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7 회: 전쟁과 여인 그리고 과거의 향기 -- >
거리를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창현과 수연은 유유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변해 버린 사천 지역의 모습이 낯설 법도 하건만 창현은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하게 앞서 나갔다.
“꽤 많이 변했군.”
10년이 지나면 강산도 변한다.
창현이 중원을 누비던 시절은 몇 백 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사천의 모습은 많이 변했고,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변하고 있는 만큼 창현이 느끼는 이질감은 클 것이 분명했다. 단지, 그가 편안해 보이는 이유는 온 몸에서 나오는 여유로움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사자는 어디를 갈 때 망설이지 않는다.
그 곳에 무엇이 있을지, 어떠한 강자가 있을지 같은 것들 따위는 사자에게 아무런 감흥조차 주지 못한다.
어디를 가든 자신이 먹이사슬 최상위층에 있는 강자라는 사실을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창현도 마찬가지였다.
구파일방의 본거지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 따위는 일절 없었다. 설사 중원의 모든 무인들이 칼날을 들이민다 하더라도 모두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중원을 휩쓸면서 황제조차 농락했던 그였기에 애초에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그에게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당문으로 곧장 향하실 건가요?”
한국에서처럼 시선이 쏠리고 있지 않기에 수연은 무척이나 편안했다. 창현이 가벼운 술법으로 모습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인파가 끝도 없이 많았고, 굳이 구파일방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창현은 가벼운 술법으로 근본적인 방해를 막아둔 터였다.
“그래야지. 아마 지금쯤 선택을 했을 것이야. 나를 맞기로.”
당문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단 한가지이다.
자신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것.
그렇다면 무당파를 배신하는 일이 되지만 관계없었다.
선을 긋고 너희 일이라고 명분 확보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당파였기 때문이다. 설마 오대 가문 중 수장을 노리는 가문이 창현 한 명이 왔다고 자체 봉문이라는 치욕적인 일을 감내 하지는 않을 것이라, 무당파는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문의 존속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면 치욕 같은 것은 찰나의 감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멸문지화의 화를 피하지 못해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무당파는 지금껏 성세를 유지해 왔고, 창현에게 봉문을 당했던 것은 너무나도 오래 전의 일이었기에 위기에 놓인 쥐가 어떻게 행동을 하는지는 잊고 있었다.
당문의 예정된 뒤통수.
그리고 창현은 당문을 통해서 구파일방과 전면전을 벌일 명분도 찾을 것이다.
똑같은 명분이지만 누구에게 명분이 있느냐는 현대 무인들의 전쟁에서 무척이나 중요했다.
일반인들의 시선이라는 것은 결코 무시 할 수 없는 것이었고, 새롭게 규정 된 국제법 역시 꽤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힘이 세계를 통치하는 시대에서 법이라는 규제는 강력해지기 마련이었다.
선전포고를 할 수 있는 문파가 전쟁에서 극도로 유리한 것은 선전포고를 받는 문파는 공격을 받기 전에는 그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힘의 싸움에서 먼저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래서 창현도, 무당파도 서로 전쟁에 관한 명분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을씨년스럽군.”
사천 시내 한복판과는 다르게 당문 근처에는 사람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는 객점 등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현대에 들어서도 많은 상가가 발전했고, 거대 가문의 앞이기에 상업은 물론, 관광업 등 상당히 많은 것들이 발전해 있었다.
하지만,
창현이랑 대립한다는 소식이 퍼진 그 이후에는 그 누구도 당문 근처에 얼씬 거리지 않았다.
당문을 길게 둘러쌓고 있는 외성, 즉 방계 가족들이 살고 있는 외성에도 당문 사람 이외에는 사람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외성을 통과하면 내성이 나오고 내성에는 직계 가족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예로부터 당문 직계 가족들 중심으로 무공이 전수되어 왔고, 고수 역시 직계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당신인가?”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지만.
굳게 다문 입술과 짙은 눈썹은 남자다움의 상징인 것 같았다. 두툼한 귓불은 이곳이 중국이기에 마치 유비를 떠올리게했다.
사각에 가까운 하관은 남자의 고집이 무척이나 강하다고 느껴지게 하고 있었다.
“누구지?”
창현의 물음에 남자는 짧게 대답했다.
“당문호라고한다.”
문자 돌림.
방계 중 방계라는 결정적 증거였다. 하지만 남자의 얼굴에는 한껏 자부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외성에서 그 누구도 창현을 가로막지 않았건만 유일하게 남자만이 당문 내성으로 마치 주인처럼 걸어가고 있는 창현을 막아선 것이다.
“혈마 강창현. 당문에 대한 방문은 공식적으로 알렸나?”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저 당문으로 간다, 라는 말을 했고 그 소식을 한국 언론은 물론 중국 언론들이 앞 다퉈 전했을 뿐이다. 당천위를 소위 찢어 죽여 버린 창현이었기에 그 소식은 이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암살 시도가 있었고, 암살의 대상자를 죽인 창현은 국제법에도 걸리지 않았다. 자연스레 한혈문과 당문 사이의 대립 구도 생겼고, 두 문파의 전쟁은 기정사실화 되어가고 있었다.
단지 힘에 추가 한 쪽으로 너무나 기울었기에 당문의 멸문이냐, 아니냐만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고 있을 뿐이었다.
창현의 그동안 행보로 볼 때 그들이 무사하리라고 예측하고 있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잔혹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늘 수시로 생명을 위협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일이었다.
“본좌에게 그러한 절차가 굳이 필요하나?”
“필요하다. 설사 황제라 하더라도 당문 내성을 방문하려면 그 전에 공식적인 요청과 당문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하다.”
창현은 피식 웃었다.
