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 *
목소리마저도 어제 듣던 그대로. 조금의 잠기운도 묻어 있지 않았다.
역시 깨어 있었어. 리티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약간의 시야를 내린 순간 리티아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그러고는 도망가다 걸린 도둑처럼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하며 괜히 이불을 잡아끌어 몸을 가렸다.
어젯밤이면 몰라도 술기운도 모두 달아난 맨정신에 나체로 몸을 부대끼는 건 적어도 리티아에겐 미친 짓에 가까웠다.
“그…….”
그런데도 남자는 부끄럽지도 않은지 고개까지 기울이며 리티아의 시선을 집요하게 따랐다.
“응? 뭐라고? 말해봐.”
그의 재촉에 리티아는 도망가는 걸 포기하고 눈을 감으며 힘겹게 입을 벌렸다.
“……너무 가까워요. 좀 비켜줄래요.”
멀어지는 대신 큭큭 웃음소리가 들렸다. 리티아가 미간을 찡그리며 다시 눈을 뜨니 오히려 코가 닿을 만큼 가까워져 남자의 숨결까지 느껴졌다.
남자의 코끝과 자신의 코끝이 맞닿아 깜짝 놀란 리티아가 몸을 뒤로 물리듯 힘을 주었다. 그러나 오히려 베개에 깊게 몸을 묻은 모양새였다.
“……어젠 가까이 오라더니.”
“그건……!”
“음, 설마 도망가려는 건 아닐 테고. 어디 가려고 했어?”
“…….”
“마음에 안 들어서 가려던 건 아니지? 내가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 두 번째부터는 더 마음에 들었을 텐데. 뭐라고 했더라? 아, 혹시 기억 안 나?”
능청맞은 소리에 리티아는 그대로 손을 올려 남자의 입을 턱하고 막아버렸다.
“하, 하지 마.”
간밤의 기억이 모두 떠오른 탓에 그 두 번째부터가 뭔지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다. 예쁘다는 둥, 더 가까이 오라는 둥, 입술이 어쩌고……. 아무리 술에 취해도 그렇지 입이 방정이었다.
남자가 쿡쿡 웃었다.
“응?”
그의 입의 웅얼거림이 진동처럼 그대로 손바닥에 느껴졌다. 간지러움에 바르작거리면서도 리티아는 끝까지 막은 손을 떼지 않았다.
“말하지 말라고요!”
리티아가 남자의 입을 막은 채로 소리쳤다. 절대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한순간에 모든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정말, 정말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리티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몸에서 처음 눈을 뜨게 된 날이 떠올랐다.
Chapter1. 호구 영애 리티아
* * *
연회장 안.
“공녀께선 그 옷이 너무 안 어울리세요.”
주르륵.
가슴께부터 쏟아진 포도주가 드레스 끝자락까지 흉하게 적시며 내려갔다. 금세 속옷까지 축축하게 느껴졌다.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쏟아졌다
“……캐, 캐번디시 영애.”
리티아의 음성이 여리게 떨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툭 떨어뜨릴 것처럼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로아 캐번디시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왜 울어요? 나는 공녀를 위해서 예쁘게 드레스를 꾸며주려고 그랬죠. 오히려 도와드린 건데……. 황태자 전하께 잘 보여야 하지 않겠어요? 공녀도 지금이 훨씬 더 보기 좋지 않나요?”
“…….”
“어우, 세상에. 또 시작이야.”
“왜 저렇게 몬트 공녀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람.”
“매번 당하는 몬트 공녀도 이상하지 않아요? 알고 보면 즐기는 거 아니야?”
여기저기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에 리티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이대로 사라져 버렸으면…….
황실 초대장만 아니었다면 연회란 연회는 모두 참석하지 않으려고 했다. 제발 무사히 지나가기만 하자고 다짐하고 왔는데 연회장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돌아가게 생겼다. 당연히 초대장을 보낸 황태자는 만나지도 못하고 말이다.
리티아와 황태자는 소꿉친구였다. 그래서 연회는 차치하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었다. 그럼 이 답답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어질 것 같아서. 그런데 또, 또, 이 무리였다.
캐번디시 후작의 고명딸로 수도 귀족 영애 무리 중 한 무리를 주도하는 로아 캐번디시는 리티아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신의 축복을 받아 태어났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성스럽게 생긴 아름다운 외모가 가장 큰 이유였고, 그다음이 그녀의 가문이었다.
리티아의 가문인 몬트가는 제국 영토의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재력가에다 대대로 성녀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 제국에서 최고로 꼽혔다.
제국의 유일한 공작 가문에 사랑을 듬뿍 받는 하나뿐인 공녀. 거기다 황태자와는 막역한 사이라는 소문까지. 하지만 그에 걸맞지 않게 온실 속 화초보다 더 약한 리티아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교묘하게 괴롭혔다. 몬트 가문이 워낙 거대하니 후환이 두려워서였다.
