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 * *
“저거 나 찾는 소리예요.”
“누군데?”
“……전 애인?”
“지금은?”
“지금은 아니에요. 사실 알지도 못하는데…….”
“전 애인인데?”
“그, 그러게요.”
리티아가 그렇게 말하며 남자 뒤에 슬쩍 숨었다.
칼리프가 옆으로 슬쩍 물러났다. 그러자 리티아도 덩달아 옆으로 비켜났다.
“…….”
그렇게 몇 번 더.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리티아가 뒤에서 옷을 꼭 잡고 따라다니자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절박해?”
“그건…… 아니지만. 곤란한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
칼리프의 물음에 리티아가 입을 삐죽였다. 그가 자신을 골리는 거라고 생각한 탓이다.
“어차피 여기 안 와.”
“왜요?”
“내가 그렇게 했으니까.”
그러자 뒤에 숨어 있던 리티아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벽에 달린 등불에 리티아의 얼굴이 좀 더 밝게 빛이 났다.
남자는 그런 리티아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봤다.
“정말 마법을 부려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의 말대로인지 아니면 지트가 이곳에 관심이 없었는지 몰라도, 리티아가 한참 숨어 있었는데도 그는 이곳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목소리가 멀어지더니 아예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안도와 동시에 리티아는 어차피 다시 들어가야 한다는 현실이 와닿았다.
뭐 그래도 제일 거추장스러운 걸 떨어뜨렸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려나.
리티아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 몸에서 눈을 뜬 이후 가장 많이 하는 일이 한숨을 쉬는 일 같았다.
“또 도움이 필요한 얼굴인데.”
리티아가 그를 올려다봤다.
워낙 키가 커서 고개가 아픈데 또 음영 진 얼굴이 기가 막혔다.
“맞는데, 이건 아무도 못 도와줘요.”
“…….”
어떻게 도와주겠어. 지금은 몬트 공작의 비위를 절대 거슬리게 해선 안 되는데.
리티아가 밝게 미소 지었다. 도와준 신사님과는 헤어질 시간이다.
“방금 도와준 건 고마웠어요. 이름 물어봐도 돼요? 음, 또 만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오늘 일은 잊지 않을게요.”
“…….”
그런데 답이 없다.
리티아는 더 지체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커튼을 힐끗 보고 말했다.
“말해주기 싫으면 말 안 해줘도 돼요. 얼굴 기억했으니까 다음에 만나면 꼭 사례할게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리티아가 다시 커튼 쪽으로 가 머뭇거릴 때까지도 남자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칼리프.”
한숨을 다시 푹 내쉬고 커튼을 걷으려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리티아가 홱 고개를 돌렸다.
“네?”
“칼리프라고.”
“아.”
이름.
리티아가 싱긋 웃었다. 붉은 입술이 몇 번 더 이름을 중얼거렸다.
“꼭 기억할게요.”
그런데 그 순간 칼리프가 커튼을 쥐고 있는 리티아의 오른 손등 위를 감싸듯 맞잡았다.
리티아의 얼굴에 물음이 생김과 동시에 그가 입을 열었다.
“안 가도 문제없게 도와줄까?”
리티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왜 자신의 손을 잡았냐는 물음보다 다른 물음이 먼저 나갔다.
“어떻게요?”
“나랑 놀아주면.”
“놀아주면?”
“문제없이 여기 있다가 집에 돌아간 걸로 저들에게 환각이라도 걸어줄게.”
“그게 가능해요?”
“응.”
취기는 아까보다 더해졌지만 그 와중에도 의문이 들었다.
왜 이 남자는 자신을 도와주는 걸까? 단순한 호의인 걸까? 결국 생각을 넘어 입으로 흘러나왔다.
“……왜 자꾸 도와줘요?”
리티아는 완전히 그에게로 몸을 돌린 상태였다. 덕분에 그와 고개만 숙이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마도 나른하고 여유로운 미소 때문인 것 같았다.
“좀 전에 네가 도와달라며.”
“방금 건 아니었는데.”
“그러네.”
그가 다시금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다.
리티아의 심장이 쿵 하고 요동쳤다.
“혹시…….”
“음?”
칼리프가 리티아에게 맞추어 허리를 숙여주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저한테 한눈에 반하기라도 했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호의적일 리 없다.
“하하.”
칼리프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시원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웃음에 리티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네가 궁금하긴 해.”
“내가?”
“응. 어떻게 할래?”
그의 눈이 커튼 안으로 다시 들어갈래 아니면 잠깐 나와 놀래? 라고 짓궂게 묻고 있었다.
고혹적이고 우아한 생김새와 다르게 말투는 제법 익살스럽게 느껴졌지만 리티아의 고민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정말…… 문제없이 돌아간 걸로 해줄 수 있는 거 맞죠?”
황태자와 만나면 무슨 이야기가 오갈지 모르니 조금 더 미루고 싶었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다.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면 더욱 간절했다.
리티아의 고민을 알아주듯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내 손 잡아.”
리티아가 조심스럽게 칼리프가 내민 손을 잡았다. 동시에 그녀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감싸는 순간 태풍처럼 바람이 휘몰아쳤다.
리티아는 본능처럼 그의 품 안에 얼굴을 묻었다.
* * *
“와.”
칼리프가 데려다준 곳은 연회장에서 멀지 않은 첨탑 꼭대기였다. 등불들이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높아 마치 별을 뿌려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탄산을 쏟아부은 것처럼 속이 확 트였다.
