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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5화 (5/70)

5화

* * *

연회는 한창이었다.

아테온 홀에 모인 귀족들은 쉼 없이 몬트 공작과 리티아의 오빠 엘라르 바젠티 그리고 리티아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

“리티아.”

인사가 잠시 끊긴 사이 고개를 돌려 숨을 돌리는데 엘라르가 불렀다.

리티아는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들었다.

나이 차가 5살도 넘게 나는 남매 사이인데 은색의 장발에 푸른 눈까지 똑같아 마주 보고 있으면 쌍둥이처럼 보여지곤 했다.

“응?”

“힘들면 쉬어도 돼. 휴게실에 데려다줄까?”

그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는 몬트 공작과는 다르게 진심이 가득했다.

리티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오빠. 아직은 버틸 만해.”

호수에 빠져 자살 시도를 했다는 소문이 벌써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멀쩡히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억지로 끌려 나오다시피 한 상태라 엘라르는 다소 화가 난 상태였다.

“넌 항상 괜찮다고 하니까…….”

“응?”

“후… 아니야. 그럼 잠깐이라도 바람이라도 쐬러 갈까?”

몬트 공작을 슬쩍 보니 그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반은 리티아의 자랑이었다.

리티아는 역시나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저기 영애들이 오빠랑 말할 기회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신경 좀 써야 하지 않을까?”

엘라르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괜찮…….”

“내가 안 괜찮아, 오빠.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조금 쉬다 올게.”

리티아가 계속 괜찮다고 하자 엘라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몬트 공작의 충실한 자랑거리가 되기 위해 이곳에 오게 된 리티아는 사실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온통 모르는 사람투성이에다 눈만 마주치면 말을 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결국 리티아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빠르게 휴게실로 향했다. 가면서도 사람들이 장애물처럼 걸려 휴게실로 향하는 복도로 나오는 데만 해도 십수 분이 걸렸다. 가까스로 복도로 나온 리티아는 호위의 안내를 받아 휴게실로 향했다.

“티아!”

혼자 있고 싶어 걸음을 서두르는데 누군가 그녀를 부르며 빠르게 다가왔다. 호위가 그 앞을 막았다. 리티아가 괜찮다며 손짓하자마자 그 남자가 그녀의 팔을 강하게 잡아챘다.

리티아의 팔을 잡은 남자는 귀까지 오는 단발에 가까운 구불거리는 노란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온갖 치장은 다 한 옷차림에 얼굴은 이목구비가 짙어 리티아의 생각보다 좀 더 화려했고 매부리코 때문인지 누가 봐도 까탈스러운 성격을 갖고 있을 것 같은 생김새였다.

“아.”

리티아는 통증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 편지 못 받았어?”

거기다 건방진 말투까지. 오만함 그 자체였다. 그 말에 리티아는 남자가 잡은 팔을 거칠게 쳐내며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리티아는 이 남자를 알고 있었다. 일기장에서도 잠깐 보았고 그녀가 읽었던 소설의 한 부분에도 얼굴 하나 믿고 아랫도리를 가볍게 휘두르는 애인이 있었다고 했었다. 그 때문에 리티아가 더욱 외롭고 고독함을 느꼈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딱 봐도 자기 치장하기 좋아하고 화려함을 즐기는 부류였다. 남을 아끼기보다는 자신이 먼저고 전혀 믿음직스럽지 못한.

지트 트레쉬.

이 몸의 애인을 자처하는 남자. 이제는 아닐 예정이지만.

팔이 금방 붉게 변했다. 그 잠깐 사이 강하게도 잡았다.

“받았어.”

“그런데 왜 연락이 없는데. 감히 날 기다리게 해?”

그의 얼굴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리티아의 소문을 모르진 않을 텐데 걱정과 안부 대신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해 보였다.

한 달이나 연락이 없었으면 한 번쯤은 찾아와야 하는 거 아니야? 한 달 동안 편지 하나 띡 보내놓고 기다린 주제에 화를 내니 어이가 없었다.

대체 왜 이런 쓰레기의 고백을 받아준 걸까. 딱 봐도 거절을 하지 못해 어영부영 커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일기장에서도 그랬으니까.

“죽었다 살아났단 소리 못 들었니.”

리티아의 냉랭한 음성에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지트의 표정이 뜨끔했다.

한 걸음 물러나 리티아를 위아래로 살펴보기까지 했다.

“……아니, 멀쩡하길래. 그리고 너 왜 말투가…….”

리티아가 코웃음을 쳤다. 본래 이 몸의 주인인 리티아였다면 벌벌 떨며 미안하다 사과했겠지만. 그녀는 이미 죽고 없다는 사실은 이 몸의 새로운 주인이 된 지민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 어차피 오늘 끝날 사이인데 누구에게나 존칭을 썼다는 리티아의 말투 따위야.

“이제라도 알았다면 비켜주실래요?”

“대체 연락은 왜 안 했냐고! 깨어났으면 연락할 수 있었잖아.”

“제가 왜요?”

“뭐?”

지트가 기가 막히다는 듯 리티아를 쳐다봤다.

“할 필요가 없으니까 안 했겠죠. 죽다 살아났더니 진짜 날 위해주는 사람이 누군지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연락할 필요를 못 느꼈어요.”

“미리 알았다면 나도 찾아갔을 거야!”

지트가 위협하듯 가까이 다가오며 소리쳤다.