하지만 가족에게도 제 속내를 꼭꼭 숨기는 리티아를 알게 되고 나서는 갈수록 그 괴롭힘은 커져 다른 영애들 눈에까지 훤히 보일 정도로 과감해졌다.
리티아는 결국 이번에도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체념했다.
“……도, 돌아가야겠네요.”
“공녀, 가지 말아요.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냥 가기엔 너무 아쉽잖아요?”
로아는 깔깔 웃으면서 리티아를 울기 직전까지 몰았다.
그녀의 목표는 오늘 리티아가 황태자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 그 작전이 성공할 예정이었다.
“어, 어, 어쩔 수 없죠…….”
얼마 못 가 리티아가 눈물을 툭 하고 떨어뜨렸다. 가녀린 어깨가 하염없이 떨렸다.
“그래요? 정말 아쉬워요. 다음에는 내가 꼭 제대로 도와줄게요. 알았죠?”
“그, 그래요. 오늘은 미, 미안해요.”
깔깔 웃음소리가 들렸다. 로아는 여전히 기세등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리티아는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그 자리를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는 스스로 호수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몸에서 눈을 뜬 건 방금까지 시한부를 살다 생을 마감한 유지민이었다.
유지민, 24세.
성인이 되고 줄곧 그녀는 병실 밖을 나가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날이 갈수록 병은 악화되고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까지 망가지다 이제는 이 고통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병약한 몸이 아닌 처음 보는 사람의 몸이 되어버렸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인물이 마지막으로 펼쳐 보았던 소설책의 등장인물이었을 줄이야.
그것도 수많은 인물 중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호구 영애, 원작 주인공이 나타나기 전 초라하게 죽는 리티아가 바로 자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 * *
“아가씨께서 깨어나셨어요!”
그녀가 깨어남과 동시에 찢어질 듯한 외침이 들리더니 저택에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하…….”
저택에 모든 사람이 모이는 한바탕의 소동이 지나간 후 지민은 거울 속을 빤히 들여다보며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머리가 아프다며 사람들을 내보내긴 했는데 이 당황스러움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은발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아까부터 계속 쓸어내려도 스르륵 어깨를 미끄러져 내리며 찰랑거린다.
청순하고 아름답다고 할 수밖에 없는 얼굴. 그리고 이 눈. 시리게 푸른 눈동자가 마치, 지중해 한복판을 떠 놓은 듯한 눈.
지민은 이러한 외모 묘사를 아주 근래에 본 적이 있었다. 바로 그녀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읽었던 그 책에서.
그건 지민의 친구가 어떻게든 그녀에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심어주려고 무던히 노력했던 것들 중에 하나였다. 가져온 성의가 고마워 읽었던 것인데 그게 자신에게 새 삶을 가져다줄 줄은 몰랐다.
그녀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맞다면 리티아는 호수에 빠져 죽었어야 맞았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이렇게라도 얻게 된 삶을 또 죽게 둘 수는 없었다. 아프지 않은 이 몸은 지민이 그토록 꿈꾸고 바라던 것이었으니까.
“…….”
또 죽고 싶지 않았다. 다시 고통스러워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지민은 이대로 리티아에게 완전히 녹아들기로 했다. 하지만 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 줄 알았던 그녀는 방에 갇혀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리티아 에울루니에 벨루스 몬트.
귀한 수식어를 갖다 붙인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리티아는 가문의 기대를 모두 떠안고 태어났다. 하지만 태어나기를 겁이 많고 대담하지 못한 탓에 그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고, 사람들의 기대는 그녀에게 온통 부담으로 다가왔다.
결국, 그게 압박이 되어 결국 목숨까지 잃은 캐릭터였다. 그 말은 이 몸에 빙의된 지민도 이대로라면 절대 순탄한 삶을 살지 못하게 될 거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좀 더 이 몸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없을까.
방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만나며 내내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왕 얻은 삶, 휘둘리며 살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힘을 움켜쥐고 싶고 자유롭고 싶었다.
“아, 일기장!”
어느 정도의 적응이 끝나니 잊고 있었던 설정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본래 이 몸의 주인인 리티아는 어렸을 때부터 줄곧 자기 전 일기를 쓴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하지 못한 말, 잘한 거, 못한 거 일거수일투족 다. 겉으로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성격이라 비밀스럽게 일기장에 자신의 속내를 내보였던 모양이었다.
예쁜 일기장을 구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다고 했었지. 초반에 죽는 인물이라 그녀의 설명조차도 초반에 모두 뿌려놓듯 알려주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찾기도 전에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리티아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까지 걸어갔다.
“리티아, 아비다.”
밖에서 들리는 중후한 목소리에 움찔 몸을 떨었다. 이곳에서 막 눈을 떠 소동이 일어났을 때 찾아와 얼굴은 알고 있다.
자신을 바라보는 기세가 남달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핑계로 보냈었는데 일주일 만에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리티아의 시종을 모조리 없앤 남자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가차 없이 베여 쓰러지던 그날이 선명하게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