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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6화 (6/70)

6화

* * *

몬트 공작은 원작에서 그랬듯 리티아가 테니아로 뽑히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리티아가 태어났을 때부터 당연시해 왔고, 그럼 알아서 황실에 버금가는 또는 웃도는 권력을 쥐게 될 테니까.

이 제국의 권력 구조가 그렇다.

그러니 그의 최종 목표는 리티아를 결혼시키지 않고 오로지 고결한 테니아로서 살아가게 하고 역사에 길이 남게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과거 결혼을 한 테니아 중에 아이를 낳고 성력이 약해진 경우가 있으니, 그 작은 위험조차 차단하고 싶은 것일 터다.

그럼에도 그가 황태자비 자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건 리티아가 만에 하나 테니아가 되지 않을 때를 위한 경우의 수라고 보면 되겠지.

사실 리티아는 그 어느 쪽이든 싫었다.

테니아나 황태자비나 누구든 쥐고 싶어 하는 자리고 권력이지만 황태자비는 테니아와 달리 평생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되고 싶지도 않았다.

‘뭐가 이래.’

몬트 공작이 말하는 뉘앙스로 볼 때 황태자는 호감을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집에 돌아가게 되면 그 신탁이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무런 준비도 안 되어 있고 기억까지 잃었다고 하는 저에게 당장 신탁이 내려와 성녀 자리에 오르라고 할 것 같진 않으니 말이다.

만약 그런 거라면 몬트 공작이 좀 더 서두르고 급하게 굴 것 같은데 오히려 여유로워 보였다.

“정말 부럽습니다, 공작 각하.”

진갈색 머리를 한쪽으로 깔끔하게 넘긴 중년의 남자가 예를 갖춰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오, 시오레 백작.”

기억을 잃은 리티아의 실수를 막기 위해 몬트 공작은 인사를 받을 때마다 일부러 가문의 이름을 넣어 말했다. 그러면 리티아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했다.

시오레 백작이 몬트 공작에게 좀 더 가까이 굽히며 말했다.

“잘 나오셨습니다, 각하. 다들 헛소문만 믿고 떠들더니 꿀이라도 입에 넣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잖습니까? 이렇게 두 분께서 사이가 좋으신 것을.”

“…….”

“저는 역시 헛소문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지요!”

몬트 공작의 눈매에 약간의 노기가 서렸다, 이내 허허 웃었다.

“누가 헛소리를 하거든 현명한 그대가 본 것을 그대로 전해주길 바라네. 아무리 떠들어도 자리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걸 본인들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시오레 백작은 두 손이 닳을 듯 몬트 공작의 비위를 맞추며 연신 하하 웃었다.

리티아는 또 반복되는 따분한 대화에 시간이 어서 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거기다 틈만 나면 잘 보이려는 영식들은 왜 이렇게 많은지. 괜찮으냐, 에스코트를 해주겠다 이 말만 수십 번을 들으니 이제는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몬트 공작에게 붙들려 시달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처음 눈을 떴던 날보다 어째 골이 더 아팠다.

* * *

그렇게 한 시간을 더 시달린 리티아는 잠시 테라스로 나올 수 있었다. 다시 들어가면 이번에는 황태자를 마주할 것 같은데. 그럼 또 몬트 공작이 무슨 소리를 지껄일지, 생각만 해도 무척 피곤할 것 같았다.

“하아.”

리티아는 남들이 오지 못하게 커튼까지 쳐놓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한 손에는 포도주 잔이 들려 있었다.

이미 안쪽에서도 인사 겸 잔을 받아 몇 번 홀짝인 참이었다.

리티아는 새로 받아온 포도주를 단숨에 비웠다.

“아, 좋다!”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잔을 한쪽에 치우려는데 지척에서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커튼이 쳐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빈 테라스인 줄 알았던 리티아가 화들짝 놀라 잔을 놓쳤다.

바닥에 떨어진 유리잔의 파편이 튈 거란 생각에 리티아가 몸을 피하며 눈을 감았다.

“……?”

그런데 이미 깨질 때가 됐는데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리티아가 조심스럽게 눈을 뜨니 난간에 포도주 잔이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어, 어떻게?”

“고마워?”

또 소리가 들렸다.

리티아가 휙휙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피고 커튼까지 건드렸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예요?”

“커튼 뒤 유령.”

웃음기 묻은 목소리가 들렸다.

거짓말이었다. 방금 리티아가 커튼 뒤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는데.

“거짓말.”

“아닌데.”

리티아는 더 찾아보려다 빠르게 포기했다. 있을 법한 곳은 다 찾았는데 안 보인다.

천장에 숨었거나 난간 아래 매달려 있는 건 아니겠지.

거기다 이미 여기 오기 바로 전에 못해도 독한 포도주 한 잔 반 정도는 마신 상태였고 방금 한 잔을 그대로 비워 슬슬 취기가 돌고 있어 찾기가 귀찮아졌다.

“그래요. 먼저 온 손님이었다면 미안해요. 내가 다른 테라스를 찾을게요.”

리티아가 다시 잔을 들고 나가려는데 또 목소리가 들렸다.

“방해 안 할게. 그냥 거기 있어.”

“정말요?”

“다른 사람이 오지도 않게 해줄까?”

그 말에 리티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마법사라도 돼요?”

“비슷한가?”

얼굴도 안 보이는 사람인데 대화를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웃겼지만 리티아는 이상하게도 그다지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여기서 잠시만 쉬다 갈게요. 안은 좀 답답하거든요.”

“연회는 따분하지.”

그 말에 리티아가 작게 웃었다.