“좋아, 너의 용기는 가상해. 하지만 그토록 자부심을 느끼는 너의 가문 사람들은 쥐새끼처럼 눈치만 보고 있는군.”
“…….”
남자는 창현의 이죽거림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자가 왜 태어날 때부터 사자인지 혹시 아나?”
창현은 여유롭게 뒷짐을 지며 걸음을 이었다. 남자가 앞을 막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수연은 자연스레 뒤를 따랐다.
“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자이지. 아주 간단한 이치야. 마찬가지이다. 쥐새끼들 역시 처음부터 쥐새끼로 태어났기에 쥐새끼인 것이다. 극독을 발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암기를 만들어내도 쥐새끼이기에 쥐새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문을 모욕하지마라!”
남자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와 함께 내성으로 가볼까? 너의 쥐새끼 가족들은 아마 날 성대하게 맞을 것이다.”
“…….”
아직 당문 내성에서 이렇다 할 명령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가주는 방계 인원들에게도 자체 봉문에 대한 일을 알리지 않았다. 창현이 도착하고 직접 굴복을 함으로써 그 때서야 알릴 생각이었다. 썩 좋은 일은 아니었기에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는 것이고, 조금이라도 더 강하게 무당파의 뒤통수를 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알 수 없는 방계의 남자는 미미하게 얼굴을 떨었다.
“……근데 너 방계 맞나?”
“무슨 말이지?”
자신의 옆을 자연스레 지나치는 창현을 잡아둘 수 없다는 사실에 남자는 몸을 떨면서도 물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발걸음.
내력을 끌어 올리고 선수를 먼저 치고 싶었지만, 마치 무형의 기운이 자신을 억누르는 것처럼 창현의 발걸음조차 막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남자는 천외천이 왜 천외천인지 느끼고 있었다.
단지 창현의 궁금증이 자신 역시 궁금해지고 있다는 것이 좀 신기한 점이었다.
“만천화우는 아무나 익힐 수가 없는 것인데?”
“!!!”
자신의 비기 중 비기.
그 누구에도 알리지 않았던 비밀이 드러나자 남자는 경악했다. 내력을 끌어 올릴 수도 없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내력의 기운으로도 상대방의 무공을 짐작하기란 경악스러운 일이지만 그저 모습만 보고 정확하게 비기까지 파악해내는 창현의 능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주변에서 긴장 된 얼굴로 창현과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던 다른 방계의 식구들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창현이 비기를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것보다 남자가 만천화우를 익혔다는 그 사실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창현의 말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자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가주의 사생아라도 되는 모양이군. 그래도 당문의 가주가 안목은 있어. 전대 가주들은 사생아를 그저 방계에 버려두기만 했는데 네 재능을 보고 가문의 비기를 전수 해 줄 정도면 말이야. 잠시 후에 그러면은 참고하도록 하지.”
창현은 남자를 지나쳤다.
그제야 자신을 옥죄던 기운이 풀렸다는 것을 느낀 남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등을 돌리고 있는 상대에게 무공을 펼치는 것은 비겁한 암습이었다.
평소 남자의 성격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남자는 이토록 쉽게 창현을 보낼 수 없었다. 최소한의 반항이라도 보여주고 싶었다.
하늘을 뒤덮는 암기의 향연에도 창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남자의 몸이 빙그르르 돌면서 만 개의 암기가 한꺼번에 창현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으로 볼 수도 없는…… 그렇지만 너무나도 많은 암기가 한꺼번에 쏟아지기에 마치 비처럼 보이는 만천화우는 분명 절정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창현의 몸에서 붉은 혈마지기가 뿜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피슛-!
“!!!”
수 천, 수 만 갈래로 순식간에 나뉜 혈마지기가 암기를 모조리 하나, 하나 바닥에 떨어뜨리고 있었다.
호신 강기를 두른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강기로 암기들을 하나, 하나 모조리 날려 버리고 있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제법 잘 익히기는 했군. 근골을 보아하니 꽤 재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예전에 내가 보았던 암왕 역시 네 나이에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추후에는 꽤 손속을 나누는 즐거움이 있겠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창현은 다시 몸을 돌렸다.
바닥에 으스러져 있는 만 개의 암기를 허탈하게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창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름이 당문호라고 했던가?”
“……그렇소. 당문을 어찌 할 작정이오?”
“이름 기억 해 두지.”
수연은 살짝 놀랐다.
그녀는 남자가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창현이 이름을 기억하겠다는 말에 담긴 의미를 말이다.
“글세, 일단 내성으로 한 번 가보고. 현 시대에 암왕이 있긴 있나?”
“……그 분은 나와는 비견도 할 수 없는 분이오. 당신이 천외천의 고수라고는 하나 나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는 상태에서 그 분의 만천화우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오.”
창현은 피식 웃었다.
내성으로 향하며 남자의 귓가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때렸다.
“너희가 기억하는 최고의 암왕은 아마 당제진이겠지. 하지만 난 그의 만천화우를 접할 때도 하품을 하면서 손을 한 번 휘저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나의 그런 한 수에도 깨달음을 얻고 더욱더 무공을 수련했다. 너처럼 허탈함을 느끼며 누군가를 믿는 대신에.”
잠시 검선과 암왕과의 얽힌 기억을 회상하는 창현은 옅은 미소를 흘렸다.
‘무당파에 가문을 팔아먹은 놈들을 정리하고 당문을 사용하는 것도 괜찮겠어. 녀석의 후예들이니까.’
남자는 큰 역할을 했다.
창현이 옛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멸문을 면하게 한 것이다.
곧 창현의 눈에 당문의 내성이 보이고 있었고, 예상대로 가주를 비롯한 장로들 당문의 직계 가족들이 모두 정문 안에서 창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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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완료