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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8화 (8/70)

8화

* * *

그리고 지금.

리티아로 눈을 뜨게 된 순간부터 칼리프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 경위까지 모조리 떠올린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본능에 충실했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기억나나 보네.”

그녀의 손에 입술이 맞닿은 채로 웅얼거리던 칼리프의 눈매가 야살스럽게 휘었다. 리티아의 얼굴을 포함해 온몸이 한껏 붉어진 탓이었다.

“읏.”

칼리프는 자신의 입을 막은 손을 떼며 손바닥의 도톰한 살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리티아의 손에 기대듯 제 뺨을 가져다 대며 고개를 기울였다.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오히려 막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의 태도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녀를 언제든 삼켜 버리겠다는 탐욕마저 느껴졌다.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여전히 목은 까끌거리고 제 몸이 제 몸이 아닌 것 같았다. 거기다 기억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정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제 팔 사이에 자신을 가둬놓은 남자가 쉬이 놔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

리티아가 살짝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올리자 또다시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어쩐지 온몸이 저릿저릿한 느낌이었다. 온 신경이 그의 시선 하나에 반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그대로 가려고?”

“…….”

“약속도 안 지키고? 나 버리고 가겠다는 건 아니지? 어제랑 말이 다르잖아. 그리고…….”

옷 다 찢어졌을 텐데.

칼리프의 중얼거림에 리티아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팩 고개를 돌려 옷을 찾았다. 드레스는 없고 어젯밤까지 옷이었던 천 조각이 여기저기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걸칠 수도 없이 조각조각 난.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아.”

다 찢어진 저걸 입고 가느니 차라리 시트를 둘러매고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일어나려고 해도 그의 체격이 워낙 큰 탓에 그를 밀어내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간밤이야 술에 잔뜩 취해 맞닿았다고 해도 지금은 너무나도 적나라한 상태였다. 서로가 아무것도 입지 않은. 그야말로 헐벗은.

결국 부끄러움을 참지 못한 리티아가 꾹 눈을 감으며 말했다.

“……당장 안 갈 테니까. 잘 알아들었으니까 우선 좀 비켜줄래요? 너무, 가까운데. 오, 옷부터 입고 대화를 해요. 멀쩡히, 제대로.”

같이 뒹굴었는데 멀쩡한 건 그뿐인 것 같아 울컥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래봤자 그의 팔 안에 갇히다시피 해 모양은 빠졌지만.

“응, 그럴게. 분부대로.”

짓눌렀던 무게가 사라지고 리티아는 서둘러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천으로 몸을 둘둘 감은 채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서자마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아.”

리티아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도저히 후들거려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한껏 도도하게 굴려던 리티아는 귀까지 빨개진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굳어버렸다.

“미안. 도와줄 걸 그랬네.”

흠칫거리며 굳어버린 작은 어깨를 본 칼리프가 나직하게 웃었다. 그가 저를 안아 침대로 다시 옮겨주는데도 리티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릴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 치워봐.”

“싫어요.”

“얼굴 보게 해줘.”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변할 수 있지?

어제 처음 본 그는 위험할 정도로 매혹적인 남자였다. 그는 대화를 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우위를 선점하고 있었고 리티아는 마치 본능처럼 그걸 인정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취하기 전부터. 그런데 지금은 애원에 가까운 부탁에, 무척이나 친절하고 친밀한 행동을 하고 있다.

모든 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원래 그런 건가?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뭘 해봤어야 알지!

리티아는 스스로에게 건네는 비명에 속이 시끄러웠다.

무척 정중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준 그가 말했다.

“그래서 어디 가려고 했는데?”

“……집에.”

그러자 남자가 눈썹을 비뚜름히 치켜떴다.

“아직도 네 이름 안 알려줬잖아. 돌아가고 싶어?”

“…….”

“알려주면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줄게.”

아이에게 사탕을 주며 달래듯 유혹적인 말에 리티아의 입이 바짝 말랐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어봤었던 것 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술김에 일을 저지른 와중에도 그것만은 착실히 지켰던 모양이다. 그냥 알려주고 가버릴까. 어차피 워낙 유명하니 이름을 숨겨봤자일 거다.

“……리티아.”

그러자 칼리프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니, 그거 말고.”

“그럼?”

여전히 천으로 몸을 가린 채 리티아는 모른 척 그에게 물었다.

“진짜 네 이름.”

리티아는 입을 딱 다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이 몸의 원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건 나밖에 모르는 사실인데.’

심지어 얼마 되지도 않아 들킬 일도 없었는데. 그러고 보면 어제부터 질문이 이상하긴 했었다.

리티아가 침묵을 유지해도 그는 여전히 흥미로운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리기라도 한 걸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리티아는 모른 척 대꾸했다.

그가 리티아를 찬찬히 살피더니 픽 가볍게 웃음 지었다.

“뭐 그래. 앞으로 차차 알아가면 되니까.”

