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4 회: 전쟁과 여인 그리고 과거의 향기 -- >
“결국 그대의 말은 지켜지지 않았군.”
검선의 얼굴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한혈문에서 사질을 기다린 지 벌써 한 달. 하지만 무당파에서 들려오고 있는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버려졌군. 완벽하게.”
“…….”
검선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약속은 지켜진다. 그대와의 비무는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미 무당파가 도발을 감행하고 있는 이상 나 역시 대처 방법을 바꿀 수 밖에 없어. 그대가 구파일방에 끼치는 영향력은 이제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난 왕효명처럼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탐욕자가 아니니까. 내 명분은 중요한 것이고, 내 명예는 지켜져야 하는 것이니까.”
왕효명은 무당파를 위해 스스로 명예를 버렸다고 생각 할 것이다.
‘사질, 그건 명예를 지키는 방법이 아니네. 설사 한혈문을 무너뜨린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손가락질 대상이 되어버린 무당파는 이미 변질 되어 버린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말았어. 어쩌면 진즉에 말리지 못한 나의 부덕함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검을 섞게 해주는 영광은 감사하다고 생각하오.”
“뭐 약속은 약속이니까.”
“부디…… 날 수행하러 온 녀석들은 무사히 돌려보내주길 바라오. 그대가 자비를 믿소.”
“하는 짓을 보면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지만 어차피 본문에 돌아가서 갈기갈기 찢겨 죽을테니까.”
잔인한 말이다.
검선은 신음성조차 내지 못했다.
그들은 가족의 안위를 담보로 검선과 창현을 노리고 온 자살 특공대나 마찬가지였다. 검선이야 이미 죽은 목숨이었고, 자신들 역시 그 목숨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무당파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창현이 검선과의 비무를 결심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가족의 안위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당파에서는 대기 하라는 명령만 내려오고 있고, 가족의 소식은 전해주지 않는다. 목숨을 걸고 금단의 무공을 익혔는데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검선과 창현의 탓인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둘이 대결을 펼치고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암살을 꿈꾸기란 힘들었다.
그건 말 그대로 이제는 개죽음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창현과 검선에게 그 탓이 돌아가고 있었다. 한혈문 내에서 그들은 안하무인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창현이 아직 검선을 내치지 않았고, 그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한혈문 내에서도 그 일을 수습해주고는 있지만, 점점 한혈문의 명성에도 흠집이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꺄아아악!”
검선과 창현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시각, 그들 중 한 명은 여전히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이 미친 새끼가!!”
여자는 굉장히 화가 난 듯 했다.
그들은 절대로 관광객을 건들지 않았다. 일반인들에게 문제를 일으켰을 경우 조용히 있는 창현이 칼을 빼들 것이라는 사실은 그들도 느끼고 있었다. 철저하게 한혈문 내부 인원들에게만 안하무인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한혈문은 당연히 무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울의 궁 전체를 소유 하고 있는 한혈문이기에 당장 그 궁을 관리하는 사람들만 해도 상당수였고, 하루에도 몇 천명은 가뿐히 넘는 관광객들을 관리하는 인원들 역시 상당했다.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행정 업무를 보는 인원들도 있었다.
그들중 당연히 무인도 있었지만, 여자와 같이 그저 직원 개념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혈문은 그 어떠한 대기업보다 더 후한 대우와 복지를 자랑했고, 근무 조건이 좋았기에 꿈의 직장이라 불리고 있었다.
당연히 엄청난 경쟁력을 자랑했다.
그래서 피해를 당하는 요 한 달간 직원들은 묵묵히 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창현에게 보고가 올라가는지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괜히 튀는 행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당파와 전쟁 분위기를 풍기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검선과 그 수행인원들은 손님 자격으로 한혈문을 방문했고, 창현의 직접적인 손님이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은 못 참아!!”
