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 *
은빛인지 회색인지 알 수 없는 선이 어깨 위에 어지럽게 낙서처럼 그려져 있었다.
처음에는 어딘가 눌린 자국이라고 생각해 거울에 더욱 가까이 몸을 붙였다. 그러나 이건 문양이었다.
어떤 문양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V자로 거미줄이 뻗치듯 나간 것으로 보아 마치 날개를 연상케 했다.
뜨거운 통증이 심해질 때마다 그 문양이 새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어둡게 변하길 반복했다.
“분명히 오늘 아침까지도 없었는데…….”
어깨를 가린 드레스를 입고 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뜬금없이 신탁이 내려온 것도 아닐 테고. 테오스나 테니아 그 무엇이든 문양이 생긴다는 말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대로 사람들 앞에서 어깨를 드러냈다면 그 어떤 의심을 샀을지도 모른다.
대체 이게 뭐지?
손으로 벅벅 지워봐도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의 물을 손수건에 적셔 문질러도 지워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마치 각인처럼 새겨진…….
“각인? 말도 안 돼.”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대체 무엇과 각인?
하지만 불안함에 피어오른 생각은 고개를 치켜들고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룻밤을 보내고 난 뒤부터 느껴지던 이상한 통증.
칼리프의 입술이 닿자마자 가라앉던 느낌.
나오지 않는 성력에 더해진 통증과 이 설명할 수 없는 빛.
아무리 봐도 원인은 그 남자였다.
불안감이, 본능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리티아가 입술을 짓씹었다. 설마 이것 때문에 그렇게 자신 있어 했던 것은 아니었겠지. 만약에 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아무런 힘도 내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만에 하나 진짜 리티아가 아니라고 밝혀지면 그때는?
불안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설마 이번에야말로 죽는 것은 아닐까. 단지 가볍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묵직하게 느껴졌다.
“우선 돌아가서 생각해야겠어.”
아직 회복이 덜 됐다고 말한 게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우선은 돌아가서…….
하지만 리티아는 그대로 문고리를 잡지 못하고 멈춰 섰다.
몬트 공작에게 오늘 일이 보고가 될 것 같은데 뭔가 하지 않으면 가장 먼저 의심을 살 것 같았다.
이대로 돌아가면 몬트 공작은 차치하고 아까 리티아를 도왔던 신관도 의심할 여지가 있었다.
칭송받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정말 위험했다.
그럼 그 남자를 찾는 게 우선인가?
하지만 어떻게?
그가 데려다준 이후 다신 만날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어떻게 그를 만나야 하는지도 묻지 않았다.
왜? 물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호기롭게 일주일을 말했던 것이 무색하게 리티아는 어느새 그를 찾을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걸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남자뿐이었다.
“대체 어떻게 찾지.”
그 연회장에 다시 가봐야 하나?
하지만 남자는 애초에 그 연회장에 들어가지 않고 테라스 밖에서 만났다. 들어갈 일도 없다고 했었다. 그러니 지금 그 연회장 테라스를 찾아간다고 한들 그가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리티아가 다시 입술을 짓씹었다.
칼리프.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이다지도 필요해질 줄이야.
“제발, 제발…….”
리티아가 기도하듯 손을 모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딱 한 번만 멀쩡하다고 확인할 정도만……!
그 순간 물꼬가 트듯 작은 해소감이 느껴졌다.
청량감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하아.”
리티아가 참았던 숨을 토하며 파르르 눈을 떴다.
방금 느낌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며 다시 두 손바닥을 펴 보였다.
빛이 빛을 찾아 모이듯 하얀 빛이 응어리지며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다. 이내 물처럼 흐르며 바닥까지 빛무리가 흐르다가 사라진다.
감전이 된 것처럼 불쾌한 느낌이 여전히 조금 남아 있긴 하지만 방에서 처음 시도했을 때보다는 훨씬 개운한 느낌이었다.
“……됐다.”
우선 이걸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보여야겠다. 다시 힘이 막히기 전에. 그리고 그 후에 그 남자를 찾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리티아는 서둘러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그러고는 다시 아까 사람들이 모였던 그곳으로 향했다.
그 힘이 사라질세라 거의 뛰어오듯 원래 자리로 돌아온 리티아는 자신을 발견하고 다가온 신관에게 가볍게 웃어 보였다.
“휴식을 좀 취하셨습니까?”
“네, 감사해요. 모처럼의 방문이었는데 걱정하셨죠.”
리티아가 다시 축복을 나눠주겠다고 말하자 신관은 조금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흔쾌히 끄덕이며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리티아는 자신 앞에 선 다른 사람을 보며 심호흡을 했다.
“빛의 축복이 깃들길.”
리티아가 축복을 받으러 온 남자의 머리 위에 자신의 성력을 흩뿌렸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그리고 오래.
* * *
기부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리티아는 칼리프를 찾을 방법만 생각했다. 무사히 기부 활동을 마치고 왔다는 소식을 들은 몬트 공작은 다행히 기뻐했지만, 우습게도 집에 돌아온 이후부터 다시 힘이 나오지 않았다.
에밀리아에게 넌지시 그의 인상착의를 말하며 귀족 중에 없는지 물었으나 별 도움을 얻지 못했다.
이번에는 신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지.
