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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12화 (12/70)

12화

* * *

“어떤 걸?”

“내 힘. 이런 말은 전혀 없었잖아요.”

리티아가 날카롭게 눈을 치떴다.

“다 말하면 도망갈 것 같아서. 나도 내 패 하나쯤은 있어야지.”

“뭐라고요?”

“어쨌든 내가 이긴 것 맞지?”

아쉬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여유로움에 리티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면 그렇게 말 못 해요. 빨리 내 힘 돌려내요. 내 어깨에 생긴 문양. 이거 당신이 만든 거 맞죠? 여기 있는 것도 빨리 지워요.”

리티아는 등을 살짝 돌려 어깨를 가리켰다.

그녀가 직접 거울로 봐야만 보이는 자리라 손으로 근처를 눌렀다.

“음.”

불길하게 칼리프가 뜸을 들였다.

“어서요.”

리티아는 빨리 내놓으라며 다그쳤다.

“싫어.”

단호한 말에 리티아가 입을 뻐끔거렸다. 지금 싫다고 했어?

리티아의 눈매가 다시 날카로워졌다.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칼리프, 그쪽한테는 한낱 장난인지 몰라도 나는 아니라고요. 당장 내일이라도 힘을 쓰지 못하면.”

“네가 힘을 못 쓰는 건 나 때문이 아니야.”

“뭐라고요?”

“네가 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아서라고?”

“네가 내 흔적을 지우고 싶어 할수록 네 힘은 사라질 텐데. 말해봐, 다시 힘을 쓸 수 있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어?”

그 말에 리티아가 입을 탁 다물었다.

아주 간절하게 그를 찾았던 게 생각났다. 정말 그것 때문이라고? 그 전엔 그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 해서 나오지 않았던 거고? 무슨 그런 게 다 있단 말인가.

리티아는 시선을 땅에 떨어뜨린 채 생각에 잠겼다. 칼리프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리티아의 턱을 잡아 들어 올리고서야 눈을 들었다.

“안 돼…….”

리티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없애는 건 불가능해.”

“…불가능하다고요?”

“해줄 수는 있는데 네가 죽을 수도 있어. 정말 그걸 원해?”

극단적인 발언에 리티아가 주춤하며 말을 잇지 못하고 칼리프를 쳐다봤다.

“이게 대체 뭔데요? 내가 왜 죽어요?”

“내가 돌이킬 수 없다고 그랬잖아.”

“그랬죠. 하지만 성력을 못 쓴다는 소리는 없었어요, 분명히. 말 안 해줬잖아요.”

리티아가 그날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며 말했다.

그러자 칼리프가 다소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안 통하네.”

“장난치지 말고요!”

리티아가 울컥했다.

자신은 지금 마음이 닳아 죽겠는데 그는 그저 장난 또는 흥미로움 하나로 자신을 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알았어. 다는 못 해주지만.”

칼리프가 리티아의 손을 가져갔다.

리티아는 내치지 못하고 그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가만히 기다렸다.

또 장난스럽게 웃으며 아무것도 안 해주겠다고 할까 봐.

리티아는 얼른 돌려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녀의 손등에 칼리프의 입술이 닿았다.

자신을 오롯이 쳐다보며 입술을 내리찍는데 리티아는 그 뜨거운 시선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비스듬하게 시선을 피했다.

손등에 진득하게 입을 맞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흐…….”

물어볼 것도 없었다.

리티아가 짧게 흐느끼듯 숨을 들이마셨다.

마치 꽉 막혀 있던 통로가 뚫린 것처럼 성력을 억지로 뿜어내지 않는데도 몸 안에 청량감이 감돌았다.

이번에는 밑바닥에 항상 깔리며 불쾌함을 주었던 찌릿한 감각도 없었다.

이곳에 처음 와서 힘을 익히기 전에도 느끼지 못했던 강한 느낌이었다. 저절로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고작 이렇게 쉽게 풀릴 일인가?

이제 자유로워진 게 맞나? 다 못 해준다고는 했지만 지금 느끼는 건 원래 힘보다도 훨씬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되어도 찾을 일이 없을 것 같긴 한데…….

리티아가 눈을 깜빡이다 말했다.

“……된 거예요? 다 된 거예요? 원래대로 돌아온 거예요?”

“음.”

“무슨 의미예요?”

“바람 방지.”

“……바람 방지?”

그게 뭐지?

“다 풀어주면 쌩하니 도망갈까 봐. 방금 그 비슷한 생각했지?”

리티아가 움찔했다.

그냥 찾을 일이 있나 없나 생각만 했을 뿐이다. 예리하기는.

리티아는 체념했다. 어차피 일주일 내기에서 졌다는 건 그를 찾을 때부터 인정한 사실이었다.

“……내 말에 책임지기로 했잖아요. 좋아요, 당신이 이겼어요.”

리티아가 입을 삐죽였다.

칼리프는 그런 리티아를 다시금 흥미로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말이지?”

“이렇게 날 곤란하게만 하지 않는다면요. 날 곤란하게 하면 당신 말을 들어줄 이유가 없으니까.”

“음, 좋아, 최대한 자중해 볼게. 다른 건 또 뭘 해줄까?”

리티아가 순순히 인정을 하자마자 칼리프는 금방이라도 뭐든 들어줄 것처럼 굴었다. 좀 더 자신을 골리고 놀릴 줄 알았던 리티아는 속으로 의아해했다.

저게 저렇게 좋아할 일인가?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방금 협박처럼 괴롭힐 땐 언제고.

대체 이 남자는 자신이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든 것일까.