“그런데 몰랐다고요?”

“그, 그래.”

“동네방네 다 아는데 당신만 몰랐다라, 우습네요. 잘됐어요, 안 그래도 찾아가서 말할까 했는데.”

“뭘? 연락이 늦었단 사과를 하려면 지금 해. 나도 네 사정을 다 몰랐으니 이해하고 받아줄 테니까.”

기가 찬 말에 리티아기 싱긋 웃었다.

“이해해 줄 필요 없어. 너 따위가 뭐라고 이해를 하니 마니 말을 해? 그쪽과 나는 오늘로써 끝이야. 그러니까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날 소중히 하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필요 없으니까.”

그러고는 지트가 다시 그녀를 잡기 전에 호위에게 그를 막으라 명령했다.

“내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해. 아버지께 혼나고 싶지 않으면.”

“예, 알겠습니다.”

“티아! 당장 거기 서!”

호위에 힘에 저지당한 지트가 외쳤다.

리티아는 지트의 외침을 뒤로한 채 가볍게 손을 흔들며 휴게실로 향했다.

뒤따라온 에밀리아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감탄했다.

“아, 아가씨! 이런 모습 정말 처음이세요!”

“…이상했어?”

“아뇨! 너무 멋있었어요! 항상 그러시길 바랐는데 눈앞에서 보니까 더 멋진 것 같아요!”

에밀리아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감격했다.

사실 리티아는 속으로 긴장을 많이 했다. 이전 생에서도 그다지 큰 소리를 내지 않는 편이었고 누군가와 부딪히며 싸우는 것도 싫어했다.

오랫동안 아팠던 탓에 조용하고 편안한 걸 찾다 보니 성격은 더욱 그런 쪽으로 향했었다. 하지만 남녀 관계는 무릇 애매하게 굴면 더 질척이고 안 좋게 변하는 꼴을 많이 봐서 이렇게 단칼에 끊어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다 살아난 걸 뻔히 알면서도 사과는커녕 리티아에게 사과를 바라는 모습에 초면에 정이 떨어진 것도 있긴 하지만.

리티아는 아직도 기가 막혔다. 자살 소동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거기다 대고 사과를 바라다니.

어쨌든 떼어내고 오니 속은 후련했다.

에밀리아가 차를 가지러 간 사이 리티아는 소파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연회장에 잠깐 있다 보니 테니아를 가장 많이 배출해 낸 가문, 테니아의 유력한 후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깔보는 눈도 제법 있었다. 아마 리티아가 죽기 전 괴롭혔던 이들도 그 부류이리라. 직접적으로 가문을 건드릴 용기는 없고, 가장 약한 리티아를 가지고 놀았던 모양이다.

문 바깥에서 다시 소음이 일었다. 지트가 뭔가 소리치며 이곳에 들어오겠다 난리를 치는 것 같았다.

리티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소파에 몸을 묻었다.

* * *

삼십 분쯤 지나자 몬트 공작이 리티아를 찾아오라 명했다.

깜박 잠이 들 정도로 편히 쉬고 있었던 리티아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힘들어도 하는 수 없다. 고분고분해야 한다. 또 방에서 감시당할 수는 없으니까. 다시 돌아간 연회장은 아까와 분위기가 판이했다.

주변은 조금 더 어둡지만 화려한 주황색 불빛이 더 강해졌다. 과일 주스와 도수가 낮은 발포주가 주를 이루었던 파티주도 브랜디와 색이 짙은 포도주로 바뀌었다.

그 덕분인지 아까 미친 듯이 몰렸던 시선이 한결 덜어져 편안했다.

“좀 쉬었느냐.”

리티아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나쁜 대화는 오고 가지 않았는지 몬트 공작의 표정이 좋았다.

“네, 아버지. 그런데 오빠는요?”

그러고 보니 엘라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 저하가 와서 따로 자리를 비웠다. 네게도 인사를 하려던 것 같은데 나중에 나오면 인사라도 드리렴. 지금은 네가 기억에 없어도 어려서부터 항상 같이 있었을 만큼 친했으니 금방 편해질 게다. 꼭 붙들어 놓거라.”

그 부분은 리티아도 잘 알고 있었다.

리티아가 무시를 당하는 장면도 황태자가 초대해서 갔다가 생긴 일이라고 했었으니까.

소꿉친구라고 했으니 더한 설명도 필요 없었다.

그런데 꼭 붙들어 놓으라고?

우선은 몬트 공작이 원하는 대답을 하고 무슨 뜻인지 알아내기로 했다.

“네, 아버지. 그렇게 할게요.”

리티아가 고분고분하게 답하자 몬트 공작이 더욱 흡족하게 웃었다.

몬트 공작이 사람들이 멀어진 틈을 타 은밀하게 말했다.

“테니아 신탁이 내려오기 전까지는 황태자의 마음이 딴 데 가지 못하도록 해야 해. 네가 가만히만 있어도 먼저 다가오지 않느냐. 그러니 적당히 받아주기만 해.”

처음에는 몬트 공작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네가 이번 신탁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면 황태자비 자리가 네 자리가 될 테니 말이다. 물론 이 아비는 네가 테니아가 될 거란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단다.”

그제야 리티아는 온전히 말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테니아가 되지 않을 시를 대비한 플랜 B까지 모두 짜놓았다는 뜻인가.

그게 다른 것도 아니고 황태자비 자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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