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9 회: 종장(終章) -- >
창현은 씁쓸함을 느꼈다. 그 옛날, 나이 차이는 많이 났지만 친우라 느꼈던 검선의 무당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신념 때문이라고 해도 씁쓸함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창현은 좋게 생각했다.
썩은 뿌리는 뽑아내야 새싹이 힘차게 자랄 수 있다고. 지금의 검선은 그 새싹을 띄울 수 있는 뿌리라고.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윤미의 말에 창현은 별거 아니라는 듯 싱긋 웃어보였다.
“오랜만에 힘을 쓰니 피곤한 모양이야.”
천외천 고수인 창현이 피곤함을 느낄 리는 없었지만, 윤미는 그 말이 심리적 피곤함이라 짐작했다.
“곧바로 돌아가실 겁니까?”
“아니, 오랜만에 중원으로 온 김에 한 번 둘러봐야지.”
이미 한 번의 여행을 하기는 했지만, 그 때는 전시나 마찬가지였다. 오대세가가 중국의 정부를 장악했고, 구파일방의 무리가 꼬리를 말았으니 이제는 편안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윤미가 새하얗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한국에 남아서 정신없이 바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일이었지만, 윤미는 무척이나 들떴다.
아직 모든 일이 해결 된 것은 아니다. 실비아는 아직 종적을 알 수 없었고, 론즈 가문과의 숙원도 남아 있다.
론즈 가문은 이번 한혈문과 구파일방의 전쟁에서 구파일방에게 힘을 싫어주고, 둘의 양패구상을 유도할 작전이었다.
비록 그것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오대세가의 충성맹세와 오소리가 데려 온 요마 부대에 틀어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창현은 론즈 가문이 곧바로 움직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한혈문의 힘을 보았으니 준비를 할 것이다.
그 때까지는 조금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중원을 돌아볼 참이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묻힌 산과 배교의 비처에도 한 번 들르기로 결정했다.
“그 전에 일단 윤미.”
“네, 문주님.”
딱딱하면서도 사무적인 비서실장과 같은 느낌이 윤미에게서 풍겼다. 하지만 창현은 알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차가운 그녀가 자신의 품에서는 그 누구보다 뜨거운 여자라는 사실을.
잠시 성욕이 들끓어 올랐지만, 아직은 이동중이었기에 창현은 애써 억눌렀다. 길 한복판에서 윤미와 사랑을 나누기에는 좀 민망한 느낌이 들었다.
방금 전투가 끝나기도 했고.
윤미는 창현의 그런 기색을 눈치채고 빙그레 웃었다. 언제나 표정이 없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자 화사한 아름다움이 쏟아져 내렸다.
“언제든지 문주님을 원합니다.”
그 것은 일종의 신호였지만, 창현은 깔끔히 성욕을 이겨내었다.
“훗, 괜찮아. 시간은 많으니까.”
“네, 문주님 언제든지 말씀 해주십시오.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곧바로 들어오셔도 됩니다.”
윤미는 아쉬웠다. 전투가 끝난 이후 설난은 전쟁 후 정리 때문에 곧바로 돌아갔고, 자신과 창현 둘 뿐이었다. 한국에서는 창현과 단 둘이 있는 시간이 적었기에 이참에 뽕(?)을 뽑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곧 그의 말을 다시 생각했다. 시간은 많았다. 창현에게도, 그리고 윤미 자신에게도.
“먼저 어디로 가십니까?”
둘은 걷는 듯 슬슬 움직이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은 둘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았다. 초상비라 불리는 극공의 경공술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경공술을 펼치며 달렸다.
보려해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배교가 있던 곳.”
자신이 고문을 당한 곳 뒤에는 배교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창현은 그곳을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라 확신했다.
자신이 직접 결계를 쳐 놓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교의 장로들 역시 창현을 고문한 곳이 배교의 비처라 믿었고,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실망을 했었다.
물론 그 사실까지는 창현이 자신의 영혼만 봉인을 해둔 뒤였기에 창현도 알지 못했다.
“감숙성까지라…… 며칠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하루에도 만리를 달릴 수 있는 것이 창현과 윤미였다. 그렇지만 사람이 어떻게 하루 종일 경공만 펼친단 말인가? 그것도 피곤한 일이었다.
“오늘은 적당히 저곳에서 쉬지.”
윤미는 빠르게 달려오느라 이곳이 미처 어딘지 파악하지 못했다.
“……저곳은.”
이제야 깨달은 윤미가 약간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곳은 바로 오대세가 중 한 곳인 남궁가였다.
“왜 비무라도 하고 싶어서?”
“아, 아닙니다.”
오대세가의 가주들도 윤미에게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윤미는 이제 천외천을 바라보는 고수이고, 한혈문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초고수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설난이 개발한 슈퍼 컴퓨터의 랭킹 시스템에서도 윤미는 최상위권에 속해있다.
구파일방 장문인들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오대세가 가주들 정도로는 윤미에게 비무를 청할 수도 없는 것이다.
정 청하고 싶으면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 더 옳다고 봐야했다.
“한 번 보고는 싶군. 남궁 늙은이의 평생소원이 자신의 눈으로 제왕검법의 완성을 보고 싶어 했는데 지난 번에 보니 그들은 일초조차 익히지 못했더군.”
“네?”
윤미가 놀라 되물었다.
