내렸는지 순식간에 입 안이 차가워지며 청량감이 돌았다.
리티아가 저도 모르게 개운한 한숨을 쏟아냈다.
“좀 괜찮아지신 것 같아요?”
그 말에 리티아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응, 엄청. 이게 정말 필요했어.”
“헤헤, 다행이네요! 아가씨께서 원래 연회 안 좋아하시잖아요. 그런데 요즘 계속 연회에 드나드셔서 조금 걱정이 돼요. 주인님 걱정을 덜어드리는 것도 좋지만 저는 아가씨께서 몸도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벌써 초대장 쌓인 거 보세요.”
에밀리아의 말에 리티아의 고개가 돌아갔다.
테이블에는 이미 한쪽에 수북하게 초대장들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거기다가 내일부터 부지런히 나가야 할 기부 일정에, 곧 있으면 성녀 후보들과 함께 현 테니아들의 만남이 있을 거라고 했다.
그야말로 지옥의 일정이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참석할수록 몬트 공작이 안심하며 감시를 늦추는 건 좋았다.
“괜찮아. 정 힘들었으면 아마 집에서 쉬었을 거야. 오래 방에만 있었더니 오히려 요즘은 그게 더 나은 것도 같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한편으로는 좀 궁금했다.
그토록 찬양받는 테니아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원작에서 본 것처럼 성스러운 존재 그 자체인지.
사실 그보다 리티아의 관심은 지금보다 좀 더 자주적인 삶을 원하는 거지만.
리티아는 정말 자신이 테니아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날의 일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긴 하지만 아무리 원작 리티아가 죽지 않았다고 해도 카미야가 나타날 테니까.
조금은 다르게 흘러간다고 해도 카미야가 죽지 않는 이상 그녀가 테니아가 되지 않을까? 그러니 지금 사고 친 게 발각되느니 완전히 발표가 날 때 탈락이 되는 게 여러모로 좋았다.
지금 걸리면 당장 황태자와 결혼을 하라며 밀어 넣을 것이 분명하니. 그래서 오히려 더 카미야가 얼른 나타났으면 싶기도 했다. 그럼 황태자랑 이어지는 것도 해결되고 다 해결이 될 것 같은데.
직접 카미야를 찾아야 하나? 빈민가 출신이라고 했지?
생각을 하는데 에밀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그럴게요. 아가씨, 저는 아가씨께서 괜찮으시면 전 다 좋아요!”
“고마워.”
지금은 유일한 편인 에밀리아를 리티아가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러자 에밀리아가 수줍어하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아, 에밀리아.”
“네, 아가씨.”
“그……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아가씨.”
“오브라고 불리는 자들 말이야.”
“네?”
“그들에 대해서 알아보려면 아무래도 신전이 나을까?”
신전에는 도서관에서 취급하지 않는 책들이나 금서들이 다량 보관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심지어 황궁에 없는 것들도 신전 안에는 있다고들 했다.
귀족들이 그들을 배척하고 절대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혐오하는 건 알지만 좀 더 정확하고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리티아가 알고 있는 세계관 정보에도 문양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비슷한 부분도 없었으니까.
“……오브요? 갑자기 그건 왜 궁금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