여자는 남자를 향해 따귀를 날리려 했지만 일반인이 무인의 그림자조차 밟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으흐흐흐!”
남자는 굉장히 짜증이 나 있는 상태였다.
무당파에서 금단의 마공과 막대한 돈으로 유혹을 했다. 그는 다른 수행원들처럼 무당파 내에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공의 파훼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무당파 내에서도 모르는 극비 사항이었다. 대충 눈치를 보고 살아남을 생각이었다. 자신은 어차피 가족도 없고 무당파에서 받은 돈과 무공으로 어디로 도망가 살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으니까.
그러려면 일단 한혈문 내에서의 일이 해결 되어야 하는데 한 달 동안 아무 소식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래서 직원들을 희롱하거나 건들거리면서 시간을 때우는 것이다.
처음에는 가벼웠지만, 그 본 심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따라와.”
서로 의사소통이 될 리가 없었다.
여자는 무척 화가 났지만,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자신의 손목을 잡아끄는 남자의 모습에 본능적으로 오늘 이 놈이 뭔가 다른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소에는 엉덩이를 치거나 뒤에서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바람처럼 사라지는 놈이었다. 그 피해자가 수십 명이었지만 남자의 모습을 본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딱 한 명이 본 이후에 그 때서야 범인이 남자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어쨌든 그녀들은 모두 무공의 기본조차 모르는 일반인들이었으니까.
“이, 이거 놔!”
남자의 우왁스러운 손길에 여자는 그제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크아아악!”
갑작스럽게 터진 비명에 여자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주 익숙한 모습이었다.
“내, 내성주님!”
“이 번 일은 직원 전체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
“어째서 이 딴 쓰레기에 대한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나?”
윤미는 말과 함께 숨 막힐 듯 한 살기와 더불어 남자의 손목을 아예 꺾어 버렸다. 남자는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가지 결정적인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
‘왕효명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다. 이 계집은 무황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계집이라 들었는데 마공을 끌어 올릴 수조차 없다니!’
회심의 역작이라 생각하고 파견한 수행원들은 윤미조차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 내성주님.”
여자는 울먹 거렸다.
“스스로의 몸을 소중하게 생각해야한다. 여자의 마음가짐은 바로 그 것이다. 누군가가 지켜 줄 것이라는 생각을 먼저 하는 것보다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지킬 방법을 생각하게 되지. 네가 스스로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도 문제이고, 주군과 한혈문을 믿지 못한 것도 문제이다. 주군은 결코 자신이 품은 사람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않는 분이다. 설사 그 것이 나와 같은 내성주나 너와 같은 일반 직원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윤미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중국어를 충분히 능숙하게 구사 했기에 남자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을 할 수 있었다.
“너를 비롯한 수행원들의 쓰레기 짓은 잘 알게 되었다. 한혈문을 너무 물로 보았군. 그냥 넘어간 것이 아니라, 너무나 바빴고, 아직은 폐쇄적인 직장 문화에 더 익숙한 우리 직원들의 미숙함으로 너희들이 활개를 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윤미는 말꼬리를 여자에게 돌렸다.
“당장 뒤를 돌아 자리로 돌아가도록. 보면 충격이 클테니.”
“아뇨, 내성주님께 감히 부탁을 하자면 저 자식이 고통을 당하는 장면을 그대로 보고 싶어요.”
찰나의 느꼈던 공포심!
남자의 눈에서 읽을 수 있었던 비열하고 더러운 욕망!
스스로를 지키라는 윤미의 말에 여자는 두 눈 똑똑히 담기로 했다.
적에게는 그 어떠한 자비도 없고, 일본 잔존 무인 세력을 처리 할 때의 윤미의 악명은 여자도 익히 알고 있었다. 목젖을 직접 꿰뚫고 사지를 찢었던 그녀의 잔인한 그 소문을 알고 있었지만 여자는 굳게 마음을 먹었다.
윤미는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입에서 변명이 나오기도 전에 그대로 팔에 힘을 주었다.