허공에다 말하는 것도 웃긴데 대화가 되는 것도 웃겼다.

“그쪽도 싫어해요?”

“즐기는 편은 아니지.”

“하긴. 숨어 있는 거만 봐도 알 것 같아요.”

남자가 다시 큭큭 웃었다. 여전히 남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안에서 어떻게든 제게 잘 보이려 했던 사람들이랑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자 훨씬 마음이 편해졌다.

적어도 들러붙으며 귀찮게 하지는 않으니까. 아니면 그녀를 다치지 않게 도와줘서일지도 모른다. 물론 놀라게 한 건 남자였지만.

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또 어울리지 못하고 동떨어진 공녀 취급을 받았을 텐데 말이다. 얼굴도 모르고 어디에서 말을 거는 건지도 모르지만 작은 호감을 느꼈다.

거기다 오히려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자신이 못 보니 상대방도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편히 말을 걸고 있는 건 리티아였다.

“그쪽은 언제 들어갈 거예요? 저는 곧 다시 들어가야 해요.”

“난 안 들어갈 예정인데.”

“……부럽다.”

리티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너도 안 들어가면 되잖아.”

“그러고 싶은데 날 찾는 사람이 많아서요. 어차피 안 가도 찾으러 올 거고.”

리티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 웃거나 대답을 하던 남자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따분해서 가버렸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줄까?”

“……뭘요?”

“들어가기 싫다며.”

대체 뭘 도와준다는 거지?

리티아가 난간에 기대다시피 했던 몸을 세웠다. 목소리가 들리는 근원지를 찾기 위해 까치발을 들고 위, 아래 그리고 좌우를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사람이 매달릴 수 없는 벽 그리고 등을 매달아 놓은 천장만 보일 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 말을 하는 거예요?”

“궁금해?”

“뭐 그렇게 궁금하진 않은데.”

리티아가 말끝을 흐리는 순간 난간에 탓- 하고 구두 굽 닿는 소리가 났다.

“……위?”

리티아가 놀라며 고개를 드는데 마치 계단 하나를 내려오듯 난간 아래로 내려온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안녕.”

키가 커서 커튼에 등이 닿을 정도로 몇 걸음이나 뒷걸음질을 쳐야 한눈에 들어오는 남자였다. 얼떨결에 마주 보고 인사한 리티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 설마 위에 앉아 있었어요?”

“서 있었는데.”

“그거나 그거나요. 정말 커튼 뒤에 숨어 있던 게 아니었다니.”

“네가 커튼은 살펴봤잖아.”

“제대로 안 봤다고 생각했죠.”

짧은 실랑이 끝에 리티아는 남자의 모습을 비로소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과 눈 때문인지 아니면 새카만 밤 풍경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가 입고 있는 옷도 모두 검은색이라서인지 신비하다 못해 오싹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 모두가 아니라면 비정상적으로 고혹적인 외모 때문일지도 몰랐다.

마치 유약을 바르기 전 도자기처럼 매끈하고 하얀 피부가 대조되어 더욱 그렇게 보이기도 했다.

“…….”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봐.”

피식 터지는 웃음소리에 리티아가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보진 않았…….”

“마음에 들어?”

“아뇨.”

리티아가 고개를 저으면서까지 단호하게 말하자 남자가 또 쿡쿡 웃는다.

인사를 해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익히고 책에 나왔던 대로의 묘사와 맞춰보느라 계속 사람들의 얼굴을 의식하며 살폈는데 연회장에서 결코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봤다면 아마 각인처럼 기억했을 테지.

아무리 술기운이 있다고 한들 못 알아볼 얼굴이 아니었다. 지금 막 연회장에 왔거나 정말 연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저 위에 숨어 있던 걸지도.

“정말 신기하네.”

“뭐가요?”

남자가 리티아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채로 흥미로운 듯이 이목구비 하나하나. 아니 속눈썹 한 올까지도 살펴지는 것 같았다. 민망해질 정도의 집요한 눈길에 리티아가 조금 불쾌한 티를 내자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산뜻하게 고개를 들며 난간 쪽으로 좀 더 물러났다.

“여기 있어야 하는 거 맞아?”

“저요?”

“숨기는 건지, 모르는 거면 됐고.”

“대체 무슨 말…….”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남자에게 리티아가 계속 되물었다.

실은 찔리는 구석도 있었다. 혹시나 자신이 리티아의 몸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채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리티아는 황태자 외에 친구가 없다시피 했다지만 혹시 친구인 것은 아닐까 하는 별생각이 다 들었다.

“몬트 공녀 못 보셨습니까?”

그때 커튼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잊었을 리가. 아까 전에 리티아의 팔목을 억지로 잡아채던 것도 모자라 소리치던 지트 트레쉬였다.

연회장을 나간 줄 알았더니 아직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리타아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커튼과 남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아…….”

아까 그렇게 다신 나타나지 말라고 했건만. 지금 나가면 얼마나 귀찮게 할지 눈에 보였다.

“이리로 갔다는데. 대체 왜 안 보이는 거야.”

지트의 목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저기.”

“응?”

“정말 미안한데 그쪽 뒤에 잠시 숨어도 돼요?”

지트 트레쉬나 이 이름 모를 잘생긴 남자나 오늘 처음 본 건 매한가지였다. 그렇지만 굳이 고르자면 좀 전에 자신을 도와준 이 남자를 택하는 게 나았다.

술에 용기가 불어났나. 워낙에 어깨가 넓고 키가 커서 뒤에 잘 숨으면 아무도 못 보게 잘 숨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숨겨달라고?”

남자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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