앞으로라니. 양심이 좀 찔렸지만 리티아는 굳이 이 하룻밤 인연을 더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 물론 먼저 덮친 게 자신이라는 건 또렷하게 기억이 나긴 했지만 이런 대형 사고를 더 크게 키워 이어갈 생각은 없었다.

리티아가 그를 막듯 중얼거렸다.

“……저기, 미안하지만 어제 일은 없던 걸로 해주겠어요? 물론 어제 도와주고 좋은 풍경을 구경시켜 주고 또 술친구가 되어줬던 건 고마웠어요. 변명이지만 어젠 제가 좀 답답한 게 많이 쌓여 있던 상태라……. 아마 앞으로 볼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리티아는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허리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어서 빨리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리가 아직도 후들거렸다.

칼리프는 그 모습이 불안해 보였는지 곧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받쳐주더니 다시 침대에 앉혔다.

“다치겠다. 어제 내가 그렇게 별로였나? 아닐 텐데.”

그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말투로 물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어차피 우린 어제 처음 본 사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럼 계속 만나.”

“……싫다면요?”

“왜? 어제는 다 감당하겠다면서. 난 그러고 싶은데.”

“그……건, 그건 어제 취, 취해서 그런 거죠, 술김에. 나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요.”

“아아, 술김에.”

“네……. 그런데 왜 자꾸 그쪽만 반말을 하죠?”

아까부터 계속 남자는 반말이었다. 아니, 실은 어제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아무래도 말투 때문에 자신이 자꾸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에 분하기까지 하려고 했다.

“푸핫! 억울하면 너도 하면 되지. 어젠 곧잘 했잖아.”

남자가 웃음을 터트리며 단박에 허탈한 답을 내놓았다.

리티아는 그게 더 분해서 입을 삐죽이며 그를 노려봤다.

그의 진득한 시선을 계속 받고 있으니 다시 왼쪽 어깨 통증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파.”

대체 왜 이렇게 어깨가 아픈 거지?

결국 통증에 리티아가 눈을 찌푸렸다.

“버틸까 궁금했는데.”

그가 고개를 숙여 리티아의 어깨에 입술을 맞추며 말했다. 남자의 손이 어깨를 부드럽게 쓸었다. 따뜻한 온기가 퍼졌다.

“뭐라고? 뭘 버텨요?”

“그럼 이렇게 할까?”

“……?”

리티아가 대답 대신 한껏 경계했다.

“어차피 너는 다시 날 찾게 될 거야.”

내가 필요할 테니까.

통증이 사그라들며 그의 덫 같은 시선이 다시 리티아를 향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어제 그랬잖아. 돌이킬 수 없을 거라고. 네가 감당하겠다고 말이야.”

“…….”

알고 있다. 그 말에 상관없다고 대답도 했었다.

리티아는 혀를 깨물고 싶었다.

“네가 날 찾지 않으면 없던 일로 해줄게.”

“정말로?”

지금까지 보내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과 다르게 그가 내민 조건은 허무할 정도로 쉬웠다. 리티아는 애초에 찾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그가 먼저 말을 꺼내주기까지 했다.

“대신.”

“대신?”

“네가 날 찾으면.”

리티아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때부터는 네 말에 책임을 져야지.”

책임을 지라. 자신을 감당하라는 소리였다.

리티아가 잠시 고민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이기는 게임 같은데…….

“언제까지요?”

“언제까지 할까. 하루라고 할 거면 내가 정하고.”

하루라고 하면 지금 제안을 없던 일로 할 것 같고 너무 길면 리티아 자신이 손해를 볼 것 같았다.

“……조, 좋아요. 일주일.”

“일주일?”

“네, 일주일.”

“뭐, 좋아. 일주일. 네가 날 찾으면 내가 이기는 거야.”

“그때까지 안 찾으면 내가 이기는 거고요. 그럼 이제 날 데려다줘요.”

그런데도 여유를 잃지 않고 웃는 모습에 리티아는 심기가 거슬렸다.

“그 전에.”

“또 뭘요?”

“내 이름.”

“…….”

리티아는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날 불러봐, 다시. 날 찾으려면 이름 정도는 기억해야 하잖아. 그렇지?”

그럼 데려다줄게.

칼리프가 살살 리티아를 달랬다.

고민하던 리티아의 입이 조금 뒤 천천히 벌어졌다.

“……칼리프.”

그의 미소가 아찔하게 번졌다.

* * *

그렇게 됐었던 거다.

그의 말대로 무사히 집에 돌아왔고 신기하게도 아버지인 몬트 공작은 리티아가 중간에 사라져 버렸단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대체 얼마나 어마어마한 마법사길래.

아, 그러고 보니 이곳에도 마법사가 있던가? 빛의 힘도 있고 어둠의 힘도 있고 성녀도 있으니 당연히 마법사도 있겠거니 여겼다. 만약 없다면 찜찜해지는데…. 아무래도 먼저 이곳 생태를 확실하게 알아두는 편이 좋겠다.

다행히 어제 일은 문제없이 지나간 것 같으니 앞으로만 더욱 조심하면 될 것이다.

어제 일은 과거로 묻기로 하고.

리티아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달칵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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