창현은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남궁세가의 정문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21세기가 되었지만 중국의 무가들이 아직도 아시아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그들이 아직 그들의 전통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대세가도, 구파일방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대대로 내려오는 건물을 허물고 신식 건물을 짓지 않았다.
간단한 것일 순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전통이라는 힘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문파를 상징하는 문파의 건물이 벌써 몇 백 년 이나 내려오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 전통에 따라 정문에는 호위무사 두 명이 남궁세가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모두 일류 수준의 고수들이었다.
단지 다가가고 있는 두 사람이 일류 따위는 눈에도 차지 않을만큼의 강자라는 것이 문제였다.
“다, 당신은…….”
창현을 알아 본 호위무사가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였다.
“가주는 바쁘겠지? 들어가지.”
호위무사는 이토록 쉽게 남궁세가의 정문을 통과하는 인간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난 날까지 하지 못했었다.
오늘부로 그것이 바뀌었다.
창현과 윤미는 마치 자신의 집처럼 남궁세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세가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넓은 마당이 보였고, 양 옆으로 작은 전각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전각들을 지나쳐 가주와 핵심 식솔들이 모여 사는 본각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전각은 그 세월의 흔적을 엿보이게 만들었다.
“문주님!”
창현을 지나쳐 부리나케 뛰어가더니 호위무사는 벌써 안에 소식을 알린 모양이었다. 남궁가의 중요 인물들이 모두 나와 창현과 윤미를 반기고 있었다.
가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창현은 그가 전쟁 수습을 하느라 바쁜 것을 알고 있지만 굳이 물었다.
“가주는 바쁜가 보지?”
“네, 지금 점창파를 정리하고 있는 중이십니다.”
창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하고 있는 남자는 남궁가의 장자인 남궁협이었다.
“제법 괜찮은 티를 내는군.”
남궁 가주는 뒤늦게 아들을 단 한 명 낳았는데 그가 바로 남궁협이다. 늦둥이인만큼, 그 것도 외아들인만큼 남궁세가라는 거대한 조직의 장자라는 신분 덕분에 무공 수련을 게을리 할 수도 있고, 다른 길로 세어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남궁협은 천성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아직 17살임에도 불구하고 일류 수준을 넘어설 수 있었다.
창현은 단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그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칭찬을 한 것이다.
남궁협은 당당했다.
자신의 세가가 충성 맹세를 한 것을 억울해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남궁협은 충성 맹세를 했으면 확실하게 충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7살에 불과한 그는 또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쓸데없는 부심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뭐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냥 며 칠 머물다 감숙성으로 갈 것이다.”
“그럼 계시는 동안 편안히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지긋한 장로들 중 그런 남궁협의 태도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창현은 굳이 그들에게 지적은 하지 않았다.
뭐 귀찮았기 때문이다.
“늙은이의 평생 소원이 제왕검법의 삼 초를 보는 것이었는데, 남궁가의 숙원이 네 대에서 이뤄지겠군.”
“!!!”
그 말 한마디가 주는 파장은 엄청났다.
남궁가는 대대로 제왕검법의 일초만 제대로 익혀도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 믿었다.
현 남궁가주는 제왕검법의 이초만 익혀도 창현 정도는 가지고 놀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뭐 사실은 익힌 사람이 없어서 알 순 없지만, 그만큼 남궁가가 제왕검법에 가지는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것이 비록 너무 난해해 익히지 못하는 그림의 떡에 불과하지만, 그런 엄청난 검법을 창시한 선조에 대한 자랑스러움은 대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것이 무슨 말씀이오?”
창현을 곱게 보지 않던 장로 중 한 명이 몸을 떨었다.
“글세…… 네가 소가주이지?”
“그렇습니다, 문주님.”
의외로 남궁협은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설사 자신이 제왕검법을 모두 익혀 창현을 능가하더라도 창현에게 반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충성 맹세를 했기 때문에.
그는 약속을 중시하고 신뢰를 자신의 피 같이 여기는 전형적인 정파 인물이기 때문이다.
“윤미와 간단한 비무라도 한 번 해보지. 소가주의 실력을 보고 싶군. 저녁 먹기 전에 가볍게 즐길겸.”
한 가문의 소가주를 식전 행사쯤으로 취급하는 말일 수 있지만, 그 누구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윤미는 초고수이다.
그런 고수와 비무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영광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에 윤미와 남궁협이 비무를 한다는 것 자체가 윤미가 남궁협에게 조언을 해주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더구나 이야기는 창현이 꺼냈으니, 현존 최고 고수라 할 수 있는 창현이 조언을 해주겠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남궁협만이 아니라 무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이었다.
이미 천외천조차 뛰어넘는다 알려진 창현의 조언이라니!
창현은 우직한 남궁협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17살이라…… 한창이지.’
윤미를 바라보는 남궁협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비무나 가르침에 대한 기대보다 예쁜 선생님을 바라보는 소년의 심정으로말이다.
============================ 작품 후기 ============================
반갑습니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출판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한 작품은 출판 중이고, 한 작품은 출판 준비 중이기에 바쁘기는 합니다.
미완결인 혈마를 쓰면서 머리도 식힐 겸 해서 잠시 짬을 냈습니다.
새로운 작품을 하나 준비할까 생각했지만 일단 1권 분량으로 혈마를 마무리 짓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연재를 재개했습니다.
조아라 오랜만에 오니 정말 많이 바뀌었네요.
사실 접속 자체가 정말 오랜만이라서 한동안 구경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