우두둑-!
“!!!”
남자는 물론 한혈문 직원 여자의 몸도 움찔 떨렸다.
오른 쪽 어깨부터 통째로 뽑혀져 나왔다.
“무당파와의 전쟁은 곧 시작된다. 그리고 너희들을 정리하는 것부터 주군을 도발한 죄를 물게 될 것이다.”
피가 솟구쳐 오르고 윤미의 얼굴을 적셨다.
“이미 사고가 터진 것 같군.”
“무슨……?”
윤미가 찰나의 순간에 낸 그 내력조차 느낀 창현은 빙그레 웃었다.
“알아서 사고를 친 것 같더군. 수행원들에게 아무런 느낌조차 받지 못했나? 그대가 천외천 고수이기는 하지만 무황에게 패한 이유를 모르면 수행원들의 비밀을 모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지.”
뜬구름 잡는 소리라 느끼고 있는 검선의 얼굴은 궁금증으로 물들었다.
“문파를 사랑하는 그대의 마음은 알겠다. 진정한 검선의 후예인만큼 적어도 그를 생각해서라도 난 무당파를 멸문 시키지는 않을 작정이야. 그는 내 지난 지루한 인생의 활력소 중 하나였으니까. 실수를 했다고 했지? 주춧돌부터 다시 세우도록 해. 하지만 그러려면 완전히 무너져야하지.”
검선은 한 가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당파는 기둥이 뿌리채 뽑힐 것이라고.
‘나의 부덕함이다…… 욕망에 빠진 사질을 멀리하고 그저 고고한 학이라 생각하고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려 검과 산에 빠져 세월을 낭비했으니. 하지만 그조차 끝에 이른 무공을 보지 못했으니 이 얼마나 허무한 삶인가.’
창현은 몸을 일으켰고, 검선도 따라 나섰다.
둘은 곧 두 팔이 빠져 버린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온 몸에 피칠을 하고 있었다. 윤미의 명령으로 이미 주위는 통제 되어 있었기에 그 잔인한 장면을 보는 사람은 검선과 창현 뿐이었다.
“어찌…….”
묘한 색기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는 검선은 무황과 창현만이 아니라 절대고수가 또다시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하면서도 남자의 모습을 보며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도윤이무공을 펼쳐라. 그러면 살아남을 수도 있어.”
창현의 말에 두 팔이 없는 남자의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윤미 너는…… 내 방에 가 있고.”
피를 머금은 정장과 하얀 피부. 그리고 가슴골로 흘러내리고 있는 붉은 피.
일반인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잔인한 모습에서 풍기고 있는 폭발적인 색기. 창현 역시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윤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무인들의 세계는 일반인들과 다르고 검에 목숨을 맡긴 남자의 욕정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하지만 자신의 주군이고 그 누구보다 자신을 아끼는 것을 알기에 도리어 그 것을 이해하고 몸조차 뜨거워짐을 느끼고 있었다.
최근에는 달달한 분위기를 만끽하며 관계를 이어나갔지만, 오늘 밤은 꽤 격렬한 정사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 있을 일은 중원과의 본격적인 전쟁이었다.
============================ 작품 후기 ============================
가뜩이나 요즘 의욕 저하되어서 말이 아닌데,
잡소리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에게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내시다니 대단하시네요.
좋아요 엄지손가락 드리겠습니다.
예전이라면 걍 무시하고 지나 갈텐데 기분이 말이 아니라
울컥 하군요.
돈 아까우면 보지 말고 그 돈 아깝지 않은 좋은 소설들 보세요.
괜히 돈 아깝고 시간 아까운데 제 글 보면서 열폭하지 마시고요.
다른 독자분들에게 불쾌감을 일으키는 말이라면 죄송합니다.
요즘 상태가 말이 아니라서요.
가볍게 지우고 넘어갈 일도 욱하네요.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