리티아는 잠시 눈을 감고 그 쾌감을 느꼈다. 진짜 리티아는 모르겠지만 유지민은 처음 느껴보는 느낌, 광경이었기에.
평생 병을 달고 산 것도 모자라 스무 살을 기점으로 병원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그러다 생을 마감하고 리티아의 몸에서 눈을 뜬 뒤에도 줄곧 갇혀 있었으니 그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답답함이 조금은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자유로움일까.
그럼 이 남자는 뭘까.
누구기에 자신을 도와준 걸까.
아리송한 질문을 자신에게 하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가 은인임이 틀림없었다. 리티아가 칼리프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여기서 마셨어야 됐는데, 아깝다.”
리티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질 좋은 포도주를 이곳에서 마셨어야 진가를 발휘하는데.
아쉬움에 갈증이 났다.
칼리프가 뭔가 내밀었다.
그가 만들어내기라도 한 건지 그의 손에는 포도주 잔이 들려 있었다. 짙은 포도주가 찰랑였다.
리티아의 눈이 또 한 번 동그래졌다. 한 번도 정확하게 대답해 주지 않았지만 그는 마법사인 게 분명했다.
“고마워요.”
적당히, 적당히 마셔야지.
그러나 그 결심이 무색하게 한 모금씩을 아끼듯 마셨더니 도리어 감질난 느낌이 들었다. 해서 리티아는 조금 과감해지기로 했다. 그간에 쌓인 결박감이 리티아의 이성을 넘어섰다.
평생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겪었으니 오늘 정도는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겠다고. 그 생각과 함께 벌컥 마신 술에 취기가 더욱 강해졌다.
결국 고삐가 풀렸다.
한 잔 더. 한 잔 더, 그리고 한 잔 더.
기분이 풍선처럼 부푼 리티아는 칼리프에게 요구가 많아졌다. 포도주가 찰랑이며 손목을 적셔도 리티아는 기분이 좋기만 했다.
“그쪽 좀 많이 근사한 것 같아요.”
“내가?”
“네, 특히 얼굴…… 아, 목소리도. 근데 나한테 뭐가 궁금했어요? 그래서 날 도와준 거잖아요.”
리티아의 혀가 어느새 어눌해졌다.
“지금은 제대로 대답 안 해줄 것 같은데.”
“왜요? 해줄게요.”
어느새 리티아의 웃음도 헤퍼졌다.
“그럼 네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말해줘.”
“이곳에?”
리티아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생각을 하는 듯 행동이 잠잠해졌다. 미약하게 몸을 휘청이다 붉은 입술이 열렸다.
“마차 타고?”
“그거 말고.”
“으음…… 몰라.”
“그럴 것 같더라니.”
칼리프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리티아가 따라 하듯 배시시 웃었다.
“내가.”
“음?”
“이런 느낌을 느낀 게 처음이라서 그래요. 처음이라서. 자유로운 게 처음이라서.”
잔으로 혀를 빼꼼 내밀어 물방울처럼 아쉽게 떨어지는 포도주를 받아먹은 리티아가 말했다. 더 달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상태가 영 처음 같지 않은 걸 느낀 칼리프가 더는 내주지 않은 탓이었다.
흡사 행동은 애주가 또는 중독자의 모습과 비슷했으나 리티아의 청초한 외모 탓인지 그마저도 우아해 보였다.
리티아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빈 잔 속을 노려봤다.
“처음?”
“늘…… 누워 있었으니까.”
한참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느라 중얼거린 리티아가 이제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자신과 놀자는 말에 그러겠다고 하고 따라오더니 혼자 취해 꾸벅꾸벅 조는 모습에 칼리프가 고개를 저었다.
이걸 예상하고 데려온 건 아니었는데. 뭐 그녀의 존재 자체에 흥미를 느꼈던 건 사실이니 조금 더 두고 보기로 했다.
본래라면 본능적으로 자신을 피해야 하는데 그런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기에 더욱 흥미가 일었다.
지금껏 처음 보는 존재.
이방인인가.
그사이 리티아는 아예 잠이 들었는지 그의 곁에 기댄 채로 조용해졌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다시 눈을 뜬 리티아의 맑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취기에 잠식된 리티아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고 맑았다.
“칼리프.”
“…….”
대답이 없자 리티아가 두 손으로 칼리프의 뺨을 과감히 감쌌다. 그러고는 대답을 종용하듯 눈을 부릅떴다.
“칼리프.”
“응.”
칼리프는 황당했지만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예뻐.”
당신 되게 예쁘다.
리티아가 히죽 웃었다.
덩달아 칼리프의 입에서도 바람이 픽 샜다.
“그래서 마음에 들어?”
“응, 사실 마음에 들어서 따라온 거예요. 난 예쁜 사람이 좋거든.”
“내가 위험한 놈이면.”
그 말에 리티아가 갸웃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닐걸.”
고개를 젓다 리티아가 휘청하자 칼리프의 손이 곧바로 나갔다.
“거봐요. 안 위험해.”
리티아의 웃음이 짙어졌다. 이제는 아예 칼리프의 양어깨를 지지대 삼아 쥐었다. 그리고 이내 얼굴이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칼리프의 이마에 촉 입술을 맞대고 떨어졌다.
처음으로 칼리프의 여유로운 표정이 평정을 잃었다.
“고마워요. 아무것도 안 가져와서 줄 게 없어.”
리티아가 헤헤 하고 웃는데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그 순간 스파크가 튀었다.
Chapter2. 위험한 남자와 사고를 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