서로 똑같은 시간 속에 있었는데.

“아, 그런 대단히 근사한 남자와 하룻밤을 보냈지.” 하면서 넘길 수 있을 정도의 만남이었다. 아마 칼리프도 그랬을 거다. 그는 리티아보다 훨씬 더 여유로웠으니까.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그날 첫 만남이었고 어쨌든 하룻밤까지 이어지긴 했지만 친밀한 관계를 쌓을 시간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하룻밤.

솔직히 칼리프는 근사했다. 리티아의 몸에 적응하면서 정신없는 와중에도 강렬하게 시선을 빼앗겼을 정도로.

게다가 그날 그는 저의 불안함을 해소해 주었고 그동안의 답답함을 풀어주고 즐거움까지 줬었다.

마음이 복잡하지만 않았어도, 리티아의 현재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어도 그날 그렇게 내빼려고 하진 않았을 거다.

행여 더 이어가고 싶어도 리티아는 지금 많은 제약에 묶여 있었다.

몬트 공작은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었다. 사람을 갈아치우는 데도 망설임이 없었다. 그 예로 리티아가 호수에 빠졌던 날. 그날 저택에 경비를 섰던 기사들과 시종 모두 목이 잘려 나갔다고 했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에밀리아만 한 달 근신으로 버텨냈던 것이다.

가차 없이 목을 벴다고 하던데 리티아는 도저히 떠올릴 수도 없고 상상하고도 싶지 않았다.

테니아가 되는 길에 조금이라도 막히는 게 있으면 모두 다 치워 버리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중에서야 지나가며 들었는데 지트와의 연애를 그냥 내버려 둔 것도 어차피 별 영향도 없는 놈이니 나중에 치워 버릴 예정이라 그냥 둔 거라고 했었지.

에밀리아 말로는 리티아가 지트 트레쉬를 걷어찼다는 걸 보고받은 그는 딸이 정말 정신을 차린 것 같다며 좋아했다고 한다.

어쩐지 소문에 예민한 몬트 공작이 벌써 치워도 남았을 녀석을 계속 가만히 둔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럴 가치도 못 느꼈던 건데.

그런데 칼리프는? 성녀의 가장 중요한 조건인 강력한 성력을 틀어쥘 수 있는 남자였다. 무슨 방법을 쓴 건진 모르지만 만약 몬트 공작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가만히 둘까?

애먼 사람을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의심이 들었다.

대체 누구기에 아무렇지 않게 남의 힘을 억누를 수 있을까.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그가 오브 중 하나거나 그런 것은 아닐까.

하지만 원작에서 테오스와 오브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고서는 평생 한 번 마주치기도 힘들다고 했으니, 거기에 나타날 확률이 너무 적은데….

리티아가 알기로는 오브들은 특징이 없었다. 적혀 있지 않았다. 차라리 머리에 뿔이라도 났다고 했으면 알아보기 쉬웠을 텐데.

귀족들이 말하는 불순물, 무법자, 재앙 그리고 그 어딘가 어둠과 불쾌함의 총체.

하지만 칼리프는 그런 단어와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귀족다운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내 힘만 쓸 수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그래서 일부러 계속 냉랭하게 대꾸했다.

칼리프가 리티아의 뺨 언저리에 손을 가져갔다.

리티아는 본능적으로 물러났다.

칼리프는 뺨 대신 그녀의 기다란 은실 같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감싸 쥐었다.

“네가 원하면 언제든 쓸 수 있어.”

“언제든?”

“그리고 난 널 언제든 도와줄 수 있고.”

“왜요?”

“내가 그러기로 했으니까. 그러니 경계심은 좀 내려놓는 게 어때? 그날처럼. 이래선 이긴 것 같지도 않잖아. 음?”

칼리프가 속삭였다.

리티아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드는 궁금증이었다.

“혹시.”

“응?”

“이전에 절 본 적이 있다거나 아니면 오랫동안 봐왔다던가…… 그런 건 아니죠?”

“첫눈에 반했냐의 연장선인가?”

민망해서 얼굴을 붉힌 리티아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프가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을 했다. 리티아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아니. 난 그날 처음 봤는데.”

“그래요?”

“그리고 넌 알고 있을걸.”

“뭘요?”

“내가 관심 갖고 있는 쪽이 누군지.”

“…….”

“대답이 됐어?”

“충분히요.”

“그래서 네 진짜 이름은 아직도 안 알려줄 건가?”

“…….”

리티아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더 엮이고 싶지 않은 이유 또 하나.

그가 리티아의 본 모습을 알고 있는 것같이 말하는 게 싫었다.

그가 뭘 알고 있는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른다. 행여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해도 그렇다고 수긍해 줄 생각도 전혀 없었다.

누구 좋으라고 약점이 잡힌단 말인가.

여러모로 이 남자는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걸 하룻밤이 지나고 나서야 알아버려서 유감이지만. 그래서 칼리프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리티아가 고개를 들었다.

“내 이름은 리티아예요. 다른 이름은 없어요. 그러는 당신은 그게 진짜 이름이 맞아요?”

리티아는 모른 척 못 박았다. 오히려 되물었다. 분명히 귀족 이름 중에 칼리프라는 이름은 없었다. 이름인지 성인지도 모두 찾아봤다. 물론 그가 귀족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연회에 들어오지 못했을 테니까.

“진짜 이름 맞는데. 왜, 뭐라도 찾아봤어?”

“아뇨.”

리티아가 곧바로 받아쳤다.

그러자 칼리프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눈에 이채가 돌았다. 마치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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