제대로 테니아 후보들의 활동이 시작되면 외부에서 기부 활동을 하는 일이 많아진다고 알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일이 이곳 제국 전역을 성스러운 힘으로 점검하며 테오스의 힘을 널리 알리는 일이었다.
제국 테오로스를 이루는 중앙 수도 비스티움을 포함해 동쪽의 테리움, 남쪽의 모리움, 북쪽의 라움, 서쪽의 웨이타스까지.
각자 구역을 나누어 돌아가며 테니아의 후보들이 활약을 펼치는 것이다.
앞으로 테니아가 되면 모두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때 후보들을 위해 차출된 기사들을 ‘테메스’라고 부르는데, 그 기사들과 함께 낙후된 곳을 살피고 마물의 습격을 막으며 아테스의 선택을 받길 바란다.
적어도 리티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는 활약을 펼쳐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꼭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어떻게 만나지?”
* * *
그 후로 리티아는 거의 매일 저녁 열리는 크고 작은 연회에 드나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연회와 파티를 피했던 그녀였기에 가뜩이나 받는 시선의 배를 받았지만 리티아는 찾고 또 찾았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결국 일주일을 코앞에 앞두고 연회에 참석한 리티아는 구석 테라스에 기대 답답함에 중얼거렸다.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방법이 없다. 오죽하면 귀족들의 명단까지 모조리 살폈다. 그가 가르쳐 준 이름은 가명이었는지 칼리프라는 단어조차 안 보였다.
그를 피할 생각만 했지, 이렇게 찾기 어려울 줄은.
달빛은 휘영청.
곧 일주일이 끝나간다.
“제발 나타나, 제발.”
칼리프.
리티아가 테라스 난간에 팔꿈치를 댄 채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이마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단단한 팔이 부드럽게 리티아의 허리를 감싸고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진 것은.
“내가 이겼네.”
얄밉도록 여유로운 목소리가 리티아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나타났다.
안도감이 드는 동시에 리티아가 홱 몸을 돌렸다. 눈에 원망의 빛이 들어차는 찰나 새하얀 손이 칼리프의 멱살을 잡듯 옷깃을 틀어쥐었다.
“왜 이제 나타나요?”
리티아가 비명을 지르듯 물었다.
“내가 너무 늦었어?”
그에 반해 남자는 여유로움 그 자체였다. 나태함까지 느껴지는 그 느긋한 말투에 리티아는 화가 치밀었다.
만약 리티아가 얼마나 피가 마르는 시간을 보냈는지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이런 미소는 지을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리티아는 정말 가슴 졸이는 나날을 보냈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이미 다 알고 있었죠!”
그 하룻밤이 쌍방 동의였던 건 리티아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귀띔을 해줬다면 이렇게 마음 졸이지는 않았을 거다.
행여 들켜서 죽임을 당하면 어쩌나 마음 졸였던 게 생각나 원망부터 쏟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런 리티아의 손을 여유롭게 그러쥔 칼리프가 제 뺨에 그녀의 손을 올렸다. 뜨거운 온기가 리티아의 손등에 퍼졌다.
리티아는 손을 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에 반해 칼리프는 마치 기분이 좋아서 그녀의 원망 따위는 조금도 타격이 없는 사람 같았다.
“미안. 이렇게 화낼 줄은 몰랐네.”
리티아는 그가 왜 기분이 좋은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내기에 이겨서? 아니면 원래 그런 성격이라?
오히려 느긋한 여유로움에 기분이 상할 뿐이었다. 그래도 내심 그가 나타나 다행이었다.
어차피 일주일이 지나면 그가 나타나겠지만 그래도…… 당장 내일 낮에도 성력을 써야 하는데 또 그런 일이 생기면 공작이 의심할 것이 뻔했다. 칼리프가 나타날지 안 나타날지도 사실 미지수였고.
이제 그를 만났으니 힘을 돌려달라고 해야 할 때였다.
리티아가 한숨을 쉬었다.
완전히 힘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뭔가 꾹꾹 눌러놓은 느낌으로 보건대 그가 봉인을 해놓았거나 무슨 조치를 해놓은 게 분명했다. 그걸 칼리프가 풀어주면 되는 것이니 여기서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사이 커튼을 쳐놨으니 누군가 느닷없이 들어오진 않겠지? 리티아는 여전히 그의 옷깃을 꽉 붙잡은 채로 발코니에 누가 오지 않는지 힐끗댔다.
“자리를 옮길까?”
칼리프의 말에 리티아가 고개를 들었다.
리티아가 잠시 고민했다. 오래 걸리는 걸까?
그렇다면 내키는 제안은 아니지만 여기보단 나을 것 같았다.
“오래 비울 수는 없어요.”
“오래 안 걸려.”
리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프가 리티아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순식간에 어두운 기운에 싸이더니 다시 눈을 떴을 땐 눈에 익숙한 공간이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공간을 눈에 다 담았다. 바로 그와 하룻밤을 보냈던 곳이었다.
저번처럼 연회장 근처로 갈 줄 알았는데.
왜 하필 여기인가 했지만 뭐 어쨌든 힘을 돌려받으면 다시 돌아갈 테니까 상관없었다.
리티아가 다시 홱 고개를 돌렸다.
“이제 돌려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